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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국토의 정중앙지역이라는 양구(楊口). 내 마음 속의 스승 박수근 화백의 고향이자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라는 기억속의 땅을 근래 세 번이나 더 찾게 되었다.
박수근미술관 개관(2002.10.25) 때 첫 발을 딛고서 이듬해 ‘박수근을 기리는 작가들’(2003.3~6)에 출품한 당시에는 사정이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근래 양구가 고향인 한 지인과의 인연으로 다시 두 차례, 한 주간이나 양구에 머물렀다.
▲ 계곡과 돌단풍(33 X 24.5cm) |
오늘은 금강산 가던 옛길을 따라가는 DMZ 두타연 트레킹과 제8회 도솔산전적문화제 행사에 참가(2005.6.19)하기 위해 떠나는 날. 모처럼 아내와 함께 채비했으니 참으로 특별한 여정이다. 동행은 차편과 기사를 자청함은 물론 양구가 고향임을 자긍으로 살아가는 장영록(張永錄) 박사(인천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동료교수인 최순옥 박사(철학 전공)를 합해 네 명이다.
한 달 전 나의 화실을 방문한 장 박사의 전격 제안으로 계획에 두었던 생태우수마을(방산면 송현리) 탐방이 앞당겨졌다. 진정으로 달려오는 인연을 어찌 망설이랴. 그 후 이미 2주 전 닷새나 송현 마을순례를 다녀온 후 또 떠나는 마음은 지난 만남이 한껏 그리움으로 살아 오른 탓이다.
장 박사는 길손을 위한 배려로 춘천 소양강 부두에 세 사람을 내려주고 육로로 차를 몰아갔다. 은빛 물결 호수의 물을 가르는 낭만과 더불어 추곡약수터에 이르러 안내방송에 귀가 쏠린다.
“여러분이 보시는 좌측의 추정리는 한국에서 제일 작은 마을로 두 가구가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한 분은 이장님이고 또 한 분은 반장님이십니다.”
배는 반시간 만에 38도선을 경유, 양구 선착장에 닿았고 일행은 육로로 온 장 박사 차에 합류했다. 먼저 박수근 미술관을 찾아 ‘다시 봄이 오다’를 관람하고, 한 작가의 영혼을 지키는 권성아 학예연구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폐교와 소담한 도촌초등학교도 둘러보았다.
두타연에서 탄성 속 행운의 순간 만끽
이튿날 아침(6.19), 트레킹 때문에 동면 월운리 비득고개 군연병장에 집결하기 위해 차를 바꿔타야 했는데, 방산면장(김창진)의 배려가 그새 지난 날의 정으로 새록하다. 그런데 중도에 합류한 이가 있었으니 서울에서 새벽차를 타고 서둘러 달려 온 이윤희(李潤熙) 교수(인천대 사회학)다. 순간의 선택, 찰라는 영원으로 가는 추억의 가로등이다. 벽암록(碧巖錄)은 말한다. ‘내 삶에서 가장 절정의 날은 언제입니까? 바로 오늘입니다’라고.
트레킹은 비득고개를 출발, 금강산 가는 길목을 경유, 두타연
▲ 두타연(頭陀淵)에서 (24.5 X 66cm) |
드디어 ‘용의 머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고 주변을 둘러싼 기암괴석은 마치 병풍을 연상케 한다(龍頭直落瀑 怪巖屛風造)’는 두타연에 이르러 김밥을 먹는 시간. 서둘러 폭포 아래로 내려가니 모두들 탄성 속에 행운의 순간을 만끽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다 슬슬 물속으로 들어가자 열목어(천연기념물)가 살살 종아리를 비껴간다. 모래무지도, 때깔이 신비한 쉬리도 지천이다. 바위에는 가을이면 붉은 빛을 토할 바우나리(돌단풍)가 하늘거린다. 2주 전 방산면의 협조로 군사지역을 둘러보고, 두타연에서 화첩을 펼치며 탁족(濯足)을 즐겼던 나그네의 행운이 새삼스럽다.
두타연이란 이름은 천 년 전 연못 위에 두타사(頭陀寺)란 절이 있었음에 연유한다는데, 물 떨어지는 높이가 10m, 연못은 지름 20m나 되며 바위병풍을 두른 듯하다. 동쪽 암벽에 큰 굴이 있고 수심은 12m나 된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수입천(水入川) 물줄기를 따라 31번 국도(총 18km)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6.25전쟁 이후 50년이 넘도록 통제되었다가 두 해 전(2003.6.1)부터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양구문화> 2004년).
