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4 - 야마가타에 도착해 호텔 체크인후 거리를 구경하다가 만두를 먹다!
2022년 11월 4일 릿쇼지 절 을 구경하고는 야마데라에키 山寺(산사)에서 센다이에서 오는
쾌속 열차를 타고 22분 만에 야마카타 山形(산형) 역 에 도착해 서구로 나가서는
토요코인 야마카타에키 니시구치 호텔에 가서 아침에 맡긴 배낭을 찾아 체크인을 합니다.
그러고는 역 서구는 신시가지인양 썰렁한 편인지라 동구 로 가기 위해 역을 통과하는데 여기
야마가타역에는 관광지 를 소개하는 사진에 다치바나 대나무등 장식들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히가시구치 로 나가는데..... 이 도시 야마가타 山形 는 마미가사키 강변에 발달한 성읍으로 예로
부터 모가미강의 수운에 힘입어 저마와 생사 등의 거래가 성하여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야 늘 그러하듯 이자카야에서 맥주 를 마시면서 안주로 이런저런 것을 시켜 먹고 싶다만 매일 이자카야에
가느라 돈을 쓰니 마눌이 오늘은 마침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만두 라 부르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교자 라
부르는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중국에서 만두(만터우) 라고 하면 속에 아무것도 없는 밀가루 찐빵 을 말합니다.
에전에 처음 야마가타시에 왔을 때는 전국적인 체인 이자카야 인 시로키야 白木屋(백목옥) 로 들어
가서 생맥주 나마비루에 몇가지 안주를 시켜서 저녁 을 먹는데..... 예전에 나카쓰에서 밤중에
처음 간판을 보고 白木屋 (백목옥, 시로키야)을 “일본옥” 이라 잘못 읽었던게 생각나 웃음이 나옵니다.
그때 메뉴 중에 김치인 기무치 キムチ 가 보이는데 本場(본장, 원산지) 은 한국의 경상도 로 가격은 부가세
미포함으로 298엔 이라고 적혀 있으니 부가세 8% 를 포함해 2,600엔을 치르고 나왔는데, 마눌은
그냥 역전에서 500엔 짜리 우동 이나 먹지 매일 이자카야를 찾는다고 입이 쑥 나와있지만 모른체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눌에게 이끌려 들어온 만두 가게에서 만두는 물론이고 생맥주인 나마 비루 를 시켜서
한잔 들이키다 보니, 오늘 아침 요네자와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와 호텔에 배낭을 맡기고 다시 기차
를 타고 동쪽 산속에 릿샤쿠지를 다녀오느라 피곤했던 몸과 마음을 쉬는데 문득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동아일보에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가 쓴 “ 자기 세력 보다 사회 중시,
에도(도쿄) 를 내준 가쓰의 ‘질서 있는 퇴각’ ” 이라는 기사 입니다.
가쓰 가이슈 (勝海舟·1823∼1899),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이름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존경했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 이었다면 더 가깝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막부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군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江戶·도쿄) 까지 쳐들어왔을 때 막부 측 총사령관 이었으니
역사의 패배자다. 그러나 그처럼 멋있고, 의미를 남긴 패배자를 알지 못한다. 오늘은 ‘멋진 패배자’ 의 얘기다.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는 정치적 후각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막부에 반란
을 일으켰던 조슈번(長州藩) 정벌에 실패 하자, 권력을 유지할 길은 막부를 포기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스스로 270년간 계속되던 막부를 폐지하고 자신도 쇼군 자리에서 내려 왔다.
