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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wiking6979
한국 전쟁 직전의 상황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글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창군 직후인 국군은 그렇다 치고, 2차 대전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군은 5년 만에 그 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군대로 전락한 상태였다. 미국은 평화무드에 젖어있었고 미래 전쟁은 핵전쟁이 될 것이고 재래식 전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부와 해군부를 통합하여 국방부를 만들고 첫 장관에 부유한 변호사이자 대선 공신인 루이 존슨을 임명했다. 그의 최우선적인 국방정책은 ‘감군’ 이었다. 이로 인해 그 유명한 ‘제독들의 반란’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 글의 취지와는 맞지 않으므로 생략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런 감군이 한국전쟁을 유발한 원인 중 하나이고, 전쟁의 초반에 당한 미군의 참패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한반도를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 이 발표되어 김일성의 야욕을 자극한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트루먼과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유럽에 있었고 아시아의 방위는 사실상 일본의 ‘쇼군’ 이었던 맥아더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히로히토가 사는 왕궁을 바라보는 제일생명 빌딩에서 ‘일본 개조’에만 전념하고 있었고,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거의 육군)은 게이샤와 흥청망청 놀면서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동아시아의 방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치슨 라인을 그렇게 긋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다. 더구나 놀랍게도 맥아더는 한국과 필리핀 정부 수립행사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모두 당일 날 돌아왔고,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대만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단 하루도 한반도에서 잠을 자지 않고 일본에 돌아올 정도로 그 전에는 자신을 필리핀에서 야반도주하게 했던 나라에서 ‘벽안의 쇼군’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미스 부대의 참패부터 대전에서 당한 제24사단의 참패, 낙동강으로의 패주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면 그 때 미 해병대 특히 이 글의 주인공이자 겨우 해체를 면한 제1해병사단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해병사단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 해병대는 완전하지 않은 2개 사단 뿐이었고, 그 나마도 미 본토와 일본, 태평양의 여러 섬은 물론 유럽까지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미 육군은 전쟁 후 장비를 해외에 그대로 두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해병보급 장교들은 그 장비 즉 전차, 장갑차, 트럭 등에 적당히 해병대 표시를 해 캘리포니아 사막지대에 위치한 해병 병참기지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장비가 온존되어 해병대의 전투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맥아더는 극적인 상륙작전을 통해 적의 후방을 차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해병대 사령부의 브라이트 갓볼드 중령은 “한국전쟁이 해병대가 다시 생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해병대 사령관인 케이츠 대장은 7월 31일자로 제1해병사단장에 부임할 스미스 소장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는데, 전투태세가 되어있는 부대는 머레이 중령이 지휘하는 제5해병연대 뿐이었다. 급한 데로 제5해병연대에다가 포병대대와 전차대대, 항공단과 지원부대를 합친 6,500명 규모의 임시조직인 제1해병여단을 구성하여 7월 12일 샌디에고에서 한국으로 떠났다. 여단장은 에드워드 크레이그 Edward Craig 준장이 맡았는데,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태평양의 섬들을 누빈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25일 펜들턴에 도착한 스미스 장군은 8월 15일까지 전투태세를 갖춘 사단을 이끌고 한국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손에 있는 병력은 전역을 기다리고 있는 장병 3,386명이 전부였다. 거기에서야 장군은 8월 15일까지 전투태세를 갖춘 사단을 이끌고 한국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년 전 과달카날 전투의 재판이었다. 해병대 사령부는 전역예정자의 전역을 연기하고, 예비군을 소집하고 기지 운영 요원의 절반을 차출하여 제1해병사단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제1해병연대는 다시 풀러 대령이 연대장을 맡았는데, 우선 대서양 해변에 있는 캠프 레준에 집결했다가 파나마 운하를 통해 샌디에고의 캠프 펜들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코베 神戶 로 향했다. 호머 리첸버그 Homer Laurence Litzenberg 대령의 제7해병연대는 유럽에 있었기에 가장 늦게 한국에 오게 된다. 8년 전에도 이 연대는 사모아에 잇어 과달카날에 늦게 도착했는데, 이 역시 재현된 것이다. 사단장 자신은 예정보다 사흘 늦은 8월 18일, 비행기를 타고 코베에 도착했다. 보름 전인 8월 1일, 부산에 도착한 제1해병여단은 바로 다음 날 전투에 투입되었다. 해병대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야기 -1
여기서 잠시 앞서 펠릴류 전투 편에서도 등장했지만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번호가 붙은 부대 중에 부대 하나가 맡은 전투가 역사를 바꾼 예는 흔하지 않다. 카이사르의 제10군단, 갈리폴리 전투에서 케말이 지휘했던 제19사단, 4차 중동전 때 골란고원을 사수했던 이스라엘 국방군 제7기갑여단 정도 가 그 드문 예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제1해병사단은 사단 마크에 붙은 과달카날 전투와 장진호 전투로 두 전쟁에서 두 차례나 이런 위업을 달성했다. 더구나 두 전투는 열대와 혹한이라는 아주 대조적인 환경에서 치렀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과달카날 전투는 이미 다루었고, 한국전쟁에서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장진호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스미스 장군 이었지만 지명도는 맥아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는 1893년 10월 26일, 텍사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그 곳에서 성장했다. 태생적으로 근면성실했던 그는 고교 시절에도 일하며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부전공으로 스페인와 프랑스어를 배웠고, 속기와 타자도 익혔는데 모두 그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속기 능력은 전투시에 많은 기록을 남기는데 도움을 주었다. 졸업 직전 해병대 장교 모집 광고를 보고 입대하여 ‘영원한 해병’이 되었다. 1차 대전 때는 괌에 있어 참전하지 못했는데, 전쟁이 끝날 때 대위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 계급을 17년 동안이나 달지는 상상하지는 못했을 텐데, 놀랍게도 아이젠하워 역시 거의 같은 시간 정확하게 말하면 1920년에서 1936년까지 만년 소령이었다. 두 대전 사이 미군의 진급체계는 이렇게 문제가 많았다. 어쨌든 해병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921년에는 고향의 이름을 딴 전함 텍사스를 지키는 해병대를 지휘했고, 1928년에서 1931년 동안 수많은 동료처럼 중미 근무 경력을 쌓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아이티였다. 아마도 그의 프랑스 어 실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귀국한 스미스는 조지아 Georgia 주 포트 베닝 Fort Benning 에 있는 육군 보병학교에 입학하여 고급 전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학교의 교무부장이 조지 마셜이었고. 교관이 브래들리와 스틸웰이었다. 얼마 후 입학한 인물이 바로 가장 친한 후배가 되는 풀러였다. 또다시 프랑스어 실력을 인정받아 이 ‘늙은 대위’는 프랑스 전쟁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군의 전술은 장점도 있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장교들은 합의와 협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잘 알다시피 몇 년 후 프랑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귀국을 하고서야 그는 소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버지니아에 있는 콴티코 Quantico 해병학교에서 일본을 ‘가상적’ 로 상정한 상륙작전 연구에 참가했고, 1941년 6월에는 아이슬란드 점령과 경비 임무를 맡았다. 이 기간에 대령으로 승진했고, 그 사이 전쟁이 터지자 섬을 육군에게 맡기고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스미스 장군 이야기 - 2
앞서 언급했지만 스미스는 뉴브리튼 섬에서 제5해병연대장으로써, 펠릴류에서는 부사단장으로 싸웠는데, 사단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고전을 치러야 했다. 이 때 스미스는 어떠한 전투든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이 교훈은 장진호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전투 후 스미스는 사단을 떠났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10군 참모차장으로 참가하면서 다시 사단과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전투 후 콴티코 해병학교장으로 발령이 났다가 거기서 종전을 맞는다. 전후 그는 해병교육대 사령관과 카리브 해 비상대기 부대인 제1해병특수여단장을 겸임했다.
해병대 사령관에 오른 케이츠 장군은 스미스에게 부사령관 직을 제의했고 소장으로 진급하여 그 직을 2년 동안 수행했다. 스미스가 사단장 직을 원하자, 케이츠 장군은 그를 제1해병사단장에 임명한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성이 같은 홀랜드 스미스 장군과 혼동하고는 했는데, 사실 둘은 성과 ‘가방끈이 길다’는 점 빼고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지적이고 종교적이며 끈기가 있는 그를 주위 사람들과 부하들은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틈만 나면 책을 읽는 그를 보고 부하들은 그의 가운데 이름은 Prince 가 아니고 Professor 일 것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는 사단장이 되기 전 아내와 함께 모처럼의 휴가를 보내려 했지만 갑자기 터진 전쟁으로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인생 아니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반 년을 보내게 된다.
낙동강의 소방수 : 제1해병여단의 분투 - 진동리 전투
급히 편성된 부대였지만 제1해병여단은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비가 아주 충실했다. 전차중대는 원해 셔먼으로 훈련을 받았지만, 신뢰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화력과 장갑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M26 퍼싱 전차를 받았고, 보병은 기존의 2.36인치 바추카포 대신 훨씬 강력한 3.5인치 바추카포를 지급받았다.
항공대는 경정찰기 4대 외에도 최초로 최신 시콜스키 Sikorsky H0231 헬리콥터를 장비하여 정찰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8월 2일, 크레이그 준장은 미군 사상 최초로 헬리콥터를 타고 정찰하여 전장지휘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개인장비는 2차 대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8월 3일 오후 2시경, 여단은 창원-마산 전선에 도착했다. 그들의 등 뒤에는 낙동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이었다. 8월 7일, 새벽 1시 30분, 제5연대 3대대는 로버트 태플럿 중령의 지휘 하에 진동리에서 첫 전투에 참여했다. 육군 제25사단 제27연대가 지키고 있는 진동리가 북한군의 공세로 위태로왔기 때문이다. 3대대 치열한 백병전 끝에 고지를 점령했지만 D중대의 경우 2명의 소대장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을 정도로 대대의 손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대장 머레이 중령이 북한군이 집결해 있는 고성을 공격해서 적군을 공격해서 적군을 사천까지 밀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해병대의 정찰기가 고성에서 서쪽으로 빠져나거던 북한군 제83기계화여단의 차량행렬을 발견하였고, 바로 해병 항공다의 코르세어 기들이 출격하여 118대의 각종 차량을 파괴하고 많은 적병을 쓰러뜨리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를 해병대원들은 고성의 칠면조 사냥 Kosung Turkey Shoot 라고 불렀다. 그러나 차량의 상당수가 미국제 포드 엔진을 단 소련제였다는 사실은 전쟁과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은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만만치 않았다.
낙동강의 소방수 : 제1해병여단의 분투 - 2
월 12일, 진주방면으로 진격하던 육군 제25사단 제5연대와 제555포병대대가 북한 제83기계화여단 잔존부대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제555포병대대는 야포 12문과 차량 100대를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거의 전멸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급해진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William B. Kean 소장은 크레이그 준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준장은 제5해병연대 제3대대에게 구원 명령을 내렸다. 장촌리 계곡에서의 해병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등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되어,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Walton Walker 중장은 해병대에게 밀양 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선의 장교들은 “우리는 놈들을 꺾어버렸는데 왜 후퇴를 하나” 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밀양에 도착한 해병대는 잠시 휴식을 취했는데, 워커 장군은 해병여단을 위급해진 전선의 불을 끄는 소방수로 활용하기로 했다. 여단은 바로 8월 17일 오전 8시 함안군 칠원면 오곡리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전쟁에서 보기 드문 전차전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해병대의 압승이었다. 진줌나에서 부상을 입고 괌과 유황도에서 싸웠던 그렌빌 스위트 Granville Sweet 소위가 지휘하는 M26전차 5대는 무반동총과 바추카포, 그리고 헌신적인 해병항공대 코르세어기의 지원을 받아 T34/85 전차 4대를 격파하였다. 18일 밤 2시 30분, 북한군은 제5해병연대 1대대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해병대는 다시 지긋지긋한 야간전투를 치르게 되었지만 해병항공대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방어에 성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해병항공대의 코르세어 기들은 어떤 전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상의 해병대와 손발을 맞추어 긴밀한 지원을 하였다. 같은 해병대원이라는 유대감이 낳은 놀라운 결과였다.
18일 아침이 밝자 북한군의 공격은 잦아들었고, 태플럿 중령이 이끄는 3대대가 반격에 나서 북한군이 확보하고 있던 오곡리 능선을 점령하였다. 마침 육군의 공격도 성공하여 북한군은 1,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기고 낙동강 너머로 후퇴하였다. 이틀 간의 전투에서 해병대는 66명의 전사자와 한 명의 실종자, 그리고 278명의 부상자를 대가로 치렀다.
워커 장군은 크레이그 준장에게 감사를 표했고, 마침 제8군 사령부를 찾은 조셉 콜린스 Joseph Lawton Collins 육군참모총장도 준장도 해병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21일 해병여단은 마산 부근에서 야영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는데,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후 제1해병사단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낙동강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낙동강 벌지' 전투
8월 31일 저녁, 북한군 제9사단이 창년 이남의 영산에서 미 육군 제2사단을 한 공세에 나섰다. 방어선이 돌파되었고, 제2사단 제9연대는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워커 장군이 경비행기를 타고 전선에 나가 저공비행을 하며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멈춰! 이 새끼들아! 돌아가 싸우란 말이야!!”라고 외쳤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사단장 로렌스 카이저 소장과 제9연대장 존 힐 대령의 무능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나마 부사단장 브래들리 준장의 독전으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육군의 추태에 실망한 워커 장군은 할 수 없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으로 이동 중이던 해병대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워커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차를 보고 겁을 먹는 애송이들이 아니다. 실전에 쓸모있는 프로가 필요하다!!“
제5해병연대 1,2대대가 영산으로 향했고, 종군기자 데이비드 던컨도 그들과 함께 했다. 해병대는 9월 3일 아침부터 영산 방면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작하여 4일에는 능선을 장악했다. 폭우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코르세어 기들은 과감한 근접지원 폭격을 가했다. 이를 본 육군 제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상부에 이런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우리 왼쪽에 있는 해병대는 해병항공기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공지원을 마치 포병처럼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해병과 같은 항공지원을 받든가, 아니면 보병을 해체하고 해병대로 합쳐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기력을 찾은 제9연대도 영산 돌출부의 중심인 클로버 고지를 장악함하여 북한군 9사단은 거의 괴멸되었다. 해병대는 34명의 전사자와 157명이 부상당했는데, 낙동강 전투기간에 해병대는 모두 903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이 전투는 미군에 의해 ‘낙동강 벌지’ 전투라고 불리웠는데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전차전도 벌어져 해병대는 2대의 M26전차를 잃었지만 4대의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전투 후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해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는데, 이야기를 인천상륙작전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왜 인천이었는가?
전쟁 초반부터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미 7월 21일에 제1해병사단과 오키나와에서 함께 싸웠고 북해도 삿포로 札幌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이 상륙부대로 결정되었다. 다만 장소가 문제였다. 군산과 평택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맥아더의 결단으로 인천으로 결정되었다. 군산과 평택은 셰퍼드와 스미스가 각각 지지하던 곳이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웠기에 빠른 서울 탈환이 가능했고, 항만 시설이 있어 보급에도 유리했다. 하지만 조수간만의 차이가 너무 심해 첫 부대가 상륙한 다음 반나 절이 지나야 후속부대의 상륙이 가능했을 정도였고, 서울에 가까웠기에 그 만큼 북한군의 저항도 강하리라고 예상되었다. 또한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9m 높이의 장벽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맥아더는 일본군과 싸우면서 적의 거점을 우회하여 상륙하는 전략에 익숙해져 있었고, 1894년과 1904년,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한반도 전체와 만주를 장악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인천을 밀어붙였다. 8월 23일,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와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 그리고 셰퍼드 중장이 동경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일생일대의 연기로 그들을 잠시나마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국 인천이 상륙지로 결정되었다. 군함과 상륙정을 띄울 만한 수위가 되는 날은 9월 15일, 27일 그리고 10월 11일 뿐 이었다. 물론 그 날짜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제10군단이 새로 편성되었는데, 맥아더는 제10군단을 제8군과 분리하여 자신의 직속부대로 두었다. 기본적으로 워커 장군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군단장으로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인 에드워드 M. 알몬드 Edward Mallory "Ned" Almond 소장을 임명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한국전쟁 기간 가장 조롱받는 장군으로 기록될 그를 맥아더는 군단장에 임명한 것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가 이끌던 제92사단은 흑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부대의 추태는 악명이 높았다. 콜린스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경악했지만 이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제1해병사단은 입장에서는 맥아더와의 ‘악연’이 다시 시작된 셈이었고, 더불어 알몬드와의 악연까지 새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이 루이스 존슨 장관이 해임되고 그 자리에 마셜 원수가 취임했다. 물론 모든 장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상륙 직전의 제1해병사단
작전은 당연히 상륙전의 ‘타짜’ 제1해병사단이 먼저 상륙하고, 제7사단과 한국군이 뒤를 잇기로 했다. 그러면 스미스 장군과 제1해병사단은 이 세기의 대작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전투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최고의 부대를 내놓기 싫어하는 워커의 반대 때문에 맥아더와 알몬드는 해병여단 대신 제7사단 제32연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하여 했지만 이 부대 없이 제1해병연대만 가지고 상륙전을 한다는 것은 상식 밖 이었기에, 스미스 장군은 인천에 상륙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제7사단 제17연대를 부산에 예비대로 보내고, 제3사단 제65연대를 9월 18일에 보내는 것으로 워커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제1해병여단은 부산에 모여 휴식을 취하면서 탄약과 무기를 보충하고 낡아버린 군복과 군화를 교체했다. 무엇보다 본국에서 보충병력 1,165명이 도착하여 사상자의 공백을 매웠음은 물론이고 제5해병연대는 3,611명의 정상적인 연대병력이 되었다. 9월 13일, 제1해병여단은 정식으로 해체되고 크레그 여단장은 부사단장으로 보직을 바꾸었다. 제7해병연대 대신 한국군 제1해병연대 2,786명이 제1해병사단 예하에 들어왔다. 한국 해병대는 미국 해병대의 수제자로서 많은 것을 전수받게 되고, 스미스 사단장은 그들을 자신의 네 번째 연대로 여길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해병연대원들은 미국 전역은 물론, 일부는 유럽에서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집결했다. 아마 한 사단이 전투를 위해 모이는데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병력이 모이는 경우는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해병대는 전쟁 발발 4주 만에 여단급 전투부대를 만들고, 8주 만에 특급 전투사단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중대장급 이상 이상의 지휘관들은 모두 전투경험이 있었고, 현역 초급장교들과 초급 부사관들, 사병들은 거의 전투 경험이 없었다. 반면에 예비역들은 장교의 99%, 사병의 77.5%가 참전용사였다. 그래서 몇 주 전에는 민간인에 불과했고 전술 단위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음에서도 현역들을 이끌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해병대원들은 배 위에서 훈련하며 무기 시험 발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제1해병연대와 제11포병연대 그리고 사단의 직할부대는 9월 3일까지 코베에 도착했다. 이동일까지 고려하면 15일까지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상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서울까지 전투환경이 너무 변화무쌍했다. 인천 시가지를 지나면 30km 이상을 돌파해야 했는데, 평탄하기는 했지만 언덕들이 많아 인민군에게 좋은 방어거점을 제공했다. 또 영등포는 산업지대였고, 그 다음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넓은 백사장을 가진 한강을 건너야 했다. 물론 그 다음은 현대도시 서울에서의 시가전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또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에서의 산악전도 각오해야 했다.
이에 대비하여 야전훈련을 하기에는 단위부대 적재(같은 함정에 병력과 장비, 보급품을 완전히 한 함정에 싣는 것) 만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 작업도 태풍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이렇게 작전 준비에 정신이 없는 스미스 장군에게 알몬드는 쓸데 없는 작전을 세 개나 내밀어 짜증내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244명으로 구성된 육군 특공대와 해병대를 별도로 인천 북쪽에 상륙시켜 김포공항을 장악하게 하고 상륙부대가 그들을 구조한다는 작전이었고, 이것이 스미스 장군에게 거부당하자 군산에 비슷한 양동 작전을 시도했지만 역시 소수 부대가 고립될 우려가 커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은 육군 1개 대대를 월미도에 상륙시켰다가 주력 부대가 상륙하는 동안 트럭과 전차에 탑승시켜 서울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고지들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역시 재보급을 항공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과 현실성 부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 인천 : 월미도 점령
사단의 주력은 9월 10일과 11일, 코베를 떠났다. 9월 10일부터 사전 공습과 포격, 그리고 소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태풍 케지아 Kezia 도 선단을 피해 진로를 북쪽으로 틀어주었다.
9월 14일 자정, 해군 특공대를 이끄는 유진 클라크가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여 등대의 스위치를 켰다. 미국과 영국 순양함 4척과 구축함 7척이 좁은 수로를 따라 새벽 5시 45분부터 월미도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6시에는 호위항모에서 발진한 해병항공대의 코르세어 기들과 정규 항모에서 발진한 해군 항공대가 상륙지점인 월미도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폭격은 6시 15분에 끝났고, 상륙로켓함 3척이 접근하여 로켓탄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태평양 전쟁을 겪은 고참들은 아무리 함포사격과 폭격을 가해도 저의 벙커를 파괴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천은 달랐다.
6시, 선봉을 맡은 제5해병연대 3대대와 9대의 M26 퍼싱 전차는 상륙용 주정에 옮겨탔다. 수중폭파반이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 제거에 실패해 우회햇지만 6시 33분과 35분 사이에 월미도의 ‘그린비치’에 상륙하는데 성공한 해병대는 알루미늄제 사다리를 넘어 첫 목표인 라디오 방송국 고지를 6시 55분에 장하고 성조기를 걸었다. 고지는 포격과 폭격으로 초토화 되어 있었고 살아남아있지만 얼이 빠져있는 북한군들은 순순히 항복했다.
8시 30분 까지 월미도는 완전히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고, 북한군 시신 118구를 확인했다. 포로는 136명 이었다. 해병대원들은 월미도가 요새화 도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들다 만 참호와 요새 안에서 북한군 약 150명에서 200명이 생매장되었다고 추측된다. 극소수의 병사들만이 헤엄을 쳐서 인천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만약 27일이나 10월11일에 상륙했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해병대는 10시에 전차를 앞장세우고 소월미도로 진격해 1시간 15분 후 점령을 완료했다.
태평양의 섬들에 비하면 연습 수준인 이 ‘전투’에서 해병대의 피해는 경상자 17명에 불과했다. 인천항을 통제할 수 있는 월미도를 쉽게 장악한 맥아더는 기뻐하면서 두 가지 멘트를 날렸다.
“해군과 해병대가 오늘 아침보다 더 빛난 적은 없었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그보다는 많다!”
오후 1시 조수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갯벌을 통해 공격하려는 북한군은 없었고, 다만 인천 시내를 오가는 시민 몇 명만 눈에 띄일 뿐이었다. 같이 상륙한 포병 정찰대는 포병대대가 자리할 위치를 물색했다. 오후 만조에 두 번째 상륙이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시간은 5시 30분으로 결정되었다.
