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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
★ εσχατοs(에스카토스)
에스카테(εσχατη, 최후의) + 키보토스(κιβωτoς, 상자, 방주)
+ 로기아(λογια, 학문, 가르침) =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 가르침, 학문
1) 에스카토스는 텔로스(τελοs)의 모든 완성으로서 최종 마지막 부분을 의미한다. 그리고 텔로스는 각 단계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각 단계마다의 졸업을 텔로스라고 하는 것이다.
2) 이 모든 단계의 마지막을 대학교라고 했을 때, 이 모든 단계를 종합한 마지막 단계인 대학 졸업을 에스카토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한 단계를 마치고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 단계가 텔로스이며 동시에 에스카토스가 되는 것이다.
1. 죽음과 영원
1) 많은 종교와 철학, 과학과 의학이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언급과 해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죽음 이전의 단계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소견에 불과하기 때문에 추론적인 상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 종교적으로는 간혹 천국과 지옥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주장을 아주 사실적(?)이고 성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실정이다. 때문에 현재의 한국 교계는 그들의 체험을 “아멘” 하는 식으로 받아들임으로 교리 아닌 교리가 되어 교계에 횡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3)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성경을 변증하고 해석하기 위한 신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주장이라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자의적 해석이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선지식으로서의 각종 종교 지식들이 무의식 속에서 일종의 드라마를 연출해 낸 것일 뿐이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그냥 정신 분석학적인 관점에서도 해명이 가능한 하나의 병리학적 현상인 것이다.
계 21: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4) 창 2: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의 선악과 기사에 의하면,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각오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보인다. 또는 뱀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긴 듯하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의 일들이라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다.
5) 어찌 되었든 언약의 성취 안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그 결과 인간은 죄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결국을 그 운명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명제를 가지게 된다.
창 3: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먼지)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먼지)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4) 창 3: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① 인류 최초의 항명 사건을 해설하고 있는 창세기 본문에 의하면,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영생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② 그들이 “하나님처럼”은 되었으나, 본질적으로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이는 “왜곡된 하나님처럼” 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한다면 이것처럼 큰 불행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영생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나님처럼”의 모습을 가지고 영생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③ 결국 창세기의 기사는 선악의 지식이 없는 영생이야말로 진정한 천국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왜곡된 하나님처럼” 이라는 선악 지식을 가지고 영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지옥의 삶이라는 것이다.
5) 사실 인간이 선악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어떤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탁월성과 우월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성경은 이런 속성은 영생과는 도저히 병행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이래로 사람들이 영생을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와 같은 선악 지식에 의한 체계에서 그 영생은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말기 암 환자를 의학 기술에 의해서 그 생명을 연장시켜가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말기 암 환자가 그 상태로 영생을 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옥인 것이다.
6)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체계에서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게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에, 우리는 일단은 죽음 자체가 두렵기 때문에이런 영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사실은 성령의 조명에 의한 말씀의 깨달아짐에서) 위와 같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뒤틀린 삶)이 7, 80년이라는 시간 속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시 90: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
7)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영원이 무엇인지 도무지 인식할 수 없다. 그저 순간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사전적이고 문자적인 영원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종교나 철학이나 과학이 추론적인 영원과 영생을 말해보아야 그 깊이와 넓이를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인식에 담아 놓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8) 그러므로 여기서 선악과 사건이 주는 논리를 따라간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선악에 관한 지식(=또는 의식)이 없을 때만 누려지는 타당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이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한 시시비비의 판단이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차원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의 차원에서만 알게 되고 누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알게 하심에 의해서 누려지는 것이 영생인 것이다.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9) 이런 관점에서 보니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은총인 것이다.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 땅이 영생과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때리시고 싸매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신자는 이런 땅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소망이라는 신앙적 계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신자에게는 오히려 이 땅의 삶에서 참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신자의 모습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선악 지식에 의한 온갖 억측과 불안과 자기 욕망을 부추기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데 있어서 조금의 미련이나 집착도 없게 되는 것이다.
히 11: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벧전 2: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한 죽음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라는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일부 사람들 곧 신자는 이런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는 사실에서 그 갈등을 극복한다. 이를 죽음에 대한 적극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해석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11) 죽음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의식(儀式)으로 보여주는 것이 곧 세례이다. 말하자면 세례는 죽음이라는 신비를 보여주는 시청각적 말씀인 것이다.
롬 6: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2) 비록 우리 육신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능력이 죽음이고, 그 죽음은 아직도 우리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버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런 죽음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일 뿐임을 아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신비주의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인 죽음에서 그 현실 너머의 영생의 세계를 인식하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의 담론(=discourse)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오늘 우리의 입장이다.
히 11: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2. 종말론의 배경
1)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농경 순환주기에 맞추어 시간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환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순환적인 반복을 기준으로 삶의 형태를 고정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절기를 만들어 자연의 안정적인 순환을 기원하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루었던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오리엔트(Orient)문명은 이런 순환적 시간관을 기초로 문명을 구축하였다.
2) 기원전 12세기경 오리엔트, 특히 고대 이란에 등장한 인도-유럽인들의 한 분파인 인도-이란인들의 역사관은 순환적 시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순환적 역사관이라고 부른다. 인도-이란인들은 세상은 태초부터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끝없는 투쟁을 하고 있으며, 이 투쟁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한다고 생각했다.
3) 순환적 역사관에 있어서 역사는 “시대”와 “새로운 시대”로 구분이 된다. 실제 사건이 발생하는 “시대” 가 끝이 나면 어떤 현실이나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새로운 시대”로 대치된다(=묵시 개념). 이렇게 되기까지의 중간 과정을 “종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말은 순환적인 시간이 아니라 “선형적”인 시간으로, 그 시간엔 “끝”이 있으며, 모든 인간은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심판받게 된다.
4)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종종 종말론적인 이야기들이 회자된다. 이 이야기들에서 종말이란, 세상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이다. 새로운 삶과 사상, 그리고 존재방식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런 종말의 위기는 역사에서 신의 개입, 전쟁, 환경의 변화 혹은 새로운 인간의식으로의 진입과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종말론은 순환적인 역사관을 지탱하려는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종말론은 현대에도 사회, 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때 종종 드러나는 현상을 보인다.
3. 종말론의 종교적 개요
1) 종말론은 인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이는 또한 조직신학의 한 부분으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기독교에서는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종말론의 중심이다.
2) 대부분의 종교에서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및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또한 종말론은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원시 종족의 종교, 고대 지중해와 중동의 여러 문화 및 동방의 문명에서도 유사한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에는 종말론적 주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4. 이집트의 종말론
1)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후 신체의 보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원래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사막에 묻어 자연적으로 시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왕조시대부터 귀족들은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정교한 방부 처리를 통해서 시신을 인공적으로 말리고 천으로 둘러싸서 관에 보관하였다.
2) 사자(死者)의 서(書)
① 이 책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장례 문헌으로서 기원전 1550년부터 등장한다. 그 내용은 죽은 자가 “두아트(Duat, 지하 세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사후 세계로 인도되는 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②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이 여러 구성 요소를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이 요소들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죽음으로 흩어진 인간 존재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다시 모으는 장례 의식을 생각해냈다. 또한 죽은 이의 육체를 보존하여 신적인 특징을 지닌 이상적인 형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미이라(=창 50:1-3, 26)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 사제는 사자의 서를 낭송했다.
