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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사회분야의 운동 / 애국계몽세력의 정치사회운동 / 애국계몽운동 Ⅰ 정치사회운동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85 15.12.26 10: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 사회분야의 운동


애국계몽인사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일환으로 신문·잡지의 발간 및 강연회·토론회의 개최, 그리고 단체 활동을 통하여 사회일반을 대상으로 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신문·잡지와 강연회·토론회를 통하여 ① 세계정세와 조국의 현실을 알려 국민의 분발을 촉구했고, ②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계몽했으며, ③ 민권사상·애국정신·국민국가의식을 고취했고, ④ 교육진흥·식산흥업·정치개혁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註204)

이와 같은 애국계몽인사들의 사회분야의 운동은 사회 일반에 애국심과 교육열, 그리고 독립의지를 일깨워서 다수의 지식인과 실업가, 그리고 민중들을 국권회복운동에 매진케 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1. 신문 발간을 통한 사회계몽운동

애국계몽인사들의 사회계몽운동은 국민의 지식을 계발하고 경제력을 향상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신문은 민중계몽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당시 신문은 국권을 수호하고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려는 구국적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 초점은 전근대적인 민중을 계몽하여 문명화된 근대적 국민으로 만들고, 민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데 두었다.

이 시기의 애국계몽신문은 『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만세보』·『대한민보』 등이 있었다.

『제국신문帝國新聞』은 이종일·이승만李承晩 등에 의하여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되어 1910년 3월 31일까지 발행되었다. 『황성신문』이 국한문체로 발행되어 양반이나 유생층을 주된 독자층으로 삼은 것과 달리 『제국신문』은 순국문으로 발행되어 하층민과 부녀층을 주된 독자층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말에 『제국신문』은 ‘암雌 신문’으로, 『황성신문』은 ‘숫雄 신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제국신문』은 만성적인 경영 적자에 시달렸으며, 일제의 신문 사전검열에 걸려 10여 차례 휴간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정운복이 사장이 되어 한기준韓基準·선우예鮮于叡등 관서지방 출신들을 중심으로 신문사를 운영하였다. 『제국신문』은 1908년 8월 8일의 창간 10주년 기념호로 12면 10만부를 발행했으나 대체로 발행 부수는 3,000부 내외였다. 註205)

『제국신문』을 창간한 이종일·이승만은 일반 서민층에게 국문을 해독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자아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

다. 그러므로 이 신문은 민중의 지식계발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곧 『제국신문』은 보도기관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국민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계몽기관의 성격을 띠고 민중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註206) 특히 『제국신문』은 법률과 풍속 개량에 의한 민지 계발을 주요한 목표로 내세우고 창간되었으므로, 국민에게 국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하층민의 지식계발에 노력하였다. 신문 관계자들은 신교육과 실업발달이 국권회복의 방편이라 생각하여 국가발전과 국권수호를 위하여 국민의 실력양성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국신문』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 곧 의병투쟁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註207)

1907년 정운복이 경영을 맡은 이후 『제국신문』은 문명개화론적인 측면이 더욱 강화되어 그 이전보다 계몽적인 내용의 연재물을 훨씬 많이 게재하였다. 이 신문은 국문만을 해득하는 하층민과 부녀층의 계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부인용 의약품이나 부인구인婦人求人과 같은 광고를 다른 신문에 비하여 자주 게재하였다. 1908년에 제국신문사가 『부인의범婦人懿範』이라는 부인용 서적을 간행한 것은 부녀자들을 계몽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註208)

이상과 같이 애국계몽인사들은 한말에 『제국신문』을 통하여 종래에 한국사회에서 힘없이 소외되어온 하층민과 부녀층을 근대문명사상으로 계도하여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국권회복운동에 동참케 하려는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사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던 당시의 언론들

 


『황성신문』은 개명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되어 1910년 국권피탈로 인하여 폐간되었다. 이 신문은 일반민중이나 부녀층보다 전통적인 유생층의 계몽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구 지식층을 주된 독자층으로 하여 국한문으로 간행되었다. 처음에는 남궁억이

사장직을 맡았다가 1902년에 장지연이 맡았고, 1906년 이후에는 남궁훈·유근 등이 맡았다. 註209)

장지연·유근·박은식·남궁억·신채호 등 애국계몽인사들이 주필로 활약한 이 신문은 일제의 침략정책을 폭로·규탄하며 국민계몽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을 통하여, 동양 3국의 안녕을 주장해오던 이등박문의 배신을 규탄하고, 망국적인 을사조약 체결에 협력한 매국적인 정부대신들을 규탄하며 온 국민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註210)

『황성신문』은 유생층의 계몽에 주된 관심을 두었던 만큼 창간 이후 1904년 러일전쟁까지는 전통문화의 재조명이라는 측면에서 보수 유생층에게 강역·제도·실학 등 전통문화를 새롭게 이해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1907년 정미조약 때까지는 주로 베트남이나 이집트 같은 외국의 망국사와 일본·이탈리아·프랑스의 독립과 개혁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하고, 그 현상을 타개하는 교훈과 애국심을 갖도록 하였다. 註211)

1908년 이후 『황성신문』은 외국역사의 소개를 벗어나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에 역점을 두었다. 이 신문의 역사 관련 기사에는 단군에 대한 숭배, 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사 이해, 민족적 영웅과 국혼의 강조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통적 구 지식층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190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의 사조였다. 註212)

동시에 1908년 이후 『황성신문』은 유학자들에게 실학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전통유학 자체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유학으로의 변화 곧 유교구신儒敎求新을 촉구하였다. 『황성신문』도 애국계몽동의 일반적인 흐름에 따라 『제국신문』과 마찬가지로 유생들이 주도하는 의병투쟁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註213)