오! 인천. 완벽한 작전 성공
그 사이 해병들은 후갑판에서 열린 신구교의 예배와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분간 먹을 수 없는 그리고 몇 명은 다시 먹을 수 없는 뜨거운 식사를 즐겼다. 오후 4시 30분, 제5해병연대 1,2대대는 상륙용 주정에 몸을 실었다. 그들의 주정들은 인천항 북쪽의 ‘레드비치’로 향했다. 그 동안 구축함들이 함포사격을 퍼붓고 상륙로켓함 3척이 다시 접근하여 로켓탄 6,500여발을 퍼부었다.
15분 후, 제1해병연대 장병들이 남쪽 송도 쪽의 ‘블루비치’ 로 향했다. 해병들은 잿빛 하늘 아래에 바닷물에 젖었지만 상륙 후, 자신들의 목표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이 해병대의 마지막 적전 상륙이라는 사실은 알 리 없었다.
레드비치에 상륙한 제5해병연대 1대대는 사다리를 이용해 방파제를 넘었는데, 이 때 선두에 선 인물이 발도메르 로페즈 Baldomero Lopeze 소위 였다. 아래의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의 상징이 된 아주 유명한 사진인데 앞장선 인물이 바로 로페즈 소위이다.
여기서
해병대는 월미도 보다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대표적인 희생자가 1대대 A중대의 로페즈 중위(사후 승진)였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유이 唯二
이자 한국전쟁에서는 해병대의 첫 명예훈장 수여자가 되었는데, 여기서 훈장과 함께 작성된 공보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로페즈 중위는 해안에 상륙하여 즉시 적 방어진지를 분쇄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적의 사격에 몸을 노출시킨 채, 그는 벙커를 따라 전진하다가 옆에 잇는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 하였다. 이 벙커로부터 가해온 사격 때문에 그가 담당한 상륙구역의 전진은 돈좌된 상태였다. 적의 자동화기 사격에 몸을 노출시킨 채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피격당한 로페즈 중위는 뒤로 쓰러지며 치명적인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곧 몸의 방향을 돌린 그는 수류탄을 다시 집어 적에게 던지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부상의 고통과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수류탄을 던질 정도로 강하게 쥘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소대원의 생명을 위태롭기 하기보다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부상당한 팔을 크게 휘둘러 수류탄을 배 밑에 깔고 수류탄 폭발의 충격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던 것이다.
로페즈 중위 소대의 화염방사기 운용팀 2명도 그 벙커를 파괴하려다 총탄에 맞았다. 우측에서는 아직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2소대가 3소대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이 벙커 안에 있는 적을 소탕하는 동안 1소대는 공동묘지 고지를 공격해 뒤에 오는 상륙부대가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레드나 블루 비치 모두 수륙양용 장갑차들이 승무원들이 경험이 전무하여 해병대가 장악한
진지에 포격을 가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혼란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든 상륙 지점에서 자정이 될 때까지 병력은 물론 많은 장비와 물자까지
하역하여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크레이그 준장은 월미도에 도착해서 사령부를 차렸다.
9월 15일, 하루
동안의 전투로 전사자 21명, 실종자 1명, 부상자 174명이라는 인명 손실이 났고, 비전투 손실이 14명 나왔지만, 사실상 무혈점령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당초의 우려와는 아주 다른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성공적인 상륙에 만족한 맥아더가 5일 안에 서울을
탈환하겠다고 큰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경인지역과 북한군의 상황
15일 밤 동안 수백톤의 보급물자와 장비 특히 105mm 곡사포가 양륙되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인천을 돌파해야 했기에 16일 아침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스미스 사단장은 대략 경인국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제5해병연대, 남쪽에는 제1해병연대를 배치하고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김포공항과 일본군 군수공장과 병기고가 있었고 대전 이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군수기지로 사용하면서 애스콤 시티라고 불렀던 부평이었다.
여기서 잠시 경인지방의 군사 시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이 사용하던 남영동 南營洞 과 용산 일대를 차지하고 군사기지화 했는데, 남영이라는 이름 자체가 남쪽에 있는 군부대라는 뜻이다. 경인선 중간에 위치한 부평에 소총 등을 생산하는 군수공장과 병기고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부평과 용산 가운데 있는 영등포에 철물을 다루는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 구조는 최근까지 이어져서 부평-영등포 일대는 거대한 산업단지가 되었고, 많은 공장들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영등포 일대에는 여전히 수많은 철공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육군본부의 이전에도 불구하고 용산에는 국방부가 건재하고, 아직까지는 일본군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미군기지도 건재하다. 기지 이전이 완료되면, 서울은 3세기에 걸쳐 세 나라 군대가 주둔했다는 ‘흑역사’를 끝내게 되는 셈이다. 어쨌든 해병대는 기본적으로 일본이 만들어 놓은 이 거점들을 함락시키면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인천과 서울에 있는 북한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고, 지휘관은 누구였으며 방어전략은 어떠했을까? 조금 허탈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는 답밖에는 할 수가 없다. 주력부대는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 가 있었기에, 부대도 정규 사단은 없었고, 대부분 급조한 부대이거나 후방 치안을 담당하는 2선 급 부대들이었다. 인천을 지키던 부대는 제226독립육전연대와 제918해안포병연대 예하 2개 포병중대 정도로 3천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제25여단, 제9사단 제37연대, 제18사단, 제31사단 등 이었다. 하지만 총 병력은 확실하지 않지만 2만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급조된 부대 중 대표적인 존재가 김포공항을 지키지 위해 인천에서 밀려난 부대와 공군 지상병력을 모아 편성한 ‘제1항공사단’ 이었다.
많아야 수백명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었고 낙동강 전선에 ‘올인’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인천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울 주둔 북한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서울에 보낼 원군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를 떠나 기본적으로 미군을 막을 수 있는 전략이 없었고, 통일된 지휘부도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미국 최고의 전투부대 해병대였다.
제5해병연대의 승리와 김포공항 점령
9월 16일 새벽 6시, 북쪽을 맡은 제5해병연대는 김포공항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2대대가 선봉이었고, 1대대와 3대대가 뒤를 따랐다. 이들은 인천 시내에서 치열하지는 않더라도 소탕전투 전투는 각오했지만, 인천 시내를 지나는 동안 거의 전투는 없었고 인적도 끊겨 괴기스러운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3명의 북한군 수병을 포로로 잡았지만 그들은 미군의 상륙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놀랍지만 사실이었다. 김일성은 여전히 낙동강 돌파에 미련을 가지고 연합군의 인천상륙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는 바로 나타났다.
16일 밤에 5중대를 지휘하는 스미스 대위는 부평 외곽에서 북한군 트럭 한 대와 장교1명과 병사5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들은 후속부대의 선두였고, 미군의 진출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제42전차연대 소속 T34/85 전차 6대와 250여 명의 병사들은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미군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해병대는 일단 통과시키고는 완벽하게 포위하여 전차포와 무반동총, 바추카포로 맹공을 퍼부어 불과 5분 만에 6대를 모두 격파하고, 공황상태가 된 250명을 거의 전원 사살하였다. 해병대의 피해는 경상자 1명 뿐 이었다. 이 ‘전투’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1129일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의 전투 증 가장 완벽한 승리이기도 했다.
그 사이 제5해병연대의 다른 부대는 도중에 있는 100m 남짓 되는 고지들을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17일 오전 7시, 김포공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급조된 북한군 제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방어에 최선을 다하고 18일 새벽 3시에는 야습까지 시도해 근접전까지 벌였지만 화력의 부족과 해병대의 분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제1항공사단장은 40세의 왕연 준장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 - 서울탈환전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북한군 고위 지휘관이지만,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1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은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북한군은 1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0명의 포로를 남기고후퇴했다. 다음 날, 제10군단은 김포공항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했고, 코르세어 기를 주력으로 하는 3개 항공대대가 일본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정도까지 진격하게 되면 함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포병과 항공대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김포공항의 가치는 아주 중요했다. 제5해병연대는 바로 한강 도하 준비에 착수했다.
한 편 9월 16일 정오에 제1해병사단 지휘부는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했는데, 코베에 도착하여 정비를 마친 제7해병연대가 21일에는 인천에 도착 한다는 희소식을 전달받았다. 그 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던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차가 지날 부평과 부천을 확보하고 영등포로 진격할 제1해병연대는 제5해병연대 보다는 더 치열한 전투를 각오해야 했다.
영등포로 진입한 제1해병연대
17일 오전, 제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민가를 은폐물로 삼아 포탑만 내놓고 있는 T34/85 전차 한 대를 격파하면서 일차 목표인 영등포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부천 소사에서 낮은 언덕에 매복한 북한군 제18사단 제22연대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제1해병연대 2대대 19세의 월터 모네건 Walter Monegan 일병의 바추카포 팀이 맹활약 하면서 전차대와 함께 T34/85 전차 4대를 격파하여 진격로를 열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 했다. M26전차 2대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되었고,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해야 했기에 진격은 지체되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19일에 연대는 영등포에 진입했다. 당시 영등포는 한강 남쪽에서는 서울의 유일한 구로서 당당한 서울의 일부였기에 많은 북한군이 결의를 가지고 방어하고 있었다. 서울에 ‘입성’ 한 해병대는 그만한 ‘통행료’를 내야 했지만 일부 병사들은 한 가지 ‘전리품’을 노리고 있기도 했다. 지금은 공원과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지만 일제시대에 건설된 맥주공장이 영등포 역 바로 옆에 있었기에 이를 빼앗아 목을 좀 축이고자 했던 것이다. 카스와 하이트로 상징되는 동양맥주와 조선맥주는 일제시대의 공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20일 새벽 4시 30분, T34/85 전차 5대를 앞장세운 대대병력의 북한군이 자살폭탄트럭까지 준비하여 해병대의 진지를 기습하였다. 해병대는 섬이건 육지건 시골이건 도시건 야간전투를 치를 운명이었다. 트럭이 폭발하고 양 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모네건 일병은 포복으로 적 전차에 접근하여 물탱크 뒤에서 정확한 바추카포 사격으로 2대를 격파하고 3번째 전차를 조준하다가 다른 전차에서 쏜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에게 명예훈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6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해병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면서 북한군을 물리쳤다. 해병대는 4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1대를 노획했으며, 300여 명을 쓰러뜨렸다. 시신과 부셔진 전차가 도로를 메웠기에 이를 치우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해병대는 그 날 오전 영등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80과 85 두 고지를 격전 끝에 장악하고 눈앞에 한강과 서울 시내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두 고지를 발판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풀러 대령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군단장 알몬드였다.
제1해병사단의 한강 도하
그가 전방까지 온 목적은 ‘은성훈장 수여’ 였다. 하지만 풀러는 웅크린 자세를 풀지 않았기에, 알몬드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체스티, 왜 그런 자세로 앉아 있는 건가?”
풀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선 자세로 있으면 적의 을 받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적의 사정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네.”
“장군님. 그러다가 제 동생을 잃었습니다.” 라고 대답한 풀러는 알몬드를 잡아 당겨서 앉게 했다. 알몬드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자네의 용맹을 기리기 위해 은성훈장을 수여하고자 하네. 일어나서 나에게 경례를 하고, 자네에게 훈장 달아주는 모습을 촬영하세나.”
풀러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진병이 촬영을 하자마자 알몬드의 손에서 훈장을 나꿔채고는 다시 웅크려 앉았다. 장군도 웅크려 앉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훈장 포상서의 내용은 안 읽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선 시급한 문제부터 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편 18일과 19일에 인천에 상륙한 제7사단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의주 임무는 수원 쪽으로 남하하여 제1해병사단의 남쪽 측면을 보호함과 동시에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미 제8군과 한국군과 합류하는 것이었지만 제32연대는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육군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시키려는 ‘정치적 배려’ 때문일 것이다.
한 편, 낙동강 전선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김일성 역시 서울방어를 위해 병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철원지역에서 편성 중이던 제25여단, 제70,78연대, 제9사단 제87연대 등 2만 여명을 투입했는데, 상당수는 정예부대였다.
이렇게 된 이상, 5일 이내의 서울 탈환은 물 건너 간 일이 되었지만, 맥아더와 알몬드는 9월 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언론플레이와 군사작전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해병대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영등포 전투와 한강 도하
19일 저녁, 125m 높이의 행주산성 건너편에 포진한 제1해병연대는 한국군 해병제1연대 2대대와 함께 한강 도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8시에 14명의 요원이 수영으로 한강을 건너 적 진지를 정찰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은 산 중턱을 정상으로 착각하고 북한군이 없다는 잘못된 보고를 하고 말았다. 오후 9시에 상륙용 장갑차 9대를 타고 도하를 시도했지만 북한군의 포화로 2대의 장갑차를 잃고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사상자는 경미했다.
대양을 넘다들던 해병대가 당시에는 폭이 360m 에 불과한 한강 도하에 실패한 사실을 용납하지 못한 머레이 연대장은 20일 새병 6시 반, 짧은 준비 포격을 가하고 부대를 도하시켰다. 사격은 맹렬했지만 3해병대대는 코르세어 기의 지원을 받으며 3시간 후에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잇달아 북쪽의 51고지와 95고지도 점령했다. 뒤이어 2대개가 상륙해 능곡을 장악했다. 한국해병 2대대도 상륙하여 후방을 보호했고, 제5연대 3대대도 21일에 상륙했다. 행주산성에 가면 해병대의 상륙을 기념하는 비와 상륙용 장갑차가 입구에 버티고 있다.
제5해병연대의 도하와 거의 시간, 당시는 갈천이라고 부른 안양천 변에 포진한 제1해병연대는 20일 새벽, 북한군의 역습을 격퇴하고 21일 오전 6시 30분에 영등포 시가지 공격을 시작했다.
제1해병연대의 영등포 점령
1.2 대대는 좌우로 갈라져 안양천과 논바닥을 횡단하여 논둑에 방어선을 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지만 화력과 전투력에서 우위인 해병대는 계속 적군을 밀어부쳤다. 전투 중 1대대 A중대는 북한군을 우회하여 1.6km 정도 침투하여 도심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 한강 남쪽 인도교 남단까지 진출했다. 깜짝 놀란 북한군은 당황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A중대는 제방을 따라 길게 늘어선 방어진지를 차지했는데 그 곳에서는 한강의 긴 모래톱과 북서쪽에서 북한군을 밀어붙이는 해병대의 모스이 눈에 들어왔다. 석탄더미처럼 보이는 것이 영등포 방어를 위한 군수품 창고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폭파했다. 중대의 행운은 계속되었다. 놀랍게도 인근의 한 건물에 가득 찬 미국제 대포, 탄약, 장비, 의약품을 발견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중대원들은 개인 참호를 깊숙이 파고 동료들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녁에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T34/85전차 5대 였다. 하지만 역시 놀랍게도 보병의 지원 없는 전차 단독 공격이었고, 중대는 3.5인치 바추카포로 3대를 격파하자 2대는 도주했다. 풀러 중령은 예비대인 3대대까지 투입해 더 몰아부쳤다. 보급품을 잃은 데다가 포위를 우려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포로가 된 북한군 장교 하나가 동료들에게 해병들이 너무 강하니 공격을 멈추라고 권유하기까지 하자 22일 날이 밝기 전에 영등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제1해병연대는 그 날 영등포를 완전히 장악하고 노량진 부근의 고지를 점령하여 한강 인도교를 감제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T34/85전차 4대까지 노획했다.
용산에 있는 터널 모양의 철도 정비소에 있는 서너대의 T34/85전차를 발견한 M26전차대는 폴 커티스 Paul Cuttis 중위의 지휘하에 포격을 시작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 드문 전차전에서 해병 전차대는3대의 T34/85와 6문의 대전차포를 파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제1해병연대가 한강 도하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동안, 제7사단 제32연대와 한국육군 제17연대가 도착하였다.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에서 마포쪽으로, 제32연대와 제17연대는 흑석동에서 용산 쪽으로 상륙하기로 결정되었다. 사단의 제11포병연대 역시 영등포 북서쪽에 자리를 잡고 화력지원을 맡았다. 그 사이 제5해병연대는 한국해병대와 함께 서쪽에서 서울시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신촌에서의 혈전
수색역(당시에는 빨간 벽돌 건물로 지금의 현대식 역사보다 500m 정도 떨어져 있었음)에 사령부를 둔 제5해병연대는 안산에서 연희동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노고산, 와우산 등을 확보해야 했다. 21일 오후 4시 15분 진격을 시작했다. 좌익이자 북쪽을 맡은 3대대는 응암동과 홍은동 사이에 걸쳐있는 216m의 백련산(스위스 그랜드 호텔 뒷산)을,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전선 중앙의 연희고지라 불리우는 104고지(서연 중학교 뒷산)를. 제5연대 1대대는 한강과 경의선 철도 사이의 68m 높이의 성산(정확하게 말하면 성산초등학교 뒷산)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2대대는 예비대로 대기하였다.
북한군 역시 해병들이 노리는 이 고지와 능선들이 서울 방어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 주력인 제25여단과 제78연대를 투입해 5,500m에 이르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정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두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들의 상당수는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으로 전투경험이 많았고, 포병과 중기관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어 화력도 충실했다.
백련산은 저항이 거의 없어 쉽게
차지했고 성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연희고지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 해병대는 모래내를 지나 개활지를 통과해야 했고 치열한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상당한 사상자를 내고 오후6시 30분에야 점령에 성공했다. 22일 새벽 3시경, 약 600명으로 추산되는 북한군이 120mm 박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야습을 감행했지만 3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야습과 병행하여 적들은 바로 전방에 구축 중이던 그들의 주진지에
대한 마지막 보강작업과 병력배치를 강행하고 있었다. 한국 해병의 좌우측에 있었던 미 해병대대 전방에서는 밤사이 적의 활동이 대단치 않아서
지휘부에서는 대현동이나 아현동 쯤 가야 적의 주 방어선이 나타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사이 북한군이 쏜 포탄이 수색역에 위치한 연대
본부에 떨어져 부연대장 헤이즈 중령이 다리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수도 서울 탈환을 위하여 넘지 않으면 않되는 사선은
바로 눈 앞에 있었고, 특히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바로 눈 앞에 있던 56고지(연세대 운동장 서쪽 언덕)였다.
22일 오전 7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3대대의 목표는 296 고지 즉 안산이었고, 우측방 제 1대대의 목표는 105고지인 와우산으로 105고지로 지금의 홍익대 뒷산으로 1970년, 와우아파트 참사가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하는
한국 해병 제1대대의 목표는 의령터널고지(이화여대 정문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의 철도터널)라 불러도 될 같은 높이지만 다른 105고지였다.
대대가 백련산에서 296고지 즉 안산으로 진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날 공격에서 좌익의 제 3대대가 안산 296고지를 신속히 확보할 수 있다면 중앙과 우익의 진격은 좀더 용이하리라는 것이 머레이 중령의 생각이었다. 해병전투기들이 안산 일대를 강타하는 동안 공격의 선봉에 선 H중대는 대단치 않은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전9시 45분에 안산 주봉을 점령하고, 정상을 확보했다고 보고했지만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이 연대의 공격상황은 중령의 기대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남쪽으로 뻗은 주봉과 거의 같은 높이의 세 개의 능선은 여전히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들에 의한 역습으로 3대대도 이날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더구나 어딘가 부실해 보이는 봉수대가 ‘복원’ 되어 있는 안산에 올라가면 알겠지만 정상은 바위투성이라 진지 구축이 불가능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일부러 북한군이 정상을 비워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안산 정상을 굽어보는 338m 높이의 인왕산에서 쏟아지는 포화는 진격을 거의 정지시켰다. 다행히 전날 영등포 전투가 일단락되었기에 해병 항공대는 제5해병연대 지원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목표인 북쪽 105고지를 공격하기에 앞서 대대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연희능선 즉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이 능선 너머에 있는 88고지(세브란스병원의 북쪽, 연세대 노천극장의 동쪽 언덕)를 먼저 점령해야 했다. 대대의 공격개시선인 104고지 능선과 그 전방의 연희능선은 불과 1km의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놓여 있으며 두 능선 사이의 저지대에 가로놓인 300-500m 폭의 논들(현재의 연희로 주변)이 실질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 이었다. 이 곳과 현재 서대문 우체국 밑의 터널이 전쟁터가 되었다.
대대원들이 개활지에 들어서자 북한군의 사격은 시작되었다. 전방 능선에서 적의 중화기 및 자동화기들이 불을 뿜었고 야포와 박격포탄도 날아왔다. 일선 중대의 공격이 저지되자 미군 포병 및 항공기가 지원에 나섰다. 우군의 지원사격을 받은 뒤에도 상황이 타개되지 않자 배속전환된 미 해병 전차소대와 함께 철로를 따라 전방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56고지와 연희터널고지로부터 집중되는 적의 자동화기와 대전차포 사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전차도 더 전진하지 못했다. 전방에서 날아오는 적의 사격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안산 쪽에서 날아오는 적의 측면사격도 치명적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한국 해병 1대대는 104고지로 다시 물러나 부대를 수습하였다. 전사자가 11명, 부상자가 45명이 나왔다.
와우산이 목표인 제5해병연대 1대대는 이날 용산선 철도를 따라 전차와 B중대를 앞세워 한국 해병대대와 협조된 공격을 펼치려 했으나 전차소대가 한국 해병대로 배속이 전환되자 계획을 바꾸었다. 이날 10:30 쯤에야 진짜 공격에 나선 A중대는 와우산 아래까지 접근했으나 전사한 1소대장과 중상을 입은 3소대장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격이 저지되었다. 오후에 우측방으로 우회기동한 C중대 역시 한동안 고전했으나 항공 및 포병 지원이 계속되는 동안 부대를 수습하여 뒤따라 가세한 A중대와 함께 17:35 와우산 정상을 점령하였다. 전사 12명, 부상 31명 외에 극심했던 적의 포격으로 후방지역에서 입은 손실이 전사 6명, 부상33명이나 나왔다.
이날 3대대의 목표인 안산이 확보되면 쉽게 풀리리라 믿었던 전황이 두 고지를 점령했음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제5해병연대에서는 그 원인이 어쨌든 유일하게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한국 해병들의 경험부족과 미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서울방어의 주저항선으로 삼은 연희고지 일대의 화망은 50정 이상의 중기관총을 주축으로 그 사이에 경경기관총과 자동소총을 배치하고 사각에는 박격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1km 당 자동화기의 밀도는 중기관총이 13-14정이고 자동화기 이상이 52-56정으로 평균 20m 당 1정의 기관총이 배치된 셈이었다. 이런 화망이라면 아무리 정예부대라도 돌파가 어려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3일에도 두 나라 해병대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연대장은 곧 실시될 미 제 1해병연대의 한강도하를 엄호하려면 공격의 속도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에는 수색에 대기하고 있던 2대대까지 투입되었다. 한국 해병1대대는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시켜 공격하였고, 하루 종일 격전을 치르면서 한국 1해병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한국 해병대의 전선을 인수받은 2대대 역시 여러 명의 여러 명의 소대장을 잃는 등 사상자가 속출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편 전선 양측방의 제 5해병연대 예하 제1및 제 3대대는 전날 장악한 각자의 목표를 계속 확보하면서 중앙 부대의 전진을 사격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3일 새벽 적의 가벼운 역습을 물리친 양 대대는 만만치 않은 적의 저항을 받았다. 이들이 사격의 지원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23일도 해병대의 공격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지나갔다.
