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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일 네덜란드 영화 제작자 고흐Gogh가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총격을 당한 뒤 칼에 찔려 숨졌다. 유명한 화가 고흐의 종증손자(고흐 동생의 증손자)인 고흐 감독은 이슬람권의 여성 처우 문제를 비판한 영화로 살해 위협을 받아 왔었다. 그의 영화 〈굴종〉은 강제로 결혼한 이슬람 여성이 남편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삼촌에게 성폭행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후 이슬람권의 여성 인권 발전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때는 2018년 6월 24일, 곳은 사우디아라비아.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었기에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일까? 내용을 알아보니 여성에게도 운전면허 획득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여성은 운전도 하지 못하도록 차별을 받아왔다는 뜻이다.
전통사회에 비해 현저하게 신장된 우리나라 현대의 여성 인권 수준을 더 이상 낮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뜻에서, 우리나라 고대 여성 인권의 수준을 살펴본다. 결론을 먼저 밝히면 ‘말로는 섬섬옥수, 현실은 두꺼비손’이었다.
〈섬섬옥수〉는 황석영의 1973년 발표 단편소설이다.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도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가느다란 비단실을 뜻하는 섬纖이 두 번 겹쳐 있고, 그 뒤에 옥玉 같은 손手이 붙은 단어 섬섬옥수가 ‘여자의 가냘프고 고운 손‘을 의미하는 관용어인 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남자의 손은 아무리 뽀얗고 가느려도 섬섬옥수라고 하지 않는다. 여성적 외모와 행동을 보이는 남자는 도리어 ‘기생 오래비’로 비하된다. 남자의 손은 투박하고 여자의 손은 가냘프고 하얀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아 곱디고운 손, 여자의 손은 그래야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편은 전쟁터의 군사. 아내는 논밭의 일꾼
노동을 하지 않는 인생! 과연 그것이 여성 최고의 생애일까? 2013년 11월 12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 여성은 14.5%만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것은 그만큼 여성의 인권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은 제32조 ①항에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②항에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특히 ④항에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ㆍ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태고 이래 여성은 노동을 해왔다. 아니, 여성에게는 태생적으로 아기를 낳는 고통의 숙명이 주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남성보다 노동량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말로는 섬섬옥수의 여성을 섬긴다고 떠들었지만, 사실 인간사회는 여성에게 남성 못지않게 많은 노동을 떠안겨 왔다는 말이다. 섬섬옥수는 그저 반어反語나 역설逆說의 수사법일 따름이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먹을거리를 채집한 구석기 시대가 가장 공평한 분업 사회였다. 출산의 위험 때문에 무수히 생명을 잃으면서도 구석기 시대 여성들은 열매, 나무뿌리, 꿀, 조개 등을 안정적으로 채집하여 식구들을 살렸다. 여성의 노동은, 수확량이 날마다 들쑥날쑥인 남성의 사냥보다 더 효율적으로 공동체의 생계 유지에 이바지했다.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남녀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괭이 정도를 쓰던 농구가 갈이농사에 유용한 보습으로 발전하자 이제는 육체적 힘이 센 남성들이 논밭일에 뛰어들었다. 조개를 줍는 데서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은 식으로 진일보한 어로漁撈 생활의 변화도 마찬가지 기능을 했다. 약탈과 전쟁이 생산수단이 된 청동기 때에는 더욱 심해져서, 점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약해졌다.
그렇다고 여성에게 섬섬옥수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봉상왕 9년(300) 기록을 보면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의 결핍과 부역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궁궐 수리의 힘든 노역에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런 노역에 동원되지 않은 경우라 해도 여성의 노동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이 16년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을 때 나라의 농사는 모두 여자들이 지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결혼하면서 곧장 수의壽衣를 만든 나라였다. 남편이 언제 전사할지 모르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늘 싸움터에 가 있는 남편을 대신하여 아내는 날마다 일을 했지만, 그나마 남편이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하면 아내에게 부과되는 노동량은 더욱 늘어났다.
