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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52) 예수님의 숨겨진 소년기
누가복음 강해 (15)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41-52)
평범한 아동 예수
기원후 2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년기 도마복음’(Infancy Gospel of Thoma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만 빌린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에 관한 책들이 많이 저작되었기에, 교회는 서기 4 세기경에 그중에 사실과 진리만 전하는 책을 골라서 현재의 27권을 신약의 정경(正經, the canon)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선택과 판정의 기준은 크게 셋이었는데, 첫째 저자가 사도이거나 사도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 내용이 십자가 복음의 진리와 일치해야 하며, 셋째 초대교회가 이미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책은 셋 중 하나도 해당되지 않아서 위경(僞經, Pseudepigrapha), 즉 가짜 성경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도 신적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가정해서 지어낸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어린 예수가 흙으로 새를 빚어서 숨을 불어 넣었더니 실제로 참새가 되어서 날아갔다고 합니다. 또 동네 아이가 예수를 밀치자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나 나중에 예수가 그를 다시 살려냈고, 예수를 비난한 어른이 저주를 받아 중병이 걸렸다는 식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엉터리 책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관해 유일하고 아주 간단한 기록이지만, 소년 예수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의 청소년기는 그냥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는 것입니다. 의사인 누가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습니다. (눅1:3) 추측건대 그는 어린 예수에게 뭔가 유별났던 점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마리아에게 졸랐을 것이며, 그렇게 얻어낸 결과물이 본문 하나였습니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기억하기로도, 이 사건 외에는 예수가 다른 아이들과 특별히 달랐던 점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요셉 가족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열두 살 된 예수만 홀로 남게 되었고, 뒤늦게 예수가 없는 줄 알게 된 부모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되찾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미국 TV에서 상영하는 영화 ‘나 홀로 집에’(Home Alone)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가족이 정신없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벌주느라 다락방에 잠시 가두어 놓은 막내아들을 빠트리고 출발했습니다. 엄마가 비행기를 타고 한참 가다가 깨달았으나 연말이라 교통편이 없어 천신만고 끝에 며칠 만에 겨우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휴가를 떠난 빈집인 줄 알고 침입하려는 두 명의 도둑을 아이 혼자서 기발한 계책으로 지혜롭게 막아내는 스토리였습니다.
어린 예수도 헤어졌던 부모와 사흘 만에 만났으나 아무 문제 없이 혼자서 잘 지냈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그 또래 아이들의 일상적인 모습대로 행동했습니다. 관객의 흥미를 끌려고 조금 과장한 면은 있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보다 훨씬 더 평범했습니다. 그럼에도 잘 살펴보면 이 사건에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
그 영화나 본문 사건에서나 서로 헤어지게 된 일차적인 책임은 부주의한 부모에게 있습니다. 아이를 한두 명만 낳아서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요즘 세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를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율법은 유대인 성인 남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지키도록 명했습니다. (출 23:14–17, 신 16:16) 차츰 세 절기를 다 그렇게 지키기가 힘들어지면서 유월절에만 올라가되, 일종의 축제처럼 전 가족이 함께 올라가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백 년간의 애굽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겐 가장 중요한 축제이기 때문이고, 또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는 절기 중에 유월절 관련 기록이 가장 많습니다.
