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라낸 창자가 세숫대야에 가득
증 언 자 : 이문창(남)
생년월일 : 1950(당시 나이 30세)
직 업 : 도장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 수협 부근에서 복부관통상을 당한 이문창씨의 증언이다. 그는 21일 아침에 직장에 출근했다가 즉시 퇴근하라는 사장의 지시를 받고 직장 동료와 함께 나왔다. 집으로 가기 위해 전일빌딩에서 수협 앞으로 건너간 직후 공수들이 갈긴 M16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후 창자를 절단하는 수술을 2차례에 걸쳐 받았으나 현재까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등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길을 건너다 총에 맞아
나는 지금의 진월동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기술을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직장을 옮겨가며 일한 관계로 지금은 거의 못 하는 일이 없을 정도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성실하게 살았던 것만은 자부할수 있다. 술과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으나 그때 부상당한 후부터 하도 속이 상해 지금은 조금씩 하고 있다. 1980년 5 · 18 당시 나는 중흥동에 있는 대동공업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20일에도 정상근무를 했었다. 21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으나 사장이 지금 시내에 난리가 났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다. 직장 동료와 함께 걸어서 유동 삼거리에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그곳에서 친구집에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했다. 약속된 장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오지 않자 직장 동료와 함께 전남여고에서 전일빌딩으로 난 길을 따라 금남로로 왔다. 전일빌딩 앞에 도착한 시간은 12시에서 1시 사이였을 것이다. 금남로에 빡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비집고 수협 앞에 왔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시 시위구경을 하려고 금남로로 간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 집에 가기 위해 길을 건넜던 것이다. 처음 총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순간 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거리에 팍팍 고꾸라지는 것을 봤다.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대는 총소리 때문에 멍청하게 있던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치려고 일어났다. 마음과는 달리 아무리 달리려고 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총에 맞은 사실을 깨달았다. 옷은 이미 피로 낭자해 있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무등극장 맞은편에 있는 조그만 병원문을 열고 들어간 후 쓰러져버렸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간호원들이 와서 침대로 나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간호원이 지혈시키기 위해 상처부위를 붕대로 조이자 숨도 쉬지 못할 전도로 배가 아프고 뜨거웠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지르는 나를 다시 들것에 싣고 차에다 태웠다. 그곳에서 응급처치만 받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적십자병원에서 의사들이 보호자를 찾았다. 나는 집에 전화가 없기 때문에 동생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때까지 의식이 있기는 했으나 상처로부터 오는 통증이 너무 심해 사람의 말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집에서 보호자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응급실에 방치돼 있었다. 나는 평상시 용돈을 맡이 가지고 다닌다. 그때도 지갑에 만원권 여섯장,천원권 열장과 껍, 빗 등을 담아 잠바 속주머니에 넣어뒀었다. 그날 총알이 가죽 지갑과 그 내용물을 뚫고 배에 박혔다. 지금도 그 지갑을 내용물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지갑에 있던 돈은 적십자병원에서 계약금으로 써버렸다. 나중에 수술했던 의사가 하는 말이 "지갑이나 그 내용물이 없었다면 총알이 관통했을 텐데 내용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총알의 회전력이 약해져서 복부에 박힌 것 같다"고 했다.
창자를 잘라내는 대수술
동생이 병원에 오기 전까지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었으나 동생과 매제가 도착하자 정신을 잃었다. 수술 후 3주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회복도 빠른 편이었고 경과도 아주 좋았다. 수술 후 열사흘 정도 지난 날이었다. 밤 9시경에 갑자기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해서 수돗물이 쏟아지듯 밤새 피를 쏟았다. 간호원이 이 소식을 원장에게 전화로 알리자 하혈이 멈출 때까지 수혈을 시키라고 했다. 양팔을 통해 계속 수혈을 하면 괜찮다가 수혈이 끝나면 다시 세숫대야에 가득 피를 쏟았다. 그러기를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되풀이하자 얼굴은 핏기가 없이 하얗게 변하고 손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원장이 출근한 후 다른 대학병원으로 연락하여 의사들이 왔다. 수술하는 중 사망해도 책임이 없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고 오전 10시경에 재수술을 했다.
