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
차에는 배낭, 1인용텐트, 에어매트리스, 버너, 코펠, 그리고 등산화를 싣고 다닌다.
정작 등산복은 없다. 또 영업자료도 턱 없이 부족하다. 이러니 MDRT란 연봉 1억원의 보험판매원이 못되고 늘 중소기업 과장월급 수준이다. 그런 나에게 불만을 가진 것은 마누라뿐이다. 물론 자식놈들도 불만이 있겠으나 예의바른 놈들이라 아버지에게 감히 불평을 못한다.
1991년 삼성중공업(주) 강릉영업소에 근무할 때가 봄날이었다. 차에 등산용품을 싣고 다니지 않아도 젊음으로 산에 다녔다. 양복에 구두를 신고 산에 다녔다. 내가 맡은 영업지역이 정선군과 평창군, 강릉시내 일부였다. 수금관리하는 고객이라고는 10여명이다. 부산지점에서 근무할 때 120여명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한가함이 나는 좋았다. 평일에도 산에 갈 수 있으니까.
1991년6월의 어느날, 정선읍에서 1박을 하고 강릉으로 귀소하는 길에 가리왕산을 봤다. 가고픈 마음이 일어나니 발은 자동으로 브레이크을 밟는다. 숙암분교 건너편 길가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구두에 양복 입고. 숙암분교~중봉~가리왕산.
청명한 하늘과 푸르른 초지, 춤추는 강원도의 산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넘실넘실 같이 춤추다 가리왕산에 안겨 깊은 잠을 잤다.
하산하니 해는 개울에 빠져버렸다.
염병~! 아직도 내가 그때의 청춘인줄 착각하고 있다. 요즘도 다니다가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훌렁 산으로 든다. 위험한 일인줄 알면서도. 만용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리왕산이 그립다. 그리운 가리왕산을 4년전 봄날에 갔다. 산불예방기간이라 입산불허. 3일 뒤에오라고 친절히 안내하는 직원이 밉지는 않았다.
3년전 가을에 고향친구의 부음을 듣고 제천시로 갔다. 발인하고 가리왕산으로 향했다. 장구목이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정상에서 푸른 하늘과 푸르른 초지, 춤추는 강원도의 산들을 보지 못해 흐린 날이 야속했지만 이끼계곡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어쩜 도적 맞았는지도 모른다. 1989년도 18만원 주고산 고어텍스 1인용텐트와 매트, 60리터 배낭 등. 야영하고 민둥산을 가려는 계획은 틀어졌고 바로 귀가하였다.
속도 상하지만 가리왕산을 만났다는 기쁨이 커서 그건 묻혔버렸다.
가리왕산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경기를 위해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이렇게 만용을 부려 가면서 가는 산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중학교 1학년 4월에 영월에서 부산으로 전학 갔다. 집안 모두가 이사를 했다. 예민한 사춘기시절, 향수병에 걸렸던 것 같다. 고교졸업할 때까지 매 방학때 고향으로 갔다. 고향엔 친척이 없었기에 머물 곳도 없었지만 용케 한달씩 버티다 부산으로 내려왔다. 성인이 되어서도 매년 한번은 고향에 간다. 물었다. 내가 나에게.
'왜 고향이 그렇게 가냐'고.
딱히 답이 없다. 고작 답한다는게
'고향이 거기 있으니까'였다.
'산에 왜 가냐'고 내게 물으면
'산이 거기있으니까'라고 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