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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5월 15일 토요일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이 보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신 다음 나누어 주시어 사천 명을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 않는 분의 이 물음은 그가 당신 앞에 스스로 나서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를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죄입니다. 원조들의 이야기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연결해 있는 죄의 실제를 잘 보여 줍니다. 불순종이라는 태초의 죄에 연루된 세 공범은 서로에게 탓을 돌리기 바쁩니다. 사람은 여자를, 여자는 뱀을 탓하면서요. 더구나 사람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3,12)라는 말로 하느님까지 탓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남이 자신에게 한 잘못만 말하지 자신이 한 잘못된 행동은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사람과 여자의 근원적인 ‘탓’은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대신 아내의 말을 듣고 여자는 남편의 말 대신 뱀의 말을 듣습니다. 무엇보다 그 열매가 먹음직스럽다고 보는 자신의 감각을 따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아 버린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고 에덴동산 밖에서 살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원조들의 이야기는 원죄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자비로 끝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죄는 인간의 삼중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인간과의 관계,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죄와 악의 고리를 선의 고리로 끊어 버리고 더 튼튼한 사랑의 고리로 인류를 연결하면서 이 삼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각종 자재를 잔뜩 실은 대형 트럭이 저희 피정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심한 정체로 기사님과 도우미께서 엄청 고생한 분위기였습니다.
힘을 합쳐 짐을 내리고 나서 두 분 얼굴을 보니 빨리 내려오느라 끼니도 못 챙긴 분위기였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즉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3)
그래서 제가 정중히 두분에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제가 초스피드로 라면을 끓여드릴 수 있는데,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두분은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거기다 김치와 밥과 과일과 차까지 내어드렸더니, 두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도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리 좋은 설교 말씀도 안 먹힌다는 것, 뭘 하든 일단 잘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우선 먹이고 봐야 합니다. 먹이고 나서 법을 따지든 원칙을 따지든, 야단을 치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크게 아프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는 단체라 할지라도 사람이 아프면 열 일 제쳐놓고 일단 치료를 받게 하고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 각자 모두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셨습니다. 만물 위에 인간이란 존재를 두고, 그의 성장과 구원,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었습니다. 굶주리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일, 아파하는 한 인간을 치료하는 일, 마귀 들려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본당 새 신자 분과 모임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분과장과 5시 40분에 성당에서 만나서 모임 장소로 가기로 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 시간 되는지 물어보니 시간 된다고 해서 직접 모임 장소로 6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당일 아침 미사에서 분과장은 부주임 신부님에게 ‘신부님도 오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예 저도 갑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분과장님은 그때 부주임 신부님이 저랑 같이 온다고 말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전날 제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간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기다리다가 분과장에게 전화했더니 3분 후에 도착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성당으로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분과장님은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행히 약속 장소가 성당에서 멀지 않아서 부주임 신부님이 와서 함께 갔습니다. 말은 정말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같습니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대로 들으면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1992년이니 33년 전의 일입니다. 동창 신부님들과 진부령에 있는 스키장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 한 명은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진부령으로 와야 하는데 오대산이 있는 ‘진부’로 갔습니다. 오대산의 진부는 설악산의 진부령과는 거리가 제법 있었습니다. 늦은 밤 신부님은 택시 타고 진부령의 숙소로 왔습니다. 2004년이니 21년 전의 일입니다. 사목국 신부님들이 양평의 한화 콘도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신부님 한 명이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양평 한화 콘도에서 회의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방 호수가 몇 번인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705호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705호는 없다며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용인 한화 콘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양평 한화 콘도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용인에서 양평까지 다시 와야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의 물리적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태,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해 묻는 말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은 상황에서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순히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셨습니다. 이 질문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길을 잃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다고 느낄 때,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상징합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구약의 아담이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면,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단절된 모든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을 대신 짊어진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질문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죄와 무관심 속에서 하느님과 멀어져 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단지 창세기의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와 기쁨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 8,8)
사람들이 믿음으로 먹다
사람들이 희망으로 먹다
사람들이 사랑으로 먹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먹다
사람들이 감사하며 먹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먹다
사람들이 오순도순 먹다
사람들이 사이좋게 먹다
사람들이 모두함께 먹다
사람들이 어울려서 먹다
사람들이 서로나눠 먹다
사람들이 정의롭게 먹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먹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먹다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다
오늘의 성인
성 요비타 (Jovita)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브레시아(Brescia)
활동연도 : +121년
같은이름 : 요비따, 조비타, 조비
성 파우스티노 (Faustinus)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브레시아(Brescia)
활동연도 : +121년
같은이름 : 파우스티누스, 파우스띠노, 파우스띠누스
교회에는 각 나라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고 있으나,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처럼 여러 가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순교한 이는 드물 것이다.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 형제는 브레쉬아의 귀족으로 태어나 트리야노의 치열한 박해 때 체포되어 이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혹독한 형벌을 감수하며 용감히 그리스도의 신앙을 보존해 나갔다.