새숫대야에 가득 찬 창자
내가 재수술을 받던 날 오후 4시가 되어도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자 어머니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고 한다. 평소 장남인 나를 극진히 위해 주시던 어머니는 타는 듯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후가 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찌나 발악을 했던지 보다못한 간호원이 가족들에게 어머니를 진정시켜 집으로 보내라고 충고할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고 그 긴 시간을 수술실 앞에서 보내셨다.5시가 지나서야 수술은 끝났다. "이문창 씨 수술 끝났으니 들어 가보세요" 어머니는 오히려 겁이 나더란다. '혹시 수술하다 죽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친척들이 어머니를 안심시켜 들여보냈다고 했다. 수술 후 작은어머님이 보니 내 배속에서 잘라낸 창자가 세숫대야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복부에 고름 주머니를 차고
6시경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나에게 그날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수술 후 보름간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영양제일 링게르 주사에 의존한 채 살았다.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병원에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지키려고 노력했다.아침마다 의사들이 상처부위의 소독을 하기 위해 병실로 왔다. 수술하고 꿰맨 곳에 계속 고름 주머니를 허리띠에 끼어 차고 생활했다. 손바닥만한 고름 주머니를 하루에 서너 번 정도 바꾸는데도 진한 피고름이 흘렀다. 그래서 아침마다 의사들이 와서 고름을 짜내고 소독을 했다. 거의 상처부위에 고여 있는 고름만 짜는데 어떤 때는 핀셋 같은 것으로 쿡 찔러 뱃속을 휘저으면 단장의 아픔을 느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도 비명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내가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면 혹시라도 의사들이 소독을 소흘히 할까봐서 아픔을 속으로 삼켰다.
의사들까지 포기했지만
수술하고 보름이 지나자 물을 한 모금씩 마셔도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목이 마르고 혀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갈증을 생각하면 당장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참았다. 의사가 마셔도 좋다고 했지만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는 며칠 더 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흘을 견딘후에야 한 숟가락의 물로 입만 축였다. 그렇게만 해도 살것 같았다. 의사들은 내가 회복되리라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재수술을 할 때도 우리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험삼아 하는 식이었다.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복도에서 과장이 "이문창이 목숨도 참 질기네"라고 말하는 것을 어머니가 들었다고 했다. 수술하고 꿰맨 자국도 간격이 굉장히 벌어져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 이상 벌어지게 듬성듬성 꿰맸다.. 아무튼 어떻게 수술했는지 모르지만 내 배는 가로 세로로 쩍쩍 갈라진 상처가 3개나 되고,왼쪽 맨 밑에 있는 갈비뼈 끝이 날렵하게 되어서 툭 불거져 있다. 아마 의사들이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수술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간격이 넓게 꿰매놓은 상처 사이로 삐져나온 살이 고름을 짤 때마다 들락날락했을 정도이니까. 재수술 후 치료과정중에는 의사와 간호원들이 참 친절하게 대해 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환자가 차츰 회복되어 가자 반갑기도 했겠지만 그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지키려고 노력하자 대견스럽게 생각했는지 전력을 다해 치료에 힘써 주었다.
시위가담 환자들은 통합병원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 후 도청에선가, 경찰서에선가 조사를 나왔다. 부상환자들의 신원파악을 모두 해보고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통합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당시 내가 근무했던 대동공업 사에 가서 출근부까지 복사해 가고 고향까지 가서 나에 대해 알아봤다고 한다. 그때 "치료비는 정부에서 부담한다"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었다.나는 중상환자였기 때문에 일반병실에는 있었고, 나머지 기간은 중환자실에서 보내다했다. 1980년 10월말에 퇴원하여 1981년 1월까지를 허리에 차고 살았다. 뱃속에 구멍을 뚫어일주일 정도10월말 퇴원고름 주머니 연결해 놓은 호스에서 끈끈하게 나오던 액체가 점차 묽게 나오더니 석달째 되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수술하면서 연결해 놓은 호스가 뱃속에 살이 차니까 점차로 빠져나왔다. 호스도 조금씩 밖으로 나오고 고름도 거의 안 나오자 적십자병원에가서 호스를 뽑아냈다.
위염에다 체력약화까지 겹쳐
병원에서 퇴원한 후 1981년 다시 입원해야 했다. 1980년 당시 입원치료할 때 엉덩이에 주사를 많이 맞았었다. 주사맞은 자리가 뒤늦게 곯아 고생하다 단단하게 변해 버린 엉덩이살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도 왜 오랫동안입원을 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곳에 있으면 지긋지긋하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수술이 끝나자마자 퇴원해서 매일 통원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3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집에 있으면서 상처의 치료와 몸보신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재수술할 때 배꼽의 힘줄과 살점을 잘라내서 그런지 배꼽이 한쪽으로 쏠려서비틀어져 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금도 반듯이 앉으려면 상처부위가 땡겨서 똑바로 앉지 못한다. 수술한 뒤부터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고생했다. 의사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도청 앞에 있는 '동인X선과'에서 '위투시'도 해봤으나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배가 아프고 음식도 거의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지금도 약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주로 약국에서'위염'에 좋다는 약을 사다 먹고 있다. 평소에 반 공기 정도의 밥을 먹는데도 속이 거북하니까 밥 대신 인삼을 갈아서 우유와 함께 먹는다.