③ 인간의 구성요소
⑴ 카(ka, 영혼)
죽은 자의 영혼은 시신과 함께 무덤에 있어, 후손이나 제사장이 지내는 제사상의 음식, 물, 분향 등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⑵ 렌(ren, 죽은 자의 이름)
이름은 사람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해야 할 의무이자 개성이기에 죽은 자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만 한다.
⑶ 바(ba, 죽은 자에 대한 人相)
‘바’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한 새 모양을 하고 낮 동안에 무덤에서 나와 세상으로 날아다닌다.
⑷ 슈트
죽은 자의 그림자
⑸ 앙크
이 모든 것을 잘 보존하고 심판을 통과하면, 그는 신들 가운데 영원히 사는 ‘앙크(ankh)’가 된다.
④ 죽은 자가 이상의 주문을 잘 외워 지하 세계를 통과하면 그 심장을 천칭 저울에 다는 의식을 거행한다. 죽은 자는 아누비스(Anubis,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신)에 이끌려 오시리스(Osiris, 지하 세계의 신) 앞으로 간다. 그는 이 신 앞에서 ‘42가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부정의 맹세”를 한다. 그런 후 죽은 자의 심장은 타조 깃털 ‘마트(Maat, 진리와 정의의 여신을 상징)’와 함께 천칭 저울에 올려진다. ‘마트’는 죽은 자가 사는 동안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다. 만일 죽은 자의 심장 쪽으로 천칭이 기울어졌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괴물 암무트(Ammut)에게 먹히고 만다. 부정의 맹세가 진행되는 그 옆에는 토트(Thoth) 신이 생명의 책을 들고 있다. 이 책에는 죽은 자가 생전에 한 일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만일 천칭의 양쪽 무게가 같다면, 그는 오시리스 신의 인정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단 7:10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계 20: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으르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3)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사자의 서”는 죽은 자의 심판과 사후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설명한 최초의 기록으로 평가된다. 특히 “부정의 맹세”는 살아 있는 동안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영생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믿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명제 하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모든 개인이 반드시 심판을 받으며, 지상의 삶의 질에 따라 영생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개인의 심판 사상은 후대에 등장하는 집단 전체, 인류 전체의 심판 사상의 기초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다.
5.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
1) 조로아스터교는 기원 전 6세기 페르시아의 국교가 된 종교이다. 국교가 될 정도의 큰 종교로 비록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눌리긴 했지만 고대 동방 세계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 조로아스터교는 여타 종교 계통으로부터 개념을 물려받았고 어느 정도의 제설(諸說) 혼합주의를 수용한다. 조로아스터교의 많은 특성은 선사시대의 인도-이란 시기, 즉 인도인들과 이란인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갈라선 이주(移住) 이전 시대의 문화와 신앙으로 추적될 수 있다.
2)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라고 불려진다. 종교적으로 이원론이라는 것은 선과 악, 신과 악마가 대립하는 것을 말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한 신으로 섬기긴 하지만, 이 신이 전능한 신이 되기까지는 이와 대등한 악의 신(=앙그라 마이뉴, Angra Mainyu)이 존재한다. 이 선신과 악신의 우주적 이원론(dualism)이 조로아스터교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은 신자들에게까지 연장됨으로 그들은 생전에 온갖 종류의 악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을 빛과 순결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불 앞에서 경배했다. 불 자체를 숭배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 때문에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기도 한다.
3)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
①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은 젠드 아베스타(Zend-Avesta)라고 불린다. 젠드는 “주해”란 뜻이고 아베스타는 “지식”이란 뜻이다. 본래 21 권의 큰 경전으로 B.C. 400년경 편찬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 때 불타 버리고 후대(B.C. 240년경)에 다시 결집되었다.
② 이중에서 프라쇼케레티는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말론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기원전 500년 이전에 신에 의한 불의 종말을 통해 세상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最高神)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가 모든 악을 제거한 후에 만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종말 교리를 통해서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가 죽은 후 3000년이 되면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나 인간을 심판한다. 천국, 연옥, 지옥에 있는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악은 사라진다. 따라서 이들의 종말 교리는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등의 개념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이들은 풍장(風葬), 조장(鳥葬) 등의 장례를 치른다. 탑 위에 시체를 걸어놓고 새들이 쪼아 먹고 남은 뼈들이 아래에 떨어지면 장례를 치른다. 이때 영혼은 시간이 만든 길에서 마즈다가 만든 거룩한 다리를 만난다. 거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영혼과 정신을 위해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만일 그 영혼이 의로우면 그 다리는 점점 넓어지고, 영혼이 악하면 그 다리의 끝은 면도날처럼 얇아져 추락한다.
4) 모든 사람의 행동은 미트라(Mithra), 스라오샤(Sraosha), 라슈누(Rashnu) 신 앞에서 머리카락의 무게도 잴 수 있는 정교한 천칭으로 심판을 받는다. 만일 그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루터의 기도) 그는 구원을 받는다. 죽은 지 3일 만에 그는 자신의 인격화된 양심인 ‘다에나(Daena)’를 만난다. 만일 그가 의로우면 다에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가 악하면 못생긴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5) 의로운 자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마즈다의 집인데, 여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눈이나 비가 없으며, 걱정이나 고생이 없고, 눈물과 고통도 없고, 어둠과 병과 늙음과 죽음이 없는 곳이며, 노동과 부족함이 알려지지 않는 곳이다(=계 21:4, 22:1-3). 또한 출산을 알지 못하는 성적인 만족(=창 3:16)이 있는 곳이다.
6) 반면에 악한 자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지속적인 어둠, 나쁜 음식, 울음이 있는 곳이다. 즉 생전의 행동에 따라서 그의 양심이 그를 여기로 인도한 것이다. 이때 심판자들은 그에게 독, 뱀, 전갈, 악어를 데리고 온다. 그들은 또한 그에게 썩은 음식을 가져온다. 또한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룬 사람들은 지구와 별들 가운데 위치한 ‘하메스타간’에 거주한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추위와 더위의 고통을 느낀다. 정리하면,
① 종말에는 선이 승리하고 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② 물과 녹은 쇳물을 통한 일종의 시험을 거쳐 선인과 악인이 가려지게 된다.
③ 심판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6. 이슬람교의 종말론
1)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은 종말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슬람의 신 알라(Allah)는 ‘마지막 날’의 심판자이며, 무함마드(Muhammad)는 ‘마지막 날’의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 선택된 예언자이다. 이 책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육체적인 부활이 등장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는 실제적이고 다소 성적이기도 하다.
2)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종말을 강하게 주장했다.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전에 아라비아의 부족적 삶의 형태는 ‘자힐리야(jahiliyah)’가 특징이다. 이 말은 아라비아의 이슬람교 이전 시기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무지의 시대’라고 번역되지만, 그 원래의 의미는 ‘화를 잘 냄’이었다. 즉 공격, 오만, 맹목적 애국주의 그리고 폭력과 보복을 향한 만성적인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원후 6세기 후반에 이르러 무함마드 선지자가 태어났을 때, 부족의 전쟁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임박한 재앙에 대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3) 무함마드가 속해 있던 부족인 ‘쿠라이시(Quraysh)’는 유목생활을 버리고 메카(Mecca)에 기반을 둔 상업 제국을 세웠다. 무역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부족간 전투를 포기하고 지역의 분쟁에 대한 고고한 중립적 태도를 길렀으며, 메카의 중심부에 위치한 고대 성지인 ‘카바(Ka’bah)’를 둘러싼 지역을 폭력이 금지된 성역으로 지정하였다. 이 조치들이 반도 전체에서 온 아랍 사람들로 하여금 피의 복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가 그 당시 아라비아의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은 전통적인 자힐리야의 오만함을 유지했다. 그들은 상상 이상으로 성공했고 이제 빈곤의 공포에서 자유로웠지만, 부유함에 대한 욕망 속에서 그들은 부족체제의 인도적인 면을 잊기 시작한다. 그 사회에서 더 약한 부족 일원을 돌보는 대신에, 몇몇 가족들은 부를 과도하게 축적했고, 반면 대부분 다른 이들은 점점 빈곤해졌다.