두타연이 흐르는 수입천. 그 계곡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마을 중의 하나가 지난 시간 산마을 순례로 닷새를 보낸 방산면 백석산(白石山?1,142m) 송현리(松峴里)다. 마을에서 묵은 다음날은 마침 현충일(60회) 위령제 날이었다. 동면교회 뒷산 위령탑에서 추도기념행사로 조총을 발사하고, 방산초등학생들의 현충일 노래가 이어졌다. 분단의 비극이 남달랐던 현장으로 군부대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온 양구땅은 경제발전이 더딘 대신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남한 최고인 터전이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은 세상사의 이치인가.
그러나 아주 먼 시간부터 양구의 물길은 샘이 깊은 푸른 물이었고 풍광은 아름다웠나 보다. 퇴계(退溪) 선생이 1562년 가을에 어사로 양구에 왔을 때 읊은 ‘양구(楊口)’가전해 온다.
‘옥돌 금모래 깔린 가을 물은 맑고
돌 밑의 반석(盤石)은 푸른 병풍 같구려
수레를 세우고도 저무는지 몰랐고
기구(埼嶇)한 백리노정(百里路程)도 잊어 버렸네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정경들
▲ 방산 소나무(24.5 X 33cm) |
분명 소나무가 많았을 송현리(松峴里)는 현재 참나무의 강세로 천이현상이 두드러져 솔밭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이 아쉬움은 이튿날 수입천의 하류인 파서탕 가는 길목에서 만난 장대한 금강송 한 그루로 위안이 되었다. 주변엔 사람들이 돌탑을 쌓아 신목(神木)의 위상을 기린 흔적이 보이고, 아기 소나무 한 그루가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오로지 마을 사업과 주민살림에 헌신하는 이경수(李景洙) 이장 부부는 진정한 마을 머슴이었다. 수입천의 정화사업과 꽃길 조성, 친환경농법(무농약오리농법, 자연퇴비 사용), 폐기물을 이용한 쓰레기 수거시설 등을 통해 생태우수마을(환경부 지정)을 만든 일꾼이다.
서울 구로구 ‘바르게 살기운동 개봉2동 위원회’와 자매결연(2005.5.20)을 맺은 마을은 이장과 함께 새농촌건설 마을총무 박기수(52), 청년회장 권돈찬씨(49)가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었다. 당면한 공동사업은 수입천 주변을 매립한 터전에 초가정자각을 짓고 넓은 마당을 이용해 각종 축제와 관광시설을 유치하는 일이다. 이미 솔모루정, 금강정, 백석정, 송현정, 디딜방앗간은 지었고, 수입천이 내려다뵈는 경치 좋은 자리에 좀더 큰 초가정자를 세우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이장 주재로 땡볕에 모여 이엉을 엮고 있다. 광장 입구는 온갖 야생화를 심었고, 물레방아 아래 어족관에는 물고기가 노닌다.
▲ 김용손 노인회장. |
“아, 요즘 시상 오뉴월 땡볕에 이엉 엮는 데가 또 어디 있는가?”
“여기 있지, 어디 있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제. 어이 화가 양반, 총무 부부만 그리시우. 저어기 아무나 할망구 하나 꿰차고 와, 그림에 나오게.”
“아니야, 모델비를 우리가 받아야 하제.”
김용손(70) 노인회장을 비롯해 주민들이 모여 볏단을 헤쳐 이엉을 엮는 순박한 모습들.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정경 앞에 나는 화첩을 펴고 말없이 함께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한 바가지 물로 땀을 씻어내고 초가정자에 올라 새참으로 자장면을 먹는 모습에선 잃어버린 ‘두레’의 모습이 찡하다. 벗어놓은 신발만 보아도 남녀노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노동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로 땀의 진실은 거룩하다.
방산면 직연폭포는 양구팔경 중 하나
마을이장과 짱구네식당에서 따로 점심을 먹는데 권돈찬, 박기수씨가 함께 자리했다. 그런데 식당주인 서창용씨(46)는 어제 본 소나무 앞의 탑을 수년간 쌓은 이라고 한다. 권돈찬씨는 어젯밤에 찾아뵙고 그린 조계화 할머니(86)의 사위다. 권씨는 부인 김현옥과 동갑나기로 마을에서 소꿉동무로 자라 스물한 살에 결혼, 오남매(1남4녀)를 두었다. 권씨는 나와 동갑이어서 “어이, 권형. 무엇이 그리 급했소, 참 대단해” 하자 권씨는 매우 쑥스러워 하며 “거시기 내가 손이 귀한 집의 맏이라서…” 한다. 금세 말을 트고 받는 사이에 옆자리의 박기수씨가 한 마디 건넨다.
“듣기로 우리 마을을 그린다는데, 제대로 보기나 한 거요?”
몇 마디 던진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그러면 안 되지요, 내일 내가 시간을 낼테니 잘 살펴보고 가시오”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박씨는 마을에서 태어나 군생활 외에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고, 또 문화원에서 근무했다고 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