아내가 파출부로
1954년 옛날에 다니던 직장에 다시 출근했다. 그동안 한푼도 벌지 못하고 계속 약값이 들어가니 집에서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비와 치료비를 벌어보겠다고 일을 나갔으나 결국 일 년도 못 되어 그만두고 말았다.조금만 무리해도 상처부위가 아프고 체력이 뒷받침되지못했다. 우리처럼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건강이 제일인데 체력이 딸려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후 할수없이 아내가 파출부, 식당의 허드렛일 등을하다 지금은 미싱 공으로 일하며 받는 월급으로 생활한다.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우리 식구 생활비 하랴,내 약값대랴 굉장히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1984년 부상자회에서 온 연락을 받고 그곳에 회원으로 가입했다.'월례회'에 자주 가지는 못하고 있다. 워낙 건강이 악화되어 잘 걷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상처가 당겨서 반듯이서 있지도 못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일하기란 무척 힘겹다. 그래서 거의 따라가는 입장이고 그중에서도 나는 온건파에 속한다.몇 년 전에 부상자 가족들 중 한 명씩 취업알선을 해줬다.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체력에도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어 대신 막내동생이 대우전자에 들어갔다.원래는 부상자인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동생이 대신 들어간 것이다.
국회 청문회를 보고 분통터져
그동안 부상자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회원들은 시위도 많이 하고 점거농성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가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국회 청문회를 지켜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 밀어올랐다. 부상자회의 연락을 받고 5 · 18 연관단체들과 함께 국회 청문회장을 방문해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1988년 12월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5 · 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한다면서 그 의도와는 달리 사건을 은폐시키려는 여당의 태도를 보면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회원들과 함께 동행했다.아침 일찍 광주역에서 버스 3대로 출발하여 정오가 조금 지나서 국회 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출발하기 전부터 경찰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저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서울에서도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전혀 저지하지 않았다. 아마 여당측에서 국회 청문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치했을 것이다. 우리는 청문회장을 몰랐기 때문에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전경들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우리가 의사당을 휘젓고 다니자 국회의원들이 나왔다. 신기하, 이해찬등의 평민당 의원들이 우리를 평민당 사무실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으나 신기하 의원이 "이것은 함정이다.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여러분이 이렇게 행동하면 청문회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자제해 줄 것을 호소하자 평민당 사무실로 들어갔다. 민정당 의원들만 한 명도 오지 않고 문동환, 김인곤, 이철, 김동주 의원 등이 그곳으로 왔다. 이들이 돌아가면서 현재 청문회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아픈 상처를 건드린다는 것은 우리도 알지만 자제해 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해찬 의원은 '가짜 사진'에 관한 해명을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었다. 오후 4시까지 이야기 하다 서로 "열심히 하겠다"고 협상을 보고 그곳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회원들간에 "청와대로 가자", "백담사로 가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청와대로 쫓아가기로 의견을 모으고 출발했다. 우리가 청와대를 향해 가는데 계속 뒤에서 전경들이 탄 닭장차가 따라왔다. 우리는 청와대 부근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세우고 준비해 간 김밥을 먹었다. 우리를 뒤쫓아온 수백 명의 전경들이 몰려와 차를 발로 차면서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문을 열지 않자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를 열두 명 내지 열세 명씩 나누어서 차에 태워 서울시내 13개 경찰서로 분산, 수용했다.나는 회원 11명과 함께 청량리경찰서로 연행됐다. 대공 3과에서 우리를 담당했다."먼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옛날에는 몰랐지만 청문회를 보면서 여러분의 입장을 알게 됐고 의식도 달라졌습니다. "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 갖은 아양을 떨면서 밥을 시켜주는 등 과잉친절을 베풀었다. 막말로 꼭 간신배 같았다. 밤이 되자 10명의 경찰이 우리에게 붙어서 이름을 대라고 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경찰서에 오고 이름까지 밝혀야 하느냐며 말해 주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지 여러분이 우리 경찰서에 오게 되었으니 신원파악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며 계속 추궁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우리는 신원을 밝혔다. 아침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은 회원도 있었다. 오전 10시 지나서 12명의 신원파악이 완료되었다. 아침에 밥을 주자 "우리가 이런 밥이나 먹으러 온 줄 아느냐"면서 거부해 버린 사람도 있고 일부는 먹었다. 나는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빵하고 우유를 달라고 해서 먹었다.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전경들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피차 다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어떤 보도나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다친 것은 축소되어 나오고 전경들의 부상만 과잉보도했다. 그 당시의 일을 비디오로 촬영해서 경찰들이 봤던 모양이다. 우리와 함께 온 회원 중에서 두 사람이 전경을 때린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은 보낼수 없다고 했다(그 두 사람 중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전경을 때린 것이 아니라 경찰의 신원파악에 계속 불응했던 여자 회원이었다. 회원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경찰이 꾸며낸 말인 것 같다-조사자 주).