4) 오래된 부족의식은 이제 신생 시장경제의 새로운 상황들에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함과 영적인 불만감이 존재했다. 아랍인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의 신에 대해 알았고, 그 신이 자신들의 신인 알라(=바로 그 신)와 동일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선지자나 그들의 언어로 된 어떤 경전도 내려주지 않았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610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코란이라고 알려진 경전으로 모아졌다. 이 영감 넘치는 신탁들은 메카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코란의 기본 메시지는 사적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잘못이며, 당신의 부를 공평히 나누어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정중히 대우받는 공정하고 격조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무함마드의 어록집인 『하디트(Hadith)』에서 무함마드는 “스스로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도 이루어지도록 바라지 않는다면 너희들 중 누구도 신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5) 코란은 알라신께 순명하여 살지 않는다면, 알라께서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시간에 심판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인간들을 부활시킨다고 기록한다. 알라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보여준 ‘분명한 신호’를 수용한 사람과 무시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을 구분하여, 불타는 지옥인 ‘자한남(Jahannam)’이나 기쁨이 가득 찬 천국인 ‘잔나(Jannah)’로 인도한다. 지옥의 거주자들에게 물이 주어지나, 그 물은 뜨거운 쇳물이라 마시는 사람의 내장을 전부 태운다. 그들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여 살갗이 항상 상해 있고, 불로 만들어진 집에 산다. 반면에 천국에는 오아시스와 강물이 있어 거주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안락한 쿠션 의자에 앉아 있다. 그들은 평안하며 피곤하지 않고, 진귀한 온갖 과일을 먹고, 취하지 않는 와인을 마시며, ‘후르’라는 여인들이 시중을 든다.
6) 따라서 인간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알라는 예언자들을 통해 천국을 택하라고 촉구하지만, 인간은 그 경고를 듣지 않고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아뎀(=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원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이블리스(Iblis)’라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지만, 인간은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함마드를 통해 전해준 알라의 ‘분명한 신호’를 받아들여 도덕적이며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각자 개인의 책임이다.
7) 심판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 등장하는 천칭에서 재는 것처럼 분명하다. 이는 당시 유목민들의 상거래에서 이용한 천칭으로서, 그 사람의 일생의 행동과 말을 견주어 본다. 거기에서는 그 사람의 재산이나 일가친척이 그를 도울 수 없다. 만일 그가 무함마드를 통한 알라의 ‘분명한 신호’를 받아들여 기도를 하고 희사(喜捨)를 하면서 그 의무를 다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반대로 알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8) 종말이 오는 표식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람들은 나방처럼 흩어지고, 산들은 양털처럼 뽑혀 모래 더미로 변하면, 땅은 흔들려 가루가 되고, 하늘은 갈라져 감기며, 별들은 흩어지고, 바다는 끓어 넘치며, 태양은 빛을 잃는다. 그러나 코란은 이런 종말의 징조와 종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기에 후대 무슬림 종파들은 설명을 첨부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첨가하여 더욱 정교한 종말론을 형성하게 된다.
7. 힌두교의 종말론
1) 힌두란 원래 인더스 강의 산스크리트어인 신두(Sindhu-大河)의 페르시아 발음으로서, “인디아”나 “힌두스탄”과 같이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는 문자 그대로는 “인도의 종교”를 뜻하며, 인도에서 기원된 모든 종교, 즉 바라문교, 자이나교, 불교 등을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자이나교를 배제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2)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인 베다(Veda. 지식)는 힌두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계시서(=슈루티)로 믿어진다. 브라만 계급은 브라만의 특수한 현현이며, 베다의 교사이자 전승자로서 신성시되었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에 의한 각 신분의 다르마는 브라만의 지혜, 크샤트리아의 용맹, 바이샤의 근면이다.
3) 힌두교의 신은 본질에 있어 단일한 존재이며, 최고 신격을 가진 창조신 브라만(Brahman), 유지신 비슈누(Vishnu), 파괴신 시바(Shiva)가 있다. 이들은 단일한 실재의 세 측면(=3신일체설)이다. 브라마는 영원불변하고, 전우주의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인 중성적 원리인데, 이것은 인간 내면의 “참다운 자아(=아트만-숨, 나)”와 동일하다. 따라서 브라만 자체는 무속성(無屬性)이며 비인격적이지만 비슈누, 시바라는 인격적 최고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
4) 힌두교의 업설(業設)은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현재의 삶은 반드시 과거의 행위(=카르마-업)의 결과라는 주자이다. 업설(業設)은 생사의 반복적 순환, 즉 윤회사상과 연관된다. 업(業)이 있는 한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힌두교의 궁극적 목표이다. 따라서 힌두교도들은 현세의 부귀를 전생에 의한 보상으로 생각하며 현세의 고난을 내세의 보상을 받기 위한 기회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힌두교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성격이 강한 기복 신앙의 성격과 명상 요가 고행과 같은 신비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일반적 힌두인들에게 힌두교란 심원한 교리나 해탈의 실현보다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행, 의식, 규정을 준수함으로써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내세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길이다.
5) 힌두교는 43만 2천년 동안 우주가 네 번의 커다란 변화를 거친다고 말한다. 이 변화가 일어나는 네 번의 기간을 유가(Yuga)라고 한다.
① 크리타 혹은 사트야 유가(Satya Yuga) ② 트레타 유가(Treta Yuga)
③ 드바파라 유가(Dvapara Yuga)
④ 칼리 유가(Kali Yuga)
★ 네 번의 유가(Yuga) 동안 인간은 신으로부터 점점 더 떨어져 죄를 지었다.
6)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 비슈누(Vishnu)는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적어도 9번 이상 인간의 형태를 하고 지상에 내려왔다(=아바타라). 비슈누는 이미 9번을 인간으로 화신(=化身, 아바타)하여 인류를 악으로부터 구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을 했으며, 마지막 10번째 화신인 칼키 아바타가 다시 인류를 구원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본다.
7) 칼키 아바타는 칼리 유가의 끝에 출현할 것이라고 하는데 힌두 전통에 따르면 현 시대가 칼리 유가에 해당한다. 힌두교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비슈누의 화신은 7번째의 라마와 8번째의 크리슈나이다. 힌두교인들은 또한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붓다와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 역시 비슈누의 화신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친 것으로 본다.
