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치
앞뒤 큰 도로가 나고 좌우에도 트여 마름모꼴의 땅이 됐다. 천 평쯤 될까. 갈대와 쑥대머리, 환상 넝쿨, 칡덩굴 등 온갖 푸성귀가 길길이 자라 들어가기 어렵게 버려진 땅이었다. 가까운 아파트 노인들이 잠시 텃밭으로 채소를 가꾸다가 시에서 ‘미세먼지 차단 숲’을 만들었다. 가장자리 도랑 옆으로 길게 밭을 만들어 산딸기나무도 심었다. 다닐 때 가드레일을 타 넘어 드나들었다. 다리 아래 차 대기 편하고 밭 중간에 뽕나무와 소사나무 그늘이 있어 안성맞춤이다. 씽씽 차 다니는 것도 볼만하다.
한번은 채소를 뽑아 나오는데 매끈한 뱀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 무슨 뱀이 있나. 보니 힘있게 꾸불거리다가 눈길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달음질쳐 내뺐다. 바닷가여서 짠물이다. 개구리도 없는데 어찌 살까 여겼다. 그 뒤로 본 적이 없다. 10여 년 동안 여러 번 뒤집혔다. 아카시아와 붉나무 등 잡목을 뿌리째 뽑아내고 흙을 돋우며 키 큰 나무를 심었다.
가스관을 묻으면서 깊이 파헤쳐 뱀이 나타났던 자리가 뒤바뀌었다. 사방으로 차들이 다녀서 어디 빠져나가기도 어렵다. 먹이 없는 데다 가로등 불빛으로 온통 대낮처럼 밝다. 어찌어찌 나갔거나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길쭉한 것이 섬뜩하다. 그 무늬가 예쁜 게 왜 그리 징그럽나. 그 뒤부터 얼찐대나 또 보일까 살피게 된다. 무엇이 부스럭거려도 깜짝깜짝 놀란다. 혹시 하면서---.
도마뱀이 꿈틀해도 뱀인가 싶어 ‘어이쿠’ 한다. 낮은 바닥에 바닷물 개울이 있어서 그리로 고기 잡으러 다니는가. 쥐를 노리는가. 안 보여서 이제 사라졌나 여겼는데 또 나타났다. 잊을만하면 ‘나 여기 있어요’ 한다. 호박을 수정하는데 무엇이 꾸물거려 보니 뱀이다. 아래 숲으로 스르르 기어들었다. 전보다 어려 보여 새끼 같다. 어디 어미가 있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이곳에 뱀은 없다고 여기는 아내가 마음껏 헤치며 다닌다. 돌을 굴려 담쌓기를 즐기고 낫으로 풀을 베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좋다며 곧잘 한다. 천상 농군이다. 다른 집은 여자들이 흙 만지는 것과 풀벌레, 개구리를 싫어한다. 거기다 풀밭에 뱀이 기어 나오면 그건 기겁할 일이다. 다들 밭에 오지 않는데 우린 거꾸로 됐다.
모임에 나가야 하고 당구도 쳐야 하는데 붙들려 진땀을 흘려야 한다. 오전은 도와주고 오훈 나가기로 했는데 그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 뱀 나오는 밭에 있길 좋아한다. 하기야 뱀이 있는 줄 모른다. 알면 저러겠나. 나만 알고 끙끙거린다. 저게 숨어 잘 다녀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내 눈에 나타나면 어쩐담.
밭에 가면 먼저 긴 동쪽 서쪽을 갔다 왔다 한다. 발자국 소릴 내며 설치고 다녀야 이것들이 숲속에서 나오지 않을까 해서이다. 아내가 보고 놀라 까무러치면 나 혼자 어찌 사나. 중간쯤 부추밭에 무엇이 늘어져 있다. 보니 뱀이다. 햇볕을 쬐고 있는지 두 겹으로 고랑에 가만 있다. 굵고 긴 것이 어미인 것 같다.
겁도 없는가. 그냥 있다. 미련한 사람을 능구렁이라 하는데 이게 그 짝이다. 안 되겠는가. 설설 피한다. 저쪽 뽕나무 아래 아내가 알면 큰일이다. 어서 쫓아야지 하며 낫으로 쉬쉬 견주며 흔들었다. ‘어’ 이게 덤빈다. 머리를 치켜들고 입을 벌려 물려 대든다. 풀밭으로 가지 않고 다니는 길로 들어 똬릴 틀고선 맞서려 한다. 고거 참 애먹인다.