이상과 같이 애국계몽인사들은 한말에 『황성신문』을 통하여 문호개방 이래로 문명개화에 걸림돌이 되어온 보수 유생층으로 하여금 고루한 전통의식에서 벗어나 근대문명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사회와 한국이 처한 위기상황을 올바로 파악케 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주도적으로 동참케 하려는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6일에 창간되어 1910년 8월 28일 주권피탈과 동시에 폐간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주권피탈에 이르는 5년간은 애국계몽언론이 절정에 달했으며,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는 가장 강력한 항일계몽지로서 명성을 떨쳤다. 『대한매일신보』는 『London Daily News』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있던 영국인 배설을 사장으로 하고, 애국계몽인사인 양기탁을 총무로 하여 창립되었다. 이 신문은 국한문판·영문판·순국문판으로 발행되어, 영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으므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사회일반에 배일사상을 고취할 수 있었다. 註214)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다. 양기탁·신채호·박은식 등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이 주필로 활약하는 가운데 임치정·옥관빈·설태희·이장훈李章薰 등도 관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말에 발행되던 신문 가운데 최대 부수를 자랑했다. 1908년 5월 일제

측의 조사에 의하면, 국한문판이 8,143부, 국문판이 4,650부, 영문판이 463부 등 모두 13,256부가 발행되었다. 註215)

『대한매일신보』는 반일논조를 펴면서 한국의 독립유지를 중시하였다. 당시 애국계몽신문들이 대체로 실력양성을 중시하여 독립유지보다 실력양성을 강조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문명개화를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동화적 모방’이 되는 것을 비판하고 국수보전國粹保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다른 애국계몽신문들에 비하여 의병활동에 호의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도 1906년 5월 30일자에서는 의병투쟁이 시기와 힘을 고려하지 않은 폭거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1909년 7월과 8월에는 5차례에 걸쳐 「의병총대장 이인영李麟榮」·「지방소식」·「의병소식」·「의병상보」·「의병정형」 등의 항목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사회일반에 상세히 소개하여 사실상 의병투쟁을 지지하였다. 註216)

또한 『대한매일신보』는 광무황제가 을사조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는 밀서를 1907년 1월 16일자에 사진과 함께 게재하여 일본당국을 당혹케 만들었고, 일진회 등 친일파와 을사조약에 찬성한 매국 대신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사회일반에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신채호가 쓴 「독사신론讀史新論」과 국난극복의 영웅인 최영崔瑩의 전기를 연재하여 사회일반에 민족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註217)

나아가 『대한매일신보』는 국체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문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사무실을 두고 신문에 특별부록을 증간하면서까지 기부자들 명단을 소개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친

일 외교고문 스티븐스포살사건, 안중근의 이등박문포살사건,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살해미수사건 등을 상세히 보도하여 사회일반에 반일의식을 고취시켰다. 註218)

이와 같이 애국계몽인사들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일본의 한국침략 행위를 폭로하고, 이완용의 친일내각과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규탄했다. 특히 항일의병운동과 친일파 암살활동 등도 상세히 보도하여 사회일반에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만세보』는 1906년 6월부터 1907년 6월까지 국한문으로 간행되었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후원 아래 권동진·오세창 등이 창간한 이 신문은 국민의 지식계발 곧 국민계몽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만세보』는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반 시사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여자교육에 주목하여 여성교육단체를 조직했고, 여성단체와 연계하여 애국계몽활동을 폈다. 註219)

사회일반의 지식계발과 풍속개량에 관심을 두었던 『만세보』는 국민계몽의 입장에서 정치학의 이해를 급선무로 지적했다. 의복의 개량과 단발의 시행, 관혼상제와 풍수 등의 개량도 주장하였다. 아울러 각자의 천직과 의무에 충실하여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진회나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안이한 면이 있었다. 註220)

『대한민보』는 1909년 6월 2일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까지 간행되었다. 임원진에는 오세창이 사장으로, 장효근張孝根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이종린李鍾麟 등이 기자로 활동하였다. 註221) 『대한민보』도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의 지식계발에 발행 목적을 두었다. 『대한민보』는 국민의 사상을 통일하여 민족의 위기를 타개할 것을 강조했으며, 일진회의 합방성명이 발표되자 국민들에게 그 부당성을 폭로하며 합방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註222)

해외에서도 교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하와이에서는 『신죠신문』·『한인시사』·『한인협셩신보』·『신한국보新韓國報』, 미주美洲에서는 『공립신보共立新報』·『대동공보大同公報』·『신한민보新韓民報』, 노령에서는 『해조신문海潮新聞』·『대동공보大東公報』, 중국 상해에서는 『태동신보泰東新報』 등이 간행되어 해외의 한인사회에 항일의식과 자주독립의식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註223)

이상과 같이 애국계몽인사들은 각종 신문을 간행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신문들은 신지식과 신사상의 보급으로 민중을 각성케 하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을사조약·고종양위·한일합방 강요 등 수많은 침략책동을 비판하였다. 일제는 1907년 7월 ‘신문지법’을 제정케 하여 민족언론을 규제하고 신문활동을 위축시켰으나, 애국계몽신문들은 합방 때까지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대응한 국민적 항일여론을 일으켰다.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사회계몽운동

애국계몽인사들은 신문뿐만 아니라 회지·잡지를 통하여 사회일반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애국계몽단체들은 『대한자강회월보』·『대한협회회보』·『서우』·『서북학회월보』·『기호흥학회월보』·『호남학보』·『교남교육회잡지』·『태극학보』 등 회지를 발간하였다. 그들은 이 같은 회지를 통하여 그들의 주장을 회원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알리고자 하였다. 예컨대 대한자강회는



전국 동포 모두가 『대한자강회월보』를 읽어 조국정신을 배양하며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게 함이 국권회복의 정로正路이다. 註224)



라고 하여, 모든 회원에게 회지 구독을 의무조항으로 부과했고, 일반 민중에게도 구독을 권유하여 註225) 회지 발간의 목적이 국권회복운동의 기초로서 국민의 의식계발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는 월간으로 1906년 7월부터 1907년 7월까지 13호가 간행되었다. 『대한자강회월보』의 면수는 대체로 70면을 초과했으며, 그 목차는 논설·회보·관보제요·국조고사國朝古事·문원文苑·본국방언·소설·잡록·동서문답·해외기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자강회월보』에는 교육관계·식산관계·정치관계·법률관계·역사지리관계·문예관계 등 140여 편의 논설과 시사문답·국내외 뉴스 등이 실려 있다. 『대한자강회월보』의 초기 발행부수는 알 수 없으나 제6호부터는 2,000여 부씩 간행되었고, 독자들의 요구에 의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는 추가하여 인쇄되기도 하였다. 註226)

