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발효되는 바이러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2012년 《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
파수(破水) / 김영미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모래내 9길 / 김영미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신문에 찍힌 학교의 주소를 본다
모래내 9길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
모래내 그 길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곁을
혹은 내 앞을 지나갔을까
길 위에서 흩어져버린 모래알들
창밖으로 경의선 열차가 지나갔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골대처럼
나는 이끼 빛으로 녹슬어
내 기억은 어느 밤 저 열차를 탔던가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
나는 막 출발하려는 기차처럼 기침을 시작했다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
석양의 식탁 /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조정경기장에서 / 김영미
뒤로 달리기의 정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의 등은 바람을 가르고 강물을 찢고 나아가
열렬합니다
모두 힘찬 구령입니다
새하얀 노가 푸른 강물을 자맥질합니다
뒷사람의 뜨거운 숨이 귀를 덥혀줍니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고 귓바퀴를 간질입니다
출발점에서 멀어져야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입니다
상처였다면 상처였을 것입니다
제 몸의 성장판을 모두 닫아버린 아이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하는 날들입니다
퉁퉁 불어버린 물새의 발가락이 얼음에 갇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뒤를 보며 확신합니다
키잡이는 수평을 맞춰 나침반을 내려놓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놓아주지 않는 자장이 있습니다
방향도 없이 바늘이 눕고 물결은 겹으로 빛납니다
쉽게 끝날 경기가 아닙니다
벌목 / 김영미
수백 개의 어린 도끼날을 달고
전동 톱날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밑동이 썩어들면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한 그루 나무는
근심과 공포의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는 종일 바른 차렷자세로 누워 있었다
새잎은 자라기도 전에 우수수
베갯잇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투신했다
톱날이 깊이 와 박힐수록
나무는 불 그림자로 휘청이며
지붕 위를 넘실댔다
가지 끝에 매달린 새집의 안간힘
복제를 반복하던 나이의 테가 마지막을 드러내고
나무가 마지막으로 어느 방향을 선호할지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관뚜껑 같은 방문을 닫았다
사라진 / 김영미
—오리
센트럴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중에서
겨울을 견딘 밀싹과 북극의 얼음물을 넣어 만든
증류주를 마시던 밤이었다
홍제천으로 검은 오리털 군단이 모여들었다
입김 같은, 연기 같은 모의들이 피어났다
질문이 질문을 퍼뜨리던 기관들의 떨림
한발 앞서 포기되던 입자들의 간지러움
빙판을 걷던 오리들의 푸른 발바닥을 본 것도 같다
떼로 세상을 떠나는 무심한 등을 본 것도 같다
겨울이 지나면 연못의 얼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테이블 위로 고꾸라지며 늙은 고아가 물었다
김영미 시인
1975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서울시립대 철학과 졸업.
너머 / 이상협
제자리로 돌아온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었다
돌아와 마주한 가족들은
처음 보는 다정한 사람들이 되었다
물 웅덩이는 나를 비춘다
내가 없던 시간에도
너머의 나는 잘 있는지
그의 등에서
곤란한 진심이 그림자처럼 빠져나온다
등은 그를 더욱 그답게 마무리한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런 말투로써 나는
온전히 사랑의 눈동자를 지니게 된다
너머의 내가 철봉을 넘을 때
말아 쥔 손바닥에서 이편의 나는 피 냄새를 맡는다
나를 덮어쓴 채
신발 끝으로 그림자를 문지르기 시작한다
백자의 숲 / 이상협
불탄 목적지는 이해하기 쉽고 나는
도착하는 길이 계절마다 다릅니다
구운흙은 울기 좋습니다
깨어질 듯 그러했습니다
밖에 누구 있나요
안에 누구 없습니다
나는 나의 작은 균열을 찾는 중입니다
금 간 서쪽 무늬를 엽니다
나는 획의 기울기를 읽는 데 온 밤을 씁니다
중심은 맺혔다 사라집니다
나는 안팎이 없습니다
나는 누워 처음 나의 중심을 봅니다
검은 모자 떼가 날아갑니다
불쏘시개로 흰 뼈를 깨뜨리고
경계에서 나는 태어납니다
후유後有 / 이상협
잔기침으로 꽃을 뱉는다 꽃이 켜지자 방금 생각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생각만이 궁금하다 노래는 들을수록 닳는다 살갗의 숨구멍들이 무료할 때 음악은 나를 듣기 시작한다 욕조의 물처럼 우연히 넘쳐나는 누군가가 하수구로 흘러간다 초침 소리처럼 나의 소리가 무서워진다
마당은 천천히 움직인다 감잎은 각도를 조용히 꺾는다 축적이 다른 지도를 들고 서로의 눈금을 센다 한 뼘 안에서 끝나는 거리를 잰다 국수처럼 하늘로 늘어진 허연 길에서
낙화 : 책 바깥으로 날아가는 각주들
여행 : 몸이 밖을 떠돌 때 안쪽으로 더 멀리 가는 노동
비행 : 날면서 낡아가는 공중전화박스
블랙박스 : 모든 사건은 원인을 통제하도록 설계되었다
나무 속에 앉아 날개를 기르는 동안 나는 희박해진다 꽃의 허벅지를 보았다
* 후유 : 열반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미래에 받는 미혹의 삶.