‘허허 요거 맹랑하다.’ ‘이놈’ 하고선 발을 쾅 디뎌 위협을 줬다. 안 되겠다 싶었는가. 개울로 ‘후절펑’ 떨어져 내렸다. 새끼는 도망치기 바빴는데 이건 내가 만만한가 대드는 게 노련하고 가당찮다. 낫으로 이리저리 후려쳤다 머리 들다가 걸리면 혼쭐나라고. 바닷물에 빠졌으니 짠 물에서 어쩌나 봤다.
낫으로 물 위를 막 갈겨댔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헤엄을 잘 친다. 저쪽으로 가라 했는데 내 쪽으로 달려들며 발아래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재빠르다. 거기 들어갈 곳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기다란 게 눈 깜짝할 사이에 기차가 굴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듯 숨었다. 들어가선 소식이 없어 발로 쾅쾅 짓밟아 놀라게 했다.
꿈쩍 않고 나올 생각이 없다. 부추밭을 정성껏 가꾸는 아내인데 어쩌나. 하필 여기서 얼찐거릴 게 뭔가. 작기나 하나 길다 길어. 음습한 곳에 엉큼스럽게 스며든 걸 그냥 둘 수 없다. 그것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는 아내다. 나오지 말라 군기침을 하며 쾅 밟고 지나쳤다. 앉아 쉬면서 뜸할 때 보니 구멍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누구 있나 없나 살핀다. 그게 참 밉상이다. 나오기만 해 봐라.
며칠 뒤 태풍으로 비가 많이 내렸다. 낙동강 물이 불어나고 바다 만조에 넘쳤다. 그릇들이 둥둥 떠다녔다. 뱀이 들앉은 구멍도 물에 푹 잠겼다. 이게 어디로 갔는지 오며 가며 살폈지만 보이지 않는다. 부디 멀리 가라 여기서 알짱대지 말아라. 그게 감히 어디라고 덤벼드나. 힐끔힐끔 내다보며 약을 올리나.
오른손엔 낫을 들고 왼손엔 뱀 잡을 지팡이가 들렸다. 겁많은 아낸 그걸 보면 기절할 수 있다. 그래 그만두자 생각이 들다가도 요결 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야지 맘먹고 더 튼튼한 몽둥이를 만들었다. 아내가 보고 놀라기 전에 해치워야겠다. 끝을 목누르기 쉽게 ㅅ자로 팠다. 같잖게 덤비는 걸 어찌 그만두나.
며칠 뒤 마치고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후다닥 아내가 놀란다. ‘뱀뱀’ 하면서 뒤로 물러선다. 호박 수정할 때 보였던 뱀인가 보다. 자갈에 몸 데우러 나왔다가 들켰다. 아낸 놀라선가 뱀이 빨갛단다. 그때야 독 없는 물뱀이라며 있는 걸 일러주었다. 이제 밭에 가지겠나. 잘 됐다 채소를 사 먹으면 돼지 그게 무슨 대수인가.
며칠 뒤 ‘밭에 가 봐야 안 될라.’ ‘뱀 나오는데 어딜 가.’ 다니는 두산경로당 함양 댁이 영감 젊을 때 허약해서 몸보신할 거라 뱀을 잡아 곰을 만들었다. 돌 틈으로 들어가는 구렁이 꼬리를 잡아당겼다. 안 나오길래 지나는 사람에게 끄집어내 달라 부탁했다. 담배 연기를 뿜으니 술 빠져나왔단다. 길 가다 보면 잡아서 삼베 자루에 넣고 푹 고아 한 사발 마셨다. 겁도 없다. 그걸 어찌 잡나. 무자치에 소름 끼치는데.
그 말하는 아내도 담이 생겼는가. 까짓것 하는 눈치다.
첫댓글 뱀,지렁이,굼벵이,지네,바퀴벌레,...너무너무 혐오스럽습니다.
저도 "까짓것.."이런 담이 생겼으면....
풀밭엔 뱀이 있습니다.
도심이고 도로가 사방으로 났는데 다닙니다.
시골은 덜 한 것 같은데 도시 산속과 들판은 심합니다.
산돼지와 고라니가 내려오고 풀쐐기 뱀이 스멀거립나다.
이 많은 문장 정말 대단하십니다
뱀의 애기 뱀도 멸종 상태라 요즘은
보기 어려워요 그래도 징거려워요.
텃밭 가꾸는 모습 시골 사는 저 보다
더 부지런하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박회장님 발 괜찮아요.
너무 더워 애먹었습니다.
땀으로 옷이 흡뻑 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