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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63) 여호사밧(1) 우리가 힘써야 할 일 – 말씀교육 역대하 17:1-9
역대하는 유다의 왕들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 왕,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를 집중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 왕들이 다윗과 솔로몬과 함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교훈을 얻어야할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사왕에 대해서도 3장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역대하는 오늘 여호사밧에 대한 이야기도 17-20장까지 네 장에 걸쳐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사밧 이야기의 서두 부분인데, 열왕기에는 없는 이야기(2-19절)입니다. 오늘 역대하가 남겨두고 있는 기록들을 통해 그가 왜 이렇게 중요하게 주목받는 왕이 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까지 살펴본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은 아버지가 이룬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좋은 유산’과,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 아람왕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며, 의원을 의지하는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은 “계속되는 전쟁”이라고 하는 ‘나쁜 유산’을 모두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우선 여호사밧은 계속되는 북이스라엘과의 전쟁, 저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일에 힘을 써야했습니다. 그래서 온 유다의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하고, 아버지가 정복했던 에브라임 성읍들에도 영문을 두었다고 기록을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절이 기록하듯, ‘이스라엘을 방어했다’는 말과 4절의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을 함께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군대를 막아섰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역시 막아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3-4절이 기록하듯,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한 사람,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한 사람, 그의 계명을 행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당연하지요. 상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입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것들이 전수됩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힘껏 배우고 따라야할 것이 있는가 하면, 조심하고 버려야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유산이 있고, 나쁜 유산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구하는 모습, 그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고 모든 가증하고 악한 행위를 버리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다시한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다스리는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는 은혜까지 풍성히 누리시는 복된 분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때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유다에서 제거하는 일을 함과 동시에, 자, 이것이 물리적인 개혁이었다면, 오늘 여호사밧이 주목받게 된 가장 중요한 개혁이 등장합니다. 아사왕이 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깨끗하게 비워냈으면, 채워내야 했던 것입니다. 없애고 없애고 재건하는 것까지는 잘했는데, 자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화가 나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세워진 주상만 찍어내고, 제단만 다시 세워놓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겉보기만 번듯하게 부수고 세워 놓는 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에 주인이, 중심이, 기준이, 무엇보다 귀한 가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큰 개념입니다. 없애고 재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큰 개념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생각나시지요? 누가복음 11장 24-26절을 보니, 귀신이 나갔고, 깨끗하게 소제하고 정리했는데, 그냥 두니 어떤 일이 벌어지죠? 나갔던 더러운 귀신이 물없는 곳으로 다니다가 만난 친구들,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나중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더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그래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빼앗고 제거하고 부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얼마든지 왕이 죽기를 기다려, 정책이 바뀔 때까지 숨죽이다가, 이내 다시 냉큼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놓고 그간 못한 것까지 더해 음란하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여호사밧왕이 잘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정책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여호사밧은 즉위 3년, 그가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때, 그가 했던 일은, 유다 여러 성읍에 방백 다섯사람(7절)과 레위인 아홉 사람(8절), 그리고 제사장 두 사람(8절)을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세상의 논리와 체계를? 세상의 첨단 유행과 사상을? 왕의 크고 위대함을? 아뇨, 9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17:9)
말씀교육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어떤 왕도 이처럼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냈던 왕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총 16명으로 구성된 전담 팀을 꾸린 것이지요? 하나님께 주시는 부귀와 영광을 허튼 곳에 쓰지 않습니다. 온 백성의 마을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율법책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올인했던 것이지요?
