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평읍으로 들어설 때
도로명이 석봉로이다.
석봉이면 한호 한석봉의 호인데???
조선 선조시대 명필가
한석봉이 대체 가평과 무슨 관련이 있길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헛웃음 짓고 말았다.
어느 분의 글에는 악평으로
대과급제도 못했고
벼슬을 늦게 준 곳이 가평군수였는데
임란 직후라 군민구제에 실패한 것을
말아먹고 쫓겨났단다...
한석봉의 일화가 생각나서 자세히 읽어보니
개성사람이었다.
인용해보면
“글씨로 얻은 이름값에 비해 벼슬로서는 그리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씨만 잘 썼기 때문이다.
......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 때 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었고, 그 공로로 왜란 후 선조가 경기도 가평군수로 보냈지만, 글 쓰는 것과 지방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되어 강원도(북한) 통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비슷한 예로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현감 맡고 대차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삐딱선을 타서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개판으로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당한 뒤 이듬해(1605)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무위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신은 사람에게 모두를 베풀지 않는 듯 싶다.
세상에 이름 알리고 나면 정치에 나서고
정치판에서 곧 사라지는 걸 보면 그렇다.
여하튼 가평읍 도로명 작성할 당시
가장 두드러진 가평 연고자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아예 체육관 수영장도 한석봉의 이름을 붙였다.
글을 잘 썼지 그 당시에 수영이나 해 보았나?
그냥 그렇다.
청정지역
가평고을에서
구석 구석
걷고 돌다 보니
점차 적응해가면서
금새 4주가 흘렀다.
가평을 나서는 금요일
치과치료로 오전에는 치주과에서
오후에는 보철과에서 좀 힘든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7시 가평역으로 나섰고
시간 반 달려서 터미널역에 도착했다.
오전 치료를 마치고 뒷 산으로 올랐다.
오후 치료까지 산책이나 해야지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산길을 걷는데
임플란트 식립수술하던 날 생각이 난다.
수련의가 마취를 마치고 나서
조용히 권했다.
위에 치아 둘만 시술하기로 하였는데
아래 치아도 하나 더 하시면 어떻겠냐고
이미 16년 전에 아래 어금니 하나 도망갔고
없는 채로 여태 살아왔다.
아래 하나 더 심는 것은
이 몸에는 사치인 것 같네요...
그냥 16년 전 상태로만 심고 싶어요.
이렇게 거절하였더니
7개에서 4개로 줄어들었다.
이도 다른 치아치료비용까지 더하면 경차 한 대 값이 넘는다.
이제 운전도 내려놓았고 BMW로 일상 살아가는데
뭐 소형차 값을 내 몸에 투자할 그런 가치가 있을까?
여하튼 오후에 치아 하나 살리는데 고통이 심했다.
다시 보철치료를 해야 하는데 이도 보험이 안 되니
돈 백은 그냥 들어간다.
치과가 이 몸으로부터 고통과 돈을 마구 잡숴댄다.
마취상태로 다음 예약일정을 기다리는 데
앞 좌석 할머니와 간호사의 대화가 귀에 걸린다.
고령이라서 충치 치료가 어렵다는 결론인데
살펴보니 80대 아니 더 드신지도 모르지만
늙으면 치과치료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는 임플란트 몇 개 더 하라니
아직은 쓸만한 상태인가 보다...
얼얼한 채로 전철에 오르고
집에 도착하니
식욕이 마구 발동한다.
보따리 풀고
허기도 채우고
잠시 컴 앞에 앉았다.
올 한 해도 한 달 한 주 정도 남았다.
이 소중한 날들을 어찌 보내야 할까?
열심히 등산지도를 찾아보고
이제 저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올라보기는 해야지!
주말만이라도
숙소 근처의 칼봉산, 연인산, 명지산으로
올 한 해를 채워보자!
이번 주말에는 칼봉산으로
걸어서 오르고
걸어서 내려와 보자
오로지 두발로만~~~~~
그 다음에는 연인산으로, 명지산으로
두 발이 도와줘야 할 터인데~~~~~~~~
첫댓글 칫과치료중엔 심한활동을 ㅠㅠ
천천히 글을읽어 봅니다
나이 들어 여러 군데 고장이 나는 걸 저두 느끼며 세월을 보듬어삽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다가도 문득 서글퍼지는 이유도 어쩔 수 없네요.
치과치료 잘 받으시고 등산도 즐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