대한자강회는 월보를 통하여 ① 조국의 현실을 분석하여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고, ②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계몽하였으며, ③ 민권·국권사상과 국민국가의식을 고취하였고, ④ 교육진흥·산업개발·정치개혁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사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던 당시의 계몽학회지들

 


이 같은 대한자강회의 월보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은 당시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일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을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자강회월보』는 한말의 선구적이고 내실을 갖춘 회지로서 다수 애국계몽단체들의 회지 간행을 선도했던 것이다. 註227)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는 월간으로 1908년 4월에 창간되어 1909년 3월까지 통권 12호를 발행하고 대한협회가 해산되면서 종간되었다. 초기에는 2,000부 정도 발행되었으나 점차 증간되어 3,000부 정도 발행되었다. 『대한협회회보』는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개성 등 각 지방과 일본·미국본토·하와이·중국에도 배포되었다. 註228)

애국계몽인사 홍필주와 이종일 등이 편집 발행한 『대한협회회보』는 대체로 논설·교육·실업·정치·법률·식산·지지역사地誌歷史·문예·기서寄書·관보초록·내지휘보·외국정형·잡조雜俎·본회역사·언단言壇·회원명부·광고의 체제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회보의 면수는 평균 70쪽이었다. 註229)

『대한협회회보』의 필진으로는 신채호·심의성·조완구·권동진·장지연·정교·남궁억·오세창·이종호·김광제·윤효정·여병현·홍필주·이종일·김가진·계봉우桂奉瑀 등 저명한 애국계몽인사들을 망라하고 있다. 당시 현실과 관련하여 제시된 그들의 국가론·정치론·정당론·경제론 등의 논문들은 당시 사회일반을 대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註230)

서우학회의 학보인 『서우』는 월간지로 일반민중의 민지 계발에 목적을 두었으므로 민권론을 기반으로 국권회복사상을 전파하였다. 곧 『서우』는 사회진화론과 실력양성론, 국민주권론과 국민국가론, 애국론과 교육구국론, 실업구국론과 사회관습개혁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우』의 필자로는 박은식·안병찬·노백린·주시경·정운복 등 저명한 애국계몽인사들과 학회임원 들이 활약하였다. 註231)

『서우』의 목차는 사설·논설·교육부·위생부·잡조·아동고사我東古事·인물고·사조詞藻·교원交苑·시보·회보의 수서로 짜여 있다. 맨 처음 사설에서는 학회 회원들의 애국계몽활동을 촉구하면서 관서지방에 대한 차별대우를 언급하고, 국권회복운동을 개시하여 국권회복 뿐만 아니라 서북지방민의 민권도 신장할 것을 강조하였다. 註232)

서우학회가 서북학회로 통합될 때까지 『서우』는 1906년 12월부터 1907년 1월까지 14회에 걸쳐 간행되었으며, 매달 3,000부씩 발행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일본까지 우송하였다. 서북지방에서 애국계몽운동이 가장 열렬히 전개되었던 것은 바로 서우학회의 계몽 성과라 하겠다. 註233)

기호흥학회의 학보인 『기호흥학회월보』는 1908년 8월부터 1909년 7월까지 매달 2,000부씩 12호가 발행되었다. 발행 취지는 “대한제국의 독립기초와 2천만의 자유정신과 기호3성畿湖三省의 흥학주의”에 두었다. 곧 기호흥학회는 월보 발행의 궁극적인 목적을 국권회복에 두고, 국권회복의 길은 실력양성에 있으며 실력양성의 관건은 교육이라 하여 교육구국을 강조하였다. 註234)

『기호흥학회월보』는 생존경쟁의 시대에 실력양성도 국민의 단결과 단체로서만 가능하므로 교육도 학회와 같은 단체활동을 통하여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단체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과 더불어 과거의 폐습타파를 강조하여 대중계몽에 크게 기여하였다. 註235)

애국계몽단체들은 회지 외에도 『소년少年』·『조양보朝陽報』·『가뎡잡지』·『소년 한반도』·『대동보大同報』·『교육월보』 등 수많은 일반 잡지를 발행하여 국민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소년』은 신민회의 외곽 기관지로 최남선의 주도하에 창간되었다. 1908년 11월에 창간된 『소년』은 1911년 ‘105인사건’으로 신민회 회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난 시점을 전후하여 폐간되었다. 여기서 ‘소년’이란 오늘날 청소년의 의미를 가진다. 『소년』은 그 사업 목표가 새 세대에 대한 애국계몽운동임을 밝히고, 청소년들에게 어릴 때부터 국권회복과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할 뜻을 세울 것을 호소하였다. 註236)

그러므로 『소년』의 편집 방침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① 애국정신의 배양, ② 신지식의 교육, ③ 용감한 지기志氣의 장려, ④ 세계로의 시야 확장, ⑤ 애국주의적 국사·지리의 교육, ⑥ 애국계몽문학의 창건 보급, ⑦ 국권회복의 일꾼 양성에 두었다. 이를 위하여 『소년』은 우리 역사상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영웅의 전기와 외국의 건국영웅이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여, 청소년들의 애국심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던 것이다. 註237)

뿐만 아니라 『소년』은 이광수가 지은 「우리 영웅」, 최남선이 지은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등 수많은 애국계몽시를 게재하여 애국계몽문학을 개척했다. 근대민족사학의 창시자인 신채호의 논문 「독사신론」과 박은식의 명저 『왕양명선생실기』 등도 게재하여 민족정신과 근대적 역사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註238)

남궁억·여병현 등 애국계몽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교육월보』는 1908년 6월부터 월간으로 약 10개월간 간행되었다. 『교육월보』는 취지서에서 “교육이 국가의 문명과 부강을 가늠하는 척도이며, 국가흥망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부녀자와 아동을 포함하여 교육을 받지 않은 계층과 하층민을 독자층으로 설정하였다. 『교육월보』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사회 저변층에 대한 교육과 계몽이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이루는 방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註239)

한말에 간행된 대부분의 잡지가 지식층을 독자로 하여 국한문혼용으로 간행된 것과 달리 『교육월보』는 하층민과 부녀자를 위하여 국문전용으로 간행되었다. 또 당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이 교육과 실업을 강조한데 비하여, 『교육월보』는 독자층이 현실적으로 실업의 발전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계층이었기 때문에 교육에 초점을 두었다. 이와 더불어 국민의 지식계발에 그치지 않고 국수國粹와 국혼國魂의 배양도 강조했다. 註240)

