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어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 11호, 1939.12)
[어휘풀이]
-승무 : 장삼과 고깔을 걸치고 북채를 쥐고 추는 민속춤. 끝내 수행을 이루지 못한 고뇌를
법고를 두드려서 잊으려는 파계승의 심정을 나타낸다.
-고깔 : 중이나 무당 또는 농악대들이 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지는데 : 여기에서는 달빛이 ‘비치는데’의 의미
-외씨보선 : 오이씨처럼 생겨 맵시가 있는 버선
-삼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
[작품해설]
우리말의 조탁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조지훈은 『청록집』에 보연 준 것처럼 자연 친화의 민족 정서, 그리고 전통에의 향수와 불교적 선미(禪美)의 서정 세계를 펼치다가, 6.25를 분기점으로 현실 참여의 적극적 시 세계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부정부패 및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참여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시를 대표할 뿐 아니라,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의 하나로 ‘승무’라는 춤을 소재호 하여 삶의 번뇌를 극복하려는 종교적 구도(求道)의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시적 화자는 어느 깊은 가을밥, 한 젊은 비구니가 달빛 내려 비치는 오동나무 아래서 자신의 세속적 번뇌를 이갸내기 이해 ‘승무’라는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관찰자로서 지켜보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개성의 명기(名妓)인 황진이(黃眞伊)가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일화를 춤으로 만든 것이라 전하는 이 ‘승무’는 장삼(長衫)이에 가사(袈裟)를 걸치고, 고깔 쓰고 법고(法鼓)를 두드리며 추는 춤으로, 수행(修行) 과정의 고통과 번뇌를 잊으려는 괴롭고 쓰라린 수도자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단순히 ‘승무’의 춤 동작이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수도승의 번뇌 초극에 대한 안타까운 소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이 시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를 첫 행과 마지막 행에 배치하는 수미상관식 구성을 사용하고 있으먀, ‘감추오고’ ·‘모두오고’·‘감기우고’와 같은 아어형(雅語形) 어휘를 활용하여 운율감을 살리는 한편, ‘나빌레라’, ‘파르라니’, ‘정작으로’, ‘외씨보선’, ‘살포시’ 등 맵시 있는 우리말을 조탁하여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전 9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내용에 따라 다음고 같이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3연 의 첫째 단락은 춤추기 직전의 모습으로 화자는 ‘고깔’ → ‘깎은 머리’ → ‘두 볼’ 의 순서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특히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는 역설적 표현에서 춤추는 승려가 홍조(紅潮) 띤 젊은 여자라는 것과 그가 세속적인 번뇌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4연의 둘째 단락은 승무가 이루어지고 있는 배경이 제시된 부분이다. 무대는 황촉불 하나만 켜져 있는 텅 빈 공간이며, 시간은 ’오동잎 잎새 마다 달이 지는‘ 밤으로 제시됨으로써 고전적 정밀미(靜謐美)를 느끼게 해 준다.
5~8연의 셋째 단락은 춤의 동작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먼저 5연에서는 유장하면서도 급박한 동태미(動態美)를 나타냄으로써 4연의 정밀미와 대조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승무를 추는 비구니의 세속적 번뇌와 갈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7연은 춤추는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를 극복하는 모습이 제시되고 있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는 행위는 ‘아롱질 듯 두 방울’로 표상된 세속적인 번뇌를 초극하려는 구도자의 갈망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구도적 춤 동작을 통해 마침내 그가 도달한 경지가 곧 이 작품의 주제에 해당하는 7연의 ‘번뇌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이다. ‘별빛’은 천상적·초월적 세계를 표상하는 것으로 지상적·세속적 현실 상황을 의미하는 ‘눈물’과는 결코 동일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불교 원리에 의해 등가적(等價的) 가치를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눈물’과 ‘별빛’의 관계는 ‘진흙’ : ‘연꽃’, ‘범부(凡夫)’: ‘부처’, ‘고행’:‘열반’ 등과 같은 상대적 개념이지만, 주체의 의지에 따라 전자[진흘·범부·고행]에서 후자[연꽃·부처·열반]로 이행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리에 따라 ‘눈물=별빛’이라는 비유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8연에서는 유장한 춤 동작을 다시 보여 주고 있지만, 5연의 춤 동작과 다소 이질적이다. 즉 5연은 종교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춤인데 반해, 8연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춤이므로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 다는 구절로 표현된 것이다.
9연의 마지막 단락은 춤의 종료이자 시상의 마무리 부분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1연의 ‘나비’와 9연의 ‘나비’가 서로 다른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1연읭 ‘나비’는 나비처럼 보이는 고깔의 모습을 단순히 형상화 한 것에 불과하지만, 9연의 ‘나비’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모습이므로 ‘애벌레’ → ‘나비’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불교적 자기 정화(淨化) 내지 재생(再生)을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소개]
조지훈(趙芝薰)
본명 : 조동탁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 전문 강원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조직
1947년 고려대학교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196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