24일, 2대대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분명히 해는 떴지만 주위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 연기로 덮여 있었다. 이즈음 북한군은 미군기의 공중관측으로부터 진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량의 발연통을 피웠고 더욱이 이 날은 안개까지 짙게 깔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두분대가 수류탄 투척 거리에 있는 적의 교통호를 발견하기까지 적들 역시 해병들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적들도 미 해병들도 쓰러져 갔다.
D중대장 스미스 중위는 중대본부 요원을 포함,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방으로 보냈다. 60mm 박격포소대는 반원들도 포탄이 소진되자 소총수로 나섰다. 포병과 81mm 박격포가 지원에 나섰다. 해병대의 코르세어 비행기가 폭탄과 로켓탄 그리고 네이팜탄 등으로 적진을 사정없이 공격했지만 너무 저공이었기에 두 번째 공격에서는 10대 중 5대가 적의 대공포탄에 맞았을 정도였다.
오전 내내 D중대가 혈전을 벌이는 동안 전날의 손실로 가용병력이 90명 정도에 불과했던 F중대는 또 다른 미 해병전투기 편대의 지원을 받으며 연희터널고지(서대문 우체국 인근) 동쪽의 한 고지에 올라섰다. 한낮이 지날 무렵 D중대장은 돌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스미스 중위는 대대장과 협의하여 돌격요령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돌격부대 33명은 돌격개시선 100m 정면에 산개하여 돌격준비를 한다.
2. 돌격지원을 위해 스미스 중위의 무전유도로 코르세어 전투기가 기총소사와 폭격, 네이팜탄 투하를 감행한다.
3. 공중공격의 효과가 있으면 콜세어 전투기는 위장공격을 하며 보병에게 돌격신호를 하고 기총소사과 폭격을 멈추고 위협비행을 계속한다.
4. 돌격부대는 코르세어기의 신호와 동시에 돌격하여 130m 전방의 적 진지로 돌입한다.
5. 기관총부대 11명은 돌격반을 따라간다.
맥노튼 중위가 관측을 하고 스미스 중위가 무전으로 콜세어에 연락하여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1번기의 폭격은 130m나 빗나갔다. 2번기는 매우 정확했으나 3번기의 것은 중대 전방 50m에 떨어지는 오폭이었다. 해병들은 콜세어의 급강하 때마다 코르세어와 자기자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환성을 올렸는데 3번기의 폭격에는 환성이 욕설로 바뀌었다. 4번기가 신호탄을 발사하면서 돌입해 왔다. 총격과 폭격이 없는 위장공격이었으나 대부분의 북한군은 폭격을 할 줄 알고 참호 속으로 숨었고 동시에 스미스 중대장을 선두로 32명의 대원들이 돌격을 개시했다. A자형의 돌격대형은 얼마 안 되어 우측의 사격을 받고 스미스 중대장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맥노튼 중위가 지휘를 계속했다. 여러 병사들이 부상당하면서도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26명의 돌격대원들이 정상의 적 진지에 돌입하였다. 일부 적병들이 남아 있었으나 몇 명은 죽은 척 하고 있었고 수백명의 적병들은 동쪽 산비탈로 도망쳤다.
미 해병대 전사에서는 이 돌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격전의 승패가 결정되는 '때'는 정신적인 균형이 깨지는 바로 그 '때'이다. 불타는 전의를 가진 용자에게 승리가 있고 우유부단한 쪽은 패배한다. 주저없이 적과 죽음에 직면하게 될 능선으로 뛰어 오르는 소수의 젊은이(10% 이내)들에 의하여 승부의 저울은 기울어지게 된다."
정상을 탈취한 맥노튼 중위는 인원점검을 위하여 계급별로 손을 들게 하였다. 생존자는 모두 30명이었다. 얼마 후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D중대원은 56명으로 늘어났으나 이중 26명이 부상자였다. 24일 아침 D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의 총인원은 206명이었다. 반나절 동안의 전투로 입은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으로 후송된 자 116명, 부상 당하고도 전열에 남은 자가 26명으로 총 피해가 176명(85%)에 달하였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훗날 미 해병들에 의해서 "스미스 능선"이라 명명된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이 능선이 확보되어 비로소 서울 서쪽을 방어하기 위한 북한군의 주진지가 이 능선에 구축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지난 이틀간 치른 한국 해병들의 분투가 새삼스레 인식되었다. 북한군 포로들도 모두 연희능선의 상실로 전의를 잃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로써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로 인정받았고, 스미스 사단장은 이렇게 네 번째 연대를 얻었던 것이다.
스미스 vs 알몬드
(왼쪽)장진호 전투의 주역 제1해병사단장
당시 제1해병사단이 속해있던 10군단의 군단장 Edward Almond
-흥남 철수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0만명의 피난민을 태워 거제도 까지 피난할수 있도록 한 인물이지만 전쟁중 이해할수 없는 작전 명령과 갖은 추태로 해병들에게는 악명이 높은 인물이며, 맥아더에 아첨하여 눈과 귀를 막은 인물로 알려졌다.
2대대장 해롤드 로이스 Harold Roise 중령의 추정에 의하면 이 능선 일대에 널린 적의 시체는 1500여구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4일 오후, 중령은 예비대인 E중대를 56고지 동쪽으로 이동시켰으나 최종 목표(북쪽 105고지)에 대한 공격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최종목표 공격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72고지(창천동 4번지, 경의선 신촌역과 CGV극장 사이의 언덕)에는 아직도 적이 포진하고 있어서 이 날 중에 이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실행은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북쪽 105고지를 비롯하여 안산 주위의 주요 능선들의 점령은 25일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한국 해병 1대대와 미 제5해병연대 2대대에 의해 연희고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서울 서쪽에서 수행된 돌파작전의 일부였다고 하더라도 적 방어선의 붕괴를 유도한 결정적 전투였다. 그러므로 주전장으로서의 연희고지가 지니는 의의 때문에 신촌 일대의 이 전투를 "연희고지 전투"라 명명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투의 시발점이었던 104고지는 버스 정류장 이름이 되었으며, 전적비가 서있다. 그럼에도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었고, 신촌에서의 혈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울 중심가는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해병대는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을 치러야 했다.
한편 인천에 뒤늦게 도착한 제7해병연대는 한국 해병 제1연대 5대대를 배속받아 23일부터 잔적을 소탕하면서 '워밍업'을 마치고 김포를 지나 한강을 건너 제5해병연대의 후방을 보호하면서 북동쪽으로 이동해 경의가도를 차단하고 북한군이 더 나아가 북동쪽으로 도주하지 못하게 막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참고로 한국 해병 2대대는 미 제1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3대대는 제1해병사단의 예비대가 되었다.
한 편 스미스 장군은 적군 외에도 맥아더와 알몬드라는 두 상관과 ‘내전’ 을 치러야만 했다. 원래 장군은 신중한 작전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되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제5해병연대의 진격이 더 어려워지면 제7연대를 적의 저항이 거의 없는 서울 북쪽에서 남하시키는 작전을 원했다.
하지만 알몬드는 달랐다. 그는 신속하게 진격하여 서울을 탈환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전쟁이 난지 정확하게 석달째 되는 9월 25일에 서울 탈환을 기자들에게 뉴스거리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맥아더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제7사단의 투입도 25일까지 서울을 탈환하고자 하는 맥아더와 알몬드의 조급증 때문이었다. 사실 알몬드는 23일 참모회의에서 스미스의 반대에 부딪히자 육군 소속이었다면 스미스를 파면했겠지만 홀랜드 스미스와 랄프 스미스의 전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작전을 밀어붙이는 선에서 ‘참고’ 넘어갔다. 그렇게 했다면 둘 다 파멸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석 달 후 장진호에서 그는 더 철저하게 파멸했을 것이다. 어쨌든 6년 전에는 육군의 부진에 해병대 장군이 열 받았다면 이번에는 반대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운명적이라고 할 만한 스미스와 알몬드의 충돌이 끝을 내기에는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전투와 사건이 있었고, 바로 운명의 ‘25일’에 또 한 번 터지고 말았다.
알몬드의 '서울 탈환'
9월 24일 오전8시, 공병들이 광범위하게 매설된 제1해병연대 2대대는 합정동 절두산 일대로 상륙을 시작했다. 연대 본부와 1대대가 뒤를 이었고, 저녁에는 3대대도 한강을 도하했다. 이렇게 사단의 전 보병부대가 한강을 건넌 것이다. 제1해병연대는 와우산 남쪽에서 용산 쪽으로 동진하다가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서울역과 시청 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1해병연대의 최종 목표는 안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인 133고지였다.
그 사이 북한군은 서울시 전역에 걸쳐 종심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튼튼한 건물을 요새화 하고, 옥상에는 저격수들을 배치했다. 도로에는 200, 300m 마다 쌀가마니와 건물 파편을 쌓아 수백개의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전차와 자주포도 곳곳에 되었다. 지뢰부설은 물론 대공포화도 충실하게 갖추었다. 이 때문에 해병들은 서울 시가전을 ‘바리케이드 전투’ 라고 불렀다.
25일 날이 밝자 제32연대와 한국군 제17연대도 흑석동과 신사리 (지금의 신사동)일대에서 용산 쪽으로 상륙을 시작했다. 아침 포병의 준비 포격이 실시되었고 나흘 간의 혈전을 치른 제5해병연대는 아직 남은 고지 점령과 적병 소탕을 병행하면서 시내 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제5해병연대의 최종 목표는 미아리 고개 북쪽 177고지로 그 곳은 의정부로 가는 국도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제7해병연대는 남진하여 12시에 2대대가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를 점령했고, 1대대는 그들과 제5연대 사이의 지역을 정찰했다. 제1해병연대는 서울역 쪽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격전을 치렀다. 의무병들은 앞으로 한국에 온 후 가장 처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25일 저녁 무렵 제5해병연대는 서대문 형무소를 점령했지만 형무소 내에 잡혀있던 400여명의 미군포로는 이미 북쪽으로 끌려간 뒤였다.
이렇게 25일은 ‘서울 탈환일’이 아니고 서울 시가전이 시작된 날에 불과했지만, 그런데도 알몬드는 ‘서울 탈환’이라는 공식발표를 해버렸다. 다음날 연합보도국 기자는 이렇게 비꼬았다.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발표하긴 했지만 정작 그곳에 남아 있던 인민군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알몬드의 추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25일이 지나기도 전에 또 한건을 해내고 만다.
<타임> 표지모델 : 스미스
25일 밤 8시, C레이션으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스미스 장군에게 알몬드가 보낸 명령서가 도착했다. 이를 읽던 스미스 장군은 기가 막혀 음식이 목에 걸릴 뻔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북한군 병사들이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으니 지금 공격해서 격파하라!”
알몬드가 말한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적군’의 실상은 시가전을 피해 서울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시민들이었다. 그 시간에도 해병대원들은 야간 시가전을 치르고 있었다. 스미스 장군은 군단 사령부에 재확인을 요청했고 낯 선도시에서의 야간전투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서울을 함락시킨’ 알몬드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스미스 장군은 풀러와 머레이 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공격하기 바란다. 너무 앞서가지 말고 천천히 하고, 야간에도 확인할 수 있는 대로를 따라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26일 새벽 1시 45분, ‘북쪽으로 도망간’ 북한군 제25여단 보병 500여명은 T34/85전차 6대와 SU76 자주포 2대를 앞세우고 제5해병연대에 역습을 가해 왔다. 다행히 제5해병연대는 야습에 대비해 대전차 지뢰까지 묻어두고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투는 엄청나게 치열했다. 이 때 해병대이 포병과 전차가 쏜 포탄은 1,000발이 넘었고, 중기관총탄은 3만발이 넘어 과달카날의 기록을 넘어섰다.
날이 밝자, 전차와 자주포 9대는 모두 파괴되어 거리에 방치되었고 약 500구의 북한군 시신이 벌려있었다. 기자가 풀러 대령에게 전날 알몬드가 말한 ‘도망치는 적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도망치는 적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저기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있는 적군 수백명 뿐이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알몬드는 “25일 오후 2시에 서울은 ‘탈환’ 되었으며, 적은 북쪽으로 도주했다” 라는 보도자료를 내보냈지만 기자들은 믿지 않았다. <타임>지 기자는 “아직도 대로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오히려 <타임>의 기자는 그 전부터 제1해병사단의 활역에 감탄하여 아주 이례적으로 사단자에 불과한 스미스를 9월 25일자 표지모델로 내보냈다. 하지만 이 ‘출세’는 알몬드의 질투를 자극하여 그와 해병대를 고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서울 수복과 두 노인의 허세
26일에도 전투는 여전히 치열했다. 육군 제32연대도 해병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서 남산에서 야간 전투를 치러 400명을 죽이고 175명을 포로로 잡았다. 새로 도착한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은 제5해병연대와 같이 진격하여 중앙청 1km 지점에 이르렀다. 한국 해병 5대대를 배속받은 제7해병연대도 북쪽의 고지들을 점령하며 포위망을 조여들어왔다.
하지만 서울의 심장부를 탈환하는 임무는 기본적으로 제1해병연대의 몫이었다. 전차가 쌀가마니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저격수와 기관총 사격에 시달리면서 1대대는 한국 해병대대와 함께 서울역을 점령했다. 서울 시가전에서는 90mm와 76mm 장포신의 직사포를 단 퍼싱이나 셔먼보다는 단포신의105mm 곡사포를 단 셔먼이 더 활약을 했다. 서울 시내의 도로가 좁았기에 포신이 짧은 이 전차는 보병의 지원요청이 있을 때마다 사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제1해병연대는 제7해병연대와 제32연대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26일에는 또 다른 중요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인천 상륙 이후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는데. 제8군은 빠르게 북진하여 그 날 인천에서 남하한 제7사단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27일에는 제7해병연대가 인왕산 북쪽 고지들과 접근로를 장악하였고, 제5해병연대 1대대는 인왕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제5연대 3대대는 지금은 서울시의회인 국회의사당을, 제1연대 2대대는 프랑스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을 점령했다. 물론 미국 대사관에는 성조기를 걸었는데, 당시의 미 대사관은 롯데 호텔 건너편에 있는 서울특별시 을지로 청사였다. 나중에는 미 문화원으로 쓰이다가 영화 <구국의 강철대오>의 모티브가 된 1985년에 벌어진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 해병 2대대의 박정모 소위와 양병수 병장, 최국방 이병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건 날도 이 날이다. 북한군의 바리케이드와 저격수, 자살공격은 여전히 해병대를 괴롭혔고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강도는 약화되었고, 27일 밤은 비교적 편안히 보낼 수 있었다.
한편, 동경에 있는 맥아더 장군은 서울에서 이승만에게 탈환기념식과 통치권을 돌려주는 기념식을 꼭 열고 싶어했는데, 이는 정치적 논란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그것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생략하겠지만 문제는 맥아더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헬리콥터나 수륙양용장갑차로 한강을 건너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교건설을 고집하여 공병대들이 ‘개고생’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한 술 더 떠 알몬드는 김포공항과 행사가 열릴 중앙청에 해병 의장대를 도열시키라고 명령하자 스미스 장군은 분노하여 군단 참모장에게 “아직도 전투를 하고 있다”고 외쳤다. 맥아더조차 알몬드의 미친 짓을 취소해서 없었던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9월 28일, 서울 탈환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고, 29일 10시에 맥아더가 11시에는 이승만이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12시에 중앙청에서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다행히 부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한 시간 전에 겨우 완성되었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이 두 70대 노인은 4대의 쉐보레와 40대의 지프로 이루어진 차량 행렬을 이끌고 한강을 건넜다. 그들의 미소는 폐허가 된 서울 시가를 보면서 식어버렸다. 사실 이 결과에 그들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만약 맥아더가 서울탈환에 열을 올리지 않고, 스미스 장군의 의견대로 북한군의 퇴주로를 막고 포위를 했다면 서울의 파괴도 최소화 되었을 것이고, 더 큰 군사적인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과시를 위한 수도탈환이 우선시 하는 바람에 북한군의 상당수는 북으로 도망가고 수도 서울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워커장군이 서울을 수복한 제10군단을 두고 언론보도용 군단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두 노인은 포탄 하나가 날아와 유리창을 산산조각내는 소동이 있었음에도 굿굿하게 그리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행사를 멋지게 치러냈다.
도주하는 북한군에 대한 추격은 제5,7해병연대에 의해 시작되었고, 잔적 소탕은 제1해병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맡았다. 제7해병연대는 10월 3일, 의정부를 점령했다. 이 때 한 중대가 은행을 폭파했는데 폭약을 너무 많이 써서 앞문이뒷문까지 날라갔다고 한다. 어쨌든 10월 5일까지 제1해병사단의 작전은 끝났다. 해병사단은 다음 상륙작전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인천에 해병묘지를 서둘러 만들고 배를 타고 한반도를 일주하는 항해를 시작했다.
3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은 415명의 전사자와 6명의 실종자, 2,029명이나 되는 부상자를 내고 서울 탈환이라는 찬란한 전공을 세웠다. 전과는 적군 13,700명을 살상하고 4,692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44대의 전차를 격파하였다. 이에 비해 제7사단은 106명의 전사자와 57명의 실종자, 부상자 409명에 그쳤고, 전과도 4천여 명의 살상과 1,300명의 포로에 머물렀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에 있어 제1해병사단의 공로가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맥아더와 알몬드의 공명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다른 전투 사이의 지루한 막간극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의 성공으로 영광의 절정에 오른 ‘상륙작전 중독자’맥아더는 10월 2일,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미 제8군은 38선을 돌파해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진격하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해 함경도 지역으로 올라간다"
한반도같이 크지 않은 땅에서 북상하는 군대와 지휘권의 분리는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이미 서울 북쪽에 포진한 제10군단을 빼내 남쪽 바다로 한 바퀴 돌려 굳이 벌린 상륙작전은 큰 실책이었다. 그냥 제10군단을 북진시켰다면 이미 허약해진 북한군을 더 완벽하게 궤멸시키고 더 빠른 북진을 하여 중국군에게 전개와 매복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작전을 한 이유를 풀러는 다소의 ‘편견’을 섞어 한 부하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이 전쟁의 책임자는 누구지?”
“그거야 맥아더 장군 아닙니까?”
“맥아더는 육군 출신이야. 해병대가 서울을 탈환했지? 만약 자네가 맥아더라면 해병대가 서울과 평양을 둘 다 차지하게 내버려 두겠나?”
그의 생애 마지막 상륙작전인 원산 상륙 작전을 맡은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면 서진하여 북진하는 제8군과 평양에서 만나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전멸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적의 저항이 없었음에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은 남침 16일 전인 6월 9일, 부산항 봉쇄 목적으로 2천발의 기뢰 지원 요청을 소련에 보냈고, 사용하지 못한 이 기뢰를 원산에 뿌려놓았던 것이었다. 만약 이것들을 인천에 뿌렸다면 작전은 실패했겠지만 김일성의 방심으로 다행히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원산에 뿌려진 이 기뢰는 작전에 큰 지장을 주었다.
원산 상륙의 D데이는 10월 20일이었지만, 이 기뢰 때문에 소해정들이 투입되었다. 태평양 전쟁 기간 거의 모든 종류의 해전을 치렀지만 기뢰전은 거의 해보지 않았던 미 해군은 일본 보안대 소속 소해정까지 투입했지만 소해작업은 일주일이나 걸렸다. 사실 규모는 작았지만 인천 때에도 소해작업에 참가한 일본은 총 25척의 소해정을 파견하여 소련과 마찬가지로 ‘비공식 참전국’ 이 되었는데, 1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까지 나왔다.
그 사이 해병대는 배 위에서 먹고 자고 카드놀이나 하고, 책이나 읽고 영화보고 초기 손질이나 하면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물론 배멀미에 시달리는 장병도 많았다. 이런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해병들은 이를 ‘요요작전’ 이라고 불렀다. 그 사이 유명한 코미디언 밥 호프 Bob Hope 도 방문했는데, 그는 내리지 못해 툴툴거리는 해병들에게 “한국군이 대신 해서 할 일이 없으신 모양인데, 저라도 상륙할까요?” 라고 농담을 던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어쨌든 10월 26일에야 해병대는 원산 땅을 밟았지만 이미 이 항구도시는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에 의해 10월 10일 함락된 상태였다. 평양 역시 10월 19일에 함락되어 목표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압록강 두만강 도달과 병사들의 크리스마스 전 귀국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맥아더와 알몬드는 제1해병사단을 북진시켜 장진호를 거쳐 압록강까지 가라고 명령했다. 제1해병
사단 아니 미 해병대의 전설이 될 ‘장진호 전투’의 시작이었다.
중국의 경고와 맥아더의 오만
10월 말, 맥아더의 직속 부대이고 한 제10군단은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 외에 한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 그리고 미 육군 제3사단이 배속될 예정이어서 거의 10만 명에 달할 정도가 되어 군단이라기에는 너무 큰 규모가 되었다. 이런 대군 –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장난감 - 을 지휘하게 된 알몬드의 관심사는 딱 하나였다. 바로 워커의 제8군보다 먼저 압록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와 그의 상관인 맥아더의 야망은 곧 이루어질 듯 보였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바로 건국된 지 일 년이 갓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이었다.
중국은 미군의 압록강 진출을 당연히 원하지 않았다. 중국은 인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압록강까지 북진한다면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사표시를 미국에 전달했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미국은 매카시 광풍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따라서 무모한 맥아더의 북진을 제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만약 방어하기 쉬운 한반도의 목 즉 평양 – 원산 선 이나 원산 – 함흥선 정도에서 멈췄다면 중국의 공격은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화 되어 있다.
이미 중국은 10월 중순에 상당한 병력을 한반도 내에 침투시켜 놓은 상태였고, 11월 1일 밤 10시, 평안북도 운산에서 서부전선의 미국 제1기병사단 제8연대와 한국군 제15연대를 공격했고, 4일간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6일에는 미군과 영국군이 공격을 당해 역시 후퇴하고 말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이는 중국의 더 이상 북진하지 말라는 경고성 공격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워커보다 알몬드에게 압록강 도착의 영광을 주게 되어 잘 되었다는 듯이 군단 전 부대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한편, 원산에 상륙한 제1해병사단은 인천과 서울 전투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여 피해가 적었어 가장 ‘팔팔한’ 제7해병연대를 장진호 진격의 선봉으로 삼아 원산에서 112km 북쪽의 함흥으로 보낸 상태였다. 제5해병연대는 함흥 북동쪽의 신흥리에서 별 영양가 없는 수색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반대로 제1해병연대는 원산 서쪽의 마전리와 남쪽의 고저리에서 의외로 큰 규모의 북한군과 전투를 치러 23명의 전사자를 내고 적군 250명을 죽이고 83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렇게 당시 제1해병사단은 예하 부대가 270km 이상이나 분산되어 있어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스미스 사단장은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알몬드는 제5해병연대의 복귀만을 허용하고 장진호로 북진을 강력하게 지시했다.