『교육월보』는 60·70면 분량의 잡지로 일반시사나 논설을 중시한 잡지가 아니었고, 교과서를 대신한 통신강의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교육월보』는 1908년과 1909년경에 가장 널리 읽힌 대중잡지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교재로서 활용되는 등 국내뿐만 아니라 재외동포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註241)

상동청년회가 한글 전용으로 발간한 『가뎡잡지』는 부녀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계몽잡지였다. 註242) 그러나 『가뎡잡지』는 단순히 부녀자들의 계몽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

여 가정으로부터 개혁을 추구한 잡지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註243)

애국계몽인사들은 회지·잡지 외에 창가집도 간행하였다. 당시의 창가집은 「애국가」·「소년모험맹진가少年冒險猛進歌」·「독립가」·「혈죽가血竹歌」·「권학가」 등 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권회복사상을 고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컨대 자주정신과 청소년의 기개를 북돋우는 「소년모험맹진가」는 제목부터 격렬하고 내용에는 항일의 기개가 담겨져 있다.



1. 2천만 동포 우리 소년아

천부의 자유송自由松은 차가 없거늘

국가의 수치 네가 아느냐

우리 민족 무삼 죄로 욕을 받는가

2. 나라 사랑하는 자 적지 않건만

깰지라 소년들아 험한 마당에

모험맹진 하는 자 몇이 되느냐

조금도 사양말고 달려 나가세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주저하지 말고 나가 싸우라는 도전적 기개를 노래한 「소년모험맹진가」처럼 민족의 얼이 담긴 창가는 널리 애창되어 애국적 교육으로 확산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민간인 저술의 창가집을 압수하여 창가를 통제하였다. 註24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말 애국계몽인사들은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하고, 그 회지와 잡지 등 출판물을 통하여 다양한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하여 자강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에 일제는 한국인의 자강독립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09년에 출판법을 공포하고, 모든 원고를 통감부의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여 애국계몽인사들의 출판물을 통한 사회계몽운동을 탄압하였다.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사회계몽운동

애국계몽가들은 신문·잡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하여 직접 민중 앞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문·잡지가 구독 대상에 제약을 받는 것에 비하여, 애국계몽강연은 전국에 걸쳐 직접 민중을 상대할 수 있었다. 애국계몽강연은 각종 단체의 통상회·강연회·토론회·친목회·운동회 등 각종 집회에서 이루어졌다. 내용은 애국심의 고취, 신지식·신사상·신산업을 통한 실력의 양성,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초기의 강연활동은 명망있는 인사를 초빙하여 강연회 및 토론회를 개최하는 형태였다.

국민교육 보급을 목표로 창립된 국민교육회는 뜻있는 인사들을 초빙하여 ‘생명재산의 보호’, ‘민지의 개발’, ‘교육의 발달’ 등을 주제로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여 회원들의 애국심 고취에 노력하였다. 나아가 국민교육회 간부들은 각종 애국계몽단체의 통상회·총회, 지회 및 학교, 연합운동회·간친회 등에 참석하여 강연활동을 벌였다. 註245)

전국 규모의 조직을 가진 대한자강회도 강연회를 개최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자강회는 17개월의 존속기간 동안에 16회에 걸친 정기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여기에서 42명의 연사들이 계몽강연을 하였다. 註246) 이외에도 수시로 열린 강연회와 지회 시찰 시에 열린 강연회, 그리고 각 지회에서 열린 강연회를 고려하면 대한자강회가 행한 계몽강연의 회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도 강연을 계몽의 수단으로 중요시하여 매달 통상회 때에 또는 수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대한협회는 창립총회 이틀 뒤인 1907년 11월 19일의 제1회 임시평의회에서 연설원 2인과 연제를 정하고, 11월 24일의 제2회 총회에서 윤효정이 ‘대한협회의 본령本領’, 정운복이 ‘정당의 책임’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함으로써 강연회를 시작하였다. 註247) 1908년 1월 11일의 제3회 총회에서는 남궁억이 ‘단체의 효력’, 정교가 ‘정당의 득실’이라는 제목으로, 2월 8일의 제4회 총회에서는 정운복이 ‘지방의 현상’, 안창호가 ‘아국我國 전도의 여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후 강연회는 수시로 개최되었다. 註248)

서북학회도 강연을 통한 사회계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서북학회는 지식 계발을 위한 강연활동을 목적으로 서북협성학교 내에 심학강연소心學講演所를 설치하여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 설립 취지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극복할 청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며, 민중의 양심을 계발하기 위하여 도덕을 연마하려는데 있었다. 註249) 이와 같은 취지에 따라 심학강연소는 민중 특히 청년층을 주요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여 당시 청년들의 삶의 가치를 애국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애국계몽강연은 점차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註250)

애국계몽강연에서 민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으로 이름을 떨친 인사로는 안창호·이동휘·최광옥崔光玉·이상재·윤치호 등이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연설가였던 안창호는 강연을 통하여 “민족경쟁시대에서 독립한 국가 없이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민 각자가 각성하여 큰 힘을 모아야만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강연회 개최를 알리는 광고



큰 힘을 발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분투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註251) 또한 그는 “지금은 군사력이 미약하나 장기적으로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여 우리나라를 침해하는 강국과 개전하여 국권을 회복하자” 註252)고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준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창호의 강연활동으로 청중들은 많은 감명을 받아 부녀자들이 비녀와 반지를 빼서 애국사업에 헌납하는 사례가 빈번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註253) 특히 거상巨商 이승훈은 안창호의 강연에 감화되어 교육·식산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안중근과 여운형도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여 민족교육에 진력하는 계기였다.