1. 마츠야(Matsya) - 물고기
2. 쿠르마(Kurma) - 거북이
3. 바라하(Varaha) - 곰
4. 나라심하(Narasimha) - 사람-사자
5. 바마나(Vamana) - 난쟁이
6. 파라슈라마(Parshurama) - 브라만들을 보호
7. 라마(Rama) - 아요다의 왕이자 서사시의 주인공
8. 크리슈나(Krishna)
9.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10. 칼키(Kalki)
8) 힌두교의 우주론에 의하면 우리의 시대는 네 번째 유가이며 가장 타락한 유가인 칼리(=싸움, 부조화, 경쟁) 유가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비슈누가 마지막으로 아바타라 칼키(Kalki)로 태어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구원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심판자로 온다. 힌두교도들은 인간의 문명이 칼리 유가 시대에 점점 영적으로 타락한다고 믿는다.
9) 힌두교에서는 종종 “다르마(dharma-법, 율법)”를 황소로 표현한다. 첫 시대인 사트야 유가에서 이 황소는 네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져, 마지막 시대인 칼리 유가 시대에는 황소가 다리 하나로 지탱한다. 따라서 칼리 유가는 종말론적 괴물인 칼리와 연관이 있다.
8. 불교의 종말론
1)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는 괴겁기(=혼란과 소멸의 시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공접기(=무의 상태가 계속되는 시기), 성겁기(=새로운 생성의 시기), 주겁기(=생성한 것이 계속 존재하는 시기)가 차례로 이루어진다. 현 시대는 주겁기에 속한다. 주겁기에는 전쟁, 질병, 기아 등의 갖가지 재앙이 번갈아 일어나고 水, 火, 風 따위가 발생한다.
창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 불교 종말론에 대한 담론은 고다마 붓다(Gautama Buddha)가 자신의 가르침이 5,000년 후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시작되었다. 종말에는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할 열 가지 도덕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열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을 것이다. 열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는 도적질, 폭력, 살인, 거짓말, 사악한 말, 간음, 험담, 탐욕, 사악한 의도, 방종한 욕심이다. 이것들은 결국 빈곤의 시작이며 참된 종교의 끝이다. 5,000년 동안 붓다의 가르침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계 21: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3) 종말에 깨달은 아라한(阿羅漢-불제자 중에 번뇌를 끊어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붓다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결국 다르마(=법, 진리)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붓다에 대한 기억마저 없어지고, 붓다의 유물도 모두 부다가야(Buddha-Gayā-불교성지 가운데 가장 신성한 곳의 하나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신성한 보리수가 있다)에서 화장되는 것이다. 그 후에 새로운 붓다인 “미륵보살(Maitreya)”이 등장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갱신하여 니르바나(nirvāna)로 가는 길을 재발견한다. 미륵보살은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으며, 현재는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천상의 정토)에 머무르면서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며 세상에서 환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4) 동아시아에서는 “정토종(淨土宗) 불교”가 등장했다.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종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종파에서는 누구든지 깊은 신앙심을 갖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태어나게 된다고 믿는다. 한국의 경우 종파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원효를 포함한 신라의 고승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정토신앙에 대한 교학적 연구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일본의 정토신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욜 2: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롬 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5) 불교의 사후세계
① 삶을 지닌 모든 것은 죽은 후에도 육도의 세계에서 계속 윤회를 거듭한다.
★ 육도(六道)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아수라계, 악도(惡道, 인간계), 선도(善道, 천상계)
② 태어난 세계가 어떤 것이냐는 현세에서의 업(業)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나 선도(善道)에서 태어나 자라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 윤회된다. 이런 육도 윤회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③ 만인이 인정하는 극도의 악인은 심사를 거치는 일없이 지옥계로 곧바로 보내진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는 8천리에 달하는 멀고도 험한 외줄기 산길을 걸어서 산을 넘으면 현세와는 완전히 단절된 명부전에 도달한다. 3일 동안은 자기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며 혼줄이 3일 동안은 끊어지지 않는다(=3일장).
④ 심판
業(업)을 심사(=심판)하는 데에는 49일이 걸린다(=49제). 즉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 문턱을 거쳐 저승으로 가서 7개의 법정에 서게 되는데 각 7일을 지내게 된다.
⑴ 제 1 법정(진광대왕)에서는 서류심사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황천강을 건너게 하는데 선한 자는 다리 위로 건너게 하며 악한 자는 강물에 휩싸여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황천강을 건너게 한다.
⑵ 제 2 법정(초강대왕)에서는 의령수 나무 가지에 옷을 매달아 가지의 휘는 정도에 따라 선과 악을 구별하여 심판한다.
⑶ 제 3 법정(송제대왕)에서는 생전의 사음죄(邪婬罪)가 다루어진다. 남자의 경우 사음이 있으면 고양이가 남근을 문다. 여성의 경우 사음이 있으면 뱀이 여음으로 들어감. 죄에 대한 대가는 유황불길 속을 7일 동안 살이 타면서 걸어간다.
⑷ 제 4 법정(오관대왕)에서는 妄語(망어)의 죄 즉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가를 다룬다. 죄가 있는 자는 뽀쪽한 칼끝을 맨발로 걸어가는데 발등위로 칼날이 나온다.
⑸ 제 5 법정(염라대왕)에서는 수정거울이 있어 죄를 행한 사실이 거울 속으로 비춰진다. 죄가 있는 자는 온몸이 바둑판 모양으로 잘려진다.
⑹제 6 법정(변성대왕)에서는 오판이 없도록 재심사하여 죄목이 있으면 벌을 가한다. 죄에 대한 대가는 양옆에 예리한 칼날이 무수히 박혀 있어 걸어가면 벽이 점점 좁아져 온몸이 칼날에 찢겨진다. 바닥은 뜨거운 철판이다.
⑺제 7 법정(육도윤회 결정)은 최종 심판을 내리는 곳이며 다음 생에 착하게 행하라는 순화 교육기관이다.
6) 인과율(인과율)
①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잘살고 못살고 귀하고 천하고 끝없이 받아야 하는 고통과 끝없이 받을 수 있는 행복은 모두가 전생에 지은 因果(인과)로 이루어진다. 부귀와 공명은 그 사람이 전생에 닦은 공덕에서 오는 것이다. 즉, 수 없는 죄와 복을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다. 전생에 지은 공덕은 금생에 받고 금생에 지은 공덕은 후세에 받는다. 죄는 마음으로 짓고 벌은 몸으로 받는다.
②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복을 쌓아야하는 것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고생스럽기만 한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전생에 많이 지은 업보 때문이다. 따라서 그럴수록 부지런히 공을 자꾸 쌓으면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업보를 모두 씻어 버리어 그 다음에는 저절로 행운이 찾아온다.
③ 더러 어떤 사람은 나쁜 짓을 수없이 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지내게 되는데, 이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덕이 모두 소모되면 그 다음에는 나쁜 행실에 대한 과보(果報, 인과응보)의 벌을 받게 된다. 지금 현재 짓고 있는 것은 바로 내생의 내 모습이 될 것이고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이 모습이 전생에 지은 업보 그대로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전생의 일을 묻는다면 금생에 받고 있는 모습이며, 후세의 일을 묻는다면 금생에 짓고 있는 그 모습이다.