장진호 전투의 서막
알몬드의 허세와 불길한 징조
사실 당시의 그는 그렇게 행동할 만 했다. 갈망하던 9월 25일의 <타임>지의 표지 모델을 스미스에게 ‘빼앗겼지만’, 결국 10월 23일자의 <타임>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알몬드는 해병대 장교들 앞에 있는 지도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며 “한국군의 점령지를 인수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진격이 아니라 마치 주말의 산책을 지시하는 하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이미 중국군의 침입을 알고 있었던 제1해병사단의 장교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을 뿐 이었다. 특히 스파르타식 생활에 익숙한 해병대원들에게 알몬드가 하는 평상시의 생활은 전혀 믿음을 줄 수 없었다. 그와 군단의 참모들은 전선에 나오더라도 온수가 나오는 샤워기가 있는 트레일러에서 잤고, 일본에서 공수한 고기와 술을 즐기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10월 31일, 제7해병연대의 정찰대는 3대의 지프에 나눠 타고 2일 후 한국군 제26연대와의 임무교대를 위해 흥남에서 48km를 북진하여 수동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틀 후 교대를 할 그리고 이미 ‘중국군’과의 교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한국군이 잡은 포로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포로로부터 중국군이 인근에 포진해 있다는 정보, 그것도 무려 2주 전인 10월 16일에 만포에서 국경을 넘었으며 규모도 상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중국군은 포로로 잡혔을 때의 요령을 교육받지 못했는지 순순히 정보를 내놓곤 했다.
이 보고가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되었고,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Charles Willoughby 장군이 동해를 건너 날라왔다. 그는 맥아더가 원하는 상황 즉 모택동이 그저 김일성과의 정치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만주에 전력을 공급하는 서부전선의 수풍 발전소처럼 장진호의 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소규모의 중국군을 파견한 것이라고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었고, 현실도 그에 맞추려 했다. 당연히 자신의 ‘확신’을 해병대에게 강요했을 뿐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악영향만 미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대규모 중국군과의 전투를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치러야할 전투가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안락한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몰려 있는 ‘상관’들의 오판과 오만으로 그들이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그리고 첫 전투는 바로 11월 1일이 지나갈 때, 일본군 이상으로 야간전투에 익숙한 중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 군대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대장정에도 참여한 송시륜 宋時輪 장군이 지휘하는 제9병단으로 무려 12만이나 되었다. 다만 워낙 험난한 지형이어서 전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을 뿐 이었다.
동부전선의 첫 승리 : 수동 전투
어쨌든 제10군단은 압록강으로 북진을 하든 중국군에게 타격을 입은 서부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낭림산맥쪽으로 서진을 하든 장진호 일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이 공세의 서막이 바로 제7해병연대의 수동 전투였다. 동부 전선에서 미군과 중공군이 최초로 교전하게 되는 전투이기도 했다.
11월 2일, 한국군 제26연대와 수동 남쪽에서 교대한 제7해병연대는 곧바로 첫 정찰을 시작했고, 소규모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하루 동안의 전투 끝에 감제고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연대봉을 공격해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했다. 여담성이지만 중국군은 전사한 해병대 흑인 병사의 시신을 보고 신기해 했다고 한다.
그 날 밤 11시, 아직까지 용하게도 남아있는 북한군 제344전차연대의 전차 5대를 앞세운 중국군 제124사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방어선을 적절하게 갖춘 1대대가 제124사단 제371연대를 저지했고, 우회한 제370연대 또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정면공격을 한 제371연대와 370연대 모두 큰 피해를 입어 제124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리첸버그 연대장의 안전한 진지구축과 연계된 효율적인 포병사격과 공중지원이 주효했던 덕분이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7해병연대는 4일 다시 장진호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여 수동을 지나 진흥리까지 전진하였다.
4일 아침, 제7해병연대는 황초령 입구의 고개에서 북한군 전차 4대를 앞장세운 중국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 때 해병대원 셋이 첫 전차에 뛰어들어 망치로 잠망경을 부수고 수류탄을 집어넣어 전차를 격파하는 놀라운 용맹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동안 보기드문 미군의 대전차 육탄 공격이었다. 나머지 전차는 해병항공대의 코르세어 기와 대전차화기에 의해 격파되었다.
제7해병연대는 7일까지 전투를 계속하며 황초령 고개의 낮은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까지 점령했지만 6일부터 중국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적의 유인이라고 판단하고 추격을 중단하였다. 제임스 로렌스 James Lawrance 소령은 이 전투를 “잠깐이지만 우리가 리틀 빅 혼 전투에 참가한 커스터 장군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만큼 전세가 불리했고, 정말 힘든 전투였습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해병대는 중국군 제124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총 5일 간의 전투와 소탕작전 동안 45명의 전사자와 16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중국군 제124사단의 허리를 꺽는 데 성공했다. 거의 같은 시점에 서부전선에서 중국군이 공격을 성공시킨 데 비해 동부전선에서 본인이 지휘한 첫 공세가 실패하자 송시륜은 격노하여 강도 높은 공세를 시도했고, 이 후의 무리한 포위와 공세를 지속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미 한국군과도 전투를 치러 전력이 소모된 제124사단은 수동 전투의 타격으로 이후에 벌어지는 장진호 전투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거의 사단급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단장 알몬드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겨우 군단 지휘부가 사용할 기차를 점검했다는 내용을 일기에 쓰고 있었고, 전장 시찰에서도 산 너머를 포격하기 위해 높은 각도를 유지하는 곡사포를 보고 해병대도 고사포를 보유하냐는 한심한 질문을 하여 해병대의 냉소만 자아냈다.
알몬드는 그전에도 ‘전과’가 있었다. 인천 상륙 당일 ‘상륙작전’의 문외한 알몬드는 상륙 당일 맥아더와 함께 마운트 맥킨리 Mount McKinley 호 함상에 있었다. 해병대 선임 장교 빅터 크루락 Victor Krulak 이 지나가는 말로 수륙양용장갑차 LVT 가 정말 우수한 첨단정비라고 말하자 알몬드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면 LVT는 바다에도 뜰 수 있는 건가?”
크루락은 그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즉시 그 말을 열 사람도 넘는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세상에,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자라는 사람이 LVT를 보고 저런 것도 물에 뜰 수 있냐고
묻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해병사단의 북진 그러나...
평등주의’를 도입한 중국군은 일반 사병들에게도 작전에 대해 교육을 실시해 해병들이 잡은 포로들은 전체적인 전략을 알고 있었고, 무려 24개 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사실까지 순순히 이야기 했다. 수동 전투가 끝난 7일에 이 사실이 알몬드에게 보고되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이 정보와 운산의 참패가 알몬드를 조금이나마 정신차리게 해주기를 바랬다. 제1연대는 원산에 제7연대는 수동 남쪽에 제5연대는 신흥 계곡에 있어 이격 거리는 최장 270km에 달했다. 더구나 겨울이 오고 있어 전투와 보급 둘 다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고 더구나 사단의 양쪽 측면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을 듣는 듯 했던 알몬드는 동경 사령부의 지시를 받자마자 다시 진격을 다그쳤다. 맥아더는 11월 초에 있었던 중공군의 두 공격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1일 알몬드는 함흥으로 사령부를 옮겼는데, 해병 중대 하나를 경계부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스미스 장군은 제5연대 C중대를 보냈는데, 다시 한 번 자신의 상관이 버릇 즉 병력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경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병력 파견 요구는 콧대 높은 해병대를 호위병으로 두었다는 ‘허영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 공병대는 좁디 좁은 데다가 가팔라 지프조차 올라갈 수 없는 황초령 고개를 개척해 확장하고 있었다. 이 통로를 통해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를 향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1월 초, 이원에 상륙하여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는 제7사단에 비하면 훨씬 느린 속도였다. 스미스 장군은 자는 도중에 보급품을 비축하고, 곳곳에 병력을 남겨두었으며,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진격속도를 지연시켰다.
그들 앞에는 수동 전투의 참패로 독기가 오른 송시륜 지휘 하의 병력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는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지도상의 목표에만 - 그것도 스미스 장군은 5만 1분의 지도를 보고 있지만 자신은 100분 1짜리 지도를 보고 있었다 - 매달리는 무능한 아군 지휘관이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은 워낙 험한 지형이어서 송시륜의 사단들은 야포를 대부분 만주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었는데, 만약 야포가 있었다면 해병대는 스미스 장군의 용의주도한 지휘에도 불구하고 전멸했을 지도 모른다.
영광의 추수 감사절 그러나.....
천천히 ‘진격’하는 해병대와는 달리 불행하게도 ‘육군 소속’ 인 제7사단은 서둘러 북진해야 했고, 322km를 20일 동안 주파한 끝에 11월 21일, 사단의 제17연대 선발대가 드디어 압록강변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사단장 데이비드 바 David Barr 장군은 병사들이 대부분 발에 동상이 걸렸다고 보고했지만 최전선에 ‘여간하면’ 가지 않는 알몬드는 이 때는 현장에 굳이 날라가 사단장과 함께 압록강과 강 건너의 만주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알몬드와 바는 패튼 흉내를 내며 압록강에 오줌을 갈기기까지 했다. 패튼의 부하였던 워커 장군을 의식한 행동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물론 맥아더에게 바로 보고를 올렸고, ‘벽안의 쇼군’은 “바 장군, 제7사단의 노고가 참으로 컸소!”라는 축전을 보냈다. 물론 동경 사령부는 축제 분위였고, 두 장군으로서는 영광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지나고 있는 개마고원의 높이보다 더한 절벽이 며칠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틀 후인 23일은 미국 최고의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었다. 제10군단 사령부에서 열린 만찬에 ‘압록강 근처에도 가지 못한’ 스미스 장군도 초대를 받았다. 그와 참모들은 식탁보가 깔린 식탁위에 자기 그릇과 은식기, 나이프와 포크, 칵테일은 물론 정교하게 만든 이름표까지 준비된 그 자리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미 본토의 클럽이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극동의 전장에서 재현된 셈이었다!!! 물론 알몬드는 그 자리에서 이틀 전의 ‘무용담’ 즉 미군 중 자신의 부대가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했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았음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동석한 바 장군은 스미스 장군에게 정말 조심하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물론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의 병사들에게도 칠면조 요리는 지급되었지만 영하 30도가 넘는 날씨에 고기는 모두 얼어버려 맛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맥아더는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표현처럼 “최악의 계절인 겨울 혹한을 무릎쓰고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나라와 대결한다는 점에서 나폴레옹과 비슷”했다. 물론 급속한 몰락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알몬드의 참모였던 맥카프리 대령 역시 험난한 지형과 혹한에 진격을 중단하라고 진언했지만 상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잖아. 자꾸 그렇게 불안해 하는 건 맥아더 장군을 얕보는 것 밖에는 안 돼.”
폭풍전야
하지만 스미스 장군은 전쟁을 게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권한 내에서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야기를 최전방의 해병대원들에게 돌려보자. 11월 16일, 아이러니 하게도 중국계인 츄엔 리 중위의 부대를 선발대로 내세운 제7해병연대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이 하갈우리는 장진호 전투 내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된다. 여기서 도로가 분기되어 동쪽으로는 후동리, 서쪽으로는 얼마 후 격전이 벌어지는 덕동고개를 넘어서 신흥리와 유담리까지 이어지고, 이 두 길로 진출한 각 부대들을 연결하면서 보급과 재편성을 실시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갈우리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 남동쪽에 공병대를 투입해서 야전간이비행장을 건설하게 하고, 도수교 수리에 필요한 목제부품을 준비하게 하는 등 비전투적 요인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비했기 때문이다.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들은 알몬드가 무슨 이유로 비행장을 만드냐고 묻자, 스미스 장군은 “사상자를 나르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답했는데, 알몬드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상자? 무슨 사상자??”
나중 이야기지만 이 비행장을 통해 사단 전투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무려 4,500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갈우리 비행장은 적어도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원들에게는 8년 전의 핸더슨 비행장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되었다.
11월 25일,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에 진입했다. 여기서 90km를 더 가면 무평리에 이르고 거기서부터는 도로 사정이 나아지므로 차량을 이용해 북한의임시수도인 ‘그 빌어먹을’ 압록강변의 강계로 직행 할 수 있었다. 물론 알몬드의 명령대로 진격했다면 강계는 몰라도 무평리는 벌써 지났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틀림없이 전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민들이 떠나 마을은 텅 비어 있었지만 대신 중국군 포로 몇 명을 잡았다. 그들은 제20군 소속 3개 사단이 유담리 일대에 포진해 있으며 이들은 포위와 차단을 병행하여 해병대를 전멸시킬 계획이라고 진술했다. 해병대원들은 일개 소총수가 어떻게 이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있는 지 의아했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미끼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실 이미 무지한 상관의 명령 때문이긴 하지만 스스로 함정에 들어온 상태였다!! 이 소식은 스미스 장군에게 전해졌고, 다음 날 그는 헬리콥터에 올랐다.
영하 25도 안팎의 추위는 살인적이었지만 몇 시간 후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이런 추위에 대부분의 장비는 견뎌 내지 못했다. 야포는 추위로 인해 높아진 공기밀도 때문에 사정거리가 떨어지고 작동에도 문제가 생겼고, 박격포는 얼어붙은 땅이 반동을 흡수하지 못해 포판이 깨지기도 했다. 밤만 되면 모든 차량의 엔진이 가동되지 않았다. 카빈 소총과 BAR 자동소총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망가지곤 했다. 순발력이 좋은 한 해병이 헤어크림으로 윤활유를 대체하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아 성공하기도 했다.
전투장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면 부피가 늘어나 찢어지기 때문에 반만 채워야 했다. 설사라도 걸리면 순식간에 지옥이 될 수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항문에도 동상이 걸리고 잘못하면 하반신 전체가 얼어붙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엄청난 두께로 옷을 입었고, 벙어리 장갑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집게손가락만 분리했다. 겹쳐 입은 옷에 땀이 베이면 소총이 옷에 달라붙은 황당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사실 맥아더는 이런 혹한 때문이라도 중국군이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고, 스미스 장군 역시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어쨌든 유담리에 도착한 스미스 장군은 이 마을이 단순히 몇 줄기의 산길이 갈라질 뿐 이렇다 할 전략적 가치는 없다는 사실을 바로 파악했다. 그는 유담리 서남쪽 43km 지점의 용림동으로 ‘신중한 진격’을 명령했지만, 이미 제5해병연대의 대부분을 제7해병연대와 합류시켰고, 제1해병연대로 바로 뒤를 받치도록 하는 용의주도함을 잊지 않았다.
운명의 27일 아침, 해병대원들은 유일하게 온기를 주는 존재인 경유 난로 옆에 모여 몸과 총기를 녹이고 있었는데, 중국어 통역원이 중국군이 버리고 간 한 소련 대위가 쓴 책을 번역한 <피비린내 나는 역정 血腥的歷程> 의 한 단락을 통역해주었는데 내용이 가관이었다. 앞부분은 상투적이고 야만적인 문장으로 맥아더를 전범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이었지만 맥아더가 “해병대에 약속했다”는 내용은 그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풍요로운 성이 그대들 앞에 있다. 그 곳에는 술과 맛난 요리가 차고 넘친다. 그 곳의 아가씨들은 그대들 것이다.
해병대원들은 차라리 맥아더가 그런 약속이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란 생각에 복잡한 심정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 책자는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적군’에게 최소한의 기분 전환은 된 셈이었다. 그들은 진격을 시작했지만 바로 그 때 자신들과 합류해야 할 제8군이 중국군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첫 전투 : 1403고지의 함락
해롤드 로이스 중령이 이끄는 제5해병연대 2대대가 선봉이었다. 그 뒤를 제5해병연대 3대대가 그리고 그 뒤를 제7해병연대가 따랐다. 도로를 감제하는 1426, 1403 두 고지는 각각 제7연대 3대대의 일부와 제5연대 2대대가 점령과 확보도로에 성공했지만, 그들의 진격은 여전히 신중했고 겨우 2,3km 정도의 거리에 불과했다. 가벼운 총격전이 벌어졌고 오후6시 해병대는 산에 간단한 참호를 파고 박격포와 무반동총을 원형으로 포진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후방인 유담리 최남단에는 105mm 곡사포 40문와 155mm 고사포 18문이 배치되었다. 해가 지자 해병들이 ‘시베리아 특급’이라고 부르는 차갑고 거센 바람이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중국군은 제1해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갖춘 상태였다. 도로에는 장애물을 설치하고, 이 장애물을 관측할 수 있는 삿갓산에 역쐐기꼴(V자 형)로 병력과 포진지를 중점 배치놓은 상태였다. 이후 제1해병사단은 전진에서 방어로 전환되었고 더 이상 진출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시점에는 이미 대규모 중국군의 병력이 해병대의 측면을 강타하기 좋은 위치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날 밤10시 경 중국군의 대공세가 요란한 뿔피리와 금속제 타악기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미군의 포화에 쓰러지면서도 말 그대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해병대의 진지를 항해 파도처럼 공격을 가해 왔다.
해병대원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1403고지의 미군 진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유린되었고, 대대장의 명령으로 제5연대 제2대대는 후방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 전투는 정말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테플럿의 역습, 제31연대의 붕괴 그리고 우 리의 '알몬드'
1403고지의 함락으로 제5해병연대 3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단순한 소규모 부대의 탐색 내지 조우전 정도라고 판단했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의 공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강풍이 산 위와 아래의 공기층을 나눠놓아 1403고지에서 벌어진 전투소음을 아래의 제5해병연대는 알 수 없었고, 이들 또한 곧 치열한 전투에 휩싸였다.
혹한을 피해 난로가에 모여있던 병사들은 중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왔고, 그 직후 중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국군의 공격은 매우 은밀해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일부가 대대 본부 텐트까지 도달했고, 수류탄 파편으로 통신대 텐트의 전화 교환기까지 파손되어 응급조치에 나서야 했을 정도였다. 탄약과 장비. 식량, 피복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중국군이었지만 수류탄 하나만은 풍부해서 전투때마다 비오듯 퍼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대대 본부의 방어선까지 무너지면서 유담리를 잇는 도로까지 일시적으로나마 점령당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테플렛 중령은 즉시 역습을 감행했다. 조명탄의 지원과 동시에 G중대의 강렬한 함성과 함께 실시된 역습은 중공군의 공세를 꺾고, 앞서 태플렛 중령이 지적했던 산비탈까지 전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아끼던 부대대장 존 케니 소령 John Canny 을 잃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역습이 벌어지는 중에도 연대 본부에선 새벽에 공세를 계속 하라는 통상적인 지시가 내려왔다. 물론 군단의 지시를 전달 한 것뿐이었는데, 그러면 군단장 알몬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거의 같은 시간에, 제1해병사단의 오른쪽인 장진호 동안을 진격하고 있던 제7사단도 풍류리에서 중국군의 맹공격을 받았다. 해병대와는 달리 제7사단은 알몬드의 명령으로 부대를 잘게 쪼개 진격하고 있었기에 해병대보다 훨씬 중국군의 공격에 취약했다. 거기다 제31연대장 앨런 맥클린 Allen MacLean 대령은 중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경계를 태만히 했고 포병 역시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 더구나 부대 간의 연락까지 두절되면서 연대는 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사실 알몬드는 제한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지도에 각 부대의 움직임을 이리저리 표시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제1해병사단의 작전 참모 알파 바우저 Alpha Bauser 대령은 “그는 자신이 연합군이 유럽에서 했던 것처럼 대단한 작전이라도 세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지도 몰랐다” 하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제10군단의 예하 부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범죄’에 가까운 무책임한 행동을 한 그의 오만과 어리석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여드는 중국군 그리고'동경의 식초 파티'
중국군은 밤사이 능선을 포위망을 만들어 갔다. 그들의 스테미너와 군기, 은신술은 2차 대전의 참전용사들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다만 중무기를 휴대할 수 없어 화력은 한계가 명확했고, 더구나 대공화기도 없어 하늘은 완전히 미군이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병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덕분이었다.
3대대의 역습 때 지른 함성은 연대장 머레이 중령에게 3대대 지휘소가 점령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중령은 1403고지에서 큰 타격을 입은 7연대 H중대의 공백으로 2대대가 측면이 노출되어 후방으로 이동시켜서 중국군의 공세에 대비하도록 했고, 28일 새벽 5시 45분, 2대대는 삿갓산 방향에서 유담리쪽으로 이동시켰다. 해병대의 백전노장들은 이제 자신들의 부대가 포위될 수 있으며, 어떻게든 방어선을 최소화하고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27일과 28일, 함흥의 사단사령부에서 뜬 눈으로 밤을 세운 스미스 사단장은 ‘올 것이 왔다’ 란 생각과 함께 자신의 한 일 즉 알몬드에 대한 ‘사실상의 명령 불복종’과 하갈우리 비행장 건설이 탁월한 판단이었음을 깨닫고, 참모들과 함께 오전 10시 하갈우리로 날라갔다. 다행히 그 곳은 중국군이 공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는데, 그는 하갈우리에 사단본부를 옮기고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바우저 대령은 “사단장이 최전선에서 지휘한다는 사실 자체가 장병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주었다” 고 군단장과의 회상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술회했다.
2시간 후, 하갈우리로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온 알몬드는 스미스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쉽게도 그 내용은 전해지 않는다. 다만 스미스 장군이 고개를 가로지으며 눈을 발로 걷어찼다는 일화만 전해지고 있다. 알몬드는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만신창이가 된 제31연대 1대대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군은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에 불과하다면서 거기에서도 특기인 ’훈장 셔틀”을 시작했다. 은성무성훈장 세 개를 꺼내 대대장 돈 페이스 Don Faith 중령과 그가 지명하는 장병 둘에게 주고 헬리콥터를 타고 전장을 떠났다. 중령은 훈장을 눈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워커 장군 역시 맥아더의 호출을 받고 동경으로 날라갔다. 전황을 보면 맥아더가 흥남이나 평양으로 날라가야 했지만 거의 2,000일 동안 ‘동경에서만 자는 기록을 세우려는’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몬드는 제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고집하였으나 워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시간에 중국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기에 맥아더는 상황의 심각성을 조금이나마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어느 작가가 “승리의 잔에 담긴 와인은 시큼한 식초로 변해가고 있었다” 라고 묘사했다.
1281 고지의 초인 존 얀시
한 편, 그 사이 중국군의 공격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28일 자정 무렵, 중공군 제80사단이 제2사단 제31연대를 향해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맥클린 연대장이 전사했고 페이스 중령이 대신 지휘관이 되었다. 제7사단 부사단장인 헨리 호즈 Henry Hodes 준장도 부대원을 버리고 하갈우리로 도망쳐 스미스 소장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하지만 제5, 7해병연대는 중국군 3개 사단에 의해 유담리에 포위 고립되어 있었으며, 하갈우리는 자체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호즈 준장의 추태는 육군에 대한 해병대의 경멸을 더 심화시키는 악영향까지 낳았다.
물론 유담리 일대의 해병대도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특히 1282고지의 전투는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제7연대 2대대 E중대가 지키고 있던 1282고지에엄청난 숫자의 중국군이 밀려들었다. 1282고지의 혈전은 해병대와 중공군 모두에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큰 충격을 주고 있었습니다. 박격포로 쏘아올린 조명탄이 양군이 벌이고 있는 처참한 전장을 밝혀주었고, 조명에 노출된 장병들은 무수히 쓰러져갔다. 이미 중대장 월터 필립스 Walter Phillips 대위는 전투 초반에 팔과 다리에 중상을 입고도, 부하들을 계속 격려했다.