국경의 성 쌓는 일에도 동원된 여성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 충북 단양 남한강변의 산성에서 발견된 적성비赤城碑(국보 198호)는 ‘女子’, ‘小女’ 등의 글자를 보여주었다. 적성비는 고구려 국경 지대에 ‘좋은 성벽을 쌓고자 마음먹고 힘을 다하다가 죽은’ 야이차也尒次 등에 대한 처분을 기록해둔 비석이다. 즉 적성비에 여자, 소녀 등이 새겨져 있는 것은 신라에서도 축성 노동에 여성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종교적 노동에도 여성은 열외가 아니었다. 4구체 향가 〈풍요〉의 증언을 들어보자. 풍요는 양지 스님이 영묘사 장육존상을 만들 때에 노동요로 사용한 노래인데, ‘오라, 오라, 오라, 인생은 서럽더라, 우리는 공덕을 쌓으러 왔다네’ 정도의 뜻을 지녔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 안의 남녀들이 앞다투어 진흙을 운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교적 공덕을 쌓기 위해 남녀 구분없이 노동을 했다는 뜻이겠지만, 실제로는 섬섬옥수의 여성들도 진흙 운반에 ‘앞다투어’ 종교적으로 동원되어야 했던 것이다.
추석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회소곡〉 이야기도 여성의 강노동을 전해준다. 삼국사기는 신라 유리왕 9년(32)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베를 짜기 위해 ‘7월 기망旣望부터 8월 15일까지’ ‘날마다 일찍이 큰 부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시작했는데 을야乙夜에 마쳤다.’고 전한다. 여인들이 한 달 동안 동원되어 새벽부터 밤 10시까지 집단노동을 했다는 뜻이다. 이때 두 편으로 나누어 길쌈짜기 시합을 한 끝에 ‘가배’라는 이름의 잔치를 벌였는데 그것이 곧 ‘한가위’의 유래가 되었다.
가족 부양하느라 거지도 되고, 종도 되고
《삼국유사》에 전하는 〈빈녀양모貧女養母〉 이야기 역시 여성의 고단한 노동을 증언해준다. 화랑 효종랑 일행이 포석정에서 모여 놀기로 했는데 두 사람이 늦게 왔다. 두 사람은 “20세 안팎의 여인과 그의 눈 먼 어머니가 분황사 동쪽 마을에서 껴안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딸이 구걸을 해서 둘이 먹고 살았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도 불가능하자 남의 집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를 알고 통곡을 하자 딸도 덩달아 울어 그렇게 서로 껴안고 흐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느라 늦었습니다.” 하고 지체 사유를 말했다.
효종랑은 모녀를 불쌍하게 여겨 곡식 100석을 보내준다. 효종랑의 부모도 옷 한 벌을 보내고, 수많은 낭도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효녀 지은에게 보내준다. 당연히, 널리 번진 불우이웃 돕기 소문은 궁궐에도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를 들은 진성왕도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모녀에게 하사한 뒤, 군사들을 보내어 그 집을 지키도록 했다. 도둑이 들어 하사품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라면 지은의 마을에는 응당 정문旌門이 세워졌을 터이다. 신라 조정도 그 마을에 효양리孝養里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뒷날 지은과 어머니는 임금이 준 집을 희사하여 사찰로 쓰이도록 했다. 사람들은 두 모녀를 기린다는 뜻에서 그 절을 양존사兩尊寺라 불렀다. 하지만 효녀 지은 설화는 결국 맹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딸이 걸식을 하고 남의 집 종살이를 하는 힘든 사정을 보여주는 실화일 뿐이다.
자식을 파묻어야 할 정도의 먹을거리 걱정
교과서에 실려 있을 만큼 유명한 손순 설화 역시 가난한 가정의 힘든 아내상을 보여준다. 부부는 함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한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음식을 어린 자식이 자꾸 축내자 노모에게 돌아갈 몫이 거의 없어졌다. 이에 손순이 아내에게 말한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음식을 빼앗아 먹어 어머님은 굶주리시니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님을 배부르게 해드려야겠소.”
