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여기에서 주장하는 엘리바스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원인: 엘리바스는 인간의 고난이 외부적인 원인이 아닌 인간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죄성, 부패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창 3:17, 19에서 분명히 보듯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2)고난의 범위 : 엘리바스는 7절 상반부에서 '인생은 곧 고난이다'라는 논리를 통해 고난이 모든 인간들에게 임함을 역설하고 있다. 즉, 인간 모두는 이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절 하반절의 표현 역시 인생의 고난이 변개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바스의 논리는 다분히 일반론적 측면에 기울어진 감이 농후하다. 즉, 4:17-21에서 인간의 보편적 유한성과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본문에서도 인생의 고난을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원칙론적 측면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현실 상황(욥의 고난도 포함)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즉,그는 욥(의인, 1:1;2:3)이라는 특수한 한 개인을 인생 일반의 범주에 포함기켜 그의 고난을 정당화시키고 따라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에 아무런 불평없이 무조건 순응하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불티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르쉬프의 아들들'이다. 고대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르쉬프는 역병과 파괴의 신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 '불', '역병' '번갯불'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르쉬프의 아들들'로 직역하는 것보다는 '불티' 옮기는 것이 좋다 본절은 불이 탈 때 그 재가 항상 위로 치솟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이 피할 수 없는 자명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비유이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 '유익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문자적인 뜻은 '선하니라'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통을 신적은총의 표식 혹은 부성애적 교정의 한 방편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보기드문 신앙의 확신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유사한 표현이 94:12에서 등장한다:"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고통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좀더 배우도록 박차를 가하는 신적 교육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119:72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 일반적으로 금이나 은은 '세겔' 혹은 '개' 등의 단위로 그 수량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양을 암시할 때 사용하는 '천천'이란 형용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자는 그 수가 무한대인 금은을 말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귀히 사용하는 금은, 그것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양의 금은, 그것보다 주의 율법이 좋다고 말할 정도로 저자는 말씀 중심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