그래요. 오늘 그의 아버지 아사의 종교개혁이 우상들을 파괴하고 제단을 재건하는 어떤 겉모습,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한 것이었다면,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말씀을 가르쳐줌으로 그들을 영적인 부분들을 새롭게 세우고 무장하는데 힘을 쏟았던 것이지요. 잘 아시는 대로 남북왕국으로 분열된 이후, 북 이스라엘은 끝없는 우상숭배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데 반해, 남 유다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왕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우상과 가증한 것들을 없애고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바른 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부지런히 힘껏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구한말 나라의 위기를 겪으면서 무속신앙이나 유교, 불교와 같은 것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사경회’를 통해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비워지고 청소된 마음에 다른 악한 것이 틈탈 수 없도록 말씀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 나라 이 민족에 큰 부흥과 하나님의 축복의 길이 열려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1934년, 평양의 여자 사경회에는 2천명 이상이 참가해서 대성황이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사경회가 진행된 11일동안 학교 기숙사와 교실에서 포개 자야만 했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이부자리와 식량을 이고 160km 이상을 걸어서 온 사람도 있었다. 출처 : 대한 성서공회 ]
그러했던 사경회가 많이 약해져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이 개교회에 맡겨져 있는 것이지요? 한국교회에도 다시금 이런 사경회 전담팀이, 지방마다 연회마다 꾸려지면 좋겠습니다. 등급사경회가 부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새롭게 열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저 이단들이 달려들어서 채워주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배우되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말씀을 배우기에 열심을 내고, 목회자들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 초대교회와 같은 큰 부흥과 능력이 우리 안에도 가득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개혁은 누가 시켜서 강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저항하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가시는 힘이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지요. 그래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니, 지난 주일 말씀을 빌리자면, 나의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리라고 믿고 살아야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바른 길을 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 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떤 판단, 어떤 결정, 어떤 선택,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마음을 다해 수고해야 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딴에는 그저 주변을 둘러보며 남들 하는 만큼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하향평준화되어갑니다. 나아가 어느 새 배우지 않아야 할 것, 행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배우고 행하는 우리도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말씀을 배우고 지키지 않으면, 우민이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가장 미련하고 악한 행동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지식과 신앙이 그래서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지요.
오늘 여호사밧은 가능한 많은 백성들에게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율법교사들을 순회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이 모습이, 이 방법이 아마 저 초대교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유다의 부흥은 결국 말씀의 부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히 채우는 것이 부흥인 것을, 어찌 저 여호사밧은 알고 행했을까요? 그래요. 겉모습, 껍데기만 바꾸어서는 온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 시작하면, 우상은 가증한 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버리고 찍고 빻아 불살라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말씀이 충만해야 합니다. 오뚜기의 추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묵직한 중심이 되어,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견고하게, 아니 흔들리더라도 이내 제 자리를 찾는 우리의 신앙으로 든든하게 세워지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여호사밧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유다 나라의 개혁과 부흥에 첫 단추를 잘 끼운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 멋진 출발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데, 어느 새 성경을 배우는 일은 유치부 때, 초신자 때 하는 일 정도로 치부합니다. 우리는 이미 대충은 다 알고 있고, 우리도 다 똑똑하고 좋은 번역도 많아서 성경 정도는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며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들도 많습니다. 그래요.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착각이요, 교만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분명히 교회는 비대해지고 화려한 건물들로 탈바꿈해가고 있지만,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또한 말씀에 대한 갈급함도 사라지고 있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있고, 말씀 가르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지,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저 찬송과 기도로 마음만 뜨거웠다가 마는 예배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자꾸 배우고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10:17).
교회들 스스로도 “큰 위기”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다른 것 아닙니다. 다른 데 없습니다. 내 안에 말씀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인데, 어떤 응급조치들로 위기를 해결해보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이야기 했던 것이지요? 지난 수요일에도 읽으셨지만 한번 더 읽어보실까요? 욥기 22장 21-23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욥22:21-23)
그래요. 교회는 항상 말씀과 더불어 부흥했습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부흥과 성장은 없었습니다. 겉으로 크기가 커졌다 해도 말씀이 사라진 공동체는 부패와 타락을 거듭하다가 스스로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부흥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달라져도 말씀을 빼놓고 이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능한 많은 성도에게 특별히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고,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전심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흥하고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하시고 부귀와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쳐야한다는 사명감과 말씀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전략을 동시에 가지고 큰 예산을 쏟아부어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16사람이 모든 마을을 다니는 숙식과 경비를 다 지원했던 것이지요. 자기에게 주신 부와 영광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요. 한국교회가 이 일에 힘을 내야하고, 오늘 우리도 더욱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사명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명감과 동시에,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성읍, 우리 성도들, 남녀 대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지, 전략과 루트를 더욱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일단 더 배워야 합니다. 수요일마다 TBC성서연구에 열심히 오시고, 새벽마다 말씀을 조금씩이지만 차분히 배워가시면서 함께 기도하며 방법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우리 교회에 우리 성읍에 더욱 큰 부흥이 임하도록 말씀이 흥왕하게 충만하게 임하고 역사하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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