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박해시대에 나주에서 순교한 네분의 순교자 기념경당
나주 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대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 베드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 네 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그중 세 명의 순교자는 1871년 나주에 잡혀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1872년 나주 무학당(진영의 군사 훈련장) 앞에서 석침과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비망기》(461쪽)에는 1839년 공주 태생인 이춘화 베드로가 나주에서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아 11월에 읍내 감옥에서 33세로 선종했다고 나온다.
그들이 순교한 장소인 나주초등학교 정원에는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10여 개의 돌이 130여 년 동안 현장에 보전되어 오다가 2001년 이곳 나주 성당으로 옮겨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건립되었다.
경당 입구에 서 있는 60톤의 거석은 ‘석침사(石針死)’를 당한 무학당 순교자들의 용맹을,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을,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
나주 본당에서는 2004년 5월 5일 설립 70주년 기념으로 순교자 기념 경당 건립과 아울러 초대 나주 본당 신부이며, 5대 광주 교구장이고,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서 신앙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고 헨리(Henry, 玄海, 1909~1976, 하롤드) 대주교의 기념관과 교육, 의료 등 자선을 통해 복음화에 앞장 선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성당은 전국에서 서울 중림동 성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성당, 원주 용소막 성당 등 몇 안 된다. 이처럼 나주 본당이 초대 주임 신부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수십 점의 하롤드 대주교 유품들 또한 예사롭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들이다.
◆ 현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
성당 왼쪽 언덕 위에는 고풍스런 단층 적벽돌 건물 하나가 서 있다. 바로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이다. 1934년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로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2002년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해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일제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1935년, 나주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미국인 하롤드 대주교는 이곳에서 7년간 사목하면서 선교는 물론 성당 안에 해성학교를 설립,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에는 대주교가 본당 초대주임 시절에 쓰던 타자기를 비롯해 기도서, 십자가, 성합, 제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쏟았던 하롤드 대주교의 땀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유품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현(미국명 Harold Henry) 대주교는 1909년 7월 11일 미국 미네소타주의 노드필드에서 태어나 1932년 12원 21일 성 골룸반 출신의 사제로 서품되어 1976년 3월 1일 제주에서 서거하기 까지 43년간 본당 신부와 교구장으로 사목하면서 순교 영성을 몸소 실천한 사제이다. 현 대주교는 여러 본당을 설립하고 남녀 수도회를 초청하여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교육, 의료, 복지와 관련된 많은 사업을 시작하여 사회를 구제하고 천주교의 발전 토양을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 말기에 초대 나주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하여(1935년-1942년) 선교와 복지 그리고 해성학교 설립 등 지역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기에 그분을 추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분이 사셨던 집을 복원하여 세운 기념관이다.
◆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
경당을 나와 대나무밭과 토담길을 따라 내려오면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이었던 한옥 기와집이 복원되어 있다. 1934년에 건립돼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까리따스 수녀회 본원이었던 이 한옥은 안채와 행랑채로 구분돼 있으며, 당시 수녀들이 사용했던 각종 유품들을 전시했다. 또 수녀원 안뜰에는 초창기 지원자들이 직접 만든 성모 동굴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지오회 수도 사제 안토니오 카볼리(Antonio Caboli) 신부가 일본 미야자키[宮崎]에 설립한 수녀회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1926년 2월 8일 살레시오회 선교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카볼리 신부는 미야자키시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우선 신앙심이 깊은 젊은 여성들을 모아 애덕 자매회(愛德姉妹會)를 만들었다.
이 모임 회원들은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병자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꾸준한 활동으로 규모를 늘려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1937년 8월 15일에는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로 교황청의 인가를 얻었다. 한국에는 당시 광주 교구장이었던 헨리(1945∼1971) 대주교의 초청으로 1956년 10월 19일에 선교 수녀를 파견하였다.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에는 각 교구에서 본당 사목을하고 있으며 파푸아뉴기니에서 해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교포 사목에 힘을 쏟고 있으며 이 밖에도 교육, 사회사업, 출판 사업 등을 전개한다.
이곳은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가 시작된 곳으로, 1956년 광주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몬시뇰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한 이 수녀회의 최초의 본원이자 지원 원으로, 수도회 설립자 가볼리 신부가 각별한 관심으로 다녀간 곳이다. 그 때 이곳으로 파견된 수녀들은 남북 분단 전에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들이었다. 당시는 한국 전쟁 직후로 전쟁의 상처가 컸으며, 성당의 구호물자 배급으로 신자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선교 수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원래 정병교씨 소유였던 것을 1956년 구입하여 개조한 것으로 안채(1934년 건립)는 수도자들이, 행랑채(1933년 건립)는 지원자들이 사용하였다. 1959년 지원 원은 광주 학동으로 옮겨졌으며, 한국 수도회의 표양이 된 수도자들의 삶을 되새기기 위해 2004년 5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순교자
◆ 강영원 바오로 ( ? ∼1872)
전북 용담인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하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굳굳이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유치성 안드레아 ( ? ∼1872)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전북 무장 암틔에서 살다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혔다. 그는 신문을 받으며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에 불을 지지도록 하고 나아가 돌무더기에 묻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 동료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유문보 안드레아 ( ? ∼1871)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가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 묵상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수도 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 이춘화 베드로 ( ? ∼1839)
나주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기해박해(1839년) 때 나주 읍내 옥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춘화에 대한 기록은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짤막하게 기록된 기사가 전부로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이춘화는 공주 태생으로 나주에 와서 산지 얼마 안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체포되어 천주 신앙을 지키다가 고문으로 읍내 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기해박해 때 청주 고산에서 순교한 박 바르바라는 이춘화의 처제로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집안이 모두 신심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된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