정상부의 방어진지를 지키던 존 얀시 John Yancey 중위는 부하들에게 탄띠를 보급하던 중 수류탄 파편으로 입천장까지 뚫리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전투 지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칼슨 특공대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칼슨 특공대 출신답게 ‘겅호! 해병대’를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원래 그 구호는 팔로군에게 칼슨이 배워 유행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너무나 어이러니 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기관총 중대의 반장 로버트 케네모어 Robert Kennemore 하사는 중국군의 수류탄이 부하들의 참호 옆으로 떨어지자 굴려보내고, 두번째 수류탄은 눈 속으로 밀어넣었지만, 세 번째 수류탄이 떨어지자 본능적으로 처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몸으로 수류탄을 눌러 부하 세 명을 구한 채 두 다리가 잘려 나가며 굴러떨어졌다. 부중대장 레이몬드 볼 Raymond Ball 중위도 중국군과 싸우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중국군의 공격은 새벽3시에 다시 시작되었고, 중대는 중대장과 부중대장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얀시 중위의 지휘 하에 고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얀시 중위는 과달카날의 바실론 못지않은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탄을 광대뼈에 맞아 그 충격으로 안구가 튀어나왔지만,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적을 권총으로 쏴 죽인 후 다시 안구를 끼워넣었던 것이다.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딱딱하게 삶은 계란을 판자구멍에 끼워넣은 것 같았습니디만 제자리에 들어가더군요.”
날이 밝아지자 해병 항공대의 코르세어 기들이 날아와 그야말로 몸을 아끼지지않고 저공비행을 감행하며 해병대의 진지 몇십 미터 앞에서 폭탄을 투하했다. 중국군의 공세는 잦아들었다. 아마 얀시가 없었다면 고지는 틀림없이 함락되었을 것이고, 그 틈새를 통해 제5, 7 두 연대의 지휘소까지 유린되었을 확율이 높았다. 중대원 176명 중 12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얻은 결과였다.
옆에 위치한 1240고지에서도 극적인 요소는 적었지만 이에 못지않은 격전이 벌어졌다. 두 고지의 전투에서 위생병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수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했으나 수혈관이 얼어붙고, 붕대를 갈아주려 해도 상처부위가 노출되면 얼어버렸고, 물론 그들도 동상을 입을 수 있었지만 주사제와 혈장을 얼리지 않기 위해 입에 물고 뛰어나녔다. 그렇기에 다리를 절단당한 케네모어 하사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진 스미스 사단장
이렇게 부하들이 무더기로 쓰러져가고 있는 와중에도 알몬드는 ‘그 답게’ 아직도 전황을 비슷하게나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시간 계획서까지 제출하라는 ‘그 다운’ 요구까지 덧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독자적으로 행동해야만 부하들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한 스미스 소장은 약간의 정찰대만 보내 흉내만 냈을 뿐, 페이스 부대에게는 해병대의 도움 없이 알아서 하갈우리로 오라고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담리의 두 해병연대 중 제5연대는 진지를 방어하고 제7연대는 하갈우리로 가는 도로의 확보를 명령하고, 두 연대의 보급은 항공대에게 맡겼다. 제1연대장 풀러 대령에게는 남쪽의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 확보를 명령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26일 부사단장 크레이그 준장까지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본토로 떠난 상태여서 그는 이 엄청난 상황을 혼자 짊어져야 했다. 사실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조차도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조그만 분지지만 유담리의 해병대들의 후퇴를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하갈우리 방어는 기본적으로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았다. 이 곳에는 해병대는 물론 육군, 해군, 한국군 등 수십개 부대에 소속된 3,913명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적 지휘가 필요했다. 스미스 장군은 오후 3시 경, 3대대장 토마스 리지 Thomas Ridge 중령을 하갈우리 방어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제11포병연대 2대대 D포대가 지원에 나섰다. 이 포대는 적절한 대포병 사격으로 4문의 중국군 산포를 침묵시켰다. 하지만 이 포격전은 아주 작은 서막에 불과했다.
스미스 장군이 밀어붙였던 비행장 공사는 그 시점에서도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지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심지어 얼마 후 중국 병사들이 뛰어들어 육박전을 벌이거나 박격포탄이 비처럼 쏟아졌을 때조차도 멈추지 않았다.
워낙 극적인 장면이 많았던 장진호 전투였지만, 클라이막스 중 하나는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있는 1600m가 넘는 덕동 고개의 전투였다. 사실 스미스 장군은 북진하고 있을 때도 이 고개를 잃는다면 해병대는 완전히 끝장난다며 유황도 전투를 치르는 등 10년 경력의 베테랑인 윌리엄 바버 William Barber 대위의 제7연대 2대대 F중대를 배치했고, 이 중대에는 중기관총 분대와 박격포 분대까지 배속시켜 두어 다른 중대보다 50명이나 많은 240명을 주었다. 특히 하갈우리의 105mm 포대에게는 F중대만 지원하라는 명령까지 내려두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이 황량한 고지에서 장엄하기까지 한 대전투가 27일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덕동 고개의 혈전 : 초인 카페라타
27일, 덕동 고개에 도착한 바버 대위는 도로 옆에 있는 버려진 두 개의 오두막 중 하나에 중대 지휘소를 설치했다. 중대의 진지를 말굽모양으로 배치하여 도로변부터 산 정상부근을 거쳐 다시 도로로 내려오는 모양으로 전개했는데, 대위는 강추위에 시달리는 중대원들을 독려해서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그 때 로렌스 슈미트 Lawrance Shumitt 중위의 증언은 이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진지가 견고하고 강력해서 중공군이 감히 도전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며, 우리 주위에 있는 적은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려는 정찰병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버 대위는 그런 자기만족적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세심하게 주위를 기울여 야전교범 식으로 진지구축을 시켰는데, 소대 방어구역과 사격구역을 지정하고 모든 것을 일일이 감독했으며, 만족스러운 사격각도를 얻기 위해 중화기들을 여기저기로 옮기게 했습니다."
28일 밤 2시, 덕동 고개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는데, 또 한 명의 영웅을 낳았다.
가장 덩치가 크고, 또 가장 골치덩어리 였던 헥터 카페라타 Hector Cafferata 일병과 케네스 벤슨 Kenneth Benson 일병은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카페라타는 이렇게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시끄러운 총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뜨자마자 중공군이 쌓여 있는 눈 위를 넘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총을 조준할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다행히 중국군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참호를 그냥 통과했고 지형지물에 가리어 모습이 안 보이자 카페라타와 벤슨은 운반할 수 있는 탄약은 다 들고 나머지 소대원들이 중국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지로 달려갔다. 이 때 장교들이 해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진지의 공백을 메우려고 병력을 이리저리 옮겨 배치하고 있었는데, 카페라타와 벤슨이 때마침 나타났다.
여기서도 수류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는데, 그는 믿을 수없는 용맹을 보여주었다. 참호 속에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들어 되던졌지만, 한 개가 참호 바로 앞에 떨어져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그 수류탄을 집어 비스듬히 던지려 했다. 그러나 조금 못 미쳐 수류탄이 폭발하여 손의 일부가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는 욕을 퍼부으면서 소총에 실탄을 재장전하고는 클립이 빌 때까지 사격을 가했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야구 배트처럼 잡고 날아오는 수류탄을 야구공을 맞추듯이 맞추어 멀리 날려 보냈다고 한다.
동료 벤슨은 수류탄이 옆에 떨어져 폭발하여 그의 안경을 날려보내 잠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자동소총을 쏠 수 없게 되자 벤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소총의 실탄 클립을 손으로 더듬어 주워, 카페라타의 M-1 소총에서 빈 클립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실탄이 든 클립을 카페라타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해병대 역사에는 중공군이 그 지점에서 해병진지의 침투에 실패한 이유은 카페라타와 벤슨, 그리고 또 다른 ‘스미스’ 제랄드 스미스 Gerald Smith 의 분투 덕분이었고, 그들 세 명은 "2개 소대의 적군을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대는 6시쯤 끝난 전투에서 24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54명의 부상자를 대가로 치르고 고지를 지켜냈는데, 실종자들은 침 낭속에서 자다가 호흡할 때 나는 입김이 지퍼를 얼려 갇혀있다가 침낭채로 중국군에게 끌려가 버렸다는 어이없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졌다. 중국군의 시신은 확인된 것만도 100구가 훨씬 넘었는데, 해병대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남겨놓은 다채로운 장비였다.
영국제 리 엔필드 소총과 스텐 기관단총, 8년전 과달카날 전투만 해도 해병대도 썼던 스프링필드 소총,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적이었던 일본군이 쓰던 소총, 20년 전 장개석이 독일과 친했을 때 도입한 마우저 소총은 물론 국민당 군에게 지원했다가 노획된 것이 확실한 톰슨 기관단총도 12정이나 나왔다. 심지어 구르카 용병들의 쓰는 독특한 디자인의 구크리 칼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오히려 소련제 장비는 권총 몇 자루가 전부였다. 하지만 덕동고개의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미-영 해병대의 합동작전 : 죽음의 계곡 전투
장진호 전투는 거의 전 전선에서 규모와 밀도, 시간만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부대가 존재하는 거의 전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한데, 하갈우리와 흥남을 연결하는 고토리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일대를 확보하고 나아가 하갈우리 방어를 지원할 책임은 제1해병연대장 풀러 대령의 몫이었다. 8년 전 과달카날과는 정반대로 혹한의 전장에서 싸우게 된 그는 천막 수송을 최우선시 했는데, 덕분에 소총수들은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탄약 수송이 늦어졌는데, 참모가 이를 걱정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으면 전투를 할 수 없어, 탄약이 떨어지면 착검하고 싸우면 된다!”
또한,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적군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제발로 걸어와 위를 포위해 주었으니 일이 간단해졌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손안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리지 중령의 3대대는 하갈우리에 있었고, 도널드 슈먹 Donald Schumuck 중령의 1대대는 고토리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황초령 남쪽의 진흥리에서 철도시설과 야적된 보급품을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풀러 휘하에는 앨런 슈터 Allan Sutter 중령의 2대대와 포대 하나, 공병대와 소수의 비전투병력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 3대대 G중대와 육군 중대 하나, 그리고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 Douglas Drysdale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해병대 제41코만도 부대가 중국군이 도로를 차단하기 전에 고토리에 도착해 있었다. 300명으로 구성된 제41코만도는 믿음직한 정예부대로 2차 대전 때는 제4코만도 여단에 소속되어 노르망디와 벨기에서 활약하였고, 전후 해체되었다가 몇 달전에 재창설된 부대였다. 일부는 이미 인천상륙작전 전 서해의 여러 도서에서 다양한 작전을 펼친 바 있었다. 원래는 제7해병연대에 배속될 예정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풀러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두 나라 해병대는 정확히 반세기 전 북경에서 의화단을 상대로 싸운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두 번째 합동작전을 펼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중국인들이었고, 포위망을 뚫는 작전인 점도 같았지만 이번의 상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군대였다. 풀러는 드라이스데일 중령을 돌파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영국 해병대와 미국 해병대를 합쳐 900명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하갈우리로 돌파하여 도로를 확보하고 그 곳의 방어를 강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29일 오전 9시 45분, 눈보라와 강풍을 맞으며 그 곳으로 출발했다. 장진호 전투의 또다른 드라마 ‘죽음의 계곡’ 전투의 시작이었다.
덕동 고개의 두 번째 전투 그리고 공식화 된 철수
28일 해가 뜨자, 덕동 고개의 F중대원들은 중국군이 남긴 장비를 예비화기로 쓰기 위해 챙겼고, C47 수송기가 완벽하게 투하해 준 탄약, 의약품, 들것, 모포 등을 거의 회수했다. 이 날 밤에도 또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중대원들은 하나도 없었다. 밤10시,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항복하라는 내용의 방송이 나왔고, 곧이어 어처구니없게도 빙 크로스비 Bing Crosby 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까지 흘러나왔다.
29일 오전 2시 경, 호각소리가 나면서 중국군의 탐색전이 시작되었고, 일본제 기관총이 발사되면서, 얼마 후에는 격투가 벌어졌다. 오전 3시에는 기온이 영하31도까지 떨어졌다. 이 쯤 되면 자동화기가 반 쯤 얼어 작동이 되지 않아 단발 사격만 가능했다. 수류탄도 안전핀에 붙어있는 얼음을 제거하고 나서야 투척이 가능했다. 공군지원과 기갑장비는 물론 포병 지원조차 없는 순수한 보병전투였다. 욕설이 난무하고 수류탄이 폭발하고 총검이 번뜩였다. 중대장 바버 대위도 부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지휘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전투는 6시 쯤 끝났고, 해병들의 눈앞에는 200여 구의 중국군 시신이 널려있었다.
한편 유담리에 모여있는 제5와 제7해병연대는 이틀 동안 중국군의 공격을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면서 탈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제7연대장 리첸버그대령은 제5연대장 머레이보다 열 살 연상이고, 계급도 높았지만 그를 존중하면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덕동 고개의 F중대가 궤멸된다면 두 연대는 그대로 있어도 전멸당한다. 어떻게든 그 곳으로 증원병력을 보내야 했고, 29일 오전, 워렌 모리스 Warren Morris 소령을 지휘관으로 삼아 1개 대대 규모의 구원부대를 편성하여 덕동 쪽으로 보냈지만 도로 양쪽에서 퍼붓는 중국군의 총탄 때문에 시도는 좌절되었다. 리첸버그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본격적인 철수의 시작
한편, 27,28일 그 중요한 이틀 동안 알몬드가 이끄는 제10군단 사령부는 놀랍게도 어떤 계획이나 지시도 내리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29일 이른 아침의 종합적인 전황은 이러했다. 가장 병력이 많은 제5,7연대는 유담리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고, 제1해병사단 본부가 있는 하갈우리 역시 전투병력은 대대규모에 불과하며, 역시 포위되어 있었다. 하갈우리 남쪽 18km 지점에 위치한 풀러의 고토리 방어선도 사실상 포위되어 있었다. 그리고 장진호 동쪽의 제7사단 잔존부대인 페이스 부대도 적의 위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알몬드는 29일 이른 아침,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시간 계획서까지 제출하라는 ‘그 다운’ 요구까지 덧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억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미스는 제7사단장 바 소장의 동의를 얻어 페이스 부대에게는 해병항공대의 도움을 받아 알아서 하갈우리로 오라고 통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진흥리에서 ‘놀고 있는’ 제1연대 1대대를 고토리로 북상시키고 대신 더 후방에 있는 미 육군 제3사단을 북상시켜 진흥리를 맡아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놀랍게도 알몬드는 이를 거절했다.
그 날 오후, 스미스 사단장은 장진호 전투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는 명령을 내렸다. 유담리의 두 해병연대 중 제5연대는 일단 유담리를 방어하고, 제7연대에게는 하갈우리로 가는 도로의 확보를 명령했다. 두 연대의 보급은 항공대에게 맡겼다. 제1연대장 풀러 대령에게는 남쪽의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 확보를 명령했다. 알몬드는 결국 이날 밤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진격계획을 취소하고 철수계획으로 돌아서게 된다.
스미스의 참모 바우저는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두 개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5,7연대가 전투력을 보존한 채 신속하게 하갈우리에 도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포위를 돌파할 때까지 하갈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갈우리 방어를 돕기 위해 출발한 드라이스데일 부대는 그 순간 어떻게 되었을까?
드라이스데일 부대의 돌파
중국군이 보기에는 대단히 화려할 정도로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을 보유하고 105mm 포와 대구경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는 매복 중인 최소한 3개 대대가 넘는 중국군의 강력한 저지로 공격개시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두 나라 해병대의 미묘한 경쟁심 덕분에 이 정도나마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 1시 50분, 드라이스데일 부대는 눈보라와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로 돌파를 재개했다. 오후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쪽 6.5km 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 상의 탄흔 등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드라이스데일은 야전병원에서 부상자를 위문 중인 스미스 사단장에게 난국을 보고하였으나 증원군 없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사단장은 그 답지 않게 ‘무자비’하게도 “멈추지 말고 하갈우리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전투 중에는 아무리 사상자가 많이 나와도 밀어부쳐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이 때가 그런 경우였다. 전투 중 20살의 윌리엄 보 Wiiiam Baugh 일병은 중국군의 수류탄을 몸으로 막고 전사하였다. 사후 그에게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해가 지면서 항공지원이 불가능해지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격렬한 전투 중 드라이스데일 중령과 부관이 부상당했고 종대 중반에 위치한 탄약차량이 박격포탄을 맞았다. 이 화재로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 가량이 후방에 고립되었다.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해병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이들은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다행히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에 고토리로 귀환할 수 있었지만 전방의 2개 그룹 160여 명은 존 맥로린 John McLauhlin 소령을 따라 중국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하자마자 중국군 병사들은 차량에 뛰어올라 절실하게 필요한 방한복과 식량을 챙겼다.
후속부대가 포위된 지 모르고 있던 선두 부대는 하갈우리를 불과 1km 남겨둔 지점까지 이르러서 다시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다시 부상을 당해 미국 해병대의 칼 시터 Carl Sitter 대위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29일 저녁7시 15분, 자체의 안전도 불안한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갈우리에 도착한 300여 명은 거의 전원이 영국과 미국 해병대의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이들이 증강됨으로써 하갈우리는 스미스 장군의 말대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의 피해는 혹독했다. 지휘관이 이름 붙인 ‘죽음의 계곡’에서 전력의 3분의 1을 잃었고, 부대가 보유했던 차량의 절반 이상인 75대가 파괴되었다. 리지의 부하인 에드윈 시몬스 Edwin Simmons 소령은 이렇게 회상했다.
“초록색 베레모를 쓴 드라이스데일이 팔의 상처에서 피를 뚝뚝흘리면서, 수술실로 쓰는 텐트의 야전램프 불빛 아래서 경례를 한 후 영국 해병 제41코만도가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착했다고 보고하는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어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장진호 일대에서 드라이스데일 부대 외에 큰 전투는 없었지만 29일 날이 저물 무렵, 고토리의 제1해병연대 중 또 다른 스미스인 잭 스미스의 E중대가 공격을 받았지만 겨퇴에 성공했다. 아침에 스미스의 부하들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175구의 시신을 확인했다.
중국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도 그랬지만 이제 쌍방 모두 전의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아마도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의 전투가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남쪽으로의 진격!!
11월 30일 새벽, 제10군단에서 제1해병사단으로 파견된 고위 참모 에드워드 포니 Edward Forney 대령은 고토리에서 군단 본부가 있는 함흥으로 날아가 알몬드에게 해병대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이 때 맥아더는 뒤늦었지만 유엔군에게 전면 철수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알몬드는 하갈우리로 향했고, 스미스와 바 두 사단장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남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그리고 스미스에게 장진호 지구 미군의 후퇴작전 지휘권을 주고 동시에 “후퇴에 지장을 주는 모든 장비의 파괴 권한”도 주었다. 이로서 철수는 완전히 공식화되었지만 스미스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사실 해병사단은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남쪽으로 철수하려 해도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리고 스미스는 중장비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 장비가 있어야 압도적인 머리수를 자랑하는 중국군을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해병사단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유담리와 덕동 고개 일대의 혈전에서 3개 중대가 전투력을 상실했고, 약 1,500여 명의 사상자들이 발생한데다다가 하갈우리의 제1연대 일부와 육군 병력들도 첫 방어전에서 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물론 상당수는 동상자 였다.
11월 29일까지 장진호 일대에 배치된 미 해병대와 육군은 약 5,000여 명의 손실을 입었고, 해병대 13,500명 정도에 육군 4,500여 명을 합쳐 약 18,000명의 병력이었음을 감안하면 전체 병력의 약 1/4 이상에 해당되었다.
중국군의 공격축선은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는데, 유담리 일대를 전면적으로 압박하는 3개 사단 규모의 병력과 장진호 동쪽의 육군을 강타한 1개 사단의, 하갈우리와 고토리 일대를 공격하는 2개 사단 등 총 6개 사단이 전면공세에 나섰고, 다른 사단들은 하갈우리를 산악의 능선을 타고 우회하여 흥남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산개하는 중이었다. 만약이지만 중국군이 3개 사단 정도의 병력으로 해병사단을 봉쇄하고, 나머지를 아예 흥남 쪽으로 공격했다면 전황 자체가 완전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화하기에는 화력은 그렇다 치저라도 중국군이 지닌 이동능력과 그에 수반하는 보급능력이 너무나 열악했기에 유동적이고 신속한 입체적 공세는 불가능했다.
사실 해병대원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중국군이 보유한 차량 1천대 중 이미 600대가 미 항공대에 의해 파괴되어 최저한의 보급도 어려운 상태였다. 중국군 트럭 운전병은 미군기가 쏴대는 조명탄이 소멸되는 짧은 순간을 이용해 운전해야 했고, 그나마도 안내자가 있어야 이동이 가능했다. 중국군은 거의 모든 비전투 인력 심지어 문화선전대 소속 배우들까지 물자 수송을 도왔을 정도였다.
희비의 쌍곡선
11월 30일 자정 무렵, 거의 같은 시간에 하갈우리와 덕동 고개로 중국군이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군 포로를 동원한 항복권유 방송이 있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어서 자동화기와 수류탄, 휴대폭약으로 무장한 약 3개 중대가 덕동 고개의 서쪽과 남쪽에서 밀고 올라왔다. 이들의 공세는 잘 은폐된 방어진지의 매복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입고 실패하고 말았는데 중대원들은 이렇게 중대장 바버 대위에게 승리라는 훌륭한 생일 선물을 안긴 것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덕동 고개에 대한 중국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는데,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계속한 이유와 해병대도 이 고개의확보 여부에 따라 유담리의 주력부대의 철수가 좌우될 수밖에 없으므로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같았던 것이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국군 제58사단과 제59사단 병력이 주도한 그리고 꽹과리와 나팔, 그리고 구호가 섞인 기묘한 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하 32도의 혹한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해전술로 밀고 들다가 심지어 해병대의 전차가 발사한 포탄이 헛간에 불을 일으키자 중국군 병사들은 몸을 녹이려는 생각만으로 그 곳에 모여들었다가 해병들의 좋은 사격목표가 되어 무더기로 쓰러져 갔을 정도였다. 스미스 사단장을 비롯한 해병대 지휘관들은 중국군이 아편에 취해 있었다고 믿었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기야 스미스 사단장 본인도 수면부족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으니 적의 무모한 돌격이 약물 탓이라고 믿을 만도 했다.
하갈우리 일대에는 930구의 중국군 시신이 확인되었고, 적어도 두 배수에 달하는 부상자가 나왔으며 대부분이 동사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죽음의 계곡을 뚫고 들어온 영국 해병대도 이 전투에서 맹활약 했다.