같은 박해 시대에 숨어있던 아폴로니오라는 주교는 그 형제가 관가에 체포되기 전에 그들이 독실하다는 것을 알고 첫째는 사제가 되고 둘째는 부제가 되도록 명한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체포되어 브레쉬아에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혹은 맹수에, 혹은 불에 던져지는 고통을 받았으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맹수에게서나 화염에서도 무사했다.
그들은 결박된 채 밀라노에 와서 마치 금을 불로 다루듯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가장 가혹한 형벌로 다루게 되었으나 그러한 환경에서 그 믿음은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그 후 로마로 압송되어 에바리스토 교황에게 더욱 용기를 얻어 그곳에서도 가혹한 형벌로 참아 이겼다.
그리고 다시 나폴리로 끌려가서 그곳의 여러 마을에서 고통을 당하고 손과 발을 묶인 채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천사들이 도움으로 기이하게 구출되었으므로 형벌에 대한 항구심과 기적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에 귀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브레쉬아로 다시 끌려가서 그 당시의 하드리아노 황제에게 여러 가지의 형벌을 받고 나서 마침내 도끼로 찍힘을 받아 영광스러운 순교의 화관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순교록에 의하면 그때는 120년 2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밀라노에서 혹은 로마에서 그리고 나폴리에서 아주 훌륭하게 형벌을 당한 사실은 사제들의 기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유해는 브레쉬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다.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신분 : 신부, 설교가
활동연도 : 1641-1682년
같은이름 :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글로드,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끌로드, 끌로우드, 콜롬비에레, 콜롬비에르, 클라우디오, 클라우디우스, 클로우드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 근교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매우 신심이 깊었고 또 유복한 가문이었다. 유아기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지만 리옹(Lyon)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이상에 사로잡혔으나, 얼마 동안 이를 억제하다가 끝내는 입회하였다. 아비뇽(Avignon)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다시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5년 동안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당시에 아비뇽에는 정치적 불안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잘 평정되어 아비뇽 주민들은 평화를 되찾았는데, 이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시성식과 성모 방문 수녀회의 두 수도원이 이 평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 클로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시성식 때 생애 처음으로 설교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의 설교는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파리(Paris)로 가서 신학과정을 마쳤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프랑스의 지성이 한데 모이는 학문적 분위기에 푹 빠졌다. 그는 당시의 저명인사인 콜베르와 친분을 가졌으나 수도회 안에서는 별로 친구가 없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아비뇽 대학에서 설교가로 활약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그 후 종신서원을 발하기 전에 행한 대피정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는 특히 예수성심 공경에 전념하였고, 예수님의 생애 나이와 같은 33세 때에는 세상에 대하여 더욱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종신서원을 발한 두 달 뒤에 그는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예수회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를 만나 그녀를 지도하였다.
그의 다음 임무는 영국에서의 선교활동이었다. 영국내의 가톨릭 입장이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성 클로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영국 가톨릭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공은 많은 반대자들을 만들게 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비록 순교의 영광을 입지는 안았으나 영국에서 추방령을 받고 쫓겨나야 했다. 감옥생활로 크게 손상된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682년 2월 15일에 운명하였다.
흔히 우리는 그의 지성은 예리하였고, 판단은 정확했으며, 예술 애호가였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올리비어 파투뤼와의 친분을 높이 칭송한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92년 5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로도 불린다.
복자 요르단 (Jordan)
활동년도 : +1237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작센(Sachsen)
같은 이름 : 조단, 조던, 조르다노, 조르다누스, 조르단, 조르당
요르단은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의 직계 제자로서 제2대 도미니코회 총장을 지냈다.
그의 출생지와 연대는 미정이나 그의 실제 이름은 조르다노(Jordano)이며 작센 출신으로 1219년경에 파리 대학의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수련자로 있을 때 성 도미니코의 전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관구의 요직을 맡다가 도미니코의 사후에는 총장이 되었다.
그의 시대는 도미니코회가 꽃피는 시절이었다.
그는 수많은 지역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강의하면서 수도회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였다.
1237년 그는 2명의 형제들과 시리아 연안을 따라 예루살렘 성지로 가다가 배가 파선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25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복자 콘라도 (Conrad)
활동년도 : +1154년
신분 : 수사
지역 : 바이에른(Bayern)
같은 이름 : 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독일 바이에른의 공작인 헨리쿠스(Henricus) 흑인의 아들이다.
그는 공부하기 위하여 쾰른(Koln)으로 갔으나 완덕생활을 하려는 뜻으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의 허락을 받고서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수덕생활과 애덕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