④ 因果(인과)란 이생에도 내생에도 영원불멸한 진리임이 틀림없으므로 원인이 없이 결과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자 우주의 대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근본 원리를 깊이 깨달아 지난 과거를 참회하고 하루하루를 참되게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야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잘살고 못살고 귀하고 천하고 끝없이 받아야 하는 고통과 끝없이 받을 수 있는 행복은 모두가 因果(인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9. 유대교
이스라엘의 종말은 그들이 여호와의 뜻 곧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뜻에 다시 순종하면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되어 정의가 실현되고 도덕과 물질이 갱신된 최종적인 상태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유대 민족은 여호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도구이며,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될 때 유대 민족은 그 자신과 나머지 세계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겔 38:12물건을 겁탈하며 노략하리라 하고 네 손을 들어서 황무하였다가 지금 사람이 거처하는 땅과 열국 중에서 모여서 짐승과 재물을 얻고 세상 중앙에 거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10. 기독교
유대교는 종말론적 사건이 미래에 일어난다고 보지만, 신약성경에 따르면 이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초림) 이미 시작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선취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새로운 시대가 마침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종말론은 극히 다양하게 해석되고 수용되었다.
11. 구원과 종말
1) 딤전 2: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2) 고전 14:3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36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갈 3: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 고린도전서의 주장과 갈라디아서의 주장은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고린도서가 문답형식으로 기록된 서신이라는 사실이다.
고전 7:1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전 8: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4) 다시 말해서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이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34-35절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인 것을 알 수 있다. 곧 바울이 그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36절이 그러한 사실을 확증해주고 있다.
쉬운성경 14:36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
KJV 14:36What? came the word of God out from you? or came it unto you only?
① 여기서 “What?”은 헬라어 “h af”로서 부정적인 반박을 하는데 쓰였던 것이다. 우리말로는 “뭐가 어째요?” 정도의 뜻이다. 즉 바울이 인용한 34-35절의 고린도교인
들의 주장들이 어리석다는 뜻이다.
② 디모데 본문에서 바울은 질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창세로부터 먼저 지어진 것은 남자였고 그 뒤로 여자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자와 여자 간의 선후관계나 그로 인한 우월성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신랑)가 먼저이며 교회(신부)가 그 다음이라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계급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③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의 남자와 여자는 남성(men)과 여성(women)을 가리키는 것이고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남자(아담) = 말씀 = 그리스도 (요 1:1)
여자(이브) = 교회 = 신자 (신부)
아이 = 말씀의 결실 = 그리스도를 증거(요 5:39)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해산하였듯이 신자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이다. 즉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신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야 이것이 구원을 얻은 자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계12: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④ 그렇다면 디모데전서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딤전 2: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말씀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구별되어 전파되기를)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교회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교회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세상의 것으로 치장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예수를 믿음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여자는(=교회는) 일절(=일체) (그리스도께)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여자의 가르치는 것과(=교회가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 남자를 주관하는 것(=교회가 그리스도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말씀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교회가) 그 후며 14아담이(=말씀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교회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 그러므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말씀 곧 그리스도를 보이고 증거함으로 구원을 얻은 자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12. 교회와 종말
★ 종말의 현상은 교회의 타락이다.
★ 구약시대에 계시된 교회의 타락과 종말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2)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
★ 성경 최초의 종말 노아시대의 특징
창 6: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1) 죄악이 관영하였다
2) 죄악의 관영이란 혼합(=섞음, 다원주의)을 의미하는데 곧 음행이다.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성도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구속사로 볼 때에, 하나님의 아들은 교회를 의미하고 사람의 딸은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짝하고(=혼합되고) 있는 모습이 곧 노아시대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야고보 사도는 간음이라고 하였다.
약 4: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2. “자기들의 좋아하는” 이란, 십계명 중에서 제 2 계명인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즉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3. 그러면 성경은 왜,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행위를 우상 숭배라고 하는가? 이는 그것이 언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구원해 준 목적을 위반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여” 인 것이다. 출애굽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이 계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골 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4.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자기를 위하여 믿으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모습을 노아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5. 마 24: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라는 말씀은,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종말의 교회 모습도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한 것과 같이 자기를 위하여 예수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듣고 또한 전하고 있는 것이다.
6. 야고보 사도가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였듯이,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은 행음이다. 그래서 종말에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를 행음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행음이란, 종자가 다른 것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성경에서는 짐승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으로 말한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짐승과 교합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그렇다면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한 것은 사람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씀이다. 이 둘은 섞일 수가 없음에도 섞였으니 곧 “음행이고 타락이고 죄”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 시대를 일컬어 죄악이 관영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이 시대가 음란 문화로 뒤덮여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음란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sexy라는 말의 만연, 트렌드化) 있으니 과연 말씀대로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이다
8.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하나가 된 것은 행음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혼합한 것과 같은 것이다. 종말에도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은 것을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모든 사상을 다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계 17:1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물은 세상 곧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가치관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물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9. 창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죄와 사망 아래 가두어진 이 세상의 모습을 의미한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란 이 세상이 죄와 사망 아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마 4:14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흑암이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죄 아래 있다는 것이다.
10. 그런데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있다. 수면이란 물 위를 말하는 것인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을 수면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비진리가 물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창조가 하나로 섞여 있는 물을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 진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신다는 뜻이다.
출 2:10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즉 하나님의 구원을 창조의 기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1.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에도 자기백성을 비 진리에서 빼내는 것을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계 18:2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처럼 성경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뒤덮은 타락한 세상을 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12. 그런데 이 더러운 물들이, 탁한 홍수가, 혼합된 사상과 교훈들이 교회에 들이닥치고 뒤덮고 떠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계 12: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에 처한 세상에서 자기백성들을 빛으로 불러내실 것을 태초부터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하는 것이다.
요 1: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3. 천년왕국론
계 20: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1. 성경이 말하는 천국
1) 기독교는 초대교회 이후 교부시대로부터 신자들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는 천년왕국(=그리스도 왕국) 실재론을 인정하고 주장해왔다. 물론 메시야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는 구약에서부터 일관되게 선지자들이 외쳤던 일이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곧 메시야가 왕이 되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문제는 천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어서(=구체적으로는 이 세상 왕처럼 되어서) 다스리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는 거리가 먼 아니 전혀 다른 이방 종교적 천국 곧 극락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천국을 말한다면 당연히 이방 종교의 극락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방 종교적 왜곡된 천국관(=유토피아, 파라다이스)을 지니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종말론을 수학하는 우리는 이방 종교적인 천국관을 포기하고, 성경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천국,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신자가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3) 그러면 그리스도를 중심을 해서 신자가 왕 노릇하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이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그 천국은 지금 고난 속에 있고 사탄의 유혹과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천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4) 이제까지 초라하기만 했던 주님이 변화산에서 갑자기 변형되고 영광스럽게 되어 버리자 제자들은 거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눅 9: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러나 주님의 모습이 다시 초라해졌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천국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눅 17: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5) 천국이란 외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으로만 결정되는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지상에 천국이 임하는 시점이요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는 기회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훗날 전 우주에 나타나게 될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 지금의 천국(=지금 여기서)이라는 상태가 많이 미흡하고 기대에 못 미치기에 이를 천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천국이 완성되는 것을 시간적으로 혹은 시간의 순서로 말씀하시지 않고, 어떤 사건을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최후 사건에 예속된 새로운 시대관을 암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시대관이다.
