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丈夫出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
충무공이 1576년(선조9) 2월 식년무과에 합격하고나서 임용발령을 조용히 기다리며 한 말로 자신의 보직이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에 출입하여 아첨하거나 영화를 탐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在下者越遷 則應遷者不遷 是非公也 且法不可改也.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을 못하고 순서를 바꿔 아래 사람을 올리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규정도 고칠 수 없습니다.
1579년(선조12) 2월 훈련원 봉사(奉事 : 정 8품)였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산하의 교육훈련 담당 부서이다. 그 때의 상관은 병부정랑(丙部正郞 : 정 5품, 지금의 과장급) 서익(徐益)이 자기의 친지 한 사람의 서열을 바꾸어 참군(參軍)으로 승진시켜야 된다면서 인사관계 서류를 잘 꾸며 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충무공은 그의 청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끝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긴 까닭에 서익의 청탁을 거절하였다. 공명과 정의로써 불의에 대처한 공의 언동이 당시 한성 훈련원내에 널리 알려졌다. 그후 1581년 12월 2년째 발포만호로 있을 때 서익은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와 허위로 보고서를 만들어 공을 파직시키었다.
吾初出仕路 豈宜托跡權門謀進耶.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있는 집에 발을 디뎌 놓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느냐.
한때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 1519∼1593)이 자기 딸(庶女)을 충무공에게 소실로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내어 인척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있었다. 병조판서라는 높은 양반이 충무공을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공의 인품을 좋게 보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무공은 그 자리에서 중매인을 돌려 보내었고 권세와 돈을 따라 다니는 아첨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此乃公家物也裁之有年一朝伐之不以公而以私可乎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것이니 하루 아침에 사사로이 베어버릴 수 없습니다.
1580년 7월에 발포만호(鉢浦萬戶 : 종 4품)로 근무하였다. 발포는 지금의 고흥군 남족해안 내발리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영 객사 앞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시오.”하였으나 거절하니 성박은 노발대발 하였으나 충무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我與栗谷同性可以相見而見於銓相時不可竟不往
나와 율곡은 성이 같은 까닭에 만나 볼만도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선조14년 서익은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와 허위로“발포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전혀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파직해야 합니다”라고 장계를 올려 공을 파직시키었다. 그러자 당시 율곡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사간원 대사간인 서해 유성룡이 율곡선생을 만나보도록 권고한 적이 있었을 때 나눈 얘기.
箭筒則不難進納 而人謂大監之受何如也 小人之納又何如也 以 一箭筒 而大監與小人俱受汚辱之名 則深有未安 柳相曰 君言是也
화살통(箭筒)을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보고 대감이 받는 것을 어떻다 말하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이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말을 듣게 될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서익의 무고로 파직 되었다가 1582년(선조15) 5월에 3년 전의 근무지였던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로 재직하게 되었다. 당시 병조판서 유전(柳? : 1531∼1589)은 충무공이 늘 들고 다니던 화살통을 보고 소유하고 픈 생각에 “그 화살통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을 때 완곡하게 거절하자 유전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러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그도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死生有名 飮酒何也 不渴何必飮水 死則死耳 安可違道求生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며,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은 무엇 때문에 마시겠는가?
어찌 바른 길을 어기어 살기를 구한단 말이오!
1586년(선조 19 1월 함경도 조산원 만호(종4품)으로 있었다.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최북단 두만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여진족이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특별한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충무공은 적은 병력으로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포로된 자 60여명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때 병마사 이일은 호출하여 문초받을 때 선거이에게 한말.그러나 모든 잘못을 것을 충무공에게 전가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勿論有罪無罪 一國大臣在於獄中 而作樂於堂上 無乃未安乎.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나라에서 가려낼 일이지만 한 나라의 대신이 옥중에 계신데 이렇게 방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1589년(선조22) 7월 정언신이 나해 귀향지에서 한성으로 다시 끌려와 옥중에 갇혀 있었다. 이분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까닭없이 연루되어 65세에 죽었다. 정언신(정여립과 9촌)은 충무공에게는 은사요 상관이었으며 또 평소에 존경해 왔던 분이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읍에서 한성의 옥에 갇혀있는 정언신을 문병하였다.
吾寧得罪於濫率 不認棄此無依
내가 차라리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입는 한이 있어도 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들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없다.
1580년 둘째형 요신(堯臣)이 먼저 죽고 이듬해에는 큰형 희신(羲臣)마져 죽으니 두형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마침 충무공께서 정읍현감으로 있을 적에 함께 있게 되었다. 박생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남솔(濫率)이라고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而爲遮?海寇 莫如舟師 水陸之戰 不可偏廢.
바다로 침임하는 왜적을 저지하는 데는 수군을 따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수군이나 육군은 그 어느 쪽도 없앨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발발 10개월전 이었는데 즉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고 하고 신립장군은 수군을 폐지하자고 까지 하였고 또한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방비시설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러한 의견 충돌상황에서 충무공이 분연히 일어나 행양방어의 중요성과 수군활동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從事肥己 如是不願 他日之事 亦可知矣
자기 한 몸만 살찔 일을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장차의 일도 가히 짐작된다.
1592년(선조25) 1월 16일 충무공께서 전라좌수영 관할 장수들에 대하여 검열을 하였다. 이 때는 왜군이 처들어 오기 3개월 전으로 우리 병사들은 언젠가 있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쉬지 않고 전비태세 강화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당답의 군관과 색리들이 마땅히 고쳐야 할 병선을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벌하여 곤장으로 다스렸다.
各有分界 非朝廷之命 豈宜擅自越境.
우리가 각각 책임을 맡은 경계가 있는데 명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임의로 경계를 넘을 수 있겠는가.
