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미사일 발사를 둘러싼 어수선한 동북아 정세에서 남북장관급회담마저 파국으로 치달았다. 애초 성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북측 대표단이 예정대로 부산을 찾음으로써 장관급 회담은 국제정세에 흔들리지 않는 남북관계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틀간 머리를 맞댄 남북 장관들은 결국 의견차이만 확인한 채 냉랭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장관급 회담의 결렬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흔히 DJ의 햇볕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진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상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왔다. 이번 장관급 회담의 결렬은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최종 종착지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중의소리>는 연속기획으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재검토한다. / 편집자주
북 미사일 발사를 둘러싼 정부의 대응 방침이 여러모로 '국민의 정부'때와 비교되고 있다.
미사일이 발사된 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 고위 당국자들의 접촉자리였던 장관급회담은 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협상 자세로 결렬됐고,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각국면 속으로 접어들고 있다.
문제는 정부의 호들갑스러우면서도 경직된 대북정책.
'인도적 직원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각계층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부터 쌀 50만t 차관 제공과 비료 10만t 추가 지원을 미사일 문제와 연관시켜 지원유보의 입장을 선언했다.
회담이 시작된 후에 북측은 쌀지원과 경공업 원자재 제공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답답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DJ, 서해교전 때도 대북지원 중단안해..북 '유감표명' 이끌어내
사실 이제까지 남북간에 이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왔어도 정부가 쌀과 비료라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을 중단 한 적은 없었다.
2002년 서해교전 때는 남북 함선간 교전과 사상자 발생 등 긴장의 수위가 높아졌지만 당시 국민의 정부는 단호한 대응을 하면서도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거나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을 하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과 북한내 경수로 사업, 북으로 들어간 남측 선박의 비료 하역 작업은 그대로 진행됐다.
되려 김 전 대통령은 "일부에서 지나치게 국민을 자극하고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듯한 그런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힘을 길러 비축해야 하지만 그러나 전쟁으로 끌고 가는 그러한 언행은 삼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당부했다.
DJ 정부의 유화적인 조치는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인 김령성 내각 책임참사의 전격 '유감'표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남북관계는 전보다 더 활성화됐다. 당시에는 각종 회담을 소화하기도 벅찰 정도로 남북간 접촉이 끊이질 않았다.
한국외대 이장희 교수는 "서해교전과 당시 지금보다 더 심한 국내외 보수세력의 대화중단 압력을 받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국민과 국제 사회, 북을 설득했다"며 "현 참여정부는 국내외 보수세력의 압력에 지나치게 휘둘려 미사일 문제를 너무 과거 냉전시대 흑백논리에 입각해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미사일 국면에 직면해 보여지고 있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두고 일각에서는 "과거 서해교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보인 입장을 보면 현재 참여정부의 대북 정책이 어떤지 알 수 있다"며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분위기다.
2002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 대통령은 '국민의정부'의 '대북 저자세' 문제를 지적하면서 서해교전에 따른 부분적인 대북교류중단 필요성을 제기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북의 국제적,외교적 관례를 벗어난 행동이나 도발,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정부가 관대하게 침묵해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참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다"며 "햇볕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 '국민의정부'는 대북 정책의 지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 현 참여정부는 대북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신랄한 평가를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