유대인 남자아이는 열세 살부터 정식으로 율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러면 ‘율법을 맡은 자’(히브리어로는 '히바 미츠바')라고 칭해줍니다. 여호와의 택함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세 살이 되기 전 1-2년은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연습을 미리 시켰다고 합니다. 장남 예수가 열두 살이었으므로 성경을 저작한 야고보와 유다를 비롯해서 동생들 몇 명은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로선 예수보다 어린 동생들을, 특별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막내 아이를 챙기며 돌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선 법적으로 만 14세 미만의 아이를 집에 혼자 두면 불법입니다. 반복해서 그러면 이웃이 경찰에 신고하게 되어 있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능력과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정부가 아이를 데려가서 대신 키워줍니다. 거꾸로 만 14세가 되면 집에서 혼자는 물론 동생들과 함께 있어도 됩니다. 현대보다 더 조숙했던 고대 이스라엘에선 만 13세가 되면 어른 취급을 해주었는데, 여자는 결혼도 가능했고 남자는 회당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지금 예수는 그렇게 되기 일 년 전이었고, 그 부모는 유대 율법과 관습대로 행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나사렛이 아무리 작은 시골이라도 전 가족이 축제를 즐겨야 하므로 최소 수백 명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당시에 이처럼 집단으로 움직일 때는 어린이와 노인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성인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서 따라갔습니다. 열두세 살의 아이들도 남자 여자끼리 나누어서 어른들 뒤에 따라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 나이 때는 한참 개구쟁이 시절인지라 지금도 그러하듯이 온갖 장난을 치느라 멀찍이 떨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부모들로선 다 큰 애들이라 어련히 따라오려니 여기고 일일이 인원 점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까지 도보로 하루밖에 걸리지 않고 수백 명이 함께 움직이니까 중간에 유괴 납치되거나 실종될 염려도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나사렛에 도착해 보니까 장남 예수가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알고선 바로 다음 날 부랴부랴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는 부모와 이틀 이상 떨어져 있는 동안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에 관해 문답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당시 인근 각지에서 관광하러 올 정도로 여러 부속 건물로 이뤄진 엄청난 규모였는데, 마리아가 예수를 비교적 쉽게 찾은 것 같습니다. 절기 때마다 랍비들이 히브리어로 ‘헬’로 불리는 성전 좌측에 외부로 뻗어 있는 약간 높고 넓은 계단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 앞의 뜰에 남아 있엇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쩌면 혹시 서로 잃어버리면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장소에서 기다리라고 마리아가 미리 다짐해 놓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
마리아가 장남을 챙기지 못한 것은 분명 그녀의 실책이었지만, 당시 상황이나 관습상 당연히 예수가 함께 따라오고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도 율법 토론에 정신이 팔려 부모와 일행이 출발한 것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일에 집중하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그 또래 아이들과 똑같이 행동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신적 권능을 발휘했다면 부모가 떠난 것을 금방 알아채고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곧바로 일행을 따라잡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일지라도 육신과 정신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 아이였습니다. 그 유년 시절이 성경에 기록에 없는 이유도 유대의 다른 아이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율법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으며 유대의 전통과 관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마태는, 헤롯 대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서 천사가 지시한 대로 요셉과 마리아가 두 살이 채 안 된 어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만 기록합니다. 본문 사건은 그들이 애굽에서 돌아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애굽 도피 생활도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그곳에서부터 율법 교육을 더 철저히 행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가 아주 평범하게 자랐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식 랍비로 활동하기 전까지 그의 메시아 되심을 직접 관련된 극소수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대적인 헤롯 대왕은 이미 죽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였고 예수 가족은 밤중에 몰래 피신했기에 헤롯의 아들들도 미래의 경쟁 대적을 제거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 잔인했던 헤롯의 유아 살해는 배후의 사탄이 시켰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사탄마저도 감쪽같이 속인 셈입니다.
하나님에겐 그런 장애들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얼마든지 다른 방안으로도 아기 예수를 보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 인간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가운데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역사하시지,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기적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소년 예수를 통해서도 굳이 기적을 베풀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부모마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물론이고 앞으로 메시아로서 행할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할지 몰랐습니다.
