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8장 원어 해석
(48:3) 가나안 땅 루스에서 (뻴루즈 뻬에레트 케나안)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가나안 땅 안에 있는 루스 안에서’ 이다. 이처럼 원어 성경은 ‘~안에’라는 뜻이 있는전치사 ‘뻬’를 두 번 사용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루스 ‘안’에서 있었고, 이 루스는 또한 가나안 땅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루스’는 ‘벧엘’의 다른 이름으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하다가 하룻밤을 지낸 장소이다. 이곳에서 그는 사닥다리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단을 쌓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지었다(28:10-19).
(48:4)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아훗자트 올람)
한글 개역 성경의 본문은 가나안 땅을 야곱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는 약속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역사상 야곱의 후손이 그 땅에서 살지 못한 적이 많다. 따라서 본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원어 성경을 읽을 때 해소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영원한' 으로 번역된 '올람' 은 원래는 '감추인 것' 이라는 뜻으로 '오랜 시간'(신 32:7 ; 암 9:11)이란 의미로도 쓰이며, '영원한' (49:26 ; 시 104:5) 이라는 의미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오랜 시간' 이란 의미로 해석하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지방에서 오랜 기간을 거주하였으므로 문자 그대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영원한' 이란 의미로 해석하더라도 별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의 에언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 영적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본문은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약속받은 성도의 삶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48:5) 에브라임과 므낫세는...내 것이 될 것이요 (에프라임 우무낫쉐...이흐유 리)
본문에서 '될 것이요' 에 해당하는 '이흐유' 의 원형 '하야' 는 '살다'(신 8:1 ; 느 9:29)란 뜻이 있으나 본문에서는 '속하다'(출 20:3 ; 삼하 12:2 ; 사 45:14 ; 호 1:9)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어떤 이들은 에브라임과 무낫세는 요셉이 애굽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 야곱 앞에서 이방인의 피가 섞인 아들들 보이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 자신의 완전한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한 본문의 내용으로 요셉의 마음은 비로소 안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이들을 손자로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친아들인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자신의 아들들로 여기겠다고 했다. 이는 실제적으로 열한번째 아들인 요셉을 장자로 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선언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상속법으로 볼 때 장자는 다른 아들의 유산의 두 배를 받았는데 (신 21:16,17) 요셉의 두 아들이 다른 야곱의 아들과 같이 아들로 취급된다면 요셉의 입장에서는 다른 형제의 두 배의 유산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에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아들로 취급되어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각각의 지파를 이루었으며 나중 가나안 땅 분배 시에도 다른 지파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기업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특정 혈육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애굽의 피가 섞인 요셉의 아들들도 이스라엘의 당당한 지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인 것을 강조한다(신 9:7,8 ; 시 65:4). 그렇지만 훗날 유대인들이 가지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은 신약 시대에 복음 전파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인간의 지위나, 혈통, 계층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모든 자에게 임함을 문명히 하고있다. 실제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전혀 없는 것이다. (행 15:14 ; 롬 8:33 ; 롬 9:24 ; 골 1:27 ; 벧전 2:9,10). 실제로 오늘날 유대인의 혈통이 아닌 우리들이 구원의 반열에 들수 있게 된 것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선택 때문이다.
(48:7) 그곳은...오히려 격한 곳이라 (뻬오드 키브라트 에레츠)
본문은 직역하면 '아직도 먼 곳의 땅에서' 이다. 여기서 '오히려' 라고 번역된 '뻬오드' 는 '아직도' 를 뜻하는 '오드' 와 '안에' 를 의미하는 전치사 '뻬'가 결합한 말로 '아직도 더 가야하는' 이란 뜻이다. 또한 '격한' 으로 번역된 '키브라트' 는 '길이'의 단위로서 (35:16 ; 왕하 5:19) 학자들은 보통 말이 쉬지 않고 한번에 갈 수 있는 거리로 생각한다. 라헬이 죽고 장사된 곳은 에브랏에서 약 19km 정도 떨어진 장소이다. 아마도 야곱은 조금만 더 가면 괴로운 여정이 끝나고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안식을 얻었을 아내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던 것 같다.
더불어 요셉에게 그의 어머니 라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한 회상의 의미를 넘어서 요셉의 가장 가까운 혈족인 어머니 라헬의 묘가 가나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 언약의 땅 가나안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갖게 하려는 신앙적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48:10) 어두워서...보지 못하더라 (카베두...로 유칼 리르오트)
'어두워서' 에 해당하는 '카베두' 의 원형 '카바드' 는 일차적으로 '무겁다', '둔하다' 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기능이 많이 저하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보지 못하더라' 는 표현보다는 '잘 보지 못하더라' 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한편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본 단락에서 '눈(아인)' 은 중요한 모티프(motif)가 된다. 육신의 측면에서 볼 때 야곱의 눈은 어두웠지만 그의 영적 눈은 밝아 선택과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들 요셉은 육신적으로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는 영적 눈은 어두웠다. 오히려 그는 야곱이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모습을 '보고...기뻐 아니하였다' (17절). 이 표현은 '그러나 그가 보고...그 눈이 악하여졌다' 라는 뜻이다. 애굽의 총리로서 요셉은 세상 일을 보는 눈은 밝았지만 영적인 눈은 어두웠으며, 사람을 잘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육적인 눈이 어두웠던 아버지 야곱은 오히려 영적인 일을 잘 분별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8:13) 우수로는 (삐미노)
'오른손' 을 뜻하는 '야민' 과 '~안에' 혹은 '~로' 로 번역되는 전치사 '뻬' 의 합성어 '삐미노' 는 '오른손에 의해' 란 뜻이다. 히브리인들이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권위와 탁월한 능력, 축복과 은혜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후일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마 5:30)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죄에 물들게 하고, 지옥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면, 설사 그들이 오른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과감히 제하여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런 사회적 통념 때문에 요셉은 야곱이 장자를 오른손으로 축복하도록 시도하였던 것이다.
