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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7월 목요카페 / 주병오 시인의 시세계 ]
내가 생각하는 ‘시’
지인 중에 업적을 많이 남긴 훌륭하신 교수 한 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는 시공을 초월하여 지구촌은 물론, 우주까지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봉황 같은 존재, 또는 어느 시대에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설레는 노래를 부르는 카나리아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아니면 진흙 속에 진주라고 해도 좋겠지 요. 그래서 나는 가슴 속 깊이 시를 사모한 나머지 고행의 길을 산답니다.”
그는 내 말에 터무니 없다는 듯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는 100권이 넘는 첨단 대학교재를 집필했는가 하면 정년 후에는 난데 없이 국선미술가가 되었
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시화집을 발간하겠다고 저를 찿아왔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숨겨져 있던 나를 찿겠노라.”고 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던 분이 활기가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의 말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나, 즉 자아를 찿아가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이충이 선생님은 이 시간에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말을
자주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면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첫 번째,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지나온 경험을 보면, 습작의 교본으로 김소월의 ‘진달래꽃’, 박목월의 ‘나그네’,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윤동주의 ‘서시’, 이상의 ‘날개’, 정지용의 ‘향수’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등등, 그리고 국외 작품으로는 푸시긴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엘리엇의 ‘황무지’, 타고르의 ‘기탄잘리’ 등 수많은 현대시의 초기작품들이 시인 지망생인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는 청소년 시절 선조들의 역사, 지리와 철학을 탐독하며 여행을 즐기는 생활을 꿈꾸어 왔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문화와 사유의 발자취를 따라 어떤 길이 내가 갈 길인가? 이러한 번민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모름지기 그러한 생각을 실천해 오려 애쓰면서 얄팍하나마 지금의 사유와 보잘 것없는 시작詩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충이 시인이 늘 우리에게 “사랑의 상처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논하지 말라.”고 한 농담조의 조언은 뼛속까지 울리는 감정으로 슬픔과 기쁨, 폭넓은 조우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찿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두 번째, 오늘날에는 어떤 시를 써야 할 것인가?
우리가 지나온 100년을 시대적으로 돌이켜 보면, 일제 36년 동안에는 체념과 고발,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독재에 항거하여 울분을 표출하는 저항시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시가 범람하여 한국은 2만명의 시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 목소리와 색깔을 확실히 하는 ‘시의 전문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사의 파고를 넘어 현대시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가슴에 새겨, 금빛 태양이 떠오르는 희망의 아침바다에서 셀레는 가슴으로, 때로는 물새들 노래하는 호숫가에서 꽃과 나비 벌들, 풀잎의 이슬, 숲속에 작은 생명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담긴 큰 뜻을 헤아려 보는 사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기아의 참상, 우주 속 인간들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평화로 가는 길, 가상의 세계와 현실 등 모든 공간을 관찰하는 체험과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읽기를 통해 나는 세상에 어떤 존재일까? 내면의 세계를 새롭게 직시하며 새로운 세계와 조우(遭遇)하여 생동감있는 이데아의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방황하던 발길을 추스려 써 온 졸작 몇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천지天地에서
길 잃고 헤매이던 영혼
창백한 반쪽 얼굴로 오늘을 비추어 본다
바다를 돌아 돌아 머나먼 지평선 끝자락
가문비 낙엽송 원시림 숲 지나
자작나무마저 하얗게 누워버린
설한雪寒의 백두白頭에도
한 많은 민초民草들이
해맑은 새끼들로 꽃피우고 있다
아! 나는 누구인가?