12월 첫 날이 밝아오면서, 스미스 사단장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모두 전달되었다. 우선 짐작하고 있었지만 하갈우리에만 무려 600명의 부상자가 있으며, 유담리에 있는 두 해병연대에도 최소한 500명이 넘는 부상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단 의무대장인 해군 소속 유진 헤링 Eugiene Hering 중령의 보고가 첫 번째 ‘나쁜’ 소식이었다. 물론 이조차도 보수적인 숫자였고, 급격히 늘어날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물론 이들을 후송할 유일한 방법은 비행장의 ‘완성’ 이었는데, 물론 ‘정상적인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완공’된 비행장의 활주로는 500m에 불과했지만 항모에서 의 이착륙을 밥 먹듯이 해냈던 조종사들이 탄 C-47수송기가 오후 2시 50분에 착륙하고 30분 후 24명의 부상자를 태우고 무사히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 네 대의 수송기가 착륙하고 세 대가 부상자를 태우고 이륙하면서 하갈우리는 외부 세계와의 직접적인 연락에 미약하나마 성공한 것이다. 어쨌든 이는 무엇보다 좋은 소식이었고, 또 다른 좋은 소식도 전해졌다. 바로 낙동강 전투와 수동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회복 중이던 500명 정도의 해병들이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주 치명적이 될 지도 모르는 나쁜 소식도 전해졌다. 바로 제1해병 1사단이 퇴각할 황초령길에 있는 수력발전소 도수장을 잇는 다리가 중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이이었다. 즉, 퇴각이건 남쪽으로 진격이건 이 다리의 수리까지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스미스의 선견지명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되지만 그 이야기는 별도로 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알몬드는 그 동안 ‘목숨이 아까워서인지, 자신이 고깝게 보았던 해병대는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어서인지’ 몰라도 후방에 있는 제10군단의 병력을 북쪽으로 전진시키기 않고 함흥, 흥남 일대의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제1해병사단을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 했던 ‘진격강요’ 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나중을 위해서라도 함흥, 흥남 방어가 핵심이긴 했지만 제10군단의 잔여병력이 그 일대에 고착되면서 중국군 또한 함흥, 흥남 일대를 공격하지 않고 해병대에게만 집중공격을 가하면서 제1해병사단만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죽음의 공간을 자력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스미스 장군이 요청한 대로 제3사단이 진흥리까지라도 진출했더라면 희생자의 수가 적어졌겠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육군의 추태와 데이비스 대대의 돌파
한 편, 장진호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육군 제7사단 제31연대의 패잔병들은 필사적으로 페이스 중령의 지휘 하에 필사적으로 하갈우리 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는 다행히 해병항공대 출신의 관제장교인 에드워드 스템포드 Edward Stamford 대위가 함께 하고 있어 그의 관제 하에 코르세어 기의 절묘한 지상지원을 받아 거의 대학살을 당하고 잇었지만 그래도 전멸을 면하고 있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오폭으로 인한 아군의 희생자도 발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페이스 중령이 전사하자 어처구니 없게도 해병대 출신이자 조종사인 그가 남은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한편 고토리 남쪽의 황초령으로 리처드 라이디 Richard Reidy 중령의 제31연대 2대대가 전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알몬드가 연락기를 타고 그곳을 보니 여러 대의 차량이 부셔져 있고, 장비들이 버러져 있었다. 그는 조셉 거페인 Joshep Gurfein 소령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빨리 진격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라이디 중령은 황초령 고개를 확보하고 있는 부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지만 소령은 “대대장의 건의는 군단장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하고는 사실상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결국 전진이 재개되었지만 도로 장애물을 치우는 병사들의 실수로 부비트랩이 폭발하고 병사들은 중국군이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공황상태에 빠졌다. 겨우 12월 1일 오전 2시 30분에야 무질서하게 고토리에 들어와 방어선의 한 귀퉁이를 맡게 되었다. 스미스 장군은 특유의 온화하고 실제보다 줄이는 스타일대로 “제31연대 2대대의 전술행동은 인상적이 않았다”라고 비망록에 남겼다.
한 편, 유담리의 두 해병연대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것은 중국군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지 두려워졌다. 리첸버그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즉 유담리에서 덕동고개까지의 길은 활모양으로 휘어있는데, 한 대대를 보내 이를 직선으로 산악행군을 하여 돌파, 덕동고개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중대를 구출하고 탈출로를 완전히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제7연대 1대대장이자 과달카날, 글로스터 곶, 펠릴류에서 싸웠던 레이몬드 데이비스 Raymoand Davis 중령이 중책을 맡았다. 그 사이 다른 대대들이 각 방면에서 저의 접근을 차단하다가 테플럿의 제5연대 3대대가 선봉에서 탈출하면 각 부대가 차례로 빠져나간다는 계획을 짰다. 데이비스의 대대가 덕동 고개의 F중대에 합류하는 순간, 테플럿의 대대가 덕동 고개에서 합류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작전이 될 터였다. ‘모든 해병은 소총수다’ 란 모토대로 이 전투에서는 쓸모없는 장거리 155mm 곡사포대를 해산하고 그들도 보병이 되어 싸우는 등 최대한 병력을 확보했다. 12월 1일, 저녁 9시 데이비스의 대대는 사단의 운명 어쩌면 한국의 운명이 건 산악돌파를 시작했다.
한 편, 장진호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육군 제7사단 제31연대의 패잔병들은 필사적으로 페이스 중령의 지휘 하에 필사적으로 하갈우리 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는 다행히 해병항공대 출신의 관제장교인 에드워드 스템포드 Edward Stamford 대위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의 관제하에 코르세어 기의 절묘한 지상지원을 받아 대학살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전멸만은 면하고 있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오폭으로 인한 아군의 희생자도 발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페이스 중령이 전사하자 어처구니없게도 해병대 출신이자 조종사인 그가 남은 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한편 고토리 남쪽의 황초령으로 리처드 라이디 Richard Reidy 중령의 제31연대 2대대가 전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알몬드가 연락기를 타고 그곳을 보니 여러 대의 차량이 부셔져 있고, 장비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는 조셉 거페인 Joshep Gurfein 소령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빨리 진격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라이디 중령은 황초령 고개를 확보하고 있는 부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지만 소령은 “대대장의 건의는 군단장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하고는 사실상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결국 전진이 재개되었지만 도로 장애물을 치우는 병사들의 실수로 부비트랩이 폭발하고 병사들은 중국군이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공황상태에 빠졌다. 겨우 12월 1일 오전 2시 30분에야 무질서하게 고토리에 들어와 방어선의 한 귀퉁이를 맡게 되었다. 스미스 장군은 특유의 온화하고 실제보다 줄이는 스타일대로 “제31연대 2대대의 전술행동은 인상적이 않았다”라고 비망록에 남겼다.
한 편, 유담리의 두 해병연대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것은 중국군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지 두려워졌다. 리첸버그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즉 유담리에서 덕동고개까지의 길은 활모양으로 휘어있는데, 한 대대를 보내 이를 직선으로 산악행군을 하여 돌파, 덕동고개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중대를 구출하고 탈출로를 완전히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제7연대 1대대장이자 과달카날, 글로스터 곶, 펠릴류에서 싸웠던 레이몬드 데이비스 Raymoand Davis 중령이 중책을 맡았다. 그 사이 다른 대대들이 각 방면에서 저의 접근을 차단하다가 테플럿의 제5연대 3대대가 선봉에서 탈출하면 각 부대가 차례로 빠져나간다는 계획을 짰다. 데이비스의 대대가 덕동 고개의 F중대에 합류하는 순간, 테플럿의 대대가 덕동 고개에서 합류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작전이 될 터였다. ‘모든 해병은 소총수다’ 란 모토대로 이 전투에서는 쓸모없는 장거리 155mm 곡사포대를 해산하고 그들도 보병이 되어 싸우는 등 최대한 병력을 확보했다. 12월 1일, 저녁 9시 데이비스의 대대는 사단의 운명 어쩌면 한국의 운명이 걸린 산악돌파를 시작했다.
두 해병연대의 하갈우리 입성
매 3분마다 유담리의 곡사포 대대에서 조명탄을 쏴주고 병사들은 침낭과 무기를 제외한 모든 장비는 두고 갔다. 그리고 여분의 공용화기 탄약은 들것으로 나르되 나중에 부상자를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평소처럼 음식을 먹을 수 없기에 과일 깡통이나 크래커, 캔디 등을 휴대했다.
다행히 중간 지점까지 중국군의 저항은 없었지만 아예 길이 없는 깊은 산속 그것도 혹한 속의 행군 자체가 전투 이상의 고난이었다. 빙판길에 이끄러진 해병들은 수십미터 밑으로 떨어졌고, 그 때마다 병사들은 손에 손을 잡고 연결하여 전우들을 끌어올렸다. 1,520m 고지 기숡에서 새벽 4시에 중국군과 조우하자 기습적으로 박격포탄과 기관총을 퍼부어 1개 소대 규모의 적병을 전멸시켰다.
부대가 재편성을 위해 산악행군을 정지하자 탈진한 병사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혹한도 적탄도 아랑곳없이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대로 나두면 가장 ‘편안한 죽음’ 즉 동사를 맞게 되기에 장교와 부사관들은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깨워야 했다. 물론 낙오자도 있었겠지만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데이비스 중령 자신도 자신이 정상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때때로 중대장에게 확인 할 정도였다. 그는 펠릴류에서 44도의 폭염을 이곳에서는 영하 40도의 추위를 모두 걲는 보기 드문 군이 되었다.
밤 새 그야말로 초인적인 강행군을 한 데이비스 대대는 12월 2일 아침6시, 덕동 고개 아래의 능선에 도달했다. 81mm 박격포와 항공지원 덕분에 중국군의 저항을 두 차례 물리치고 11시에 덕동 고개의 F중대와 합류하였다. 데입스와 바버는 ‘당연하게도’ 전투 후 둘 다 명예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부대는 당연히 재편성에 들어갔다. 5일간 F중대는 26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부상자 89명을 냈고, 장교 7명 중 6명이 부상자였다. 하지만 데이비스 대대는 군의관 피터 아리올리 Perter Arioli가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희생되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사실 데이비스 중령도 저격을 받았지만 몇 cm 차이로 전사를 면한 바 있었다.
그리고 12월 1일 오전 8시, 두 해병연대는 전차와 불도저를 앞세우고 ‘남쪽으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아마 포탄을 다 쏘고 포병들이 총을 잡아 쓸모가 없어진 155mm 곡사포신에는 시신을 붙들어 매었다. 박격포 사격을 앞세운 중국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12월 3일 오후 2시 30분 경, 마침내 덕동 고개에 이르렀다. 덕동 고개의 부상자들은 모두 차량에 태웠는데, 심지어 연대장용 지프에도 부상자가 가득 탔을 정도였다.
물론 해병대 항공대의 정찰기와 코르세어 기가 중국군의 동정을 살피고 조금만 움직임이 보이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저녁 무렵, 마침내 선두부대는 하갈우리 진지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해병대원들은 ‘해병대 답게’ 전열을 가다듬고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면서 사단 본부로 들아갔지만 아직도 철수는 멀기만 했고, 그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하갈우리의 상황
두 연대의 후미도 12월 4일 오후에는 하갈우리에 도착에 성공했다. 좁은 시골 마을에 불과한 하갈우리에는 제1해병사단 외에 1,500여 명의 제10군단직할부대원들, 제7사단 페이스 부대의 생존자들, 열국 해병코만도, 그리고 종군기자들과 소수의 한국 경찰관과 연락장교, 피난민들이 북적거렸다. 각종 차량만 해도 1,000여대에 달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전투는 한국 땅에서 벌어졌고,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한국인들이 한 역할은 아주 작았다. 이들의 생명은 맥아더도 알몬드도 아니고 스미스 사단장에 두 어깨에 달려 있었다. 당시 북경의 방송은 “미 해병대의 섬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고, 사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보다 훨씬 먼 황초령을 넘는 흥남으로의 철수는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서쪽에서 패주중인 제8군의 경우는 그래도 퇴각하는 지형은 개방되어 있었지만 흥남으로의 길은 험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하갈우리에는 유담리에서 온 1,500명을 포함하여 5천명의 부상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음은 어느 군의관의 증언이다.
“용해溶解가 안 되고, 수혈관이 얼음조각 때문에 막혀서 혈장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붕대를 갈지도 못했는데,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죠. 상처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부상자의 옷을 자를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몸이 얼어버리기 때문이었죠. 부상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추위 때문에 바로 지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최악이었죠. 부상자를 침낭에 쑤셔 넣으려 해본 적이 있습니까?"
수송기 편으로의 후송 여부는 사단 의무 참모인 헤링 중령이 판정했다. 어떤 병사들은 후송을 위해 ‘꾀병’을 부렸고, 어떤 중상자는 전우들의 죽음을 슬퍼하면 후송을 거부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군의관들은 병사들의 보행 가능 여부를 보고 후송 여부를 결정했다. 공군과 해병대의 수송기 그리고 육군의 헬기들이 12월 1일에서 5일까지 4,400명의 부상자와 137구의 시신을 실어날랐다. 수송기들은 오는 길에 부상에서 회복하여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온 500여명의 해병대와 보급품을 싣고 왔다. 탄약과 연료, 식량도 대거 투하되었지만, 땅이 워낙 얼어붙어 있어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물론 눈 속에 떨어져 찾지 못하는 물건과 중국군 지역에 떨어진 양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보급은 해병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군단에서는 전 병력의 공수 철수를 제안했지만 스미스 장군은 거절하였다. 이미 “우리는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공수철수는 모든 중장비를 포기한다는 뜻이었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엄호부대는 전멸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병대답게 지상돌파를 선택했다.
종군기자들은 천하무적 미 해병대의 선봉 제1해병사단원들의 몰골을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석달 전 인천에 위풍당당하게 상륙했던 머레이 연대장은 너무 야위어서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종군기자 가운데는 한국 해병대에게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마거릿 히긴스도 잇었다. 젊고 떡똑한 데다가 예쁜 용모까지 겸비한 그녀의 등장은 해병대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녀가 한 해병대원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오줌이 마려울 때 15cm 두께의 옷을 제치고 8cm 길이의 거시기를 꺼내는 일이었다.”
한 편, 그 사이 기가 많은 죽은 알몬드가 하갈우리에 도착했는데, ‘훈장택배기사’로서의 면모는 잃지 않았다. 스미스와 리첸버그, 머레이에게 무공십자훈장을 수여했는데, 스미스 사단장이 “제31연대 2대대의 전술행동은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했고 실제 지휘를 하지 않았음에도 제31연대 2대대장 라이디 중령에게도 같은 훈장을 주었다. 해병대 병사들은 알몬드가 하갈우리에 만들려던 지휘소에 굴러다니던 술병을 몇 십년 후에도 기억했다고 한다.
철수 아니 남쪽으로의 공격이 시작되다!!
12월 5일 저녁, 하갈우리에 있던 모든 155mm 야포가 불을 뿜었다. 사격목표는 남쪽 도로 주변의 중국군 진지 또는 진지로 의심되는 모든 장소였다. 도로까지 파괴되면 안 되기에 지상에서 일정한 높이와 각도를 두고 폭발하는 신관이 달린 포탄을 사용했다. 물론 이번에 남은 포탄을 모두 소모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이 포격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진지와 방한가능한 숙소 그리고 가져가지 못하는 모든 물자를 소각했다. 그럼에도 중국군 병사들은 미군이 떠나자마자 무언가 필요한 물건이 찾기 위해 하갈우리로 몰려들었다.
12월 6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드디어 철수 또는 남쪽으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차들이 앞장섰고, 덕동 고개의 영웅들인 F중대가 맨 앞에 서고, 방금 도착한 500여명의 해병들이 바로 뒤를 맡았는데, 기본적으로 제7해병연대가 전위, 제5해병연대가 후미를 맡는 구조였다. 6척의 항공모함의 함재기들과 공군기 수백대가 순서대로 이륙하면서 같은 고도를 유지하며 교대로 상공을 빈틈없이 엄호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며칠 동안이나 혹한을 견디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전차와 F중대를 2km 가량 통과시킨 사격을 가하고 백병전을 시도했다. 어떤 중국 병사는 수십m 나 되는 절벽에 매달린 상태에서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담리에서 이미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해병대원들도 두려움 없이 그들과 맞서 싸웠다. 군악대원까지 가세하고 대구경 곡사포를 직격해야 할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고 6일 하루 동안 겨우 5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영국해병대원들은 죽음의 계곡 전투 때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이 완벽하게 냉동되어 보존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투는 12월 7일 오후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풀러 대령이 지키고 있는 고토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18km를 가는데 38시간이 걸렸고, 661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전사자 중에는 보급부대의 엄호를 맡았던 윌리엄 해리스 중령 William Harris 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늘에서 제1해병사단을 지켜주고 있던 제1해병항공사단장 필드 해리스 Field Harris 였다. 고토리에 도착한 스미스 사단장은 고토리의 방어상태가 훌륭하며, 1만 명을 위한 따뜻한 음식과 텐트까지 준비되어 있는 사실에 감탄했다. 하지만 흥남까지는 70km나 남아있었고, 무엇보다도 중국군에 의해 파괴된 도수장의 다리를 복구해야만 했다.
수문교와 고토리의 상황
한편, 장진호 일대의 중국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송시륜 장군은 서부전선의 제8군이 궤멸된데 비해 해병대는 유담리와 하갈우리에서 모두 무사히 빠져나가간데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반드시 그들이 황초령을 넘기 전에 전멸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기 위해서 수문교를 반드시 파괴해야 했다.
흥남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한 수문교는 고토리 남쪽 6km 지점에 있었는데, 중국군도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12월 1일에 첫 번째로 폭파하였지만, 해병대의 공병대원들이 나무다리로 복구해 놓았다. 사실 그 재료도 스미스 사단장의 준비 덕분이었다. 하지만 4일에 두 번째로 폭파되었고, 이번에 공병들이 철교로 복구했지만 다시 세 번째로 파괴되고 말았다. 중국군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폭약의 양을 늘렸다.
하지만 스미스 장군을 제외한 미군 수뇌부가 중국군의 힘을 과소평가했듯이 중국군 역시 미군의 능력 특히 기계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미군은 놀랍게도 1톤이 넘는 자재를 거대한 낙하산으로 투하하여 북한 북동부의 외진 산간지대에 있는 절벽에 전차와 모든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50톤짜리 철제 다리를 12월 9일 오후 4시까지 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위업에 대해서만은 해병대원들도 같이한 육군 공병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군은 이 일대에 대대 병력 정도 밖에 배치하지 못했는데, 이 지역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혹한과 인력에 의존하는 기동력과 병참의 한계 때문이었다. 더구나 통신장비 역시 낙후해 제 때 정보가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한 가지 조건이라도 중국군이 갖추었다면 스미스 장군이 아무리 용의주도하고 해병대가 아무리 뛰어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고토리에서 이렇게 제1해병사단의 삼개연대가 원산 상륙 이후 한 자리에 모였지만 물론 축하할 상황은 아니었다. 다리가 수리된 다 하더라도 험준한 황초령 기슭을 지키고 있는 제1연대 1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고토리 북쪽에 마련된 짧은 정찰기용 활주로에 이착륙이 가능한 구식 뇌격기가 그 사이에 발생한 부상자를 실어날랐고, 태평양 지구 해병대 사령관 셰퍼드 중장도 도착했다. 중장은 사단과 함께 ‘남쪽으로 공격’에함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1차 대전부터 알고 지냈으며, 이 전쟁 후에는 라이벌 아닌 라이벌이 되는 스미스 장군은 이렇게 그를 만류했다.
“우리 행군로 상에 얼마나 많은 중국군이 있는지 모르고, 갈 길도 멉니다. 적에게 섬멸당할 가능성도 있으며, 아무도 해병 중장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중장은 해병대원들에게 떠밀려 태워진 히긴스 기자와 함께 고토리를 떠났다. 그녀는 취재를 위한 동행을 원했지만 대부분의 해병대원들에게는 ‘귀찮은 짐’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식 전사에는 스미스 장군의 ‘기사도 정신’에 따른 조치였다고 기록되었다. 12월 8일 아침, 제7해병연대가 1328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제5해병연대는 1457고지로 밀고 올라갔다. 하지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항공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수문교 남북에서의 전투
선봉을 맡은 제7해병연대는 다시 선봉을 맡아 칼바람이 부는 날씨와 싸우며 황초령을 향해 나아갔다. 제7해병연대 1대대 B중대는 고토리 남쪽 1.5km 지점에서 강력한 중공군의 저지선을 만나게 되었다. 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앞으로 나선 중대장 조셉 쿠르카바 Joseph Kurcaba 중위는 휘하 소대장들을 모아서 돌파계획을 세우면서 공격지시를 내리던 중 한 발의 총탄을 이마에 맞아 절명하였다. 원래 중대장이 부상당해 지휘권을 인계받은 후 유담리 전투의 첫날 C중대를 구출하는 작전과 데이비스 중령 지휘하에 유담리 포위망 돌파의 선두에 서 산악행군을 해내는 등 10여 일이 넘는 동안 휘하 병사들을 훌륭하게 지휘했던 이 덩치 큰 폴란드계 장교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명예훈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중대장직을 인수받은 츄엔 리 중위는 쿠르카바 중위가 생전에 지시한대로 조셉 오웬 Joshep Owen 중위에게 남아 있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중국군의 저지선을 우회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리 중위 역시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두 발의 총탄을 각각 오른팔과 얼굴에 맞아 쓰러졌다. 그날 밤은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었고, 눈보라가 잦아들자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 일부는 고토리로 물러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이렇게 병력이 소모되면서 B중대의 경우 180명 중에서 27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3대대는 세 중대를 합쳐 멀쩡한 자는 120명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도 소규모 중국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황초령 기슭 진흥리 철도 야적장을 방어하고 있던 도널드 슈먹 중령 휘하 제1해병연대 1대대는 당시 사단 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던 대대였다. 대대는 사단 본대가 이용할 경로인 황초령 길이 얼마나 안전한 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슈먹 중령 본인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정찰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슈먹 중령 본인과 윌리엄 베이츠 William Bates 소령, 그리고 포병 전방관측반으로 이뤄진 본대와 1개 분대의 소총수들로 이뤄진 미끼 그룹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미끼부대는 중공군에게 노출되어 본대에 쏠릴지도 모를 주의를 돌리고자 했다. 수문교를 건너서 고토리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 방어선의 뒤편까지 진출한 정찰대는 고토리 남쪽 3km 능선 반대편에 매복해있던 중국군 병력을 발견했다. 곧바로 포병관측반이 포격을 요청하여 이 매복부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 정찰활동은 중국군 병력 일부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했지만, 수문교를 감제할 수 있는 1081고지가 지닌 전략적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한 성과도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단 본대의 움직임에 맞춰서 제1연대 1대대 또한 황초령 일대의 장악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때마침, 해병대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전날인 12월 7일, 고토리 진지의 첩보부 텐트로 이송된 중국군 제60사던 연대서기가 포로로
잡혀있었는데, 그는 고토리 남단의 중공군 배치현황을 자세히 알고 있어 향후 철수계획 수립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제60사단은 고토리 남단을 막아 해병대의 전진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제60사단 제178연대가 진흥리의 제1연대 1대대의 이동을 차단하고,
제179연대는 진흥리 남단의 철도 터널 쪽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8일 새벽 2시, 이틀치 식량을 휴대한 제1연대 1대대는 연대장 풀러 대령에게 무전으로 집결보고를 한 후 30분 뒤 폭설을 뚫고 북쪽으로 활로를 뚫기 위한 행군을 시작했다. 이 폭설은 항공지원은 물론 지원포격도 받을 수 없게 했고 행군 자체에도 방해가 되었지만, 오히려 중국군이 해병대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도록 가려주는 역할이 더 컸다. 공교롭게도 1대대 A중대장 로버트 배로 Robert Barrow 대위는 2차 대전 중 팔로군과 함께 활동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가파른 비탈과 얼음을 무릎 쓴 10여 km의 산악행군 끝에 1081고지 턱밑까지 도달했다. A중대가 공격 준비를 마쳤고, B중대도 고지 근처까지 접근해서 지휘소 설치를 마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120mm 중박격포까지 매고 이 강행군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장진호의 전투의 사실상 마지막 혈투인 1081고지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전투
도로에서 약 800m 떨어진 1081고지에는 20cm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고지 사방에는 관제장교가 배치되어 전투기의 지상지원을 유도할 준비를 마쳤다. 정오 무렵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그때 눈발이 쏠리면서 중국군에게 발각되어 많은 손실을 내었지만, 중국군은 이런 곳까지 미군이 중화기를 가져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 끝에 전초 벙커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밤 사정없이 불어닥친 바람과 함께 영하32도의 혹한은 1대대 장병들을 강타했다. 그들은 얼어버린 장갑과 군화를 벗고 양말을 갈아 신은 다음 다시 군화를 신어 동상을 방지하고자 했지만 결국 67명이나 되는 병력이 동상에 걸렸고, 그 중에서 7명은 발을 절단해야 했다.
