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td><img src="http://www.buddhistnews.net/pds/news/photo/1_152/200301171042762216.jpg" width=141 height=202 hspace=5 vspace=5 border=0 align=LEFT><br>
겨울 칼바람이 양산 통도사에도 매섭다. 차에서 내려 통도사로 오르는 계단에 걸터 앉은 동장군이 으르렁대며 추녀끝이며 기와골이며 씽씽거리며 심술을 부린다. 지칠줄 모르던 맹위는 양쪽 기둥에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일주문을 지나자 한풀 꺽인다. 일필휘지로 날아갈듯이 사위를 압도하는 한국불교의 종가인 불보사찰 통도사의 법력이 묻어나며 동장군의 기세를 꺾었나 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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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원래 아홉마리 용이 살았던 구룡지에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왕 15년(646)에 가람을 일구어 1400여년의 세월동안 법맥이 흐른 뒤 현 영축총림 방장 월하스님까지 이어지며 한국불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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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 89세의 노선장(老禪匠) 월하스님은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제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경봉스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통도사를 지켰던 구하스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유명하다. 1911년 통도사 주지가 돼 당시 대처승들이 누룩을 절에서 만들어 팔 정도로 심각했던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1917년 30본산위원장(본사주지회의 의장)으로서 일본을 시찰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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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구하스님 법 이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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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스님의 법을 이은 월하스님은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차성환스님을 계사로 첫 사미계를 받고 운수의 삶에 나선다. 8년 뒤 통도사로 돌아와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수제자가 된다. 1944년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종단행정에 뛰어들어 이사(理事)의 경계를 경험한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에서부터 총무부장,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조계종 종정까지 오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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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1970년에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한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한다. 이후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 어른으로 역할을 한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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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생활속에 들어가 중생 교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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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심과 공익성을 강조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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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란 공덕의 모체도 되고 도의 근원도 됩니다. 또 공익이 사회속에 보장될 때 신뢰란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솔선수범해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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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중생을 교화하는데 동사섭을 강조한다. 중생에게 무엇인가 구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되게 원력을 세우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스님의 메시지는 ‘부처님도 도둑을 제도하려면 같이 도둑질 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주라’는 것. 결국 중생의 생활속에 깊숙히 들어가 그들에게 자비심을 심어주어 끝내 제도하라는 내용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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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스님은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통도사는 경봉스님이 주석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대중법회인 화엄산림을 음력 11월 한달간 전국 고승들이 법문을 들려주는데, 현재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어 전국의 불자들을 통도사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방장스님께서는 영축산의 꿋꿋한 소나무처럼 통도사를 지켜온 거목”이라며 “방장스님은 현대 통도사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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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승·속 구분없는 대중교화의 마음을 자신의 문집 〈노천묵집〉에서 묻어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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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구하는 것 없고 밖으로 구하는 것 없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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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은 승·속 구분없이 중생 모두에 부처의 싹<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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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불분출재가(正法不分出在家) 무량중생개불아(無量衆生皆佛芽)/ 정법은 재가와 출가를 나눌 것 없이, 한량 없는 중생들 모두 부처의 싹이 있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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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90성상을 바라보는 노구의 월하스님. 해마다 다르게 육신이 무거운지 모습을 달리한다. 최근에는 바깥 출입을 금하고 대중들과의 만남도 차단한 체 홀로 정진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해 동안거에도 결제법어를 내리며 대중교화의 불자(拂子)를 높이 올리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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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잠자나니/ 다만 이 수행만이 묘하고 심오한데/ 아무리 말해주어도 세상 사람들 믿지 않고/ 모두 마음 밖을 향해 부처를 찾고 있도다.…(중략)…찾아보고 구하면 얻기 어려움이라/ 등에 진 무거운 짐을 내려 버리면 본래 아무 일없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사방천지가 텅 비어 트였거니/ 시방세계가 또 어디 남았는가/ 허공이 손뼉치며 라라라 노래하매/ 돌사자가 즐겁게 쉬지 않고 춤을 추도다.” (임오년 동안거 결제법어 일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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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여태동 기자 <a href="http://go.daum.net/bin/go.cgi?relative=1&url=/Mail-bin/login_f.cgi%3Ferror%3Dlogin%26lu%3D/Mail-bin/send_mail.form.cgi%3FTO%3Dtdyeo@ibulgyo.com">tdyeo@ibulgyo.com</a><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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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스님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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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의 살아있는 역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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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buddhistnews.net/pds/news/photo/1_152/200301171042762188.jpg" width=217 height=231 hspace=5 vspace=5 border=0 align=LEFT>노천(老天) 월하스님은 1915년 4월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출생했다. 1933년 7월 18세에 강원도 유점사에서 차성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득도했다. 1940년 4월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한 후 오대산 한암스님 회중에서 하안거를 성만했으며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50년부터 1980년까지는 불보종찰 통도사 전계화상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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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부터 종단일에 매진한 스님은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56년 통도사 주지,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에 주석하며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2001년부터는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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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자신의 개오(開悟)의 게송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br>
“본명해월 잠수중(本明解月 潛水中) 무생멸처견유무(無生滅處見有無) 무심거래서동용(無心去來西童用) 무일영처현시행(無一影處顯示行)/ 본래 신령스런 달빛이 물 속에 잠겨있다. 생사 없는 곳에 유무를 보아라. 마음을 비우고 오고 감을 자유롭게 하면 천국의 마음을 쓸 것이다. 그림자 없는 곳에서도 밝은 달은 항상 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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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 가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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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종가의 전통지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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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창건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에서 이운된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돼 있는 불보사찰이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막대한 양의 비단과, 채색옷감, 대장경 400권, 불교용 깃발, 꽃으로 장식된 가리개 등을 함께 가져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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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보종찰의 전통을 통도사는‘종가의 가풍’으로 이어오며 한국불교계의 ‘불지종가’(佛之宗家)‘역할을 맡고 있다. 스님은 불지종가의 전통을 살려 상하의 위계를 존중하고 계율을 존중하며 화합을 중시하는 가풍을 잇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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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은 스님으로서 ‘계율 지키기’를 생명으로 삼는다. 40대에 입적한 월하스님의 상좌인 홍법스님이 지병으로 고생을 하던 때에 병 치유차 육식이 필요해 주변에서 권하자 월하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사찰의 중으로 계율을 어길 수가 있겠느냐”며 뿌리친 일화는 지계에 대한 가풍을 그대로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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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믿음은 도의 근원이자 공덕의 어머니...()...
테그와 함께 섞여 있네요.^^ 고쳐볼라고 했는데 본인이 아니라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