피끓어 뛰는 가슴
휘 돌아보지 못한 옹졸함
타인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두 뺨을 적시는 이 끈끈함
불러도 불러도 안개 속에 흩어지는 메아리뿐
그들과 내가 정녕 남이 아님인가
겨울 소나무
겨우내 눈 서리에도 푸르름 간직한 채
늘 푸르게 살라 하네
뿌리까지 언 발 내보이며
혈관을 얼리지 말라 하네
인고忍苦의 세월
옹이 허리 곧추세우고
어리석은 낙망에 빠진 자
슬기 찾으라 하네
깎아지른 절벽 바위에서도
하늘 우러러 고개 치켜들고
절개 잇으라 하네
기상 품으라 하네
헐벗은 신의 손으로
삶을 기워가며
사육신 넋 낙낙장송되어
뭇새들 쉬어가라 하네
평화의 날개
녹슨 철조망 넘어 유라시아 기차에 몸을 싣고
덜컹거리는 역사의 회오리 잠재우며
이제는 따듯한 시베리아 초원을 달린다
그 옛날 태초의 어머니가 떠나온 바이칼
뼛속 깊이 시린 호수를 온몸에 담고
태양이 다시 뜨는 신세계를 달린다
한 세기 전 연해주에 일구어 온 생生
황량한 서아시아에 내동댕이쳐진 이들의
자유와 평화를 목 놓아 불러본다
이제 그 메아리 카파토키아 시리아를 건너
사하라 사막까지 울리어 앙골라 전장戰場에도
코끼리 눈망울에 비둘기 날고 있다
< 시와산문 117호 / 시인조명 조경옥 시인 >
바늘이 지나간 자리
그냥 헝겊 쪼가리였을 것이다
바늘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잘 보이지도 않은 바늘귀
기다란 실을 거느리고
야무지게 오가더니
어느 순간 모양을 갖춘다
무엇이든 놓아버릴 나이에
생각지도 않게 바늘을 잡고
무딘 손가락 찔려가며
한 땀 한 땀 시간을 깁는데
늘 더디 가던 시곗바늘이 달음질을 친다
길다던 동지섣달의 밤은 왜 그리 짧던지
삶이 매듭진 자리
꿰매고 깁는 그 자리는
죄다 희로애락의 바늘이 지나간 자리였구나
성숙해진다는 것
- 조경옥 시인의 시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긴 수명을 가지고 있는 거북이나 오랜 시간을 버티고 살아온 거목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노화는 슬픈 일이다. 소멸의 운명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어쩔 수 없는 불행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을 피하려고 헛된 노력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은 노욕이 되고 자신의 추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소멸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노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가질 때 노화는 삶의 완성으로 가는 성숙의 과정이 된다. 조경옥의 시는 바로 이 노화와 성숙이라는 화두를 생각하게 해준다.
< 시와산문 118호 / 시인조명 김양숙 시인 >
데칼코마니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생전 할머니 손에 돈 한 푼 쥐여 드리지 못한 아버진 한지를 접어 저승 가는 노잣돈을 만드셨다 가위질을 따라 걷는다 꽃 위를 걸을 땐 발을 빼려고 휘청거리셨다 할머니의 눈물이 모여 만들어진 댐에 다다르면 아버지의 눈보다 가위가 먼저 젖었다 잠시 쉬었다 가는 동네 해안 길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내어 누군가를 지키는 파도를 보았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을 땐 할머니가 웅얼거리던 회심곡에 발자국을 실어 가쁜 숨 몰아쉬셨다
접혀진 한지를 펴자 꽃길은 사라지고
아버지와 나는 닮은꼴의 다른 유전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간대를 등에 업고
오를수록 높아지는 빌딩 숲을 헤맨다
아버지를 닮은 내가 빌딩의 거울 속으로 첨벙 걸어 들어가자 거울은 끄떡없고 와장창 깨진 내가 바짝 마른 아버지를 읽는다
슬픔의 기억과 기억의 슬픔
- 김양숙의 시 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기억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과거에 한 일들을 기억하는 지금 나의 인식에 의해서 답해질 수 있다. 글쓰기란 바로 이 기억의 확대이고 심화이다. 특히 일인칭의 장르인 서정시는 시인의 기억 속에 숨겨진 자신의 삶과 꿈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김양숙의 시들은 대체로 시인 자신의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이 베어낸 파도를 등에 지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고래가 비취색 살냄새를 그리워하오 피가 도는 비린내를 찾아 떠난 극지의 바다 떠돌던 유빙의 행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소 바다 위에 종족의 문양을 그리는 고래의 꼬리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가오
- 「고래, 겹의 사생활」 부분
< 1920년대 현대시 >
빗소리