시 90:4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벧후 3: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이러한 시대관을 말씀하신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의 흐름 곧 과거, 현재, 미래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종말의 징조적 사건 또는 상태에 더 유의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이것이 깨어서 주님을 영접한 신자의 삶이라는 것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7) 그러면 이러한 징조적 사건을 성도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주어진 것이다. 계시록은 바야흐로 새 시대에 접어든 초대교회를 각성(覺醒)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계시였던 것이다. 계시록의 특이한 기록방식은, 환란의 계시와 영광의 계시가 번갈아 가면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모습과 땅의 모습이 군데군데 섞여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의 흐름이나 순서라는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을 책 자체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가 언제냐 하는 것을 시간적인 순서를 가지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마지막 때를 인간 세상이 맞이할 수밖에 없느냐?”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8) 이 세상이 마지막 때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약공동체(=이스라엘, 교회)의 타락에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타락이 종말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의 연속으로 증거되고 있던 것이다. 사사기가 그렇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이 그런 것임을 이미 성경의 독자는 알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징조들을 시대별로 혹은 시간별로 나열하고 정리해봐야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 결과를 이방 종교적 종말과 극락으로 나오게 한다. 즉 이런 시도와 결과는 인간의 원초적 탐욕과 궁금증(=유토피아, 파라다이스)의 발로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9) 그러면 왜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가? 종말론은 그 이유를 찾는데 초점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언약공동체인 교회가 어디서 어떻게 타락했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시록은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거의 모든 구절들이 구약의 예언서에 있는 것이고(=요한계시록은 선지서의 완성이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이 그 때 당시의 이스라엘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예수님이 처음 지상에 오셔서 펼친 천국과 별다른 천국을 새로 건설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등장한 천국 때문에 지상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가를 보이시고 이에 따른 최종 마무리를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10)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지금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연속으로 오시는 것이지 천국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새삼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을 이야기 한다면 이는 두 개의 천국을 이야기 하는 것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천국이라면 이는 하나는 주된 천국이고 하나는 보조 천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두 개의 천국
1) 천년왕국을 말한다면 이는 두 개의 천국을 이야기함에 다름이 아니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이는 두 분의 메시야. 두 분의 왕을 연상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천년왕국이란 것이 천국인지 아니면 그냥 천년 동안만 존재하는 나라인지의 문제도 생긴다. 더 큰 문제는 천년 왕국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을 천년왕국론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은 때로 인간의 예상을 빗나갈 때가 있다고 하면서 비록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계시에 복종하는 겸손의 태도를 가질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문자를 그대로 믿으라는 말에 지나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2)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왕국)이란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는 상태(=장소나 시간이 아니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천국이 나타났기에 마귀가 잡히고 사탄과 불신자들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표현을 요한계시록이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익숙한 인간들은 사탄이 완전히 멸망해야 진짜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겨나야 확실한 천국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적인 경험을 가지고 내린 오해이며 그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에 있어서는 제자들고 마찬가지였다.
막 13:4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러나 신자는 시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도래함으로 성도들과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3) 이 변화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 20: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5:9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즉 신자가 지상에서 제사장 노릇하다가 순교하는 그 모습이 바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모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누가 지금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가? 그것은 누가 지금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의 삶을 사는가?와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간이 천년이라는 것이다. 즉 천년이라는 말은 천국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벽한 성취 상태를 천년이라는 기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 그 자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이 아니라 “언약대로 완벽하게 완성된 왕국 그 자체이다” 라는 것을 천년이라는 숫자로 표현하고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천국은 지금 실재(實在)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귀는 유황불로 들어가며,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형제들의 복수(=신원)를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계 6: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지금도 엄연히 그리스도가 왕이시기에 형제들의 복수를 수행해 주신다.
4) 천년왕국론의 가장 큰 해악은 “참된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성경의 증언을 따르지 않을 경향이 크다는데 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종말 때의 참된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란에 참여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론자들은 후일, 나중에 중간왕국(=보조왕국, 천년왕국) 때에 성도가 왕 노릇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주장한다.
5) 따라서 종말론은 교회의 타락으로부터 기인된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멸망의 원인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데 있다. 세상에서 형통하고 번영하는 풍족을 누리고, 세상적인 힘(=조직과 세력)의 확장에 눈을 돌리는 비 교회 때문에 참된 교회가 비 진리를 주장하는 그들 속에서 지금도 순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증거인 것이다.
6) 그러므로 천년왕국론자들의 왕 노릇은 모든 환란과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거나 물질의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는 아직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란과 핍박의 현상은 신자가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무엇에든지 형통하고 번창하고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면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받는 축복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마지막 때의 시험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이처럼 성경의 증거와는 정반대의 천국관이 교인들에게 심어진 것은 바로 천년왕국론 때문이다. 고난의 천국을 천국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이방 종교와도 같이 영광의 천국만을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14. 천국론
1. 세상의 천국론
1) 모든 종교와 모든 인간의 심성 속에는 대체로 일치되는 멋진 이상향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도 이미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관과 혼합하여 전혀 다른 천국관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선포가 우선 구약의 정신 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천국을 극락사상과 연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2)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란 쉽게 말해서 그냥 좋은 나라이다. 유토피아이며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천국을 접근하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관 정립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왜곡되고 사탄적인 선입관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즉 사탄의 천국관이다.
3) 사탄의 천국관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천국관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천국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주장을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근거한 천국관을 내세웠다. 그런데 예수님도 구약에 근거한 천국관을 내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주장한 천국관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들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2. 천국론의 종류
(1) 구약과 전혀 상관없이 외쳐 대는 이방인들의 이상적인 미래의 천국관
(2) 구약과 연관시키지만 잘못된 구약 이해에 근거한 유대인들의 천국관
(3) 구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본 예수님의 천국관
1) 성경에서는 (1)항에 대한 천국관은 없다. 인간들의 부질없는 상상의 뭉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하늘의 생각에 도달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제시하는 말씀과 그 어떤 유사점도 발견될 수 없다.다시 말해서 비 진리(=계시가 아닌 것)는 논의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비실재이며,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끼리는 나름대로 논리가 정연하고 말이 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비현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그들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시간의 낭비이며 헛되고 헛된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계시를 근거로 한 (2)항의 유대인들의 천국관이다. 이들의 천국관은 이미 복음서를 통해서 밝혀진 많은 것들로 인해 잘 정돈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천국관을 예수님의 천국관과 비교해보면 너무 정치적이고 현세적이다. 구약의 천국관은 문자적으로 볼 때에 정치적이고 현세적이기 때문이다(=마 4:3-10).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도 오실 메시야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요 6:14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3) 유대인들도 천국은 율법(=언약)의 완성으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을 자신들의 의를 밑바탕으로 하여 포함시킨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간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서 이루어지는 천국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랑에 인간의 사랑은 포함될 수 없을 정도로 전적 부패했음을 그들은 감지하지도 못한 것이다.
3. 예수님의 천국론
1) 예수님의 천국론은 유대인들의 천국관을 고발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밝혀진다. 예수님의 천국이란 먼저 성경이 증거하는 바른 메시야를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바른 메시야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앎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숨겨진 것이다.
마 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2) 메시야를 바르게 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왜 메시아가 고난 받는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이 고난 속에서 비로소 천국의 실상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왕 노릇한다는 그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그 자체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고난 이전의 제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비로소 실상에 대해 눈이 열린 것이다. 즉 천국이 와야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미 왔기에 세상은 뒤집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다.