그런데 땅을 파던 중 돌로 만들어진 종이 튀어나온다. 두드려보니 종소리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부부는 아이를 매장하지 말라는 계시로 하늘이 석종을 보냈다고 판단, 아이를 데리고 귀가한다.
집에 돌아온 손순 부부는 종을 매달아놓고 쳐본다. 훌륭한 종소리는 대궐까지 퍼져간다. 놀라운 종소리에 마음이 흔들린 왕은 “서쪽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다.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고 분부한다.
왕은 손순 부부에게 집 한 채를 내리고 매년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한다. 뒷날 손순 부부는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석종을 모셔둔다. 사람들은 손순 부부의 효도가 널리 전파되어 세상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 절을 홍효사弘孝寺라 불렀다.
손순 설화의 주제 또한 효녀 지은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효도 숭상 주제의 실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단한 효도 이야기로만 읽는 피상적 독서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곰곰 들여다보면 손순 설화에는 아무리 힘들게 거리를 돌아다녀도 자식을 땅에 묻어야 할 만큼 하루하루가 눈물겨웠던 옛날 여성의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땅에 파묻어야 하다니!
이렇게 살아서 언제 좋은 날이 오겠소?
모량리에 사는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의 아들은 머리가 크고大 정수리가 평평했다. 사람들은 머리가 성城 같다고 해서 그 아들을 대성大城이라 불렀다. 하지만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니듯, 대성의 머리가 크다고 먹을 게 저절로 생기는 법은 없었다.
경조는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다. 그렇게 종노릇을 한 대가로 약간의 밭을 경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교 공인 이후 최초로 세워진 공식 사찰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이 큰 행사를 열기 위해 복안에게 경비를 시주하라고 권했다. 복안이 베 50필을 보시하니 스님이 축원을 했다.
“하늘의 신이 항상 지켜주실 것이며, 보시한 1만 배를 얻게 될 터이니 안락과 장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어머니 경조에게 달려가 말했다.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언제 좋을 날을 보겠습니까? 다음 세상은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보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 경조가 “좋다”고 화답한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그 때 국상國相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울려왔다.
“모량리의 아이 대성이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정말 대성이란 아이가 죽은 시각과 하늘의 울림이 들려온 시각이 같았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에 대성大城 두 자를 새긴 금 막대기를 쥐고 있었다. 대성은 뒷날 국상이 되어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 또 전생의 부모를 위해 (요즘 흔히 석굴암이라 부르는) 석불사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대성 효 2세二世 부모〉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이 설화도 유교적 효 또는 불교적 환생 논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힘든 인생살이에 주목하는 사회적 읽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대표 불교 유적 불국사와 석굴암은 가난한 현생을 벗어보고자 했던 한 여인의 고달픔에 기초를 두고 창건되었다는 말이다.
불국사
돌 던지며 적군과 전투도 불사한 옛날 여성들
옛날 사극을 보면 여자 무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경북 의성 금성산에도 여성들이 목숨을 바쳐 항전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185년(벌휴왕 2) 신라의 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 조문국 여인들은 현재의 금성산성 관망대 일대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죽는다. 양식은 떨어졌고, 군대의 규모도 턱없이 적었으며, 게다가 철제 무기를 휘두르는 신라의 남성 군사들을 돌멩이뿐인 조문국 여인들이 대적해낼 수는 없었다.
조문국 여인들의 돌멩이 항전은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진흥왕이 화랑 제도를 처음 만들면서 그 우두머리에 여성을 임명한 사실을 연상하면, ‘행주치마’를 낳은 이 전투는 여성의 참전이 고대사회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일상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조문국과 행주산성 여인들의 손이 섬섬옥수였을 리는 없다. 그녀들의 손은 두꺼비손이었다. 21세기 우리나라 현대 여성의 인권은 어떠한가? 비록 완벽하지는 못해도 이슬람권, 또는 한반도의 고대보다는 아주 낫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조문국 여성들이 사투를 벌인 금성산성의 흔적
이 글은 현진건을 현창하기 위해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게재할 원고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