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님 서거 21주기 추도회
1989년 2월 4일, 투병하시던 선생님께서 '고난의 역사'를 뒤로하시고 홀로 가신 날입니다.
이제 가신지 스무한해, 함석헌 선생님 서거 21주기를 맞이하며 선생님을 추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추도회와 함께 2010년 임시총회도 함께 개최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던 이문영 이사장님께서 사임하시어 후임으로 수고 하실 새 이사장님을 선출하는 임시총회입니다.
바쁘시겠지만 회원님들의 적극적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 2010년 2월 6일 (토요일) 오후 2시 곳: 함석헌기념사업회 회관(서교동) 3층
1부; 서거 21주기 추도회 2부; 2010년 임시총회
(새 이사장 선출 및 정관개정)
(사) 함석헌기념사업회
서울 마포구 서교동 448-1 함석헌기념사업회 회관 3층 전화 02-716-2918 팩스 02-716-2919
ssialsori.net hamsh70@unitel.co.kr
1901. 3. 13 평북 용천~1989. 2. 4 서울. 종교인·사회운동가.
함석헌 /함석헌 1916년 양시(楊市)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재학중 3·1운동을 맞아 당시 숭덕학교 교사인 함석은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평양에 배포한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때 민족주의자인 안창호·조만식·이승훈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으며 1927년 도쿄에서 김교신·유석동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유학시절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金監三]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아 이후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1928년 귀국 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0년에 평양교회 송산리 농사학원장을 지냈고, 1942~43년 고향인 용천에서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45년 평안북도 자치위 문교부장을 지냈고, 1947년부터 학교와 단체를 상대로 성서강론을 했다. 1958년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한 필화사건은 자유당 시절의 대표적 필화사건이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1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5·16군사정변에 해한 한국에서의 첫 비판을 발표해 또다시 필화를 입기도 했다. 1960~89년에는 퀘이커교 한국대표로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았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0여 년 간 발행인·편집인·주간으로 있으면서,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여기에 발표한 많은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폈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했고 1985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추천받았다. 제1회 인촌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32~33 : 뒤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제)·〈역사와 민족〉(1964)·〈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1984) 등 다수가 있다.
“함선생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행동하는 양심’ 이었다.” - 김대중 前 대통령
“함석헌 선생님과 같은 큰 어른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 법정 스님
“함선생님은 우리의 아버지였고, 스승이었다” - 이소선 (전태일의 어머니)
민족의 큰 사상가, 우리 시대의 스승 함석헌
‘거목(巨木)’, ‘500년 후에나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인물’, ‘진정한 언론인’ 등등. 모두 함석헌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그는 민주화의 상징 인물이요 대사상가다.
그의 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그의 사상은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함석헌은 여전히 시대의 격류 속에 묻혀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함석헌의 글과 행적, 그리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함석헌과 그의 시대를 다시 보고 그가 이 시대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찾아본다.
어두웠던 시대를 밝혀주었던 등불, ‘씨알의 소리’
70년대 폭압적인 유신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10년 간 발행된 잡지 '씨알의 소리'. 정권의 가혹한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그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 이 작고 소박한 모습의 잡지는 암울한 시대의 양심이자 함석헌의 분신이었다. 그리고, 당시 씨알의 소리에 실린 글들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명문들이다. 당시 검열로 인해 삭제되었던 원고를 공개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통해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를 다시 본다.
함석헌의 글과 육성을 통해 알아보는 씨알 사상과 정신
자유 정신과 저항 정신은 함석헌 씨알 정신의 핵심이다. 그의 일평생은 씨알을 억압하는 불의에 대해 분연히 저항한 기록으로 점철돼 있다. 53년 ‘대선언’ 이후 ‘사상계’에 발표한 글들을 통해 기성의 기독교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시작한 함석헌은 50년대 이승만 독재 정권과 60-70년대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해 치열한 저항을 계속했다. 함석헌의 글과 행적은이 땅의 많은 씨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한국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본다.
싸우는 평화주의자 - 비폭력은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이다
저항하고 싸우되 비폭력 평화주의를 일관되게 외쳤던 함석헌. 함석헌 씨알 사상의 또 하나의 핵심은 비폭력 평화주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80년대 중반 운동권 일부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그의 비폭력 평화주의는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한국현대사 속에서 그의 비폭력주의가 어떻게 구현되었고 그 진정한 시대적 의미는 무엇인지 찾아본다.
가족과 지인들이 말하는 ‘인간 함석헌’
함석헌을 가까이서 지켜 본 일부 사람들은 그 동안 그의 외면적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까지 보아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저항과 민주화의 상징 인물로서의 함석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그의 내면 세계는 어떠했나? 가족들과 아주 가까이서 따르던 지인들을 통해 함석헌의 내면 세계를 알아본다.
자료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