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탐방부 행사 계획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이번 문화 탐방은 경상남도 진주, 사천에서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 문화의 우수함을 탐방하고자합니다. 선배님들! 이번 3월 문화 탐방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팀장 남 무 열 올림
◈ 3월 문화 탐방 행사 일정 : 2019. 03. 15.(금)
◑ 출발장소: (07:40 범어동 어린이대공원, 07:50 대구은행 본점 건너편,
08:00 반월당 동아백화점 앞)
◈ 3월 문화 탐방지 (경상남도 진주, 사천 일원)
- 진양호 공원 - 남인수 동상
- 국립 진주 박물관 -다솔사 -선진리성
(☞현지 사정에 따라 일정이 다소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진양호공원≡
진양호(晋陽湖 유역면적 2,285㎢, 저수량 3억 1,000만t) 호반에 조성된 대규모 공원이다. 1981년 8월 6일 건설부가 진양호 일대 면적 26.39㎢(수면면적 18.75㎢, 육지면적 7.64㎢)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하고, 1998년 12월 16일 진주시가 면적 1.32㎢에 이르는 도시공원조성 기본계획시설을 고시하여 공원이 조성되었다. 진양호공원에는 동물원·전망대·가족쉼터·놀이공원(진주랜드)·삼림욕장·자동차극장 등의 위락·휴식 공간이 들어서 있고, 우약정· 양마산팔각정· 남인수 동상· 이재호 노래 기념비· 망향비· 충혼탑 등의 시설물이 갖추어져 있다. 진주시의 무형문화재 계승·발전을 위해 2002년 6월 준공한 전통예술회관과 노인복지시설인 상락원, 아시아레이크사이드 호텔도 공원 내에 있다. 진양호공원의 동물원은 2008년 현재 서부경남 지역의 유일한 동물원으로, 1986년 1월 20일 개원하였다. 공원 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로 운영되는 시설로 호랑이·사자·곰·독수리·수리부엉이 등 55종(포유류 27종, 조류 27종) 300여 마리의 동물을 볼 수 있다. 공원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조성된 전망대는 2003년 1월 준공한 3층 규모의 건물로, 시원하게 펼쳐진 진양호와 남강댐의 모습뿐 아니라 지리산·와룡산·자굴산·금오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 연결되는 계단은 36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1년 계단’이라 불리는데 계단 아래쪽에는 선착장이 있다. 이 선착장에서는 남강댐 건설로 인해 섬이 되어 버린 귀곡동 지역으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다. 호반과 산이 어우러지는 멋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는 ‘우약정’이라는 정자로, 이 정자는 1974년 진주 출신의 재일교포가 건립하여 진주시에 기증한 것이다. 그밖에 2.91km의 등산로와 1.73km의 산책로가 조성된 면적 18,000㎡의 삼림욕장이 있다. 공원 주변으로는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과 어린이교통공원 및 청소년모험공원, 한국수자원공사가 운영하는 물문화관 등이 있다.
≡진주박물관≡
1980년 10월에 착공, 1984년 11월 2일 개관하였다. 대지 1만 5882.6㎡(4,804평), 건물 4,949.41㎡(1,497.2평)이다. 개관 초기에는 선사시대 및 가야시대 유물을 중점적으로 전시하였으나, 1998년 1월 15일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1, 2층으로 나뉘어진 상설전시실 2곳과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 전시실에는 임진왜란의 결과로 남겨진 여러 문제점들을 테마별로 구분·전시하여 전쟁을 통한 문화교류와 전파양상을 보여주고, 2층 전시실에는 울산성전투를 묘사한 그림병풍, 천자총동, 거북선모형 등 전쟁에 사용된 무기류와 전선 등을 비롯하여 의병들의 항쟁 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한편, 2001년 11월 새로이 개관한 두암관(斗庵館)에는 재일교포 두암 김용두(金龍斗)가 기증한 회화, 목가구,도자기 금속공예품 등 179점의 유물 중 100여 점을 전시해 놓고 있다.
≡다솔사(多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義湘)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天王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또한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普安庵) 석굴,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부도군은 도명(道明), 낙화(樂華), 성진(聖眞), 세진(洗塵), 풍운(風雲) 등 5인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용운(韓龍雲)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선진리성≡
선진리토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74호)은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km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지점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입지상으로는 해안성에 해당한다. 토성의 규모는 둘레가 920m 정도이며 동쪽 및 남동쪽 2개소에 성문터가 확인되었다. 동문지는 육지와 통행이 가능한 곳으로 적대와 해자를 두어 방어에 중점을 두었으며, 남문지는 남쪽 측벽을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성 외부에서 문지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였다. 성 내부에서는 기와, 토기, 청자, 백자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9세기 전반 이후 10세기 전반인 나말려 초(신라 말 고려 초)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왜수군은 이곳에 상륙하여 진을 쳤는데,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승전을 한 곳이 바로 이 사천 앞바다이다. 선조 30년(1597년) 1월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기존의 토성 상부에 왜성을 쌓았다. 또한, 선진리토성은 선조 31년(1597년) 10월 1일, 경상도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 군사와 명나라 동일원제독이 거느린 조명연합군이 격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선진리 토성(축조가 과학적임)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판축토성의 세부적인 축조수법을 확인하였다. 북쪽 성벽에서 확인되는 나무기둥을 중심으로 좌우가 전혀 다른 판축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구간의 축조 구분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곳에 따라서는 나무기둥을 중심으로 동일한 토층 양상을 보이는 곳도 있어 2개의 기둥간격인 800cm 전후가 하나의 구간일 가능성도 있다. 성벽 중앙에서 확인된 보조 목은 성벽 안과 밖의 판자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기둥을 이탈되지 않도록 잡아 주기 위한 것으로 판축 할 때 기둥이 기존의 안과 밖의 벽뿐만 아니라 성벽 중앙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은 성벽의 너비보다 넓게 땅을 판 뒤, 사질점토와 암갈색 사질점토를 10~20cm 정도 다져 기초부분을 조성하여 판축하였다. 처음 축조한 성벽이 무너진 후 외벽 쪽만 ‘ㄴ’ 자형으로 다시 정리하여 그 위에 다시 판축 하였다. 성벽 외벽에는 부분적으로 하단의 기단석 열을 보강하기 위하여 점토를 단면 삼각 형태로 보강했다. 성 내, 외벽에서 380cm~400cm 간격으로 기둥구멍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하여 볼 때 성벽은 구간별로 최초 구간의 판축성벽에 순차적으로 한 구간씩 성벽을 덧대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판축 할 때 사용한 내 · 외벽의 나무기둥은 원형이나 성벽 중앙의 보조 목은 사각형의 목재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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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갑니다
감사히 봅니다
가고
또 가도
내일 뵈겠습니다
굿드림하셔요
아이고 메 울 石사무장 안계시면, 문탐방 소식은 어데서 들을 꼬 여기 실려 있었구나.. 이미 다녀와서 늦게 알았습니다. 임 해설사가 사표를 냈으므로, 허기사 임 해설사 역시 있으나 마나한 石사무장을 의뢰일 뿐 이였지만,. 사무장님<>
할 일이 더 많아 졌습니다. 제가 다 미안 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