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에 물든 석파정
- 이 성 구 -
올해 달력도 한 장 한 장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 나무의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 한 장만 남아 벽에 기대고 서 있다. 계절은 못 속인다고 어제가 절기상 소설(小雪)이다 보니 강원도 대관령에는 벌써 흰 눈이 내렸다고 한다.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일요일 아침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니 가을 단풍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늦가을에 단풍을 즐길 수 있는 명소가 TV에서 방영되었다. 그중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부암동의 석파정을 구경하고 싶어 아침 일찍 간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전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부암동에 도착하니 벌써 관람객들이 타고온 자가용들이 여기저기 틈새를 찾아 주차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인파를 따라 마을 입구에 도착해서 주위를 살펴보니 북악산과 인왕산에 둘러싸인 포근하면서도 고즈넉한 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산책하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아파트촌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한옥의 운치와 여유로운 공간구조가 나를 사로잡았다.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 석파정 전경을 살펴보니 “야! 참 아름답고 멋지다”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단풍 명소로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옹기종기 처마를 걸치고 앉아있는 한옥 집 사이사이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활짝 핀 억새 숲이 있고, 울긋불긋한 단풍 숲속에는 푸른 금강송이 호기롭게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림처럼 잘 다듬어진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붉은 감들이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다. 감나무의 홍시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나훈아의 '홍시’란 노래가 생각난다. 노래 가사를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자식 걱정으로 애태우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럴 때마다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다. 지난날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대차이란 변명으로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니놈도 내 나이가 되어보면 어미 마음을 알게 될 거다”라며 서운한 얼굴로 돌아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나도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가 되어 가니 어머님의 정을 하나 둘 깨닫게 되었다. 후회가 되어 용서를 빌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셨으니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잠시 감상에 젖은 마음을 추스르고 계곡 건너편을 보니 초서로 바위에 새겨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그 내용은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이 친구인 정이에게 신축년(1721. 조선 경종 1년)에 글을 써 주다”는 뜻이었다. 바위에 쓴 글을 보니 이곳은 18세기 초부터 현재의 위치에 별장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철종 때 세도정치가로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김흥근이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당시에는 세 줄기의 계곡물이 만나는 장소라 하여 삼계동이라 하였으며, 별장 이름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면 이곳은 언제부터 석파정이라 불렸을까?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에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와서 보니 수려한 경관이 마음에 들었다. 김흥근에게 별장을 하루만 빌려 달라고 해서 고종과 함께 방문하여 하룻밤을 잤다. 그 후 김흥근은 임금이 머문 곳에서는 신하가 거주할 수 없다고 하며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이 머물면서 주변에 온통 바위가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를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보면 동서고금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려웠던 과거를 잃어버리고 내로남불의 생활태도를 보인다. 지금도 입시부정, 부정축재, 매관매직이 세월을 뛰어 넘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인간사회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집 안으로 들어가 내부구조를 살펴보니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방에 영정사진이 놓여있고, 사랑채에는 황제 복장의 고종 사진이 관람객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잠시 쉬어 갈 겸 대청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곡의 단풍을 쳐다보니 몸속에 쌓인 모든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사랑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천년송’과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조화를 이루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사랑채 측면에 있는 천년송은 천 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650년 된 늙은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 여러 개의 쇠 지팡이를 이용해 팔을 넓게 벌리고 고매하게 앉아있었다.
천년송을 뒤로하고 오솔길로 접어드니 석파정이 얼굴을 살짝 내밀고 나를 반겼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았고, 바닥이 나무로 만들어진 한국 전통양식과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만들었다. 청나라풍의 문살 모양으로 기둥을 장식하였으며, 지붕은 기와 대신 동판(銅版)으로 만들어져 이국적인 건축양식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지금은 물이 말라 운치가 없지만 장마철에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물줄기를 상상하니 여름에 친구들과 모여앉아 술을 주고받으며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다.
석파정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가 버티고 있었다. 생김새가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코끼리바위라고도 한단다. 영험한 기운이 있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어 자식을 낳았다”고 하여 소원바위라고도 한단다. 이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소원성취를 위해 바위 사이사이에 동전을 붙여 놓고 기원하는 모습을 보니 인간의 나약함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둘레 길을 따라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단풍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조화를 이루니 더욱 발걸음이 가벼웠다. 앞에서는 젊은 청춘남녀가 잊지 못할 추억이라도 만들기 위해서 인지 손을 꼭 잡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솔길을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자연을 벗 삼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다 보니 해는 벌써 인왕산을 넘어가 저녁노을을 만들었다. 단풍나무들은 더욱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며 나그네의 발길을 놓아 주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여 내리막길에 다다르니 경주에서 옮겨 왔다는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이 나를 반겨 주었다.
석탑을 보는 순간 불심이 발동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소원이나 빌고 가련다. “남을 탓하기보다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생각하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나무처럼 낙엽을 떨어트리면서 하나 둘 마음을 비울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단풍처럼 여생을 물들이고, 노을처럼 머물다가, 낙엽처럼 떠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다 가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