역시 당대의 대표적인 연설가로 활약한 이동휘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교육계몽을 위한 강연활동을 벌여 수많은 민족학교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이동휘가 순회강연을 다녀간 함경도·강원도 지방에서는 일시에 100여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註254)

이와 같이 애국계몽가들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사립학교에서 운동회 개최를 주도하며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서우학회는 각지의 사립학교들이 연합운동회를 열도록 주선하고, 운동회에 반드시 총대總代를 파견하여 강연을 통한 교육구국활동을 촉구하였다. 註255) 그들의 운동회 개최는 강연활동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인 학부차관 표손일俵孫一이 당시의 운동회는 “무장적 시위의 운동회이며 교육의 본지와는 상부되지 않는다” 註256)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운동회는 단순히 체력의 증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시키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실전에 대비하자는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 애국계몽가들은 운동회를 개최하여 애국계몽강연을 실시했고, 나아가 미래의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실전훈련을 실시했다. 註257)

애국계몽단체의 강연회와 토론회 활동은 지방 지회를 통하여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다. 대한협회 지회의 사례를 통하여 그 강연회와 토론회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한협회는 전국에 87개의 지방 지회를 확보하고 사회 일반에 대한 계몽을 위하여 강연회와 토론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회보』의 기록을 통하여 보면, 1907년 12월 29일에 있은 직산지회의 강연이 지회 강연의 최초였다. 註258) 직산지회는 그해 12월 14일에 대한협회 본회에서 제1차로 인허 받은 11개 지회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회의 발기회나 창립총회 때는 언제나 강연이 행해지므로, 다른 10개 지회에서도 기록에는 없지만 이 무렵에 강연이 행해진 것은 분명하다. 어떻든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본회의 예에 따라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을 계몽하는데 노력하였다.

대한협회 87개 지회에서 무수하게 행해진 강연의 횟수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대한협회회보』를 통하여 1907년 12월 29일에서 1909년 2월 19일까지 14개월 동안에 지회에서 행해진 155개에 달하는 강연 제목이 확인된다. 註259) 하나의 강연도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어서, 이들 강연의 내용을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위의 155개 강연 제목을 통하여 분류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윤효정의 ‘본회의 취지와 지회의 장래’, 註260) 이동휘의 ‘본회 취지와 강령’, 註261) 안창호의 ‘왜 지회를 설립하는가’, 註262) 박승룡의 ‘본회 유지 방침’ 註263)처럼 대한협회의 취지와 강령, 조직과 유지에 관한 강연 제목이 50개로 집계된다. 이것은 『대한협회회보』에 수록된 155개의 강연 제목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것이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러한 강연들을 통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에게 대한협회의 이념과 주요사업 및 지회의 필요성을 주지시켰던 것이다.

둘째로 윤효정의 ‘정치의 기인基因’, 註264) 이규범의 ‘정당은 국가의 기본’, 註265) 설태희의 ‘사회의 정신’, 註266) 어용헌의 ‘단체의 효력’ 註267)처럼 정치와 정당, 사회와 단체의 중요성에 관한 강연 제목이 40개로 집계된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러한 강연들을 통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에게 근대정치를 소개하고 사회의식을 고취시켰다.

셋째로 조인한의 ‘신학문의 필요’, 註268) 이종학의 ‘본회 강령 중 교육보급’, 註269) 김광제의 ‘객관적 폐해와 호구好舊의 습관’, 註270) 강석빈의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따른다’ 註271)처럼 신사상과 신교육의 보급, 호고好古와 폐습의 타파에 관한 강연 제목이 30개로 집계된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러한 강연들을 통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에게 근대사상을 전파와 동시에 근대교육을 보급하였다.

넷째로 김광제의 ‘세계 대세의 기인起因’, 註272) 강엽의 ‘대세를 가히 탈 것이요 두려워 피함은 불가하다’, 註273) 이해조의 ‘국민의 사대四大 죄’, 註274) 태성엽의 ‘애국의 의무’ 註275)처럼 당시의 시국과 국민의 각성에 관한 강연 제목이 22개로 집계된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러한 강연들을 통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에게 내외 정세를 소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다섯째로 정운복의 ‘생명 재산의 보호’, 註276) 김정제의 ‘재산의 보존은 생명의 양원養源’, 註277) 이무영의 ‘산업개발은 부국의 근원’, 註278) 이정화의 ‘아국我國 실업의 관념’ 註279)처럼 민권보장과 실업장려, 그리고 기타에 관한 강연 제목이 13개로 집계된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러한 강연들을 통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에게 식산흥업을 장려하고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위와 같은 강연회와 더불어 토론회를 도입하여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을 계몽하였다.

평양지회는 1908년 2월 18일 특별총회에서 회원 ‘김진구재산피침사건’에 대하여, 지회규칙 제15조에 의거 좌우의左右議 10인을 선정하여 토론한 후 변리서辨理書를 평양 군수에게 제출하였다. 註280) 덕원지회도 그 해 3월 26일의 특별 통상회에서 회원 ‘이동호재산피침사건’에 대하여, 같은 방법으로 토론을 거쳐 변리서를 덕원 부윤에게 제출하였다. 註281) 이처럼 대한협회는 지회의 중요 문제를 토론회를 거쳐 처리하도록 토론회를 일반화하였다.

한편 대한협회는 토론회를 계몽활동의 실천도구로 활용하였다. 해주지회는 1908년 4월 13일의 통상회에서 ‘향교 내에 사범학교를 설립하자’는 의안을 가부편可否便으로 나눠 토론한 후 결정하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해주 군수도 참여하였다. 註282) 이런 토론회에는 일반 방청인이 다수 참석하므로 사회 계몽적인 의미도 큰 것이다. 해주지회는 6월 13일의 토론회에서는 ‘사회발달은 지智보다 덕德이 낫다’라는 논제로, 7월 10일의 토론회에서는 ‘회무진취會務進就는 열심유무에 있고 회원 다수에 있지 않다’라는 논제로, 8월 8일의 토론회에서는 ‘인내력이 급박한 생각보다 낫다’라는 논제로 가부편 토론을 벌였다. 註283) 진주지회에서도 같은 해 10월 10일의 통상 총회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註284) 이처럼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토론회를 통하여 지회의 주요 안건을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지회 회원과 일반 주민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애국계몽단체들은 정기적인 강연회와 비정기적인 전국 순회강연, 각 지역의 지회 활동과 대운동회 때의 계몽강연, 그리고 각종 토론회를 통하여 사회일반의 지식계발과 애국심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곧 강연회와 토론회는 애국계몽운동의 취지를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회일반으로 하여금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나서게 한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4. 기타 사회개선운동

대한자강회는 자주국권을 회복하고 문명사회로 발전을 위하여 계몽강연과 월보를 통하여 사회의식의 변화와 사회개선을 추진하였다.