미국 함포사격 위협에 굴복해 요코하마와 하코다테를 개항 했으니 일본의 혼을 더렵혔다고 존왕양이론자
들이 들고 일어나 막부를 지탄하던 여론이 순식간에 바뀌어 용단을 지지했다. 요시노부의 노림수
는 지지 여론을 모아 천황(일왕) 밑에 신정부 를 세우고 자신이 실권자 가 되려는 것이었다. 막부
의 무력 타도를 계획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당황했고..... 그 반전을 꾀한 것이 왕정복고 쿠데타 이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역적이다.’ 쿠데타로 천황(일왕)을 손아귀에 넣은 그들은 하루아침에 ‘관군’ 이 되어
‘역적’ 도쿠가와 세력을 치러 에도로 행군했다.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막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가쓰
가이슈 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 덕에 승진을 거듭했지만, 막부 주류 세력을 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막부의 여명 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부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게
‘마무리’ 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권력에 대한 미련은 연인보다 더 질긴 법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그걸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거니와, 통찰했다 해도 미련을 끊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진영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 : 막부 주류 세력들은 그의 노선을 경멸하고 한직으로 내쳤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해군 건설에 뛰어 들었다. 자기를 내쳤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작은 해군
조련소 설립 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머지않아 막부도 번(藩·봉건국가) 도 없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할 터인데, 그 일본을 지켜주는 것은 해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 다. 젊은 료마는 누나에게 “요즘은 천하에 둘도 없는 군학자(軍學者)
가쓰 린타로(가쓰 가이슈) 라는 대선생님의 문인이 되어 귀여움을 받고 있어. 가까운 장래에 오사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해군을 가르칠 곳을 설립 하고, 90m 정도 되는 배 를 만들 거야. 제자들도 400
∼ 500명 정도 각지로 부터 모여들고 있어” 라고 하며 신나했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가쓰 가이슈는 반막부 세력 중심 사쓰마번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와도 친교를 맺었다.
1864년 사이고를 만나 막부독재를 허물고 웅번(雄藩· 큰 봉건국가들) 연합정권 이 세워
져야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놀란 것은 사이고였다. 그는 이를 ‘공화정치’ 라 명명 했다.
“(가쓰는) 실로 놀라운 인물로,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 (佐久間象山· 최고의 양학자)
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 버렸다”
고 토로했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 “그(사이고) 를 만나 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나았지만 , 이른바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 가 아닐까.”
막부 총사령관 가쓰 가이슈 와 관군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 는 이틀간 협상을 벌였다.
가쓰는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도쿄) 를 관군 에 내어준다.
진영을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 은 몇 년 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 지었다. ‘관군’ 이 에도성 총공격을
앞두고 있을 때, 얄궂게도(다행히도?) 양군을 지휘하고 있던 것은 두 사람이었다. ‘공화정치’
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에도성(도쿄성) 외곽에서 단둘이 이틀 동안 회담 했다.
둘은 외세침입을 목전에 둔 마당에 오직 ‘일본’ 이라는 국가만을 생각 하자고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가쓰 가이슈는 예상치 못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사이고는
점령군 이었지만 깍듯이 예의 를 갖췄다. “사이고는 나에 대해 막부 중신의 예우 를 잃지 않았다."
"담판할 때 시종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금도 승리한 위광으로 패장을 경멸하는
듯한 모습 은 없었다.” 이 담판 없이 총공격이 이뤄졌다면 100만명의 에도 시민은 참화 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군 간에 벌어졌을 처절한 전투는 두고 두고 깊은 원한과 분열을 초래 했을 것이다.
천황(일왕) 을 등에 업은 관군 이 에도를 함락하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와 벌인 고슈·가쓰누마 전투(1868년) 를 그린 삽화. 이 전쟁의 패배로 막부는
더욱 수세에 몰렸고, 당시 막부군 총사령관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항복을 결심 하게 된다.
저 교토 동쪽 고슈 전투는 막부군은 1만 5천 으로 조슈번, 사쓰마번, 히젠번에 도사번등 신정부군
5천 보다 많았으나 신정부군은 나가사키 영국인에게서 대포와 기관총에 신식 소총 을
구입해 화력은 막부군에 앞선데다가 천황(일왕) 의 가신을 설득해 천황의 어기 를 내 걸자
졸지에 관군 이 되었고 260여년간 관군이던 막부군은 역적이 되는지라 사기가 떨어져 참패합니다.