성경은 후대 신자가 꼭 알아야만 할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는 평범한 유대 아이로서 유대식으로 평범하게 자랐기에 후대에 전해야만 할 특별한 사항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소년기 시절의 기록이 부족하다고 해서 성경의 진실성과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의 역사성에 시비를 걸거나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최초의 말씀
마리아가 예수를 다시 만나자 곧바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라고, 약간 꾸중 섞인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는 그에 대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부모와 헤어지게 된 자기 실책에 대해서 변명하는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이는 열두 살의 소년이긴 해도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이 최초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어법적인 표현으로 부모라면 자기가 당연히 성전에 있을 줄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키는 대로 마지막에 헤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 있지만, 평소에 자기가 얼마나 율법에 관해 관심을 두고 많이 연구하는지 두 분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리아에겐 가브리엘 천사에게 고지를 받을 때에 자신이 커서 행할 일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 않느냐고 깨우쳐 주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다들 예수의 말을 못 알아들었으나 마리아만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라고 증언합니다. (51절)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2b, 33절)라고 계시해 주었습니다. 왕이라면 왕궁에 거해야 하나, 예수는 지금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백성들을 율법에 따라 다스려야 하므로 성전에 자주 출입해야 합니다. 천사는 또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31, 32a)라고 덧붙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정체성을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예수는 그래서 자신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이 시점에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인식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받은 예언과 계시를 어느 정도까지 아이 예수에게 알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을 친아버지로 섬기며 존경하게 하려고 동정녀 잉태도 성인이 될 때까지 숨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어렸어도 성경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함께하신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설령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을 몰랐어도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가 감당할 소명에 대해 확신하는 가운데 하신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소년 예수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해 ‘여호와의 거룩한 전’이라고 칭하지, 이런 식으로는 절대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칭했고, 성전은 자기 아버지가 거하는 전이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아직은 ‘히바 미츠바’, 즉 구약 성경을 배워서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유대인이라는 칭호를 얻기 전입니다. 그것도 방금 마리아가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고 꾸중하다시피 했는데,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당당하게 엄마에게 대든 셈입니다. 이는 평범한 열두 살의 유대인 남자아이가 입에 담지 못할,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말입니다.
예수가 육신적으로 피를 섞지 않은 법률적 아버지 요셉을 부인하는 뜻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커서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누가도 나사렛에 돌아가서는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51절) 부연 설명했습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는 물론 아버지 요셉에게 거역 불효하는 죄를 한 번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서 ‘히바 미츠바’라는 유대인 특유의 정체성에 묶일 수 없는 당신의 진짜 정체성을 암묵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신비
말하자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유대인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도 랍비와 성경 토론을 하고 있는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모두가 놀랍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47절) 어린 예수의 성경 해석이 자기들보다 더 깊고 심오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보통의 유대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유월절 제사만 참여하고 성전 근방에서 뛰어놀기 바빴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남자 어른들이 제사를 마친 후에 남자아이만 따로 모아서 절하게 합니다. 지금의 예수님 나이 때는 누구에게 무슨 의미로 절하는지 모르고 부모가 시키니까 그냥 따라 합니다. 제사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어서 빨리 제사상에 오른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기다립니다.
예수는 전혀 달랐습니다. 부모는 예수와 랍비 간의 문답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다른 아이와 달리 율법 문답에 참여한 것만도, 그것도 이틀 내내 그러고 있는 데에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도 엄마에게 대답하는 예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서, 단순히 율법의 영재가 나타났고 나중에 큰 선생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 일을 마리아만 기억하고 있다가 누가에게 어린 예수의 가장 특별한 점이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누가도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에 유대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통해서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로서 행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율법을 온전히 가르치는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가 단순히 성경 교사가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풀어서 전하는 랍비가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르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의 가르침이 서기관과는 다르게 권세가 있음에 놀랐다고 증언했습니다. (마7:29, 막1:22) 나아가 당신께서 가르치신 구약 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십자가에서 성취함으로써 당신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간의 죗값을 갚는 제물로 바쳐져서 죄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는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지금의 어린 예수 안에서 또 나중에 사역하고 나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주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어떻게 상호 교류 작동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성경도 그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으며, 만약 상세히 설명해 주어도 하나님만의 신비에 속하기에 어떤 인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 신자로선 그분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때는 완전한 인간이었고,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행해야 할 때는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부터 완전한 인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도 완벽하게 당신의 뜻대로 행할 것이라는 확실한 예표이자 증거입니다. 예수님에게 능히 못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서 골고다 십자가에 운명하기까지 인류를 죄에서 건져 주시는 일을 단 한 치의 오차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섭리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모든 인간이 반드시 믿어야 할 절대적 진리입니다. 정말로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증거나 근거가 훨씬 더 미약합니다.