첫째로 대한자강회 회원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관민의 존비가 현격하여 관인만이 부귀와 권위를 누리고 일반 인민은 천대받고 수탈당하여 식산이 부진하고 국가가 빈약하게 되었음을 계몽함으로써, 관존민비와 직업존비의 폐습을 타파하고 국민들의 노동천시 관념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註285)

둘째로 대한자강회 회원들은 국가의 부강은 인재양성의 유무에 있고 인재양성은 여성교육에서 좌우됨을 계몽함으로써 국가의 ‘지우知愚와 빈부’를 좌우하는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여성에 대한 무교육無敎育의 폐단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註286)

셋째로 대한자강회 회원들은 조혼이 사회에 미치는 폐단이 심대하다고 인식하여 조혼금지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여자는 만16세, 남자는 만

18세 이전에는 결혼을 금지하도록 정부에 건의하였다. 註287)

넷째로 대한자강회 회원들은 당시 사회에 만연하는 미신의 폐단이 심각하다고 인식하여 본회에서는 음양술서의 금지를 정부에 건의하였고, 의주지회에서는 무격기양巫覡祈▲{?+襄}의 금지를 관청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註288)

다섯째로 대한자강회 회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대에 변통하지 못하고 옛것만을 좋아하는 폐단을 지적하고, 이른바 ‘호고병好古病’을 치유하여 시대의 발전에 부응하는 진취적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註289)

서우학회는 월보와 강연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열등국으로 떨어져 국권을 상실하게 된 큰 원인은 폐습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우학회는 첫째로 고루하고 수구적인 폐습을 지적하였다. 둘째로 모험심과 용진勇進의 결여를 들었다. 셋째로 당파와 파당을 고질적 폐습이라고 지적하였다. 넷째로 나태의 고질을 들었다. 다섯째로 사리·사욕의 폐단을 들었다. 그리고 서우학회는 이러한 폐습을 타파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여 폐습타파에 의한 사회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註290)

기호흥학회도 월보와 강연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양성과 더불어 폐습타파를 주장하고, 구 지식층이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을 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註291) 사실상 당시의 모든 정치·사회·교육단체들은 한결같이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일환으로 과거의 폐습을 타파하고 사회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협회 지방 지회가 벌인 사회개선활동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여러 애국계몽단체들의 사회개선을 위한 노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대한협회 지방 지회들은 지회 회원과 사회 일반을 대상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다.

직산지회는 1907년 12월 25일의 통상회에서 신문·잡지를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각 면面·리里에 무료로 배포하여 신지식을 계발하기로 하였다. 註292) 철산지회는 1908년 8월 8일의 통상회에서 경내境內 인민의 보통 지식을 지도 발달시키기 위하여 신문 구독을 권고하도록 철산군 주사와 각 면장에게 서신을 띠워 교섭하기로 가결하였다. 註293) 덕원지회는 1908년 6월 12일의 통상회에서 각 학교 학생들의 흡연금지 설유위원을 선정하고 학생금연운동을 펼쳤다. 註294) 경주지회의 지방부원 정재응鄭載應과 신복균申福均은 1909년 9월에 각 마을을 순회 유세하여 지역 주민들을 교화하는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註295) 대구지회 총무 이일우李一雨는 1910년 6월에 서고를 신축하고 각종 신간 서적을 다량 구입하여 소규모의 도서관을 만들고, 군내의 인사들에게 열람하도록 하여 노유老儒들도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청년자제로 하여금 학교에 가도록 권면했다고 한다. 註296)

대한협회 지방 지회들은 이와 같이 사회교화활동과 더불어 사회적 폐습을 교정하는 활동을 벌였다.

해주지회는 1908년 6월 13일의 통상 총회에서 ‘관혼상제에 낭비를 절감하자’는 의안을 가결하고, 김영택金永澤·이규승李圭昇 등 5인을 연구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註297) 그리고 7월 10일의 통상 총회에서는 ‘부인의 머리장식은 일체 비녀를 꽂자’는 의안을 채택하고, 먼저 회원 집안에서부터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註298) 덕원지회는 12월 12일의 통상회에서 조혼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지방 관청에 건의하기로 하였다. 註299) 대구지회는 1908년 12월 30일의 통상 평의회에서 시중에 음란한 서적이 유입·판매되므로 이를 금지하기로 하였으며, 註300) 해주지회는 1909년 1월 2일의 평의회에서 ‘마을 내 부정한 귀신을 모시는 집淫祠을 일체 철폐하자’는 의안을 채택하였다. 註301)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와 같이 사회폐습 교정활동과 더불어 사회구제활동도 벌였다.

1908년 12월에 광주군光州郡 효우동면孝友洞面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2채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이에 대한협회 광주지회는 12월 13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효우동면 화재 구휼방침을 토의하여, 지회 회원은 물론 각 면에 권고문을 발송하여 구휼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또한 광주군 민의소民議所와 합동회의를 개최하고 관청에 건의하여 구휼금을 요청하기로 하는 등 재난 구호에 진력하였다. 註302) 1909년 8월에는 함흥지방에 큰 비가 내려 서성천 강장제江長堤가 붕괴되어 26명이 사망하고 광대한 전야와 수천 호의 가옥이 침수되는 큰 수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함흥지회는 의연금을 모아 소선小船으로 인명을 구하고 음식물을 전달하였다. 한편 관청에 수해 구휼을 요청하고 본회에도 보고하는 등 재난의 구호에 진력하였다. 註303)


대한협회 경주지회에서 조직한 근면회 관련 기사



한편 덕원지회는 1908년 6월 12일의 통상회에서 경성고아원에 대한 기부금 모금위원을 선정하고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註304) 군산지회는 9월 5일 평의회에서 ‘고아원을 설립하자’는 의안을 가결하는 등 사회복지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였다. 註305)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이와 같이 사회구제활동과 더불어 청결·근면·저축을 장려하였다.