에도를 점령한 사이고 다카모리 는 잠시 교토로 떠나게 되자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 라며 치안 책임을 가쓰에게 맡겨 버렸다. 승자는 승자
다운 품격 이 있어야 한다. 조그만 승리에 우쭐해서 점령군 처럼 행세 하는 자들에게 승복할 패자는 없다.
가쓰는 패자의 품격 을 지켰다.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막부군을 끝까지 설득 했고, 막부 가신을
이끌고 도쿠가와 세력의 본거지 시즈오카로 선선히 물러났다. 막부 가신들은 그를 사쓰마, 조슈와 타협해서
막부를 팔아 먹은 자라고 매도 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게 중요합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는!)
이후 메이지 정부의 거듭된 입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가 한 일은 주군을 잃고 가록(家祿)
을 잃어, 명예도 생계도 막막해진 막부 가신들과 그 식솔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는 승리한 세력의 행태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패배하는 방식’ 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
대세를 읽지 못하고 무모한 집착 을 부리면 무고한 인명은 손상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 커진다. 물러나면서
행한 총질로 폐허 가 되면 사회 재건은 그만큼 어렵다. 자기 세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끊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가쓰 가이슈가 이끈 ‘질서 있는 퇴각’ 이 일본을 살렸다.
만약 가쓰 가이슈 가 아니었다면? 가쓰가 있었어도 신정부군 사련관이 통이 크기로 유명한 저 사이고 다카모리
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도쿄 시내는... 1467년 아시카가막부 쇼군 자리를 두고 조카와 삼촌이 10년간 교토
에서 싸워 시내가 불바다로 변한 오닌의 난 처럼, 도쿄는 전투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불바다 가 되었을 것입니다.
동북지방의 여러 번들은 모두 친막부파 이니 전쟁은 오래록 승부가 나지않고 계속 되었을 것이고 그럼 막부는
프랑스에서 차관과 원조 를 받고 신정부군은 영국에서 원조 를 받고 있었으니 이 서양의 두 나라는 장기판
의 졸 처럼 양측을 다루어서 일본은 두 서양 나라의 식민지 로 전락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시아 40개
국가 중에 중국과 태국은 반식민지이고 37개국은 식민지며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 나라" 뿐입니다?
메이지유신의 3걸이자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을 주장하다가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손에 넣자면 임진왜란 처럼 종주국인 청나라와 전쟁 이 불가피
한데...... 아직 일본은 그런 국력이 안되니 전쟁 군비를 갖추지 못한지라, 시기상조 라고
거절 하자 실각해 사쓰마번(가고시마) 으로 내려가 반란을 일으키니 서남전쟁 내란 입니다.
그가 정한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는 악인 으로 찍혀있는데....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 유럽의 식민지 가 되는걸 막으려면 적국인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근대국가
로 재탄생해야 하고 이 때문에 폐번치현 을 실시하니 전쟁에 한몸 바쳤던 사무라이들은
연봉을 잃고 실업자 로 전락했으며 또 두자루 칼을 차는 특권도 빼앗자 신분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군대도 국민개병제를 택해 평민을 징집 하자 설 자리를 잃고 낭인이 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으니
서구화 하려다 반란 이 일어나게 생겼고, 두번째 프랑스나 영국 또는 미국이 조선을 먼저 차지하면 영국이
식민지 인도인 부대를 조직해 오스만 투르크나 일본군과 싸우게 했듯, 서양이 조선인들로 부대를 편성해
일본 침략에 앞장세우면 일본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일본이 먼저 조선을 취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여기 일본의 서북 야마가타 지방은 아직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지라 과일과 산채, 버슷
등을 사용한 향토요리가 일품이며 특산품인 메밀과 소고기 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과일은 일본 체리인 사쿠란보 가 맛이 뛰어나고 서양에서 전해진 라 프랑스라는 배 가 맛있으며 고시히카리와
견준다는 쌀 츠아히메 가 유명하며 끓인 소고기 요네자와규 와 동태탕인 동가라지루도 이름나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역을 통과해서 서구에 자리한 우리 호텔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내일은 야마가타성 을
구경하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야마가타현 동부에 자오 온센 (藏王溫泉 장왕온천) 으로 갈 생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