율법의 두 계명
유감스럽게도 신자 중에 이 진리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자가 상당히 있습니다. 그분이 인간이라는 데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으나 하나님이라는 데에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성 중에 하나만 믿으면 구원은 물론이고 반쪽의 은혜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건전지에 양극과 음극이 함께 있지 않고 그중 하나만 있으면 작동이 전혀 안 되는 꼴입니다.
‘인간 예수’만 믿으면 주님은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그칩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십자가가 아니라 산상수훈을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의 죽음이 한 의인의 숭고한 희생일뿐, 다른 인간의 죄를 씻어서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만 믿으면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예수는 실체가 없는 영적인 그림자에 불과해집니다. 삼 년간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 함께 웃고 울면서 위로 치유 구원한 모든 사역이 아무 의미 없는 허수아비 놀음이 되어버립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둘을 온전히 믿어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도 꽤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아주 심오하고 깊은 신학적 통찰이 필요하지만,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 하나를 아주 간단하고도 쉽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는 사람이 참 인간답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몸소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으로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죄에 찌든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우하는지 온전히 계시해 주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를 신자가 자신의 삶에 실현하는 일도 너무 어렵고 거창하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와 같이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에 한정 지어서 질문했으나, 주님은 구약 성경을 뜻하는 관용구인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마22:35-40) 주님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를 딱 그 둘로 축약할 수 있다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당시는 구약 성경뿐이었지만, 신약 성경도 구약이 말하는 바를 실현한 것이므로, 이는 예수님이 직접 해석해 주신 신구약 성경 전체의 절대적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죽기까지 증오 저주하시나,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 죄인은 죽기까지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성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의를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덧입혀서 깨끗게 하시고 그 은혜를 순전히 믿는 자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자신만 최고로 높여서 사랑했던 자들로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즉 모든 신자가 평생을 두고 행해야 할 일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기만 높이려는 원죄 아래 묶여 있던 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서 자기의 의를 과시하려고 형식적 가식적 이웃 사랑만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구제에 열심을 냈으나 자기 여유분으로 자신의 선을 쌓는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여 함께 울어주는 참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아서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예수님의 심령이 그 속에 심어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자신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이웃을 살리는 주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주님과 같이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이전과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는 그런 구제를 하며,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자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간이라도 꺼내줄 듯이 모든 것을 희생 수고하며 사랑하는 차원은 아닙니다. 도덕적 종교적 의무 준행이 아니라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온전히 이해하고서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기적인 욕심, 자존심, 자기 자랑을 배제한 채 순전히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문답한 내용
예수는 어렸어도 성경에 능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계시해 주고자 하는 진리를 정확히 꿰뚫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감히 짐작건대 성전에서 구약 성경에 대해 질의응답을 할 때 이 문제도 어른들과 랍비마저 놀랄 정도로 깊이 있게 토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당시 유대인으로선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표현으로 내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신도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온전하고도 순수하게 사랑하며, 그와 동시에 육신적 아버지 요셉을 순종하며 섬겼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대로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을 실현한 것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가장 강조한 표현이 있습니다. 세 번이나 지혜부터 거론했는데(40, 47, 52절),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여 실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자랑하는 지식에 머물 뿐입니다. 예수가 지혜롭게 된 결과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이웃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도 사랑받은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아주 강하고도 뜨겁게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만 참믿음이고 그러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으며, 반드시 그대로 실현해 주는 것입니다. 애인이나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자연히 가질 수 있지만, 정작 해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하나님은 물론 신자 자신처럼 사랑해 주길 가장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기껏 열두 살에 이 진리를 터득한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실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올해 칠십삼 세로 목사가 된 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본문의 어린 예수에 비해도 너무 부끄럽습니다. 물론 완전한 하나님이시라 비교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그렇게 오래 연구했는데도 여전히 자기를 높이는 죄성을 완전히 죽이지 못하고 있고 죽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죽으셨고 또 여전히 미숙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저도 성경을 많이 읽은 성경 교사가 되기보다는 지혜가 자라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모두가 열두 살 때의 어린 예수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2/21/2025)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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