기아와 혹한에 시달리던 중국군도 이 일대를 탈환하고자 반격에 나섰지만 단단히 구축된 방어선에 부딪혀 궤멸당했다. 12월 9일 아침이 밝았고 하늘을 맑았다. 드디어 공중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배로 대위의 A중대는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과 함께 1081고지 정상의 송전탑 공격에 나섰다. 몇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정오 무렵 고지 정상에 올라선 대원들은 500여구의 중국군 시신을 확인했지만 더 감격적인 장면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졌다. 왜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싸워야 했는지를 확실하게 증명하듯 그들이 확보한 통로를 따라 사단 본대 병력들과 차량들이 도로를 따라 전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리는 복구되어 있었다. 슈먹 중령과 부하들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들도 화답했다.
한편, 당시 고토리에서는 마지막 부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스미스 사단장과 각 각 연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117구의 미군과 영국군 시신을 묻는 장례의식이 거행되었다. 한 편, 육군의 추태는 계속되었다. 통로의 측면을 방어하기로 한 육군 부대가 행군종대에 끼려 했던 것이다. 테플럿 중령은 “너희 같은 쓰레기 군인들이 우리 측면에 있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하마”라며 그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실 장진호 전투에서 육군은 해병대에 무임승차하는 경우가 많아 해병대원들을 분개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최후미는 해병대 최정예인 수색대가 맡았다. 마지막 부대가 11일 오전 2시 복구된 수문교를 통과했고, 다리가 폭파되었다.
마지막 후미 부대에 대해 피난민 속에 섞인 중국군의 공격이 시도되었고, 전차도 공격당했지만 격퇴되었다. 본대도 공격을 받아 9대의 차량과 1대의 전차가 파괴되었고 돌가 차단되었지만 과감한 역습으로 격퇴되었고 도로 역시 개통되었다. 이것이 장진호의 마지막 전투였다. 중국군들 역시 마지막까지 해병대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혹한과 보급 부족으로 스스로 붕괴되고 만 것이다.
흥남철수
황초령 고개를 넘어서면 신흥리이고, 이곳부터는 함흥평야가 펼쳐지기에 편하게 차량을 이용한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첫 전투를 치렀던 수동 남쪽을 넘자 해병대는 포탄과 사격을 받았다. 당연히 중국군의 공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알몬드의 제3사단의 ‘작품’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육군에 쌓인 게 많았던 해병대원들의 혐오감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결국 해군장관 프랜시스 매튜스 Francis Matthews는 “해군 및 해병대원은 타군에 대해 부정적 견해나 그들의 역할을 축소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야만 했을 정도였다. 알몬드는 흥남 일대에 반원형의 교두보를 만들고 타격을 입은 부대부터 차례로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첫 부대는 제1해병사단이었고, 각 부대의 철수에 따라 교두보는 축소되었고, 교두보 바깥은 해군의 함포와 항공기의 폭격으로 ‘철의 장막’을 쌓았다. 24일 최종 철수 때까지 해군이 퍼부은 함포탄만 7만발이 넘었다고 한다.
12월 12일 아침, 제1해병사단은 흥남에서 수송선에 오르기 시작했다. 14일까지 승선은 완료되었고, 15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상자들은 일본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성탄절 전야인 24일까지 해병대원은 물론 10만 명이 넘는 미 육군과 한국군, 8만 6천명의 피난민이 엄청난 장비와 함께 흥남 부두를 떠났다. 최근에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부두로 몰려가는 피난민들로 시작된다. 이 철수 자체가 제1해병사단의 분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문재인 대표의 부모도 그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해병대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분투가 없었다면 대규모의 피난민까지 실어나르는 질서정연한 철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알몬드는 자신이 명령을 사실상 불복종한 스미스 사단장 덕분에 군단의 주력을 거의 보존할 수 있는 아이러니를 맛보게 되었다. 알몬드가 이 때 피난민을 배에 태운 행동은 한국전쟁에서 그의 가장 큰 ‘위업’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의 본심이었다기 보다는 그 동안 보여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일 들 정도니 저자의 지나친 편견 때문일까?
그 사이 흥남의 낮은 구릉에서는 성조기가 반기로 게양된 가운데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장중하고 슬픈 예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모자를 옆구리에 낀 스미스 사단장이 참석했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맹세는 지켜질 수 없었다. 다행히 북한은 고토리와 이곳에 묻힌 유해를 훼손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훗날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들 유해 중 상당수는 최근 발굴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거의 두 달 동안 이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은 718명의 전사자와 192명의 실종자, 그리고 3,504명의 부상자 그리고 거의 6,200명에 달하는 비전투 사상자를 냈는데 거의 동상자였다. 다만 비전투 사상 중 3분 1은 단기간의 치료 후 임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단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투력을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중국군의 손실은 엄청났다. 정확하지 않지만 2만 5천 이상의 전사자와 1만 2천 이상의 부상자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동상자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륜 병단은 무력화 되어 함흥에서 휴식을 취하며 몇 달간 전투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다. 장진호 전투는 승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위대한 철수작전 중 하나이자 해병대 역사상 가장 기록될 만한 전투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한국군의 패주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서울까지 내주어야 했다. 유명한 1.4후퇴인데, 해병대의 분투가 없었다면 송시륜의 제9병단이 가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전 정도까지 철수해야 하는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제1해병사단의 연말연시 휴가 그리고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
부산에 도착한 제1해병사단은 육로로 몇 개월전에 싸웠던 마산에 배치되었다. 마산에서 스미스 장군은 전사한 장병의 부모와 가족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장군은 크리스마스 직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였다. 후임은 미 육군에서 가장 촉망맏고 있던 참모차장 매슈 리지웨이 Matthew Bunker Ridgway 중장이었다. 스미스와는 존중하는 사이였고, 육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이를 재정비해 반격해야 하는 리지웨이는 해병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스미스 장군이 그에게 “다시는 알몬드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자, 리지웨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제1해병사단은 ‘드디어’ 알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8군 예하로 편입되어 예비병력이 되었다.
그 사이 장병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냈고, 본국에서 3,400명의 보충병이 도착하면서 부대는 재편되었다. 새해가 되면서 풀러와 리첸버그는 준장으로 머레이는 대령으로 승진하는 등 그들의 공로에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졌고, 특히 풀러는 부사단장 직을 맡았다. 훗날 풀러는 장진호에서의 전우들을 찾아오면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래! 잘 있었나! 몸은 이제 녹았나?”
이후 장진호에서 살아남은 해병대원들은 초신 퓨 Chosin Few (초신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를 일컫는 일본식 표기다. 당시 미군은 한국지도가 없어 일본지도를 사용했다. 가뜩이나 이 전투에 참여하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장진호를 갈 수 없기에 비슷한 환경의 알래스카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한다. 초신은 미 해군 이지스 순양함의 이름이 되기도 했으며,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관의 기념 조각도 이 전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머레이의 후임으로 제5연대장을 맡은 인물은 인천상륙작전의 기획을 맡았던 갓볼드였다. 하지만 인천에 처음 상륙했던 제5해병연대 3대대장 테플럿 중령은 동상이 심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한국전쟁 전 기간 동안 해병대원 중 모두 42명이 명예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 14개가 장진호 전투 참가자에게 수여되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스미스 장군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로를 드러낼수록 알몬드의 잘못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제1해병사단은 육로로 몇 개월전에 싸웠던 마산에 배치되었다. 마산에서 스미스 장군은 전사한 장병의 부모와 가족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장군은 크리스마스 직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였다. 후임은 미 육군에서 가장 촉망맏고 있던 참모차장 매슈 리지웨이 Matthew Bunker Ridgway 중장이었다. 스미스와는 존중하는 사이였고, 육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이를 재정비해 반격해야 하는 리지웨이는 해병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스미스 장군이 그에게 “다시는 알몬드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자, 리지웨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제1해병사단은 ‘드디어’ 알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8군 예하로 편입되어 예비병력이 되었다.
그 사이 장병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냈고, 본국에서 3,400명의 보충병이 도착하면서 부대는 재편되었다. 새해가 되면서 풀러와 리첸버그는 준장으로 머레이는 대령으로 승진하는 등 그들의 공로에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졌고, 특히 풀러는 부사단장 직을 맡았다. 훗날 풀러는 장진호에서의 전우들을 찾아오면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래! 잘 있었나! 몸은 이제 녹았나?”
이후 장진호에서 살아남은 해병대원들은 초신 퓨 Chosin Few (초신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를 일컫는 일본식 표기다. 당시 미군은 한국지도가 없어 일본지도를 사용했다. 가뜩이나 이 전투에 참여하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장진호를 갈 수 없기에 비슷한 환경의 알래스카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한다. 초신은 미 해군 이지스 순양함의 이름이 되기도 했으며,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관의 기념 조각도 이 전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머레이의 후임으로 제5연대장을 맡은 인물은 인천상륙작전의 기획을 맡았던 갓볼드였다. 하지만 인천에 처음 상륙했던 제5해병연대 3대대장 테플럿 중령은 동상이 심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한국전쟁 전 기간 동안 해병대원 중 모두 42명이 명예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 14개가 장진호 전투 참가자에게 수여되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스미스 장군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로를 드러낼수록 알몬드의 잘못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장군이나 군대에 대한 평가를 가장 정확하게 하는 이는 바로 적군이다. 중국작가 왕수정 王樹增이 쓴《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읽어보면 그에게 대해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1해병사단은 1월 8일, 의외의 임무를 맡았다. 안동-횡덕 지구의 북한군 제10사단 즉 빨치산 토벌 임무였다.
제1해병사단은 1월 8일, 의외의 임무를 맡았다. 안동-횡덕 지구의 북한군 제10사단 즉 빨치산 토벌 임무였다.
걸맞지 않은 임무 : 빨치산 토벌전
당시 유엔군은 평택-원주 선까지 밀려나 있었고, 중국-북한군은 유엔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하 정월 대공세를 개시했다. 그 중 ‘걷는 공수부대’라는 별명을 지닌 이반남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은 원주를 지나 산악의 사각지대를 통해 대구까지 침투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이 침투의 목적은 물론 대구의 점령이 아니라 해병사단이 빠져나간 알몬드의 제10군단 후방 즉 원주-안동-대구 간의 보급선 차단이었다. 이 부대는 도중에 미군을 만나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안동 부근까지 진출하였고 낙동강 전선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남은 빨치산들과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군 수뇌부에서도 대구로의 진출은 무리라는 판단에 평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출구는 막힌 뒤였다.
제1해병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배속된 한국군 제1해병연대와 함께 1월 11일부터 소탕작전에 착수했다. 한국군도 함께 하긴 했지만 지리에 어둡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니 항공정찰이 중시되었다. 다행히 겨울이라 빨치산들도 대부분 마을에 머물러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밥짓는 연기가 유난히 많이 나고 사람이 출입이 빈번하거나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날아드는데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이 몰려들지 않는 곳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았다.
적이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 지면 포위를 했고 병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예상 후퇴로에 매복을 하고 화력과 공중지원을 집중시켰다. 항복권고를 하고 거부하면 화력을 총동원해 ‘빗질’을 했다. 때로는 적의 거점을 없애기 위해 주민들을 피난시키고 마을을 폭격으로 불태우기도 했다. 태백산맥 일대는 워낙 가난한 지역이라 그나마 식량과 숙박지를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사라지면 빨치산도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포로가 된 제10사단의 한 장교는 숨은 것과 도주 외에는 아무런 대책을 지시한 바 없다고 우울하게 말하기도 했다. 한 달 가까운 ‘빗질’을 마치고 3천여명의 적군을 소탕한 스미스 장군은 적 제10사단은 어떤 종류의 중요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새로운 임무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지역 주민의 재산은 물론 인명 피해가 커서 자랑할 만한 작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1월 초순, 중국-북한군의 정월 대공세는 빈약한 보급능력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그 사이 유엔군을 완전히 재편한 리지웨이 장군은 1월 15일부터 북진을 시작하여 2월 10일까지 한강 남쪽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2월 11일부터 중국-북한군의 반격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다. 특히 횡성에서 입은 한국군의 손실은 심각한 것이었다.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이 중국군에게 첫 승리를 거두고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병참선이 무너지면서 이 반격은 일주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쟁의 주도권은 유엔군 쪽으로 다시 넘어오기 시작했다.
'킬러' 작전 그리고 스미스의 10일 천하
다시 최전선에 돌아온 제1해병사단은 브라이언트 무어 Bryant E. Moore 소장의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2월 16일, 사단은 충주에 도착했고 다시 원주로 향했다 왼편에는 한국군 제6사단이 오른쪽에는 제10군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2월 21일부터 시작되는 지나치게 쎈 ‘킬러 Killer'라는 이름의 반격작전에서 그 주공을 맡게 되었다. 일차적으로는 횡성이 목표였고, 이차적으로는 홍천을 거쳐 춘천을 탈환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공격 첫날부터 2월에 어울리지 않게 호우가 쏟아져 항공지원과 정찰은 물론 산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럼에도 진격을 계속했지만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24일 군단장 무어 장군이 전방 시찰차 헬리콥터로 이동하던 도중 거대한 폭발과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그를 포함한 승무원들은 살아남았으며 잔해에서 빠져나온 무어 장군은 승무원 구출을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조 작업을 시작한지 수 시간 후, 무어 장군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인해 가슴을 움켜지고는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지웨이는 스미스 장군에게 제9군단을 임시로 지휘하게 했는데, 군단 참모들은 그의 지휘를 반겼지만. 워싱턴은 육군본부는 서둘러서 멀리 이탈리아에 있던 윌리엄 호지 William Hodge 장군을 불러다 후임자로 앉혔다. 육군 수뇌부는 자신들의 자리를 해병대 장군이 차지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스미스의 군 지휘는 열흘로 끝나고 말았다.
사단은 풀러 부사단장이 지휘를 맡아 기상 악화로 지연된 보급을 받고는 3월 1일 횡성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당일 진입에는 실패했다. 다음 날 항공 지원이 가능해지자 다시 공격을 시작했고, 4일횡성 탈환에 성공했다. 다른 부대들도 비교적 순조롭게 북진하여 양평-횡성 -평창을 연결하는 애리조나 Arazona 선까지 북진했다. 3월 6일에 종료된 킬러 작전은 중국-북한군의 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하다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적군에게 적지 않은 손실을 안겨주었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 작전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킬러’라는 작전명에 문제가 있었다고 여겼는지 다음 작전에는 절단기라는 뜻의 Ripper 라는 이름을 붙였다. 목표는 서울탈환과 함께 가평-춘천 북쪽-한계리를 잇는 아이다호 Idiho 선이었다. 작전의 골자는 우세한 화력을 활용하여 퇴각하는 적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고 작전 단계별 통제선을 설정하여 적의 역습이나 침투를 최대한 막는 것이었다.
해병사단의 착실한 북진
리지웨이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전방 공격부대에게 5일간의 보급 물자를 미리 비축하도록 하고,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해군으로 하여금 상륙작전을 하는 시늉을 내도록 하여 적의 주위를 분산시켰다. 이 때 쯤 워싱턴의 분위기는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휴전” 쪽으로 기루어져 있었지만 이를 위해서라도 유엔군이 적군을 적을 38선 이북으로 물리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3월 7일 아침, 리퍼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1해병사단의 목표는 홍천이었고, 일차적으로는 양수리에서 홍천 서남쪽 양덕원리를 거쳐 1261고지라고 불리우는 태기산과 속사리를 잇는 알바니 Albany 선 이었다. 3월 7일, 제1해병사단은 휘하 연대를 병진시키며 착실하게 진격해 나갔는데, 적의 저항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천에서는 적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호지 군단장은 제1기병사단을 홍천의 서쪽으로, 제1해병사단을 동쪽으로 하여 양익 포위를 계획했다.
제1해병사단은 홍천 동쪽의 오음산을 차고 내러가며 14일 밤까지 호천에서 5km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다음 날, 제7해병연대 1대대가 홍천읍에 진입했다. 큰 전투는 없었지만 해병사단 공병대는 공군이 뿌려놓는 접촉하기만 하면 폭발하는 작은 폭탄들을 제거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 했다.
같은 날, 미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하지만 반 년전과는 달리 해병사단은 서울에 없었고 대대적인 탈환 축하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에 불과했고 한다. 맥아더 역시 서울 방문은 자제하고 17일 오전 11시 수원에 도착했다가 다시 항공편으로 원주로 가서 제1해병사단을 방문하고 스미스 장군을 만났는데, 지프에서 내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16일 아침, 해병대는 홍천 동쪽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낮 동안에는 진격하지 못했지만 밤이 되자 적군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단은 홍천 북동쪽으로 계속 진격해 들어갔다. 춘천은 중국군-북한군의 주요 보급기지로 여겨졌고 제187공수연대를 낙하시키는 공수작전까지 계획되었지만, 막상 3월 21일 제1기병사단이 춘천에 들어서자 춘천은 텅비어 있었다. 그저 약간의 은닉 물자를 찾을 수 있었을 뿐 이었다. 3월 말까지 유엔군은 목표로 한 아이다호 선까지 도달하였다. 포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중국군과 북한군은 38도선 이북에서 리지웨이 장군은 38도선을 넘는 위력정찰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에게는 한 시간 이상이 필요없다!!
그 사이,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는 용기 Courageous 라고 불리우는 새 작전이 발동되어 서부에서는 임진강 일대까지 동부에서는 양양부근 까지 북진하는 데 성공했다. 3월 27일, 리지웨이 장군은 여주에 있는 사령부로 휘하의 군단장과 사단장을 소집했다. 물론 스미스 장군도 참석했다. 여기서 장군은 소련이 몽골 계통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을 투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소개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소련군의 등장은 현실화되기 어렵지만 최악의 경우,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제8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절대 기밀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군은 또한 미국 정부가 휴전 회담을 제의하게 되면 제8군은 지역방어만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맞을 수 있으므로 이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전선을 최대한 북쪽으로 밀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러기드 Rugged 작전을 구체화했는데, 러기드는 ‘요철’ 이라는 뜻으로 그 동안의 진격으로 울퉁불퉁해진 전선을 정리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는 언론이 지은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였는데, 이 곳은 적군의 보급과 지휘의 중추였다. 장군은 이 지역을 제압하지 않는 한 적군은 쉽게 반격에 나설 것으로 보았고, 이 지역을 목표로 한 돈트리스 Dauntless 작전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진강에서 화천 저수지를 거쳐 양양에 이어지는 캔사스 Kansas 선까지 진출하는 러기드 작전이 성공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또한 그 전에 중국군과 북한군의 반격이 벌이질 확률도 높았다. 원래 이 작전은 한국군 제6사단을 좌익으로, 제1기병사단을 우익으로 하고 제1해병사단을 예비대로 공세를 가할 생각이었지만 리지웨이 장군은 불의의 반격도 대비하고, 여차하면 러기드 작전을 돈트리스 작전까지 연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제1기병사단을 더 전투력이 강한 제1해병사단으로 교체했다. 이 때 리지웨이 장군과 호지 장군은 스미스 장군에게 갑작스러운 변경을 통보하면서 하루만에 작전 준비가 가능하냐고 묻자 대답은 이러했다.
“해병대의 구호 중에는 한 시간 이상은 필요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구호는 해병대에게 힘든 일은 쉬운 일보다 30분 더 걸리는 일이고, 불가능한 일은 힘든 일보다 30분 더 걸리는 일이니, 한 시간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 ‘해병대다운’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리지웨이와 호지 장군은 감사했지만, 해병대원들은 갑작스러운 출동에 불평하면서도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에 진격을 시작했다.
한 편 당시 제1해병사단은 사상 최초로 M1951이라고 부르는 방탄복을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지급했는데, 덕분에 부상자가 줄어들어 사기가 높아졌다. 소련군은 결국 공군과 방공군만 비공식적으로 투입했을 뿐, 지상군은 투입하지 않았다. 대신 장비 지원을 늘려 중국군도 초기의 다채로운 장비에서 탈피하여 점차 소련제 장비로 통일되고 있었다.
맥아더의 해임과 화천댐 공격
한편, 해병사단이 공격을 시작 한 바로 그 날,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함께 회의를 열고 맥아더의 해임을 결정했다. 후임으로는 리지웨이를, 그리고 제8군 사령관에는 제임스 밴플리트 James A. Van Fleet 중장을 임명하기로 하였다. 마침 프랭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한국에 가 있었으므로 그가 동경 시간으로 4월 12일 오전 10시, 워싱턴 시간으로는 11일 오후 8시에 해임 소식을 그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가장 실망한 이는 이승만이었고, 한국 주둔 영국군 등 일부 연합군 부대는 평화의 전조라며 기뻐하고 축포까지 쏘기도 했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 4시, 리지웨이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직무를 인수했고, 밴플리트는 14일 12시 30분 대구 공항에 도착하여 제8군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렇게 맥아더의 시대는 가버렸다.
스미스 장군 역시 이 때쯤 월말에 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 캠프 팬들턴 사령관으로 가야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후임자는 제럴드 토마스 Gerald Thomas 소장이었는데, 그는 과달카날 전투 때 사단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워싱턴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해병대는 화천댐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는데, 장진호의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댐을 공격한다는 사실은 장병들을 조금 찝찝하게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전 때의 전우이자 ‘네 번째 연대’ 인 한국군 제1해병연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우익을 맡았고, 좌익은 제7해병연대가 중앙은 제5해병연대가 그리고 제1해병연대는 예비대를 맡았다.
하지만 중국군이 4월 9일 오전4시, 화천댐의 수문 10개를 모두 열어 북한강의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해병사단의 오른쪽에서 진격하고 있는 한국군 제6사단은 적지 않은 병사와 장비가 떠내려갔고, 미군 포병진지도 하나도 수마에 휩쓸렸다. 물론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사태를 걱정했던 제7해병연대는 낮에 차량으로 이동하는 관례를 깨고 1개 중대를 뽑아 밤에 개인 보급품과 탄약을 매고 밤에 행군 시켰지만 한 발 늦고 만 것이었다.
