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971년 9월 나는 고려대 9월 학기 졸업생으로 사회로 나왔다. 철수 자살 이후 8년이나 세월이 지난 후다. 돌이켜보면 63년에 경택이가 보낸 '철수 사망. 급히 하진하기 바람.' 그 한 통 전보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만약 그 전보가 안왔다면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미식축구 선수들과 어울려 종로 2가 디셔네 음악실에서 팝송이나 흥얼거리면서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졸업했을 것이다. 칸트나 헤겔 같은 서양철학만 알고, 그 밖에 노장철학이나 유가사상, 불교철학이 있고, 그게 더 배워볼만한 것인줄 생각도 못해봤을 것이다.
철수 자살 후 나는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인생행로를 걸었다. 그 가을 자원입대했고, 229자동차 대대에서 자살용 실탄을 차에 숨기고 다녔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대하자 2년간 섬을 돌아다녔다.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방에서 혼자 촛불 켜놓고 성경 읽다가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한밤에 일어나 한치 앞 내다볼 수 없는 안개 덮힌 해변을 헤매기도 했다. 생을 마감하려고 절벽 중간에서 술 먹고 잠들기도 했고, 섬마을 여선생을 만나 거기서 살 궁리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뭔가에 홀려있었다. 생이 무의미했다. 철수는 자살했고, 나 역시 그래야 했다. 당시 나는 그랬다. 사회로 복귀할 길은 멀고, 거기서 벗어날 탈출로는 자살 밖에 없었다. 그때 날 구해준 사람이 형님이다. 형님 따라 서울 올라올 때, 나는 이미 백년 다 산 사람 같았다.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했다. 대학 복학하자, 나는 수도승처럼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빼고는 학문에만 파고들었다. 더 이상 서양철학, 특히 실존주의 같은 것에 시달리지 않았다. 나는 노장철학에서 긍정적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후 나는 신문기자가 되었다. 재벌 자서전 써주는 작가 되었다가, 기업체 중역 되었다가, 대학교수 하다가 은퇴했다. 나는 재벌과 한방에서 20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냈다. 사람이 염원하는 돈의 무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은 비굴하면 돈의 노예가 된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게 다 철수 덕택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나는 자원입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철학에 심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락동 성당 문상객 명단에서 최옥녀란 이름을 본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름은 단숨에 나를 50년 전의 시간으로 끌고가버렸다. 옛추억이 밀물처럼 내 앞에 밀려왔다. 경택이는 이미 고인이다. 이제 내 청춘의 이력서를 들어줄 사람은 오직 옥녀 밖에 없다. 그래 나는 옥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지나간 일은 다 아름답다.
그때 한 여인이 내게 닥아왔다.
'오빠! 옥녀가 철수오빠 동생인거 알지요?'
정애였다. 그는 여고시절 잠시 우리집에 하숙한 적 있다. 내가 철수하고 친한 것, 철수 동생이 옥녀인 걸 안다.
'알지. 옥녀가 서울 사는 모양이던데?'
'아까 잠깐 보였는데, 집에 간 모양이네요. 남편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살고있어요. 철웅이는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고.'
철웅이는 철수 동생이다.
'정애씨!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인데....‘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 가지고 있었어요?‘
'아니, 철수 자살 후, 그 집에서 나를 원망했을 거고...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도 파란만장한 사연이 많잖아? 그래서...’
'하기사 오빠도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너무 보고싶지. 만나게 해줄 수 없을까?'
'내가 주선해 볼께요.’
그러고 정애는 갔다.
나는 최무룡이 부른 <원일의 노래>가 또 생각났다.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쏘냐 헤어질 운명, 차가운 밤 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물론 옥녀가 차가운 밤하늘에 웃음을 파는 그런 인생을 살았을 리 없다. 이쁘다고 어릴 때부터 '새첩이'란 별명을 가졌던 옥녀한테 내가 다른 생각을 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고향 뒷동산은 아니라도, 옥녀가 산다는 가락동 어디 커피숍에서라도 꼭 만나고 싶었다.
옥녀도 이젠 머리에 하얀 은발 날릴 70 초반의 노인일 것이다. 우선 ‘메기통’ 이야기부터 해보고 싶었다. 거긴 강 건너에 가을이 익어가던 들판이 있고, 서장대 너머 호국사에서 들려오던 종소리가 있었다. 종달새는 보리밭 위에 높이 뜨서 지저귀었고, 강물엔 메기가 헤엄쳤다. 철수의 화장한 재를 뿌린 거긴 봄마다 벚꽃 만발할 것이고, 가을이면 오래된 감나무에 홍시가 붉을 것이다. 풀섶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마져 그리운 그곳을 옥녀와 이야기 해본다는 것 자체가 기대할만한 일이다.
언젠가 진주서 등산팀 회장하는 친구와 노래방에 간 적 있다. 그가 총무와 또 한분을 불렀다. 거기서 나는 깜짝 놀랐다. 오래된 성곽 아래 핀 복사꽃 같다고 할까. 수줍고 은근했고, 그러면서 풍류가 있었다. 하도 감동적이라 후에 글을 쓴 적 있다. '진주 여인은 인근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야채 닮았으니, 부드럽기는 신안동에서 자란 토란처럼 부드럽고, 시원하기는 도동의 수박처럼 시원하다. 달콤하기는 비봉산 산딸기같이 달콤하고, 연하기는 습천못 무화과처럼 연하다. 감성은 촉석공원 석류처럼 새콤달콤하고, 피부는 비온 후 칠암동 대밭 속에 돋는 죽순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하다. 봄이면 들판에 나가 쑥 캐고, 여름이면 봉선화 꽃물들인 손으로 남강에서 빨래하는 여인이 진주 여인이다. 이 천년기념물 같은 진주 여인은 바늘 틈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쌀쌀한 서울 여인과 도저히 같은 등급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옥녀도 수줍으면서 감성적일 것이다. 다정한 진주 여인이 ‘당미 언덕’ 이야기 하다가 손수건 꺼내 눈동자에 맺힌 이슬을 닦을지 모른다. 인생은 한 편 드라마 같은 것. 서로 그동안 어디를 얼마나 헤매 다녔던가.
나는 20년 쯤 글을 써왔지만, 이름난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 언덕에 돌을 하나 세우고 싶다. 돌에 이런 내력을 새기고 싶다. ‘여기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한 청년이 묻혀있다. 평생 그를 그리워한 친구가 여기 돌을 하나 세운다.’ 그 옆에 누구라도 잠시 거기서 쉴 수 있도록 벤치 하나 놓아둘 것이다.
나는 옥녀에게 그런 이야기도 하고 싶고, 그때 혹시 옥녀가,
‘오빠! 팔십 바라보는 우리는 저승 가는 순서가 없어요. 언제 저와 같이 ‘당미 언덕‘에 한번 가봅시다.’
하고 제안할지 모른다.
그날 가락동 성당에서 정애와 헤어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타향 헤매던 나그네는 나이 들수록 고향 여인이 그립기 마련이다. 최희준의 '병사(兵士)의 향수'란 노래가 있다. '내 고향 처녀들이 나를 불러주는데, 하루에도 열 두번씩 가고 싶은 내고향. 에헤야 가다 못가면 에헤야 쉬었다 가세. 내 님의 치마 한 감 사가지고 갑시다.'
그날 정애와 헤어진 후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가 최근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정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