사진 감광사 / 이상협
나를 뒤집고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밝게 담는다
어떤 표정에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물에 불은 손가락 사이로 갈퀴가 생겨났다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기로 결정한 것이다
못이 박힌 옆구리로 구름처럼 피가 번진다
물의 체온을 받아 나는 간신히 있다
손바닥을 마주치듯
눈빛과 눈빛이 만나는 곳으로부터
얇고 이상한 화석이 생겨난다
그를 자세히 보기 위해 불을 끈다
냄새를 오래 만져 모아두는 나라에 가고 싶다
검은 이불 한 채가 흘러간다
핀셋으로 건지지 못한 구름과
물밑에 죽은 사람들을 나는 너의 얼굴로 막아서고 있다
밝은 곳이 가장 어두운 사람
나는 딱 한 번 나였던 적이 있다
최초의 멍게 / 이상협
너와 간섭한다 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진동하는 너와 진동하는 나는
떨림을 목적으로 한다
이쪽 바다의 돌고래가
저쪽 바다에게 건네는 말
우리는 나를 우리는 너를 간섭한다
집 속에 집을 짓고
몸속의 몸을 진저리 치며
나는 문이 많은 질문을 알고 있다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까지
물속에선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두 개의 해류가 만날 때마다
진동하는 너와 나는
멍게를 먹고 찬란한 혀를 얻는다
슬펐다는 사실만 슬퍼한다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앵커 / 이상협
마지막 뉴스가 끝나면 한쪽 귀를 접습니다
뜨거운 수증기로 얼굴을 지웁니다
세수를 하면 자꾸 엄지손가락이 귀에 걸립니다
나는 조금만 잘 지냅니다
검은 양복을 입을 때만 나를 믿는 사람들은
각자의 TV 속에 손을 넣고
실을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불행은 정시에 시작됩니다
투명한 파문을 만듭니다
소문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마이크는 얼굴을 편애합니다
거미는 먹이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이상협 시인
197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 앨범 《에고 트립(Ego Trip)》을 발표하면서 2010년에 가수로도 데뷔. 현재 KBS 아나운서[1FM (93.1 MHZ) 음악풍경 글, 진행]
[신인추천 심사평]
서쪽 무늬 읽기와 촛대에 꽂는 해의 체험 / 장석남
매혹과 영성과 미지(의 영역)가 없다면 시가 아니라 여타 예술작품도 그렇거니와 이해보다 우선은 느낌이니까. 이해해버리면 그만인 시가 너무 많고 이해도 안 가고 느낌도 없는(내 감각이 시들어버린 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시도 아주 많다. 그 재료가 언어이니 이해의 회로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불리함을 딛고 그 영역을 넘어서야 삶의 현장성이 있고 또 그것의 추체험의 의무가 있는 시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환기해볼 것을 전체적인 소감으로 피력한다.
당선된 이상협의 “나는 나의 작은 균열을 찾는 중입니다//금 간 서쪽 무늬를 엽니다/나는 획의 기울기를 읽는 데 온 밤을 씁니다”(「백자의 숲」, 부분) 같은 구절은 매혹적이다. 이 주인공의 삶과 생각의 무늬를 짐작해보는 것이 그러하고 ‘획의 기울기를 살펴’본다는 이미지가 그러하다. 체험의 특이성이 낳았다고 보았다. 개성으로 살려야 할 것이지만 응모작 전체의 어조가 비슷한 것은 그게 관념에 과도하게 기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자꾸 드러나고 싶어하는 지식과는 싸우고, 살 냄새, 살림의 냄새가 좀 더 풍부해지면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리라고 본다.