충무공은 왜적이 야만적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경상도 수군이 대패하였음을 알고 이제는 전라좌수영이 조선을 지키는 제1방어선이 됨을 바로 인식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일단 보류하였다. 원균의 몇 차례 요청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출전 지연 문제는 그 후 한때 조정에 까지 문제로 떠올랐다. 우의정이었던 이원익은 충무공의 조치 내용을 보고서 당연한 조치임을 변호해 주었다. 반드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때에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 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으로 전개한 옥포해전을 치르면서 한 말씀.
毋杻一捷慰撫戰士 更勵舟楫爲有如可 聞變卽赴終始如一亦
한 번 승첩하였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위무하고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변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1592년 6월 14일 제4차 당항포 해전을 승리하고 나서 한 말씀.
臣嘗廬島夷之變 別製龜船…雖賊船數百之中 可以突入放砲 是 白乎等用良 今行以爲突擊將所騎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고북함을 만들었는데… 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1592년 6월 14일 보고한 내용
吾不死 則賊必不敢來犯矣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불의의 일에 대비하여 비상용 전투식량 1,300석을 비축해 놓으며
輕敵 必敗之理
적을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
1593년 2월 22일 충무공은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이 있는 웅천 등지를 공격하며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 以 爲遮按海路之計耳
호남의 땅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충무공께서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玄德升{1564년(명종19)∼1627년(인조5)}에게 보낸 편지 내용임.
見小利而入剿 大利不成 姑用停之 乘機剿滅事.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는 큰 것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무찔러야 합니다.
1594년 2월 13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
欺罔天聽 至於此極 國事如是 萬無平定之理 仰屋而已.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국사가 이래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1594년 2월 16일 암행어사 유몽인이 장계한 내용을 보고 암행어사라는 사람이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눈앞의 얼버무림만 하고 있다며
與賊相對 勝敗決於呼吸 爲將者不之死 則不可臥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년 3월 경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공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며 군무를 보니 아들이 휴양하기를 권하자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은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태구련과 이무생에게 장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칼자루에 바로 위의 칼면에 이와 같은 도명을 한 칼에 한 구절씩 금상감으로 새겨 두었다.
將?功無補於涓埃口誦敎書面有?於軍旅.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595년 5월 29일 일기에서
獨依樓上 念國勢危如朝露 內無決策之棟樑 外無匡國之柱石 未 知宗社之終至如何 心思煩亂終日反側.
혼자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으니 사직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
1595년 7월 초1일 난중일기에서
若有心膽 則必自處矣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1595년 7월 7일 선조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내린 유지를 보고나서 참으로 놀랍고도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深夜使之歡躍非强爲樂也 欲使久若暢申勞苦之計也.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한 것은 억지로 즐겁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에게 그 수고를 풀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1596년 5월 5일 일기에서
所經一境 蓬藁滿 目慘不忍見 姑除戰船之整 以舒軍民之懸.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같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한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이라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배겅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 하겠다.
1596년 윤 8월 14일 일기에서
竭忠於國而罪已至 欲孝於親而親亦亡 天地安如吾之事乎 不如 早死也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은 어버이마저 돌아가셨다. 어찌하랴 ! 어찌하랴 !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어디 있으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1597년 4월 19일 백의종군하면서 아산에 이르러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듣고
晨昏戀慟淚凝成血 天胡漠漠不我燭兮 何不速我死也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은 아득한 저 하늘을 어찌하여 내 사정을 이다지도 살펴주지 못하는지, 왜 어서 죽지 않는지.
1597년 5월 6일 백의종군중 꿈에서 두 분 형님을 꿈에서 보고나서
介峴行來 奇巖千丈 江水委曲且深 路險棧危 若扼此險 則萬夫 難過矣.
개벼리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길이나 되고 굽이 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 험고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가 어렵겠다.
1597년 6월 4일 백의종군중 권율 장군의 진지를 찾아가던 곳으로 현재도 개벼리 개비리 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 臣不死 則賊不敢侮矣.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8월 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하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 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
昏鼻血流出升餘 夜座思淚 如何可言
어둘 무렵이 되어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 짓곤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
1597년 10월 19일 일기중에서 한 달전 9월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칠천량 패전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는데 10월 14일 막내 아들 면의 부고를 받았다. 그 부고를 받는 순간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고 꿈속에서 아들을 본 후 마음이 심란할 때 일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 謂矣.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
명량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년 9월 15일 긴박했던 날 일기에서 이 말은 『오기병법(오기병법)』의 「치병편(치병편)」제3장에서 연유된 말이다.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은 진나라 左思가 지은 「촉도부(蜀都賦)」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大將不可不和 讐賊不可從遣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를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1598년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7월 17일(우리나라에서는 8월 18일로 알았다) 죽으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비밀리에 철수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부대만 우리 수군이 바다를 가로 막고 있어서 못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명나라 진 도독은 그 청을 들어 줄려고 하였다.그 뒤 몇 차례의 뇌물을 먹은 진 도독은 결국 충무공께 왜적을 보내주자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진 도독은 부끄러이 여겼다.
此讐若除 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15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왜장 고니시 유니나카가 이끈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에서 정박하고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배들도 많았다. 충무공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약속하고서 이 날 밤 10시경에 같이 길을 떠나 19일 밤 2시경에 노량에 이르러 왜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충무공은 전선 약 150척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만 했고 이번을 최후의 전투로 장식해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17일 밤 자정에 천지신명께 빌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않된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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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춤무공 탄신일이 분명 음력일진데 4.28일로 고정인가?
정부에서 양력으로 그렇게 정하고 공표했다는군. Don't let my death be known to the enemy(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고 적당히 둘러대라).
안진경체로 쓴 이충무공 신도비가 돋보이네. 노량진 소재 사육신묘에도 입구에 안진경체 집자로 구성된 세운 신도비가 있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