오전 11시경에 5 · 18 당시 부상당한 경위와 서울까지 오게 된 동기에 대해 서류를 꾸며 담당형사가 가지고 갔다. 한참 후에 되돌아온 형사가 "내가 잘 말씀드렸더니 두사람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빨리 광주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참 지난 뒤 다시 들어와서 "이번은 특별히 두 사람도 불구속처분으로 여러분과 함께 가도록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선심이나 쓰듯이 말했다. 오후 늦게 12명 전원을 전경버스에 싣고 형사 4명이 강남고속터미널까지 따라왔다. 터미널에 가보니 이미 많은 회원들이 눈에 띄웠다. 동행한 형사 4명이 표를 끊어서 버스에 탄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나는 그 차를 타고 광주로 왔다.
보상은 언제까지 미루기만 할 것인가
온전치도 못한 몸을 이끌고 국회 청문회장까지 쫓아가게 됐던 것은 위증을 하는 증인의 태도와 그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인 의원들의 태도가 분해서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위증을 일삼는 당시 계엄군들과 고위공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가증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들을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어떻게 5 18의 진상이 규명되겠는가. 1987년부터 광주문제가 거론되면 항상 빠지지 않았던것이 '보상'이었다. 엄밀히 따져보면 여당이건 야당이견간에 근본적인 치유대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족이나 부 상자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은 기필코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부상자나 유가족들의 원상회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정책적으로 여당과 야당 모두 광주를 팔아먹고 있다. 건강이 회복된다면 돈이 무슨 소용있겠는가. 그런데 보상문제 을 떠들어대는 것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역겹기까지 하다. 부상자회원들간에도 경상자들이 훨씬 보상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중상자일수록 내가 병신이 된 마당에 보상금이 무슨 소용 있느냐'는 입장이 강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부상자들의 생활을 봤을 때 보상금문제는 시급하다. 물론 큰 행사나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면 으레 진상규명,명예회복 그리고 보상금이 거론된다.
그러나 부 상자들과 개인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실제 생활하는 데 있어서 보상금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까지도 살았는데 그것도 참지 못하느냐"고 하겠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춥고 배고플 때 백 원과생활이 나아졌을 때 2백 원이 어떻게 같은 수 있겠느냐"는것이다. 많은 가장들이 부상으로 인해 노동력을 상실한 채 경제적인 어려움과 건강의 악화로 가정파탄을 겪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나도 비교적 중상자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빨리 보상금이 지급되기를 바라고 있다. 1980년 이후 전혀 일을 못 하고 누워 있으면서 계속 약을 먹어야만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손실이 막대하다. 그러나 내가 돈을 한푼도 벌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형편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집사람의 고생이 무척 심하다. 그것을 보고만 있으려니 앞으로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보상문제가 빨리 매듭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피해 당사자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상금의 지급 후에도 확실한 진상은 규명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시점에서 두 전직 대통령이 증언대에 선다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권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끄는 것은 정책적으로 5 · 18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려는 술수인 것 같다. 수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밝혀진 지금 한두 명의 사망자가 더 밝혀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보상금의 지급문제는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살원흉보다 그 하수인이 더 저주스러워
5공화국과 6공화국 정전의 책임자가 "광주문제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실토하지 않는 이상 학살자의 색출은 어렵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국민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두환 개인에 대한 원한과 증오보다 그 하수인들에 대한 미움이 더 크다. 전두환이 ,5공화국 시절의 모든 사건을 혼자 힘으로 일으켰을 만큼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옆에서 보좌했을 놈들이 계획을 짜고 실행했으리라 생각하니 그들이 더 증오스럽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학살의 책임자가 "내가 명령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잘못의 인정과 진정한 사과가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용서해 줄 용의가 있다. 물론 유가족들이나 부상자 개개인이 처한 처지에 따라서 학살자의처벌에 관한 입장이 분명히 다르리라고 생각한다.(조사 · 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좋은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