이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댐을 점령해 수문을 닫으려 했지만, 지형상 야포지원을 받기도 어려웠고 안개가 짙어 항공지원도 불가능한데다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까지 겹쳐 실패하고 말았다.
해병대의 북진 그리고 중국군의 4월 공세
이 때 사흘 동안 완강하게 방어한 중국군의 중대장은 해병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년 후,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군은 이 전투의 중국군 지휘관을 보고 싶다는 요구를 했는데, 자리에 나타난 인물은 22세에 불과한 자오즈리 趙志立 였다. 중국군은 그를 위해 서류가방과 안경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의 방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홍수도 겹쳐 해병대의 화천댐 공격은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병대는 다시 38선을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맥아더의 해임 직후인, 4월 13일,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의 영향으로 해병대 증강안이 부상했지만, 마셜 국방장관은 이를 반대했다. 한편 신임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부임하자마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중부전선을 김화 남쪽과 화천 북쪽을 연결하는 와이오밍 선으로 끌어올리고 동부전선에서는 양구와 인제를 잇는 앨라배마 선까지 진격하며, 전체적으로는 적의 보급 중심인 철의 삼각지대에 대한 공격 태세까지 갖추자는 것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와이오밍 선에 대한 공격은 4월 21일, 앨라배마 선에 대한 공격은 4월 23일 시작하겠다고 리지웨이에 상신했다. 리지웨이는 앨라배마 선을 인정하지 않고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점에서 철원과 화천 저수지를 지나 동해안의 천포리에 이르는 라인을 와이오밍 선이라고 수정하여 작전을 승인했다. 4월 21일 해병사단은 한국군 제1해병연대를 우익으로, 좌익에는 제7해병연대를 중앙은 제5해병연대를 그리고 제1해병연대는 예비대를 맡겨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해병대는 중국군 포로를 통해 바로 다음 날인 22일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역정보인지도 몰랐지만 장진호에서는 그들의 진술은 사실이었기에 대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4월 22일 오후 6시, 사단은 진격을 멈추었고, 다음 날 오전 6시 진격을 재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바로 직후에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포격이 해병대 진지를 강타했고, 대병력이 피리소리, 북소리, 꽹과리 소리와 함께 돌진해왔다. 이 때, 제7해병연대 1대대 C중대 소속 21세의 허버트 리틀턴 Herbert Littleton 일병은 수류탄이 진지에 떨어지자 몸을 날려 동료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2009년 12월, 그의 고향인 아이다호 Idaho 주, 남파 Nampa 시의 우체국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중국군의 공격은 해병대 좌익을 맡은 한국군 제6사단에 집중되었고, 사단은 압도적인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붕괴되고 말았다. 스미스 사단장은 예비대인 제1해병연대를 좌익에 배치하여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한국군 제6사단의 패주병들이 밀려든다는 보고를 듣고는 이렇게 명령했다.
“싸울 의사가 있는 자들은 계급을 불문하고 싸우게 하라. 그렇지 않은 자는 포로로서 다루어라
스미스 장군. 한국을 떠나다.
하지만 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해병연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잠시 후퇴하기는 했지만 곧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에 나섰고, 한 중대는 150명의 부대원 중 40명만 남았을 정도였다. 이에 놀란 호지 군단장이 후퇴를 명했지만 거부해서 제1해병사단 참모들이 설득해야만 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병사들이 놀랄 정도로 계속되었다. 스미스의 장군의 마지막 날인 24일 공중지원이 이루어지고 해병대가 전열을 정비하고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자 중국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4월 24일, 전투 중이라 사단장의 이취임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군악대의 연주 속에 장군기를 내리고 올림으로서 사단장의 퇴임과 부임을 표시하였다. 스미스 사단장은 10개월 간 인천, 서울, 장진호, 원주, 회성, 홍천, 춘천, 화천에서 한국전쟁의 고비가 되는 전투를 치른 장병들에게 짧은 이임사를 남기고 25일에는 춘천의 비행장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예상보다 일찍 사단을 떠나게 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차기 해병대 사령관으로 내정되어 있던 셰퍼드 중장 등의 견제 때문이 아닐까 싶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김해공항에서 스미스 장군에게 은성2등 무공훈장을 수여했고, 그는 동경과 미드웨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근처 알라메다 Alameda 해군기지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했다. 휴가를 얻은 그는 모교인 버클리 대학과 샌프란시스코 프레스 클럽 등에서 초청 연설을 했고,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해병대 본부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본부는 그에게 휴가가 끝나는 대로 팬들턴 기지로 부임하라고 명령했다. 중장으로의 승진도 보류되었다. 군내의 ‘정치’ 때문이라고 짐작한 그는 다시는 한국전쟁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팬들턴 기지 사령관 직에 충실했다. 특히 경험을 살려 기지 내에 한국의 지리와 마을 본따 만든 ‘코리아 빌리지’를 만들어 한국 파병을 앞둔 장병들의 훈련에 열중했다. 한국 전쟁이 끝날 때인 53년 7월에 그는 대서양 지구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한 달후에 중장 계급장을 달았다. 55년 9월, 그는 셰퍼드에게 사령관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전역 신청을 했고 전역하는 날에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부인 에스터가 계급장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정원이 있는 집을 사서 은퇴 생활에 들어갔지만 전사한 부대원의 유가족들에게는 손수 편지를 썼다고 한다. 부대원들의 묘소도 자주 찾았다. 1964년 5월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그도 1977년 성탄절에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 그의 외손녀인 게일 쉬슬러 Gail Shisler 여사가《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For Country and Corps》란 제목으로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냈지마 안타깝게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
현리 전투와 해병대의 후퇴
제1해병사단은 중국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한국군 제6사단의 붕괴로 측면이 노출되면서 북한강 남안 즉 춘천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군의 공세는 가공할 만 했지만 역시 보급과 화력의 열세가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일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고 중서부 전선에서 60km, 중동부 전선에서는 35km 정도 진격했지만 8만 명 이상의 엄청난 전사자를 대가로 치러야 했다. 유엔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중국군의 4월 공세를 기본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각 사단에게 연대 규모의 적극적인 위력 정찰활동을 지시하고 다시 북진을 준비했다. 하지만 뜻 밖에도 중국군이 다시 5월 중순 공세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스미스 장군이 떠난 제1해병사단은 다시 알몬드의 제10군단 예하로 들어갔고, 제2사단과 함께 춘천-홍천 축선 방어를 맡았다.
유엔군 지휘부는 중국군의 공격이 서울을 목표로 서부와 중부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중국군 지휘부는 화력과 기동력이 약한 한국군이 주로 맡고 있는 동부전선에 주공을 두었다. 해병대가 맡고 있는 춘천 방면으로는 중국군 제39군이 소양강을 도하하여 양동작전을 실시했다.
5월 16일 저녁 8시, 동부전선에서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의 가장 수치스러운 참패로 기록될 현리 전투의 시작이었다. 이 전투로 한국군 제3군단은 붕괴되었고,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군단이 해체되는 치욕까지 겪고 말았다. 사실 이 전투의 참극에는 알몬드의 판단 착오와 고집도 한 몫을 했다. 제3군단 보급소가 위치한 하진부리에서 현리까지의 구간에는 속사리재, 운두령, 상배재, 고사리재, 오미재(오마치) 등 굴곡이 심하고 지형이 험한 5개의 고개가 있으며 이 중에서도 주저항선에서 약 7~10km 후방에 있는 오미재와 고사리재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였다.
특히 오미재는 대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5km 지점에 있는 고개로서 만일 이곳을 적군이 장악하면 현리 일대에 배치된 제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가 차단될 뿐 아니라 기동장비의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이유로 제3군단에서는 이 고개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제10군단의 작전지역에 포함되고 말았다. 이에 제3군단장 유재흥은 5월 4일, 중국군이 즐겨 사용하는 우회침투 전술에 대비하고 주보급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오미재에 군단 예비인 제9사단 제29연대 1개 대대를 배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유재흥은 이 같은 행동을 취하면서 알몬드와 사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확인한 알몬드 중장은 “어찌하여 나의 책임지역 내에 한국 제3군단이 부대를 배치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오미재에 배치된 부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유재흥은 “오미재가 우리 군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형이므로 우리가 경계하는 것이며 이 조치가 귀 군단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귀 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에서 이곳에 병력을 배치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경계부대를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알몬드는 항의를 계속하였고, 제8군 사령부에 이를 보고하였다. 이때 제8군은 오미재에 관한 경계조치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곳이 제10군단 작전지역인 점을 감안하여 제3군단에게 “오미재의 병력을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그 틈을 노린 중국군의 침투로 제3군단은 무너지고 말았다. 어쨌든 제10군단의 오른쪽을 지켜줄 한국군 제3군단의 붕괴로 제10군단 역시 전선을 재조정 할 수밖에 없었고, 해병대 역시 홍천 쪽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중국군 공격 역시 보급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딛히고 말았다. 이제 다시 북진할 때였다. 해병대에게 주어진 목표는 양구였다.
도솔산 전투 : 한국 해병대의 승리
중국군의 5월 공세가 잦아들자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장차 예상되는 휴전 회담에 대비해 임진강입구–전곡-화천저수지-양구-인제-양양을 잇는 캔사스 Kansas 선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이 선은 훗날 휴전선과 거의 동일시 된다. 그 일환으로서 제1해병사단은 양구군 동면과 인제군 서화면에 걸친 도솔산 확보에 나섰다. 이 지역은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는 요지이며,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진격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 돌출된 산악지대로 인해 적에게 포위를 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제1해병사단은 이 산악지대에 24개의 목표를 선정하여 6월 3일, 제5해병연대를 앞장세워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8목표 전방의 무명고지를 점령하는데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토마스 사단장은 당시 화천 저수지 일대와 소양강가에서 수색전을 전개하고 있던 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해병연대를 투입했다.
김대식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는 6월 4일 공격을 시작했는데, 야간전투까지 감행하는 등 그야말로 맹활약해서 1122고지와 1218고지를 차례로 점령하고 12일에는 대암산에 진출하여 제5해병연대와 연결하여 캔사스 선을 확보하였다. 그 사이 우측의 제5해병연대는 15목표를 좌측의 제7해병연대는 24목표를 점령했다.
이어서 15일에 한국군 제1해병연대는 2단계 공격을 개시하여, 3대대 10중대와 11중대는 19일 새벽 5시 30분, 22목표이자 최종 목표나 다를 바 없는 도솔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병사들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몇 몇 대원들은 나무에 ‘무적 해병’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16일간 벌어진 이 전투에서 연대는 2,263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42명을 생포했으며 다수의 화기를 노획했지만 210명의 전사자 등 700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를 대가로 치렀다. 국군의 연패로 마음이 상해있던 이승만은 여군 훈련소장 김현숙 중령에게 고추장 19상자를 해병연대에 보냈다. 매운 고추장을 먹고 더 용감히 싸워달라는 뜻이었다. 20여일 후 이승만은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사단 예비대가 되어 홍천강으로 물러나 휴식과 부대 정비를 하고 있던 연대를 방문해 포창장과 ‘무적 해병’ 이라는 휘호를 수여했다. 현재 양구군 동면 비아리 산 1-2 번지에는 도솔산 전투위령비가 서있는데, 매년 6월 중순이면 양구에서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도솔산 전적 문화제’가 열린다.
펀치볼 전투
이제 전선은 1차 대전의 참호전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제1해병사단은 양구 북쪽의 펀치볼(亥安분지) 북쪽 고지들을 연결한 헤이스 Hays 라인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펀치볼 공격에 앞선 8월 18일, 이 곳의 동서 고지군들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름도 처절하기 그지없는 피의 능선 전투였다. 이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자 제1해병사단도 공격에 나섰다. 한국군 제1해병연대도 홍천을 떠나 8월 28일 사단과 합류했다. 이 곳에는 중국군이 아닌 북한군 제1사단이 버티고 있었다. 해병대로서는 서울 탈환전 이후 거의 1년 만에 북한군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토마스 소장은 좌익에 한국 제1해병연대를, 우익에 제7해병연대를 배치하고 8월 31일부터 공격에 나섰다. 두 나라 해병대는 지형상의 불리를 무릅쓰고 북한군의 견고한 진지를 공격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돌멩이보다 많은 지뢰, 적의 완강한 저항과 집중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해병들은 사단 포병과 제1해병항공단의 헌신적인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치열한 전투 끝에 한국 해병대는 김일성 고지라고 불리운 924고지와 모택동 고지라고 불리운 1026고지를 점령했고, 제7해병연대도 주어진 목표를 완수했다. 9월 5일에 끝난 1단계 전투로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요지인 이곳에서 물러나 간무봉 쪽으로 후퇴하였고, 해병대는 펀치볼 북쪽으로 진격하여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게 되었다.
사단은 다시 9월 8일에 하달된 제한공격 지침에 따라 부여된 북측 간무봉에서 사단 정면에 뻗은 능선상의 749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이 공격은 간무봉 일대의 적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펀치볼에 대한 적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전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단은 1단계 작전을 끝낸 후 약 1주간의 부대정비를 한 다음 9월 1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9월 20일까지 격전 끝에 749고지를 점령하고 펀치볼 북쪽 5km에 있는 812고지까지 탈취하였다. 이 전투에서 근거리에서 아주 정확한 M26전차의 90mm 전차포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 전차포로 수많은 북한국의 벙커와 참호가 파괴되었고, 한 전차 중대는 하루에 720발을 발사했을 정도였다. 물론 몇 대는 북한군이 매설한 대전차 지뢰로 궤도와 바퀴가 파괴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지기도 했다. 사단은 812고지 탈취로 작전목표를 달성하고 해안분지를 완벽하게 확보하게 되었다.
펀치볼 전투 기간 제1해병사단은 426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1,026명의 부상자를 내고 적군 2,799명을 죽이고 557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의 프레데릭 마우서트 Frederick W. Mausert 병장은 중상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의 진지를 격파하고 사격을 자신에게 유도하였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마우서트 병장은 이 전투에서 유일하게 명예훈장을 받았다.
2단계 작전에서 사단은 884고지에 224명의 수색중대와 36톤의 보급품을 헬리콥터를 이용해 투입하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는데, 후송이나 정찰, 수송이 아닌 본격적인 헬리콥터 투입은 전사상 처음이었다. 27일에는 야간작전에도 투입되었다. 이 작전은 미국의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고, 태평양 지구 해병대 사령관 셰퍼드 중장과 알몬드의 후임으로 제10군단장이 된 바이어 소장도 해병대의 제161헬리콥터 수송대대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해군에 헬리콥터 상륙함이 생기게 되지만 이 이야기는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양구군 동면 팔랑리 1471-5번지에 펀치볼 지구 전적비가 서 있지만 실제 전투지역은 비무장지대 내에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그리고 계속되는 전투
1951년 6월 이후, 거의 10개월간 펀치볼 일대에서 적전을 수행하던 제1해병사단은 1952년 3월, 서울방어에 중점을 둔 제8군의 전투부대 재배치 계획에 따라 파주의 장단 지구로 이동했다. 소속도 제1군단으로 변경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판문점 우측 고랑포였고, 사단에 배속된 한국 제1해병연대는 판문점 좌측 사천강 전초기지를 맡았다. 이 때쯤 사단장도 존 셀든 John Selden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사단 입장에서는 원산 상륙 이후 지긋지긋했던 고산지대에서 벗어난 셈이었지만 자신들의 전문분야인 상륙작전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대장으로 승진한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제1해병사단을 중국군의 배후에 상륙시켜 포위하는 작전을 상부에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이 작전이 성공하면 아군의 완벽한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이미 제한된 전쟁을 선택한 워싱턴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소련이 더 직접적으로 개입할 우려도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실력이야 어찌되었건 ‘북진통일’만을 원했던 이승만은 밴플리트 장군을 좋아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태릉의 육군 사관학교에는 밴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몇 달간의 소강상태를 보낸 해병대는 1952년 8월에 판문점 동남쪽 6km 지점에 있고 229m 높이인 백학산과 판문점 동북쪽 7km 지점에 있는 236m의 대덕산 사이에 있는 벙커 고지에서 중국군과 다시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벙커고지는 중국군이 장악한 대덕산에서 감제당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해병대로서는 백학산의 주진지를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이 고지를 확보해야 했고, 반대로 보면 중국군도 마찬가지 입장이었기에 전투는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고지는 휴전회담 장소인 판문점의 안전을 위해 설정된 사격제한지역과 인접해 있어 머리수보다 화력에 의존해야 하는 해병대에게는 더 불리한 전장이었다.
낮에는 해병대가 밤에는 중국군이 점령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졌고 8월 9일부터 16일까지가 가장 치열했다. 총 458회의 출격을 감행한 제1해병항공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7차례에 걸친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시켰지만 해병대도 6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희생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도 그 전처럼 엄청난 수류탄전이 벌어졌고, 제5해병연대 2대대의 로버트 시마넥 Robert Simanek 일병이 몸으로 수류탄을 막아 사후에 명예훈장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겨울
9월 18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제1해병사단을 방문하여 부대 사열을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필자도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제1해병사단은 고참병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신병들이 대신해서 그 전 같은 전투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대신 장비는 더 좋아졌는데, 대표적인 장비가 M26 대신 들어온 M46패튼이었다. 미 해병대는 여분의 장비였던 M4 셔먼을 한국 해병대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서 한국 해병대는 처음으로 전차중대를 갖추게 되었다. 미 해병 전차대의 엘리오트 레인 Elliot Laine 소위가 사격과 운전, 수리법 등 전수해 주었다.
제1해병사단은 10월 27일에 야간전투까지 감행하여 후크 능선을 탈환했고, 28일에는 판문점 북동쪽의 외곽진지를 탈환하기는 했지만 큰 전투는 없었다. 12월 초에는 한국전쟁 종전을 공약을 내세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하였고, 전쟁은 점차 파장 분위기로 흘러갔다.
여기서 눈을 워싱턴으로 돌리고 시간 역시 반년 전으로 돌려보자. 맥아더의 해임 직후인, 4월 13일,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의 영향으로 해병대 증강안이 부상했지만, 마셜 국방장관은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두 달 후인. 6월 19일, 미 상하양원은 해병대 병력을 21만 2천명에서 40만 명으로 확장하자는 의안을 가결했다. 장진호에서의 고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사실 2차 대전 후 해체되었던 제3해병사단이 팬들턴 기지에서 이미 1월 7일에 재건되어 훈련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사단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스미스 장군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고 제1해병사단에 보충병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겨울이 찾아왔다. 1952년에는 백마고지 전투로 대표되는 고지전들이 계속 벌어졌지만 적어도 겨울에는 큰 전투가 없었고, 주 전장은 오히려 판문점으로 옮겨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베가스 고지 전투와 군마 레클리스
53년 3월 22일, 벙커고지에 대한 중국군이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해병대는 이를 격퇴하고 112명을 살상했지만 이 전투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26일 부터 고랑포 서북쪽의 전초기지인 베가스 Begas 고지와 그 서북방 2.5km 지접의 레노 Reno 고지 및 그 서남방 500m 지접의 카슨 Carson 등 100m 안팎의 전초진지에서 5일 동안 혈전을 치렀다.
특히 29일에는 베가스 고지 위의 중국군을 격퇴하고 457명을 살상한 전투가 가장 치열했는데, 이 일련의 전투에서 해병대는 추정사살 1,700여 명, 포로 4명, 진지 앞 유기 시체 539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대신 116명의 전사자와 89명의 실종자, 부상 801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5일간의 전투에서 해병사단은 두 가지 특별한 화제 거리를 남겼다. 3월 28일 베가스 고지에 이어 레노 고지까지 점령당했는데, 적의 기관총 진지 앞에서 분대원이 부상당하자 분노한 제7해병연대 2대대 소속, 다니엘 매튜스 Daniel Mathews 병장이 그를 구하기 위해 소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여 그를 구하고 적의 기관총좌까지 침묵시켰으나 결국 중국군 기관총 사수와 격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만 사건이었다. 이 전공과 희생정신으로 하사로 추서되었고, 1년 후인 1954년 3월 29일 명예훈장을 받았다.
두 번째 화제거리는 사람이 아닌 말 이야기다. 해병대는 전투 중 뚝섬 경마장의 마주인 김흥문씨에게 259달러를 주고 ‘아침해’라는 이름의 경주마를 사서 탄약과 무잔동포 운반에 투입했다. 그런데 이 말은 몬테 카시노 전투의 참전곰 보이첵 처럼 포탄도 포성도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려 386회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해병대원들은 이 전우에게 무모하다는 뜻의 레클리스 Reckless 라는 새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레클리스는 해병대가 한국을 떠날 때, 같이 미국으로 떠났으며, 정부가 수여하는 상이기장, 종군기장,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예까지 누렸다. 레클리스는 1959년 하사가 되었고 1960년에는 전역했다. 1968년 병사하자, 해병대는 엄숙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한국전 정전 60주년(2013년)을 맞추어 버지니아 주 콴티코 기지에 동상까지 세웠다.
해병대의 마지막 전투 그리고 종전
그 사이 주전장이 된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은 옥신각신하면서도 포로 교환 등 휴전이 느리게나마 현실화되고 있었고, 해병대원들은 고아원을 방문하며 위문품을 전달하기도 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4월 8일에는 벙커고지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이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틀 후인 4월 10일에는 해병대원들은 물론 사실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끝났다는 중국군의 선전 방송까지 듣기도 했다.
4월 말, 제1해병사단은 대부분의 전선을 미 육군 제25사단에게 인계했지만 찰스 맥코이 Charles McCoy 중령이 지휘하는 전차대대와 일부 부대는 계속 남았고, 전차대대의 1개 중대는 제25사단을. 2개 중대는 그 사이에 판문점 부근으로 이동한 터키 여단을 지원하게 되었다.
5월 15일, 중국군은 칼슨 고지와 베를린 고지로 대공세를 시작했는데, 이 전투에서 전차대대는 여기저기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며 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이 전투에서 포탄이 바닥나면 장갑차들이 포탄을 싣고 밤새 보급을 하곤 했다.
그 후에도 사소한 전투는 계속 이어졌으며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이승만의 ‘결의’와 휴전 반대 관제 데모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국방부 시계’는 ‘시차’는 있었지만 돌아갔다. 휴전협정 조인 직전인 7월 25일, 베를린 고지에서 해병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제7해병연대 2대대 소속이자 멕시코 계 미국인인 암브로시오 길렌 Ambrosio Guillen 하사가 진지를 방어하면서 부상자를 대피시키려고 적의 화력에 자신을 노출시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 공적으로 그는 한국전쟁에서 해병대의 마지막 명예 훈장 수상자가 되었다. 이 고지에서도 해병대는 적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제1해병사단은 휴전 후 1년 반이 지난 1955년 3월 14일, 작전지역을 한국 제1해병연대가 모태가 되어 두달 전에 자신들과 같은 단대호가 붙은 사단으로 승격된 한국군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하고 그들의 임무를 다했다. 1964년에 경기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4리 산8번지에 세워진 한미해병참전비가 두 나라 해병대의 투혼과 전우애를 기리고 있다.
3년간의 전쟁기간 동안 무려 3만 544명의 해병이 죽거나 다쳤지만 해병대는 말 그대로 한국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았기에 이후에는 해병대의 존재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