주 요 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날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듯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1920년대의 선구적인 우리말로 쉽게 쓴 시
빗소리가 민족해방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소식이라 믿고 싶은 화자
알 수 없어요
한 용 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보다 큰 긍정에의 길을 준비하는 ‘불교적 변증법’의 논리를 쉬운 말로 풀어낸 시
유리창
정 지 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어린 자식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슬픔을 맑고 감각적 이미지에 의해
그러나 주관적 감정이 과잉 노출하지 않고 절제된 표현으로, 화자의 초기 작품 중에 성공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1930~40년대 작품 >
승 무
조 지 훈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민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는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선(禪)의 세계는 경험적이건 선험적이건 간에 일어나는 표상, 개념, 판단 등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일체의 상념을 제거한 뒤에 나타나는 정적의 세계라는 것을 화자는 잘 표현하고 있다.
절 정
이 육 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묵지갠가 보다.
현실적 삶이 위축되어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새롭게 확대된 삶을 위한 전기가 마련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수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의 담은 저항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고향
윤 동 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화자는 고향인 북간도에서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을 보냇으나 서울 유학 생활을 하면서 현실의 암담한 상황을 깨닫게 된다. 그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마음에 그리던 고향을 상실하고 내적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어느 지류에 서서
신 석 정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극에 달할 즈음에 화자는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지녔기에 현실을 묵과할 수만은 없었던 심정이 드러나 있다. 이 시에는 암흑 속에서 발버둥치면서도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는 양심을 표현하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 영 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리는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빛의 파종
이 충 이
-중략-
아침마다 햇볕에 손 말리고
저녁을 기다리는 강가 미루나무
우리가 키 큰 나무 꼭대기에
내던진 그 돌들
여름밤 내내 별이 되어
하늘에 총총이 박혀 떴다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며
새벽을 기다리는 우리의
이마에 별똥별이 떨어져 내렸다
명멸하는 별똥별도 이 세상
어딘가에 빛을 뿌린다
그렇다 여름날 햇살처럼 선명한 자유
더 낮은 땅에 씨를 뿌리는 빛
우리가 심은 벼포기도 한낮에 새끼를 친다.
여름밤 빛을 심고 새벽을 기다린 시인.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져서 어딘가에 빛을 뿌려
새끼(새 생명)의 탄생을 기대(희망)하는 마음
벽화
-유년기
이 현 애
-중략-
길게 누운 빛살 안개, 무기수처럼
한그루 그늘에 숨어 또 다른 그늘을 만든다
구부정한 저년 무렵 비릿한 내음 풀어졌던
이음새 다잡아 산 세우고 물도 만든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 눈 속 흑점 서늘한 목덜미
따라 지평선 밖으로 빛줄기 수혈한다
젖은 물 움켜쥔 비탈 온 몸 흘려보낸다
바닥에 떨어뜨렸던 그림자 멍울 따라
빈손 내민다. 잘 비워졌다고 느꼈으나
끝내 입다물지 못하는 느티나무 그늘
덤불더미 지나고 눈발 날리며 흉내 낼 수 없는
발자국 따라 다시 아버지의 주름 속에 넣는다
자연이 만드는 수채화를 그리다 문득 아버지의 주름 속에서 그와 같은
삶의 그림자, 즉 영화처럼 흘러가는 실루엣의 형상을 보는 듯하다.
이현애 시인의 작품에서는 한없이 유영하다가 결국 내 안으로 다시 들어
와 대칭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