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을 지키던 장수의 상소가 올라왔다.
장성이 무너지고 있어 보수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언지하에 이 상소를 묵살하는 강희제.
백성들의 노역을 강제하는 장성은 필요없다고.
진정한 장성은 백성들의 마음안에 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변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북동쪽으로 약 180 km 떨어진 이곳 승덕( 구 열하)에 '피서산장'을 짓는다.
건축 자체만으로는 강남 정원 건축의 확대판이었던 피서산장은, 그러나, 불과 2백만의 만주족이 3억의 한족을
완벽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역사적 수수께끼를 풀어갈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연암 박지원은 갈파한다.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황제의 고도의 정치적 책략이라고.
도대체 강희제를 비롯한 청의 황제들은 이곳에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이었을까.
무엇이 연암 박지원을 그토록 전율하게 했을까.
우리 일행이 승덕에 도착했을 때, 피서산장은 이미 어둠에 잠겨있었다.
정문의 조명이 음울하게 느껴질뿐.
밤사이 눈이 왔다.
적갈색 잎새들이 하얀 눈을 한 웅큼씩 지고 있다.
그렇게, 눈은 나뭇잎에 모여서 쉬고.
청명한 기운이 가슴 가득 들어온다.
행복하다.
미소를 머금는다.
황제도 이런 순간을 만끽했었기를...
목란위장.
제주도 면적의 약 30 배 크기로, 승덕의 북서쪽에 설치되었다.
남쪽으로 연상산맥과 잇닿고 북쪽으로 몽고족들이 유목하던 패상초원과 접한 곳.
이곳에서 황제들은 가을마다 대규모 사냥행사를 열었다.
적게는 수천명, 많으면 수만명의 병사가 참가, 강희제부터 가경제까지 약 110 회 정도
시행된 이 사냥행사는 기실 황제가 친히 지휘하는 '군사훈련'이었다.
이 사냥행사에 참가한 정예병사들을 중심으로 몽고 토벌군이 조직되었으며, 이 사냥행사
자체는, 몽고족들에 대한 무력시위였다.
연암 박지원은 말한다.
' 열하는 장성밖 황량하고 궁핍한 곳인가? 이름을 '피서'라 지었으나 사실은 천자 자신이 변방을
지키고자 함이다'
보녕사에서 잡은 원경.
흐린 날씨로, 시계가 뚜렷하지 않다.
맞배지붕들 위로, 쌓인 눈이 가지런하다.
외팔묘.
피서산장 바깥의, 여덟개 절을 일컫는다.
중국 전통의 사원 건축양식과 몽고족, 티벳족의 건축양식이 혼재하지만, 이 절들은 모두 라마불교 사찰이다.
청조의 역대 황제들은 라마불교 즉 티벳불교를 지원하며 지지했다.
옹정제의 경우 심지어 설법까지 할 정도로 라마불교에 매료되어있었다.
왜 청조는 라마불교를 지지하며 한편으로는 개입했을까.
당시 라마불교는 티벳인들은 물론, 몽고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유일무이한 종교였다.
청조가 라마불교를 진흥하고 승덕에 휘황찬란한 사원들을 건설하자, 몽고족들은 앞다투어 청조에
복속되어왔던 것이다.
고도의 정치적 책략.
보녕사의 대웅보전.
만주어, 한어, 티벳어와 몽고어로 동시에 표기되어 있다.
청조의 황제들은, 무릇 이 네가지 언어에 통달해야 했다.
보녕사.
승덕에서 유일하게 현재도 승려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찰.
입구에서 대웅전까지는 중국사원 건축양식으로, 대웅전을 지나서는 중국식 건축양식과 티벳식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우리 일행이 대웅전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예불 시간.
가운데 사진의 인물이 판첸 라마 10세.
판첸 라마는 라마불교에서 달라이 라마 다음의 권위를 지니는 직위다.
