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사람이야
김 광 화
여행은 어디로 갔느냐보다 누구와 갔느냐와 누구를 만났느냐가 더 오래, 더 기분 좋게 기억되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만남이 기분 좋은 장소로 연결되고, 그때의 기억들은 손을 잡고, 마음에 닿고, 인연으로 엮여서 작은 실마리만 있어도 실타래가 되어 줄줄이 이어져 나와 슬며시 미소짓게 된다.
어느 잡지 책에서 ‘처음책방’이라는 서점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서점도 아니고 책방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정겨웠고, ‘첫사랑’, ‘첫눈’, ‘첫 키스’……, 가슴 몽글거리게 하는 ‘처음’이라는 단어에 끌려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겨울의 끄트머리에 제천으로 향했다.
삼한 시대의 3대 저수지 중 하나인 의림지를 지나 한적한 주택가 끝에 ‘처음책방’이 다소곳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모습의 책방일까? 설렘으로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책방은 불이 꺼진 채 조용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 출입문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밝은 목소리의 안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구미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더니 바깥주인이 회의 중이면 전화 연락이 안 되겠지만 해보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책방주인이 직접 오시는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라면서 환성을 질렀다. 회의가 잡혀 있었는데 조금 미루고 달려왔다고 했다.
“잡지에 실린 모습과 똑같아요!” 감사한 마음을 아부로 대신하자 “에이~, 실제가 더 났죠.” 한 수 위의 농담까지 얹으셨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월이 느껴지는 책들이 천정까지 가득하게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묶어놓은 책들이 있어서 이유를 물어보자 공간이 너무 좁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으로 정리 중이라고 했다.
어수선하지만 한번 돌아보라는 책방주인 안내에 따라 서가를 따라 돌면서 왜 ‘처음책방’이냐고 물었더니 세상에 처음 나오는 책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아 ‘처음책방’이라고 했단다. 단행본은 증쇄를 거듭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가고, 창간호에는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창간사를 보면 알 수 있어 초판본과 창간호는 모두 우리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고 설명을 해 주셨다.
서가를 돌아보면서 대학 시절에 열심히 읽었던 「창작과 비평(창비)」에 환호하고, 비닐에 겹겹이 싸서 보관 중인 「진달래꽃」에 감동하고, 최인훈의「광장」,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박경리의 「토지」…… 등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책들이 모두 초판본 혹은 창간호라니! 옛날 ‘우량아 선발대회’에 선발된 어린이가 표지로 나와 있는 책을 보고는 웃음이 빵! 터졌다. 거의 50대가 넘었을 주인공이 이 책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남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우연히 시작했다는 책방주인의 깊은 뜻이 존경스러웠다.
사연이 담겨있고, 역사가 숨어있는 책방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일부러 회의까지 미루고 오신 분을 더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 우리를 끝까지 배웅해 주던 책방주인과 ‘처음책방’이 한 장의 사진으로 가슴속에 콕! 들어왔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면서 정원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6월에 거창 ‘허브빌리지’에서 또 한 번의 기쁜 만남이 있었다. 농촌살리기 프로젝트로 거창의 젊은이들이 만든 ‘허브빌리지’는 전문가의 손길로 예쁘게 다듬어진 곳이 아니어서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마치 「타샤의 정원」에 온 듯 정겨웠다.
줄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6월 초순인데도 너무 빨리 찾아온 더위에 지쳐 ‘허브빌리지’ 카페로 들어가니 카페지기 아가씨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우리를 보면서 시원한 카페에서 마음껏 쉬라며 차가운 냉수를 건넸다. 빈속이라 커피 마시기를 꺼리는 우리에게 “아이고, 빈속에 카페인이 들어가면 큰일 나요. 사람도 없이 에어컨 돌아가는 게 미안했는데 잘 오셨어요.” 하더니 인생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안내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줄장미가 예쁜 계단에서 포즈를 취하자, “아니, 어디서 모델 하다가 오셨어요?” “와! 그렇게 자연스러운 포즈는 어디서 배우셨대?” 카페지기의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여름날 잘 여문 봉선화 씨가 터지듯 사춘기 소녀들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7월이면 운동장 절반이 보라색 라벤더 정원이 될 거라는 카페지기 말에 같이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라벤더가 연상되는 보라색 손수건을 샀다.
카페지기가 “너무 맛있는 집이라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인다.”며 예약까지 해준 맛집은 또 카페지기만큼이나 친절한 주인이 반겨 주었다. 반찬마다 정성이 가득가득 들어있는 밥을 먹으며, “여긴, 친절한 사람만 사나 봐요?” “카페지기와 만나면 모두 그렇게 돼요.” 웃으면서 툭 던지는 주인의 그 한마디에 짜르르한 감동이 가슴을 스쳤다.
진정한 만남은 오랫동안 바라보고 지켜보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의 개념이 불명확할 만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오랜 시간이 쌓이지 않아도 그 장소가, 그 느낌이, 그 감동을 되살리는 만남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은 결국은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느낀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길을 나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