덕원지회는 1908년 6월 13일의 통상 총회에서, 상리上里 이회里會에 교섭하여 청결을 장려하기로 하였다. 註306) 경주지회는 1910년 5월에 군청에 제안하여 군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하고 근면회勤勉會를 조직토록 하였다. 취지는 식산흥업의 장려, 근면 저축의 실행, 그리고 위생 청결의 권장 등이었다. 註307) 자인지회의 회원과 군민들은 1910년 6월에 만든 실업상의 규칙 중에, “저금규칙을 정하여 당해 지회 재무부에 일체 수입하여 보관 식리할 사”라고 규정하였다. 註308) 뿐만아니라 『대한민보』의 기사에 의하면, 자인지회는 저금부를 설치하고 회장 변상묵, 총무 윤창섭, 사무장 서상묵 등이 군민에게 권고하여, 1910년 7월 현재로 저축 가입자가 100여 명에 달하여 군내에 근검의 풍조를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註309) 이처럼 대한협회 지회들은 본회 강령 제6항의 “근면저축의 실행”에 부흥하여 근면 저축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밖에도 대한협회 지방 지회들은 사회교화활동, 사회폐습 교정활동, 사회구제활동, 근면·저축 장려활동 등 광범위한 사회개선 활동에 나섰다.

나아가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의병봉기로 인한 피해 및 사회의 혼란과 분쟁 속에서, 민생의 안정과 사회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의병설유활동을 전개하였다. 단천지회는 1908년 2월 평의회에서, 부근의 ‘의진義陣’에 설유문을 보내어 해산을 권고하기로 결의하고, 두일면에 파견된 의병설유위원들은 3월에 의병 130여 명을 만나 42명을 귀순시켰다. 4월에는 의병 37명을 만나 귀순시켜 결국 의병 130여 명 중 79명을 설유하여 귀순시켰다. 註310) 영흥지회는 1908년 2월 통상회에서, ‘의병’ 관련자들을 적극 효유하기 위하여 각 면에 총대 2인씩을 선정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註311) 1908년 10월 진주지회는 ‘폭도 귀순에 대한 조칙’에 부응하여 포고문을 각 마을에 붙여서 “의도義徒로 하여금 회오悔悟의 길을 자구自救케 하기로” 가결·실시하였다. 註312) 전라도 지역 시찰원 김광제의 보고에 의하면, 남평지회는 의병과 진압군 사이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것이다. 註313)

대한협회 지회의 의병설유활동이 기본적으로 대한협회 지도층의 친일협력에 의한 정권욕의 반영이라는 견해도 있다. 註314) 그러나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들은 ① 의병 봉기의 방법으로는 국권회복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판단, ② 의병은 오히려 양민을 괴롭히고 동족상잔을 초래한다

는 생각, ③ 의병으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생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하는 현실적 처지에서 사회의 안정을 위해 의병설유활동을 전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 204] 유영렬, 「열강의 동북아시아정략과 한국의 국권회복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347쪽. ☞

[註 205] 최기영, 「언론의 구국투쟁」, 『한국사』 46, 국사편찬위원회, 2000, 62~63쪽. ☞

[註 206] 이해창, 「言論機關의 활동」, 『한국사』 20, 41~42쪽. ☞

[註 207] 최기영, 「언론의 구국투쟁」, 『한국사』 46, 63쪽. ☞

[註 208] 최기영, 「제국신문」, 『한국독립운동사사전』 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04쪽. ☞

[註 209] 정진석, 「황성신문」, 『한국독립운동사사전』 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651~652쪽. ☞

[註 210] 이해창, 「언론기관의 활동」, 『한국사』 20, 44~45쪽 ; 최기영, 「언론의 구국투쟁」, 『한국사』 46, 64쪽. ☞

[註 211] 최기영, 「황성신문의 역사관련기사에 대한 검토」, 『한국근대 계몽운동사연구』, 20쪽. ☞

[註 212] 최기영, 「황성신문의 역사관련기사에 대한 검토」, 『한국근대 계몽운동사연구』, 21쪽. ☞

[註 213] 최기영, 「언론의 구국투쟁」, 『한국사』 46, 65쪽. ☞

[註 214] 강재언,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과 수난」, 『근대한국사상사연구』, 173~174쪽. ☞

[註 215] 최기영, 「대한매일신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96~97쪽. ☞

[註 216] 최기영, 「대한매일신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96쪽. ☞

[註 217] 최기영, 「대한매일신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97쪽. ☞

[註 218] 강재언,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과 수난」, 175쪽 ; 최기영, 「대한매일신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97쪽. ☞

[註 219] 이해창, 「언론기관의 활동」, 『한국사』 20, 49~51쪽. ☞

[註 220] 최기영, 「만세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380쪽. ☞

[註 221] 최기영, 「대한민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140쪽. ☞

[註 222] 이해창, 「언론기관의 활동」, 『한국사』 20, 52~54쪽. ☞

[註 223] 최기영,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 일조각, 1991, 193쪽. ☞

[註 224] 윤효정, 「大韓自强會月報刊行祝辭」, 『월보』 1, 5쪽. ☞

[註 225] 대한자강회, 「卷末 注意」, 『월보』 1. ☞

[註 226] 대한자강회, 『월보』 14, 63쪽. ☞

[註 227]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91쪽. ☞

[註 228] 최기영, 「대한협회회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210쪽. ☞

[註 229] 대한협회, 『회보』 3, 1~2쪽. ☞

[註 230] 최기영, 「대한협회회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210쪽. ☞

[註 231] 이송희,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 331쪽. ☞

[註 232] 이송희,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 312쪽. ☞

[註 233] 이송희,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 314쪽. ☞

[註 234] 백순재, 「기호흥학회월보 해제」, 『기호흥학회월보』 1. ☞

[註 235] 이송희, 「기호흥학회월보」,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524쪽. ☞

[註 236]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77쪽. ☞

[註 237]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78쪽 ☞

[註 238]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79쪽. ☞

[註 239] 최기영, 「교육월보와 대중교육」, 『한국근대 계몽운동연구』, 96~97쪽. ☞

[註 240] 최기영, 「교육월보와 대중교육」, 『한국근대 계몽운동연구』, 97~98쪽. ☞

[註 241] 최기영, 「교육월보와 대중교육」, 『한국근대 계몽운동연구』, 118쪽. ☞

[註 242] 이기문, 「개화기의 국문사용에 관한 연구」, 『한국문화』 5,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4, 72쪽. ☞