수십년간 중국 당국의 그늘아래 있던 그가 1989년 세상을 떠나자,
달라이 라마와 중국 당국이 각각 지명한 2명의 판첸 라마 11세가 공존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당연히,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판첸 라마 11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법당 오른쪽 사진의 인물이 중국 당국이 지명한 판첸 라마 11세.
살아있는 달라이 라마 14세의 사진 대신, 죽은 판첸 라마 10세의 사진을 가운데 두어야 하는, 이 옹색함.
막스레닌주의자들이 유심론자들의 수장을 지명하는, 이 어색함.
보녕사의 뒷부분.
계단을 오르면 대승지각이 있다.
그 안에 있는, 세계최대라는 금칠목조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라마불교는, 대승불교의 줄기 아래에 있다.
때문에 관세음 신앙이 중핵을 이룰 수 밖에 없는바,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일컬어진다.
보타종승지묘.
티벳의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모방했기에, '소포탈라궁'이라고도 불리운다.
건축양식에 있어서, 보녕사보다는 더욱 티벳의 건축양식에 가까워진듯 보이지만.
이번에는 중국 전통의 그것을 티벳의 포탈라궁위에 얹어 놓았다.
건축물을 관통하는 정치논리이다.
1771년, 이 절의 준공식은 건륭제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러시아 볼가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몽고부족 토이호특족이 러시아군의 추격을 피해 청조로
귀순해오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8개월간에 걸친 '죽음의 탈출'로 이 몽고부족의 인구는 18만에서 7만으로 줄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비로서 '천주의 나라'에서 '부처의 나라'로 돌아왔다는 환희에 젖는다.
건륭제는, 보타종증지묘의 준공식을 열며, 이 부족에 대한 환영연회를 베푼다.
안에서 바라본 보타종승지묘.
청조에 있어, 황색 지붕은 오로지 황제의 것이었다.
이 황색 지붕의 건물이 보타종승지묘의 중심인 '만법귀일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그곳, 그곳이 황제의 활동공간이었다.
철두철미한 정교일치.
다시 한번, 정치는 건축을 관통한다.
건륭제는 보타종승지묘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 대청제국의 황제가, 이 종교의 중심이다'라고.
하지만.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였을까.
이 절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누각 하나.
거기에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있다.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진시황이래, 중원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북방유목민족의 문제를,
역시 같은 유목민족이었던 만주족은 독특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인 '장성쌓기'를 거부했다.
몽고 초원의 입구, 목란위장에서의 모의 군사훈련이었던 목란추선 (가을사냥)을 통해 무력을 다지고,
승덕을 라마불교의 성지로 탈바꿈시키면서, 몽고족들에대한 정신적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한 청조.
세월을 따라, 장성은 무너져내렸다.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북방은 평온했고, 강역은 오히려 넓어졌다.
3억 인구의 한족은 이 경이로운 업적을 이룬 2백만의 만주족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다.
청조의 황제들은, 승덕에서 '마음의 장성'을 쌓아올렸던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의 장성'.
연암 박지원이 갈파한대로, '천하의 두뇌', 그곳이 승덕이었다.
뱀 다리 하나.
아래 사진.
공덕함에 돈을 넣고 열심히 향로를 만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신앙, 혹은 도박.
'재보천왕'을 모신 단을 근엄한 표정의 라마승려가 지키고.
'불광은 고루 비춘다. 구하면 응답이 있으리라'라고 쓰인 붉은 휘장이 보인다.
사람들의 표정은 절실했다.
그래서 노골적이었다.
첫댓글 근방의 민족들을 소수민족이라 여기며 진시황이래 모든 근방 민족을 복속시키려는 중국. 지금도 티벳은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는데. 이 작은 나라, 우리나라는 정말 대단하다.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으니~~나의 조국이여 영원하라. 그러려면 후세가 든든해야 한다. 정말로. 아침에 생각을 깊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동감입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감사하네요.
덕분에 좋은 구경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읽어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잘읽고 구경도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지요...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한번은 구경와도 좋으실듯.
글과 사진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는군요.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