행 17:6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3) 성령이 임하자 구약의 모든 역사적 언어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측면에서 재해석되고 또 바르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역사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불완전하고 쇠퇴할 현 세상에 대한 고발의 언어이며 또한 심판의 언어였던 것이다. 따라서 천국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된 기쁨으로 기꺼이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다. 즉 확정된 천국백성으로서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도 성령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15. 그레엄 골즈워디 - 천년왕국설
1) 먼저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천년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성경 전체 중에서 단지 한 문단, 즉 요한계시록 20:1-10에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문단에 대한 특정 해석이 종종 정통신학의 시금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주제를 지나치게 격상시키거나 심사숙고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격하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저는 천년설을 요한이 전한 계시의 전체 뼈대를 이루는 많은 비유적 표현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서 약술한 해석의 원리들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이 주제를 살피고자 합니다.
2)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천년설에 대한 토론에서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이 토론으로 인하여 해석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주제는 해석학 또는 해석적 방법을 연구하기 좋은 자료인 셈입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기는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의 종말을 훌륭하게 서술해 놓은 이 문단이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의 원인이 되거나 연속적인 싸움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조심했으면 합니다.
3) 이 주제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분들은 오히려 전(前)천년설, 후(後)천년설, 무(無)천년설로 구분한 것 자체도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아마도 “결국에는 어떤 것이 옳은지 드러나고 말 것이다!”라고 하면서 익살맞게 스스로 전(前)천년론자라고 주장하는 제 친구에게 동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요한계시록 주석들은 천년설의 논쟁을 다루는 중에 어떤 특정 견해로 귀착되는데, 이는 단순히 그 견해가 그 주석가의 요한계시록 전체의 해석에 일치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보기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론적인 주석책 중 가장 좋은 것에 속하는 것은 윌콕(Michael Wilcock)의 I Saw Heaven Opened입니다. 이 책은 분명히 윌콕의 무천년설의 입장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단순히 위에서 말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쯤 되면 독자들께서는 저의 대체적인 입장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분별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들께 바라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참조하셔서 저와는 다른 견해들을 가진 분들뿐만 아니라 이 폭좁은 논쟁거리에 거의 무관심한 분들에게도 관용을 보이셨으면 합니다. 또 저의 바람은 좋은 주석책과 더불어 이 책 [복음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께서 요한계시록을 좀 더 자세히 공부하시는데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4) 이른바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은 사실 요한이 다루고 있는 ‘싸움’ 주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저는 이 상징적인 부분을 미래의 한 사건에 대한 글자 그대로의 묘사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입장은 소위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 라고 하는 견해가 훨씬 더 가깝습니다. 완곡하게 말한다 해도 이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나타나셔서 천년 동안 다스리신다는 것처럼 엄청나게 의미 있는 사건이 신약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한편 이런 사건이 있을 것임을 지지하는 논증들은 구약성경을 복음에 의해서 해석되도록 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거의 전적으로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적용한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5)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있는 문단(계 20:1-10)이 일련의 묵시적 환상들 중 하나라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입니다. 또한 이 문단은 재해석이 필요한 문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단을 해석할 때 먼저 우리는 묵시적 상징을 통해 표현하려는 어법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단지 하나의 상징적 문단에 근거하여 어떤 커다란 교리적 체계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성경에서 모호한 구절들을 더 분명한 구절들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즉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우리를 위해 성취한 모든 것-을 우리의 해석의 열쇠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 그러나 전천년주의적인 견해를 취하는 ‘여자적’(如字的) 해석자들의 입장은 사실상 거의 두 시대를 연결된 직선으로 보는 구약성경의 전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전천년주의가 구약성경의 전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전망의 많은 부분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불가능한 해석원리인 ‘여자주의’(如字主義)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경의 ‘약속과 성취’라는 패턴은 결코 그토록 엄격하게 여자적(如字的)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성취는 언제나 그 약속의 원래 표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의 전망을 전혀 배태(胚胎)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7) 우리가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실은 그것이 ‘주의 날’에 대한 시나리오(scenario)의 일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그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승리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전천년주의자들이 미래에 있으리라고 가정한 지상 프로그램이 수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그러나 아직은 영광스럽게 되지는 않은 성도들과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부활되지 않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스리기 위하여 이 땅에 돌아오셔야 한다는 사상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뒷받침 되지 않고 있습니다.
8) 이와 같은 지상의 천년왕국을 주장하게 된 것은 사실상 자업자득한 골칫거리, 즉 미래에 있을 서로 다른 두 소망에 관한 문제와 조화를 이루어보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입니다. 첫째는 모두 이스라엘과 연관된 표현으로 되어 있는 구약의 예언들이 여자적(如字的)으로 성취되리라는 소망입니다. 둘째 것은 복음의 완성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조화되도록 결합시켜 보려는 시도는 오히려 이 될 성싶지 않은 결합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원칙을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여자적 회복과 동시에 복음을 모두 포함하는 그런 미래를 약속한 것이 아니므로 ‘여자주의’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9) 그러므로 여자주의자들의 천년왕국 해결책은 여자적(如字的)이지도 않을뿐더러 성취도 아닌 것입니다. 이 해결책을 따르자면, 구약 예언들의 이스라엘적인 표현들을 조정하여 복음을 포함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회복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다윗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자주의는 이를테면 땅, 성전 등등의 외적인 차원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해결책을 따르면 천년왕국은 현대의 테크놀러지(technology) 시대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것이고 성경의 예언이 나온 그런 세상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자적이 아닙니다. 여자주의자들에게는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비추어서 기록했다고 말하는 것이 곧 게임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요점을 잡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현대의 테크놀러지가 성경 예언의 여자적 해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세상 역사상에서 좀 더 의미있는 발전이 이루어진 뒤에 역시 그것을 조절 못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은 인간의 테크놀러지는 여자주의자들의 예언 해석에 응용될 수 있는 반면에 모든 역사상의 유일한 사건인 복음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10) 또한 여자주의자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성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취’로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의 회복만으로는 여자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성이 만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문자적(소위) 성취를 말합니다. 이것은 잠정적이다가 영원한 복음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지상의 회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따라서 전천년주의자들은 이러한 선지자들의 내다보는 범위를 좀 잘라내야만 합니다. 그래야 좀 더 완전한 왕국이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이 ‘천년’만을 언급할 뿐, 이 기간동안 지상에 계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저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전천년주의적인 해결은 건전한 해석 원리들을 거의 모두 무시한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만일 전천년주의적인 체계가 용납된다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요한계시록의 씨줄과 날줄인 복음에 의해서 종말에 대한 전체적 구조가 형성되어가던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갑자기 멈추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더 분명한 의미가 우리의 해석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모든 구원 사건들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일어날 일들은 복음 전파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복음사건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일어난 일이 전 우주적으로 공표(公表)됨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12) 이 문단(계 20:1-10)에 따르면 ‘천년’은 ‘주의 날’, 사탄이 결박되는 날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영광중에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환상으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싸움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제사장 왕국’이 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고 있음(계 1:6, 참고. 계 20:6)을 보여 주는 표현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이란 양적 측면으로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완전한 일정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질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영광중에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의미합니다.
13) 한편 싸움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권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싸움에 참여하고 계시다는 것과 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은 성도들의 존재를 심히 단조롭고 평범하며 무의미한 영역에서 옮겨 놓음으로써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는 또한 무감각한 고통과 패배의 영역으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 바꿔 말해서 각자의 개인적 신분은 복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역사조차도 우리를 압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금’을 ‘사탄의 패배의 날’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결박은 악이 없고 싸움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임하였으며 이제는 복음을 전파하며 복음에 따라 사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리는 확언인 것입니다.