[註 243] 한규무, 「상동청년회에 대한 연구(1897~1914)」, 『역사학보』 126, 104쪽. ☞

[註 244] 손인수, 『한국개화교육연구』, 일지사, 1980, 390~397쪽 ; 손인수, 「근대교육의 확대」, 『한국사』 20, 국사편찬위원회, 2000, 118쪽. ☞

[註 245] 신혜경, 「대한제국기 국민교육회 연구」, 『이화사학연구』 20·21, 156쪽. ☞

[註 246] 대한자강회, 『월보』 제1호에서 제13호까지의 「본회회보」·「본회회록」 ; 『대한매일신보』 관련기사 참조. ☞

[註 247] 대한협회, 『회보』 1, 39~40쪽. ☞

[註 248] 대한협회, 『회보』 1, 42·44쪽. ☞

[註 249] 서북학회, 「心學講演」, 『서북학회월보』 10, 19~21쪽. ☞

[註 250]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6일 「광고」. ☞

[註 251] 도산기념사업회, 『도산안창호』, 1947, 17~18쪽 ; 주요한 『안도산전서』, 삼중당, 1971, 57~63쪽. ☞

[註 252] 안창호, 「雜俎, 연설」, 『서우』 7, 25쪽. ☞

[註 253] 이송희, 『대한제국말기 애국계몽학회연구 』,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1985, 54쪽. ☞

[註 254]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71~73쪽 ; 이재순, 「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 14, 13쪽. ☞

[註 255] 이송희, 『대한제국말기 애국계몽학회연구』, 44쪽. ☞

[註 25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5, 919쪽. ☞

[註 257] 高橋濱吉, 『朝鮮敎育史考』, 경성제국지방행정학회 조선본부, 1926, 301쪽. ☞

[註 258] 대한협회, 『회보』 3, 59쪽. ☞

[註 259] 대한협회, 『회보』 제3호에서 제12호까지. ☞

[註 260] 대한협회, 『회보』 5, 57쪽. ☞

[註 261] 대한협회, 『회보』 10, 62쪽. ☞

[註 262] 대한협회, 『회보』 10, 63쪽. ☞

[註 263] 대한협회, 『회보』 12, 54쪽. ☞

[註 264] 대한협회, 『회보』 2, 57쪽. ☞

[註 265] 대한협회, 『회보』 5, 59쪽. ☞

[註 266] 대한협회, 『회보』 3, 60쪽. ☞

[註 267] 대한협회, 『회보』 6, 69쪽. ☞

[註 268] 대한협회, 『회보』 12, 55쪽. ☞

[註 269] 대한협회, 『회보』 6, 68쪽. ☞

[註 270] 대한협회, 『회보』 10, 64쪽. ☞

[註 271] 대한협회, 『회보』 11, 51쪽. ☞

[註 272] 대한협회, 『회보』 6, 61쪽. ☞

[註 273] 대한협회, 『회보』 10, 63쪽. ☞

[註 274] 대한협회, 『회보』 5, 57쪽. ☞

[註 275] 대한협회, 『회보』 7, 58쪽. ☞

[註 276] 대한협회, 『회보』 2, 6쪽. ☞

[註 277] 대한협회, 『회보』 7, 59쪽. ☞

[註 278] 대한협회, 『회보』 11, 52쪽. ☞

[註 279] 대한협회, 『회보』 12, 55쪽. ☞

[註 280] 대한협회, 『회보』 3, 59쪽. ☞

[註 281] 대한협회, 『회보』 3, 60쪽. ☞

[註 282] 대한협회, 『회보』 4, 58쪽. ☞

[註 283] 대한협회, 『회보』 7, 57~58쪽 ; 『회보』 8, 63쪽. ☞

[註 284] 대한협회, 『회보』 8, 63쪽. ☞

[註 285] 정운복, 「官尊民卑의 弊害」, 『월보』 2, 42·47~48쪽. ☞

[註 286] 윤효정, 「女子敎育의 必要」, 『월보』 1, 40~43쪽. ☞

[註 287] 대한자강회, 『월보』 2, 55~56쪽 ; 『월보』 3, 66쪽. ☞

[註 288] 대한자강회, 『월보』 4, 42쪽 ; 『월보』 10, 45쪽. ☞

[註 289] 이기, 「好古病」, 『월보』 9, 3~5쪽. ☞

[註 290] 이송희, 「한말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학보』 26, 75~78쪽. ☞

[註 291] 이송희, 「기호흥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522쪽. ☞

[註 292] 대한협회, 『회보』 5, 59쪽. ☞

[註 293] 대한협회, 『회보』 11, 51쪽. ☞

[註 294] 대한협회, 『회보』 7, 60쪽. ☞

[註 295] 『대한민보』 1909년 9월 24일 지방단신. ☞

[註 296] 『대한민보』 1910년 6월 29일 지방잡사. ☞

[註 297] 대한협회, 『회보』 7, 57쪽. ☞

[註 298] 대한협회, 『회보』 7, 58쪽. ☞

[註 299] 대한협회, 『회보』 12, 55쪽. ☞

[註 300] 대한협회, 『회보』 12, 57쪽. ☞

[註 301] 대한협회, 『회보』 12, 56쪽. ☞

[註 302] 대한협회, 『회보』 10, 65쪽. ☞

[註 303] 『대한민보』 1909년 8월 17일 지방단신, 1910년 1월 28일 휘보. ☞

[註 304] 대한협회, 『회보』 7, 60쪽. ☞

[註 305] 대한협회, 『회보』 11, 52쪽. ☞

[註 306] 대한협회, 『회보』 7, 60쪽. ☞

[註 307] 『대한민보』 1910년 5월 21일 지방잡사. ☞

[註 308] 『대한민보』 1910년 6월 10일 지방잡사. ☞

[註 309] 『대한민보』 1910년 7월 5일 지방잡사. ☞

[註 310] 대한협회, 『회보』 3, 59~60쪽 ; 『회보』 6, 171쪽. ☞

[註 311] 대한협회, 『회보』 5, 62쪽. ☞

[註 312] 대한협회, 『회보』 8, 64쪽. ☞

[註 313] 대한협회, 『회보』 8, 55쪽. ☞

[註 314] 김항구, 『대한협회 연구』, 단국대박사학위논문, 1992, 13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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