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고스
우주의 서재
우주의 성찰
영원한 현재를 걷다
― 진악산 시냇물에서 누린 장자의 소요유
2026년 9월 4일 아침 6시, 인공신장실 진료를 시작하였다.
오후 5시 50분까지 환자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살피며 하루의 진료를 마쳤다.
인공신장 혈액투석실
투석기의 관을 따라 흐른 혈액이 다시 환자의 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명이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이어지며 순환하는 것임을 되새겼다.
마지막 환자를 진료한 뒤 흰 가운을 벗어 조용히 걸어 두었다. 의사라는 이름도, 병원장이라는 직책도, 하루 동안 마음에 쌓인 수많은 생각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따라 두 시간 동안 걸으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즐겼다.
소요유는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는 걸음이 아니다.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고, 누구에게 보이려 하지 않으며,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노니는 마음의 여행이다.
나는 길을 걸었으나 어디에 도착하려 하지 않았다.
걷는 순간이 곧 길이었고,
발이 닿는 자리마다 우주의 중심이었다.
진악산 아래 시냇물은 돌과 풀 사이를 굽이돌며 졸졸졸 맑은 목소리로 흘렀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다투지 않고 몸을 나누었으며,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도 자신이 낮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고집하지 않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자신을 비웠기에 수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초가을 바람이 시냇물을 건너와 능수버들의 가느다란 가지를 흔들었다. 버들가지는 허리춤을 간드러지게 돌리며 춤을 추었다. 나무는 바람을 붙잡지 않았고, 바람도 나무에 머물지 않았다. 만나면 흔들리고, 인연이 다하면 다시 고요해졌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춤이었다.
모든 것은 홀로 생겨나지 않는다. 바람이 있어 가지가 흔들리고, 물이 있어 송사리가 헤엄치며, 숲과 시냇물이 있어 새들이 깃든다. 나의 한 걸음도 땅과 중력, 호흡과 몸, 의지와 의식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이 모여 비로소 이루어진다.
맑은 물속에서는 송사리들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헤엄쳤다. 그들은 어제 흘러간 물을 그리워하지도, 아직 오지 않은 물길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오직 지금 흐르는 물속에서 온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작은 송사리의 심장에서도 우주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물가의 바위에는 청록빛 물총새가 푸른 보석처럼 앉아 있었다. 작은 몸은 고요했지만 두 눈은 물속을 온전히 응시하였다.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었다. 때가 이르자 물총새는 푸른 화살이 되어 물속으로 날아들었다.
얕은 여울에서는 오리 세 마리가 풀과 물살 사이에 몸을 맡기고 평화롭게 쉬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였고,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지켜 주며 같은 물길을 흘러가는 일이다.
백로와 왜가리는 긴 다리로 물살을 딛고 서 있었고, 이름 모를 작은 물새는 물막이 곁에서 물속의 미세한 움직임을 살폈다. 맑은 물속의 자라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유영하였다.
송사리와 물총새, 오리와 백로, 왜가리와 자라는 모습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랐다. 그러나 어느 생명도 다른 생명보다 높거나 낮지 않았다.
장자의 눈으로 보면 크고 작음, 빠르고 느림, 아름답고 거침은 인간이 지어낸 분별일 뿐이다.
송사리는 송사리답게 완전하고,
물총새는 물총새답게 자유로우며,
자라는 자라의 속도로 영원을 살아간다.
나는 내 눈으로 산과 물, 새와 물고기를 직접 바라보았다.
그러나 깊이 성찰해 보니 ‘본다’는 일조차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라는 안근(眼根), 산과 물과 새라는 대상인 색경(色境), 그리고 보는 의식인 안식(眼識)이 인연 따라 만날 때 비로소 하나의 봄이 일어난다.
눈과 대상과 안식이 만나 촉(觸)이 되고, 그 만남에서 느낌과 생각이 생겨난다. 눈만으로는 볼 수 없고 대상만으로도 보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도 홀로 존재하거나 홀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의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만남에 ‘아름답다’, ‘내가 좋아한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이름을 붙이고 집착한다. 인연으로 잠시 나타난 현상을 영원한 실체로 여기며,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나’와 ‘내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산도 물도 빛도 끊임없이 변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몸과 마음도 순간마다 달라진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도 고정되고 독립된 ‘나’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이다.
무아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의 선언이 아니다. 내가 수많은 관계와 조건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다.
시냇물 또한 물방울 하나만으로 흐르지 않는다. 구름과 비, 숲과 계곡, 돌과 흙, 햇빛과 중력이 함께하여 비로소 흐른다. 모든 존재에는 홀로 성립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것이 공(空)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열려 있고,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에 흐를 수 있고,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한 실체로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도 극단이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도 극단이다.
현상은 분명히 나타나지만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면서도 고정되지 않고, 비어 있으면서도 인연에 따라 찬란하게 드러난다.
이 두 극단을 벗어난 지혜가 중도(中道)이다.
해가 기울자 진악산 능선은 검푸른 그림자로 깊어졌다. 시냇가 산책로에는 초록빛과 황금빛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어둠은 빛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작은 불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물 위의 불빛은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생겨났다 사라졌다. 같은 모양으로 머무는 빛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덧없음 때문에 밤의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길을 가리키는 돌 표지판은 방향을 알려 줄 뿐 목적지는 아니었다. 경전과 언어도 이와 같다. 깨달음의 길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깨달음 그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진리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직접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산과 물을 온전히 바라보는 순간,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의 경계가 엷어졌다. ‘내가 풍경을 본다’는 분별이 잠잠해지고, 보는 자와 보이는 세계가 함께 일어나는 하나의 생명현상만이 남았다.
나는 우주를 바라보는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었다.
우주가 나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냇물은 우주의 혈류였고, 바람은 우주의 호흡이었다. 진악산은 우주의 몸이었으며, 새들의 울음은 우주의 목소리였다. 분별 없이 깨어 있는 순수의식은 우주가 스스로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었다.
그 순간 나와 우주는 둘이 아니었다.
나는 우주 안에 살고,
우주는 내 안에서 깨어난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생각 속에 있다. 실제로 숨 쉬고,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자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뿐이다.
영원은 끝없이 긴 시간이 아니다.
시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한순간의 온전한 깨어 있음이다.
진료 가운을 입고 환자를 돌보던 순간도 우주였고, 가운을 벗고 시냇물을 걷던 순간도 우주였다. 환자의 맥박을 살핀 일과 송사리의 유영을 바라본 일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었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을 돌보고, 우주가 우주 자신을 바라보는 연기의 세계였다.
오늘 나는 진악산 시냇물을 따라 걸은 것이 아니다.
흐르는 우주 안에서 우주와 함께 흘렀다.
걸음은 멈추었으나 소요유는 끝나지 않았고,
해는 저물었으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명의 분별을 내려놓고 연기를 보니 무아가 드러났다. 무아를 깊이 성찰하니 공의 지혜가 열렸고, 공을 허무로 오해하지 않고 눈앞의 생명을 사랑하니 중도의 길이 밝혀졌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한 방울의 시냇물에도 우주가 흐르고,
한 마리 작은 새의 눈에도 영원이 깃들며,
한 번의 숨결 속에서도 모든 생명이 함께 숨 쉬고 있다.
이 순간이 나의 삶이고,
이 순간이 장자의 소요유이며,
이 순간이 영원한 현재이다.
이 순간이 온전한 삶이다.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