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생활의 마지막날이 되고만 24일밤 생도들은 설렘 속에 거의가 밤잠을 설쳤다. 6월의 넷째 일요일이었던 25일은 입교 후 처음으로 허용된 면회날이었기 때문이다.이날의 북괴 남침상황과 생도대의 출동 및 전투 등에 대해서는 생도1기 때 이미 소상하게 언급한 바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다만 생도1기생들과는 처지가 다른 생도2기생들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전투상황만 기술할까 한다.생도2기생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했던 면회날, 윤홍섭(예비역중령·「6·1동기회」간사·한국에너지연구원실장)·박경석·장도민·원창희생도 등 운이 좋은 몇몇 생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면회 온 가족·친지·애인들과 얼굴조차 맞대지 못하고 전선에 투입돼야 했다.이날 아쉬웠던 면회를 계기로 박경석· 박준승생도 (예비역대위·상업)는 평생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됐다. 박경석생도는 이날 먹을 것을 듬뿍 사들고 온 가족들이 교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박준승생도는 집안사정으로 면회 온 가족이없었다. 박경석 생도는 이날 먹을 것을 듬뿍 사들고 온 가족들이 교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박준승생도는 집안사정으로 면회 온 가족이없었다. 박경석생도는 쓸쓸히 앉아있는 박생도의 소매를 끌어 PX격인 「주보」 에서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후로 두 분의 우의는 더욱 돈독해졌다고 한다.51년2월 강원도 현리의 1077고지에서 두 분은 나란히 소대장으로 싸우다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포로생활 중에도 두 분은 붙어 다니다 시피 하다 극적으로 함께 탈출, 지금까지도 매달 한번씩 어김없이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이날 상오11시쯤 주번사관으로부터 『각반 사관생도는 완전군장하고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하라』는 전달이 갑자기 내려졌다.완전군장을 꾸리는 것조차 미숙했던 생도2기생들은 하사관 출신인 한기욱(예비역대령· 전대통령문교담당비서관)·김홍내(예비역대령·전국무총리비서관)·이공녹(예비역중령·명지고교교사)생도 등의 도움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군장을 꾸렸다.이날하오5시. 외박을 나갔다가 급히 귀교한 생도1기생 2백62명과 학교에 남았던 생도2기생 2백27명(나머지 1백여명은 육사외곽 경비 용산역 경비 등의 임무, 또는 병원입실 등의 이유로 잔류했다), 그리고 80여명의 기간장병들로 구성된 생도대는 육사교정을 출발해 포천으로 향했다.트럭에 함께 타고 전장으로 가는 길이긴 했으나 1년 남짓 교육을 받은 생도1기와 이제 겨우 24일간 생도생활을 한 생도2기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사명감과 함께 흥분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생도2기생들의 솔직한 심경이었다.생도1기생들은 얼떨떨해하는 2기생들에게 어떤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말라고 일렀고 트럭을 타고 빗길을 달리면서도 후배들에게 즉석 전술교육을 가르치기도 했다.당시 생도1기생인 이호봉(예비역소장·전37사단장), 김창일(예비역대령·파월비둘기부대 참모장·평화통일정책 자문회의사무처부이사관)생도등은 전장에서 당장 필요한 수류탄투척·분대전투·암호사용법 등을 후배들에게 가르쳤다.25일하오5시에 육사를 출발, 하오9시쯤 포천 부평리372고지일대에 도착한 생도대는 새벽까지 1∼2인의 호를 파는 등 전열을 가다듬었다.26일 여명과 함께 북괴군 1개대대와 첫 접전이 개시됐으나 인접 의정부가 함락됨에 따라 후퇴명령이 내려져 생도대는 눈물을 머금고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육사로 돌아온 생도대는 26일하오9시∼27일 새벽사이에 다시 불암산F고지 등에 투입되었다가 28일 새벽3시 서울이 적군에 함락됨과 때를 같이하여 광나루를 통해 남하를 시작, 6월30일엔 수원, 7월3일엔 평택으로 이동했다.7월10일 생도1기생이 대전 원동국민학교에서 비로소 소위로 임관될 때까지 생도2기생들은 생도1기와 생사고락을 같이해왔다.그런데 서울이 적군에 점령되고 생도대가 막강이남으로 철수할 당시 거듭되는 후퇴명령을 거부한채 적진(불암산)으로 되돌아간 사수파가 있었다. 사수파 생도2기생 가운데 우선 얼른 생각나는 분은 김성진(예비역소장·전수송사령관·전국버스연합회이사장)·김대영·박순하 (예비역대령·국제관광공사연구원)·박창환(예비역소렴·상엄)·김득성·(예비역중령)·백천석(예비역중위·경희의료원근무)·문용일(예비역중령·홍릉기계연구실장)·정호경(예비역대령)생도등이 있고 곽노준·민태율·나을수생도 등은 그때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