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노래/이기철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산 아니면 또 어디이겠는가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이겠는가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몸은 제 길들여 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 내고 그곳에 채색된 단청(丹靑) 올려서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혈거(穴居)마저 줄어든다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면
내 어제 분필과 칠판 앞에서만 열렬했던 말들이
가시 되어 일어선다
산골 처녀야, 눈 시린 십자수(十字繡) 그만두고
여치 메뚜기 날개 접은 들판의 콩밭 누렁잎 보아라
길 끝에 무지가 차라리 편안인 산들이 누워 있고
산 끝에 예지도 거추장스러워 피라미들에게 맡겨 버린
물이 마음 풀고 흐르고 있다
내 이 길 억새 속으로 걸어가면
배춧잎 같은 정맥 돋은 손을 쉬고
늘 내일로만 가는 신발을 벗어 한 사흘 나뭇가지에 걸어 둘 수 있을까
내 늑골 밑에서 보채던 달력과 일과표와
눈 닿으면 풍금 소리를 내며 일어서던 글자들도
등 두드려 한 열흘 잠재울 수 있을까
먼저 간 발자국들이 내 발길에 지워지고
내 발자국 또한 뒤이은 발길에 이내 지워지고 말
한쪽 끝에는 대구(大邱)*를 달고 다른 쪽에는 은해사(銀海寺)
솔바람 소리를 달고 있는 길
* 대구: 경상북도에 있는 대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