< 간추림 >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세상과 육과 마귀에 대적하는 그들의 싸움은 하찮은 것이거나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 곳곳에 엮어 넣은 ‘싸움’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루어진 격투장으로 모든 성도들을 끌어들입니다. 복음이 ‘주의 날’이라는 주제의 구조를 형성했듯이, 복음은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할 싸움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애초에 이 싸움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완전하게 결판이 났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은 그분 안에서 승리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복음을 자신의 몸의 지체들에게 적용시키고, 이 복음을 통하여 그들로 자신을 닮도록 일하시는데, 이로써 똑같은 싸움이 교회의 삶속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싸움은 ‘완성’에서 해결됩니다. 따라서 ‘천년’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므로 ‘완성’ 때이거나 또는 바로 그 직전의 어떤 기간에 국한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16. 천년왕국론 등장의 배경사
1)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이 앞에 오면 전천년설, 뒤에 오면 후천년설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천년을 문자적인 기간으로 받아들인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한편 무천년주의는 형식상 후천년설에 속하지만 천년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2) 전천년설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이 그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지나친 문자적 주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와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재림을 단일 사건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계시록의 진술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경향을 그대로 따른다. 나머지 세 개의 천년설은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는 실정이다.
3) 3세기의 이레니우스, 저스틴, 터툴리안, 락탄티우스 등의 교부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하였다. 4세기에는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유행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의 지지 가운데 무천년설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들에 의해 현세적 천년왕국 사상이 번성하였다.
4) 16세기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무천년설 견해를 취했다. 이들은 극단적인 세력의 전천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켜보면서 천년왕국설을 개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다.
5) 17세기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이후 복음의 번성과 함께 낙관적인 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요나단 에드워드를 비롯해서 프린스톤 3인방이라고 불리는 찰스 핫지(Chares Hodge), 로버트 댑니 (Robert Dabney ),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신학자들에 의해 후천년설이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6) 19세기 들어와서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전천년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과 천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맞물려 예언 집회가 유행하던 때에, 다비(John Nelson Darby)와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사상은 가장 커다란 영향력이 있는 종말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7) 이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천년왕국설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네 가지 입장 모두 나름대로의 성경과 현실에 대한 주장과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배제하고라도 세 가지 주장 중에 어느 것 하나가 유일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전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게 이루어진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볼 때, 문자적-영해적 해석을 근간으로 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천년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천년이 아니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순서들 역시 문자적인 예언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8) 천년왕국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는 문자적으로 지상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보는 것이다. 즉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을 집약적으로 상징화한 표현을 “천년”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계 20:4의 말씀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성도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고 또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17. 144,000과 짐승의 표 (666), 적그리스도
1)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숫자 “144,000”을 민족적,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교회사에서는 세대주의라고 부른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교회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 지상의 7년 대 환난 기간 중에 살아남은 자들 중에 이스라엘 (유대인)의 숫자가 144,000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전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성도들 중에서 구원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2) 개혁주의는 이런 주장을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개혁주의는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수를 상징화한 숫자로 해석한다. 이 숫자는 12(=구약백성 12지파)×12(=신약백성 12사도)×1000(=완전성과 무한성)으로 이루어진 언약 성취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즉 144,00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딤후 2:19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3) 계 7장에서는 이들이 마지막 때의 환난과 사단의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계 14장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받을 최종적인 운명(=구원과 유기)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계 13장의 “짐승의 표”에 관한 기사를 세대주의는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컴퓨터의 영문 철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하여 합하면 666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바코드 (barcord)도 666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했었고 지금은 베리칩(VeriChip : 무선식별기술 (RFID) radio frequency indentification) 을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외에도 교회사에서는 666이라는 숫자를 적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하였다.
5) 그러나 계시록에 언급된 “표”는 당시 군인들, 노예들, 신전 봉사자들에게 소유물의 증거로서 낙인을 찍는 통상적인 전통(=소유, 충성, 보호)에서 빌려 온 상징어(象徵語, symbolic word) 인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666을 로마의 불신 황제들 (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안 등)과 관련시키거나 히브리어 원어를 숫자로 환산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려했던 시도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전부 무익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666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짐승의 수를 판독하는 일보다 짐승의 본질을 구속사적으로 파악하는데 있는 것이다.
6)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짐승, 적그리스도는 실제로 있었던 어떤 인물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연출하에 구속사의 도구로서 본연의 활동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짐승은 항상 인간에 대해서 이기도록 작정하신다.
계 11:7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7) 그러나 이런 환란 속에서도 성도만은 예수님의 승리를 의지하게 작정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로 하여금 천국에서 자신이 쓴 면류관마저 포기하게 하신다. 예수 믿음을 종교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번영으로 이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되심과 십자가 피 흘리심의 취지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고난 속에 둔다는 사실을 믿는다.
8) 그렇다면 짐승의 정체는 이 와중에서 매일같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유도하는 거짓 교사와 그 세력이 짐승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이미 예수님도 동일한 시험을 마귀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라면 그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란, 성령의 인을 받은 사람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고후 1: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10)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요 19:30)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데 있다. 그래서 항상 미완성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그 미완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힘이 센 쪽으로 붙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오직 십자가의 완성을 성도 안에 담아두었다는 표시로 인을 치신다. 그래서 짐승도 이 사실을 아는 것이다,.
행 19:15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11) 그래서 짐승과 그 표를 받은 세력들은 성도를 비 진리로 공격한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을 미워하는 온갖 단체들이며 사회적인 현상들인 것이다. 이 모두가 짐승이 찜해 놓은 소유물들이며 짐승의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곳에서 짐승의 활동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12) 용의 머리와 10뿔은, 다니엘서에서 인자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대결 구조를 가졌던 그 바벨론 제국의 연장에서 출몰되어야 했던 제국이다.
단 7:7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제국이 어떤 나라이냐가 아니라, 이 제국과 더불어 다니엘에게 내려준 계시가 어떤 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어서 진정 “인자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등장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용의 지배하에 있는데,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의 정체를 피 지배자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13) 열 뿔을 가진 제국, 곧 짐승의 정체는 인자의 나라의 실체를 역사 속에서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용, 짐승, 적그리스도 이런 것들이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관심이 되는 것이다.
요 18: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성도에게 안겨 주신 나라, 곧 아들의 나라(골 1:13)를 역사 속에 나타내는 식으로 짐승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항상 뱀의 후손의 정체는 여자의 후손과 병행되어서 그 실제적 실체가 기능적으로 노출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창 3:15).
14)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기백성들은 이 세상 짐승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고 세상 힘을 의지하지 않기에, 세상 권력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모든 종교인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5)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이 상호 다른 두 부류를 숫자로 표기한 것이다. 짐승의 숫자는 666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모두 666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고 영원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신자의 운명도 이미 결정 났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계 13: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6) 하나님께서 666이라는 숫자를 영원한 저주로 들어가게 될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은, 언약의 완성을 상징하는 수자인 “7”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결정 난 운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6이라는 숫자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신 것이다. 따라서 “666”이라는 숫자와 이름은 언약 완성의 숫자 “7”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공과금.지병'치료비.먹거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6번의 인슐린과 혈당체크 하루에 내몸을 10번을
찌르며 살다보니 많이 지치고 저혈당 쇼크등으로
머리도 이젠 예전같지 않고 어눌해지고 있어요...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매일 이걸 해야하나 갈팡질팡하고 갈등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인데 요즘은 너무힘드네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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