같이 당선된 김영미의 시의 장점은 이즈음 사람들에게 회자 좀 된다는 기성 시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은 흔적이다. ‘합평’의 느낌이 덜했다. 시가 분명 수련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제 이야기와 체질이 살아 있어야 하지 않던가. “해는 꼭/주방 창문에 와서/떨어진다//그때는/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눈동자를 향하는/칼끝은 막을 수 없어/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석양의 식탁」, 부분) 같은 체험이 이월된 사유가 싱싱했다. 전체적인 감정이 비극적인데 반대로 어법과 이미지는 경쾌하니 신인으로서는 충분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개성과 힘이 아까워 함께 천거하기로 한다. 서로 견주면서 두런두런 걸어가도 좋으리라.
추미선, 안희연 두 사람의 시도 끝까지 손에 있었다. 당선작에 뒤지지 않으나 운이 없었다고 받아들이시길.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화려하고 수다스러움은 자칫 역량의 과시처럼 보인다. 그것은 미숙한 것이다. 현실이 그러하니 좀 심플한 것은 어떤가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이다. 심플은 못 미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임을 생각해주시길.
시인의 사과 / 김행숙
사과상자 같은 박스에서 응모작들을 한 묶음씩 꺼내 읽었다. 신화와 은유의 역사에서 사과는 엄청난 과일이다. 과학자 뉴턴과 철학자 스피노자와 화가 세잔이 특별히 선택한 과일이 또한 사과였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사과의 신화와 역사에 기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손에는 아직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미지의 사과가 주어져 있을 뿐이다. 신인에게 구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사과 폭탄일 것이다.
네 명의 작품들 사이에서 내 마음은 한참 이리저리 흘러 다녔지만, 나는 기꺼이 당선작에 동의하고 축하를 보낼 수 있었다. 두 명의 당선자와 더불어 시간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된 두 명의 응모자에게도 등단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니 지나치게 힘이 들어갈 일도 크게 상심하여 힘이 빠질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안희연(「액자의 주인」외 9편)의 언어는 그의 시적 스타일 안에서 단단하고 예민하다. 이번에 내가 읽은 응모작 중에서 그는 가장 세련되고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보여주었다. ‘스타일’은 그의 시적 개성과 매력의 핵심이면서, 반면에 비밀이 사라진 ‘분명한’ 스타일은 언어가 작동되는 방식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완성의 욕망보다는 미완성의 모험 속으로, 안전한 제작보다는 혼돈의 무형식 속으로 더 밀고 들어갔다 나와도 좋지 않을까. 시간을 다시 미루는 것이 아쉬웠지만 머지않아서 독자들은 그의 시를 보게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추미선(「화성에서 만나」외 11편)의 상상력은 활달하고 자유롭다. 그리고 언어의 탄성과 윤기 또한 인상적이었다. 수다스러울 때에도 언어의 탄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은 그의 시에 믿음을 더하게 했다. 슬픔과 명랑성과 잔혹성을 함께 가진 그의 시의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하려면 소재나 표현에서 종종 덜미가 잡히는 기시감을 지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려하면서도 터프한 시적 보폭 속에서 그의 자유가 한층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김영미의 시는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려는 순간 다시 붙잡는 힘을 그의 언어는 가지고 있다. 말이 감정에 녹아드는 순간 뼈를 심고 “칼처럼 반듯해진다”. 소품의 인상을 언어의 뼈로 물리쳤다. 우리는 그의 맑고 단단한 서정에서 한 명의 시인을 찾기로 했다. 그의 시 구절을 변형하여 우리의 기대를 표현해보자면, 쉽게 끝날 시가 아닐 것이다.(“쉽게 끝날 경기가 아닙니다”, 「조정경기장에서」, 부분)
그와 더불어 또 한 명의 시인에게 축하를 건넬 수 있어서 기쁘다. 이상협의 시는 ‘작은 균열’ ‘작은 각도’ ‘안팎’ ‘너머’ ‘사이’ ‘너와 나’의 세계를 시적으로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를테면, “구운 흙은 울기 좋습니다/깨어질 듯 그러했습니다”(「백자의 숲」, 부분)와 같은 구절. 보이지 않는 세계, 은폐되고 삭제된 세계의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그의 시는 시적인 ‘공감각’의 힘을 일깨워준다. “나는 활선공이 됩니다/송전탑에 올라 감전처럼 마을과 마을을 잇습니다”(「다국적자」, 부분)라고 했듯이 그의 시가 일으킬 감전의 경험들을 예감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현대문학》201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