(48:14)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식켈 에트 야다이우)
'어긋맞겨' 에 해당하는 '식켈' 은 '어긋맞기다' 는 뜻 외에도 '신중하다', '지혜롭다' 란 뜻을 가진 '사칼' 의 강의 능동형이다. 이는 야곱이 팔을 어긋맞겼다고 하는 행위를 강조할뿐만 아니라 야곱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하기까지 신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본문은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는 뜻과 함께 '팔을 신중하게 얹었더라' 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야곱의 행동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깊이 생각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48:15) 섬기던 하나님 (하엘로힘 아쉐르 히트할레쿠)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스스로 좇았던 그 하나님' 이다 즉 한글 개역 성경에서 '섬기던' 으로 번역된 '히트할레쿠' 는 '가다', '좇다', '향하다' 란 뜻을 가진 '얄라크' 의 재귀형으로서 본문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좇았다' 는 뜻이다. 따라서 KJV, NIV, RSV는 모두 이를 '걸었다(walked)'로 번역하였다.
본문에서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 은 바로 그분을 '좇는 삶' 이라고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비시디아의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다윗을 가리켜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을 산 것이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산 삶이었음을 증거하였다(행 13:36).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하나님을 좇아 걷는 삶이어야 한다.
(48:15)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메오디 아드 하이욤 핫제)
'남으로 부터' 로 쓰인 '메오디' 의 기본형 '오드' 는 '아직', '반복하여', '멀리' 란 뜻이 있고 이 단어가 본문과 같이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메(from)' 와 함께 쓰일 때는 '~대로' (민 22:30)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지금까지(아드 하이욤 핫제)' 는 관사 '하' 를 '날' 을 뜻하는 '욤' 과 '이것' 이라는 뜻의 '제' 와 연결하며, 또한 여기에 '~까지(unto)' 란 뜻의 전치사 '아드' 를 결합시키어 '바로 이 날까지' 라는 뜻이다. 즉 이는 '바로 지금까지' 란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오늘날까지' 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의 전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께서 참목자로서 인도하였고 그 인도하심은 바로 이 순간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실로 야곱은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48:15) 기르신 (하로에)
'하로에' 는 '기르다', '풀을 뜯기다', '방목하다' 등으로 쓰이는 '라아' 의 분사형 앞에 정관사(하)가 붙은 형태로서 그 뜻은 '그 기르는 자' 즉 '그 목자'이다. 그런데 이 '목자' 라는 표현은 앞에 나오는 '섬기던(히트할레쿠)' 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표현이다. 즉 '좇다' 란 뜻이 있는 '섬기던' 하나님을 '목자' 와 같이 '기르고 이끄시는 분' 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이 '좇았고', 지금까지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마치 양과 목자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양치는 사람으로 살아온 야곱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언급한 것은 이 비유보다 하나님과 그의 인생을 더욱 잘 묘사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이 좋은 목자가 되신다고 말한 야곱의 기도는 그 자체가 가장 진실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48:16)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학고엘...믹콜 라)
직역하면 '모든 악에서 구원하신 그 자' 이다. 본문에서 '모든' 에 해당하는 '믹콜' 은 '모든 것' 을 뜻하는 '콜' 과 '~로부터' 를 의미하는 전치사 '민' 의 합성어이다. 또한 '환난' 에 해당하는 '라' 는 단순히 '어려움' 이란 뜻만이 아니라 '악한 상태' (렘 24:2,3), '사악' (렘 4:4), '불구' (41:19) 라고하는 모든 부정적인 상태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모든 환난' 은 '모든 사악함', '모든 어려움', '모든 부족함'이라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한편 '건지신' 으로 번역된 '학고엘' 의 기본형 '까알' 은 '도로 사다', '속전하다' 는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정관사(하)' 까지 결합되어 '구원하는 자' 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레위기나(25;25) 룻기에서는(4:4-6) '기업 무를 자' 를 나타내는 데 쓰였다. 특히 룻기에서는 나오미의 밭을 도로 물어 주고, 룻과 결혼해 다윗과 메시야의 계보를 이은 보아스의 모습을 통해 '기업 무를 자' 즉 '고엘' 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 주었다.
(48:16) 사자께서 (함말르아크)
기본형 '말르아크' 는 '보냄을 받은 자', '전달자' 란 문자적 의미가 있고, 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천사' 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자' 는 피조물 이상의 존재이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하였던 하나님의 사자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을 때, 그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자가 결국 '하나님 자신' 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였다(32:24-29). 그러므로 본문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 는 신약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48:17) 기뻐 아니하여 (와예라 뻬에나이우)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그 눈이 악하여졌다' 이다,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는 생략된 '뻬에나이우' 는 '~안에' 를 뜻하는 전치사 '뻬' 와 '눈' 을 뜻하는 '아인' 이 결합된 말이며, '기뻐 아니하여' 에 해당하는 '와예라' 의 기본형 '라' 는 '악하다', '근심하다', '사납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원어 성경은 요셉이 육신의 눈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그의 생각과 다르자 그의 눈이 근심하며 악하여졌음을 보여준다. 즉 육체의 눈으로 볼 때 둘째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이 심히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영의 눈이 밝은 야곱에게는 둘째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영적인 눈을 뜨지 못환 요셉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묘하신 섭리를 단지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된 자들로서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영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행동할 바를 바로 결정해야 한다(롬 12:2 ; 고전 2:13 ; 빌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