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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8월9일)에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동학 혁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다. 우리 학창시절에는 그냥 민중이 봉기한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를 그냥 난으로 배우고 크게 집중하지 않고 지나쳤지만 역사 저널을 통해 본 바로는 앞으로 반드시 크게 재조명이 되어야 할 역사적인 혁명 운동이었음을 알았다.
프로그램의 말미에 동학 민중들은 거의 도륙 당하다시피 패전하고 또 체포되어 처리되는 상황의 이야기에 이르러, MC 최정원은 그만 목이 메이고 만다.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게임 자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일본 군은 유럽식 전투 전략을 구사하며 동학 군을 토끼 몰이 식으로 압박을 받으며 거의 몰사 하게 된다. 이런 세력의 존재 자체를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게 너무나 허망하게 당하고 마는 부분에서 모두 할말을 잃고 만다.
그리고 동학 봉기군은 패배로 인한 처벌을 받게 되게 되는데, 사실 동학 혁명의 근원이던 탐관 오리 조병갑이 도리어 재판관이 되어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그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MC 최원정은 친일파들이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을 처벌하기도 하더니, 그 이전부터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혀를 찬다.
이윤석은 자신이 교수님의 말씀을 거꾸로 한 게 아닌가 하여 귀를 의심하고 있다. ‘최시형이 고등법원 판사가 되어 그 탐관오리 조병갑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고 해야 하는데 라며 할말을 잊지 못한다.
MC 최원정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길목에 이렇게도 중요한 동학 농민 운동이었는데도, 우리가 제대로 배운 바가 없었던 것 같아 더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고 한다.
신영우 교수는 외세 척결을 위한 2차 동학 봉기 실패한 후 대한 제국에서 반란으로 탄압을 받았고, 식민 치하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도 교과서에 반란으로 낙인 찍혔었고,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매도 당해 왔다고 한다.
이런 원인이 일본 침략자들뿐만 아니라, 양반 지주층들도 동학 운동을 한 이들을 나쁜 짓을 한 사람들로 매도해왔고,광복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잘못된 매듭이 풀려지지 않아 동학운동 100주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 회복사업이 시작되었노라고 한다. 그리고 110년이나 지난 2004년 3월에 비로소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노라고 한다.
우리도 이제는 이를 바로 알아야 할 것 같다. 동학 난이 아니라, 동학 농민 혁명이다. 현재는 이 표현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마무리를 하려던 최원정이 갑자기 말을 잊지 못한다. 몇 번이고 자세를 고치고 호흡을 가다듬어도 쉽게 제 호흡을 돌아오지 못한다. 그녀를 잘 아는 패널들은 말 없이 침묵을 지켜주고 있다.
너무나 말이 안 되는, 너무나 안타깝고, 한심하고, 말이 안 되는 수많은 사연들을 그래도 냉철하게 맞이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감정 조절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다.
“오늘은 굉장히 미안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고 솔직히 말하며 다음 주 예고를 이어간다. 다음 주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야기가 이어진단다.
앞의 내용을 보지 않은 분들은 이 부분의 이야기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반드시 2015년 8월 9일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을 반드시 다시 보기 하여 한번 보시기 바란다.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동학 농민 혁명 전후의 시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단, 분노 조절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정신 건강상 보지 마시길 바란다.
비교적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풀어가는 역사 이야기들이지만 듣고 보다 보면, 부끄럽고 한심한 위정자들이 이 나라와 역사를 망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무엇을 잘못 했는지 조차도 인식 하지 못했고, 그 폐단은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언제나 너무나 똑 같이, 마치 판박이 처럼 되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추가한 글 :
오늘날, 필요는 하지만 가장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생산성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회, 책임보다 힘만 너무 커 범인의 인격체로는 절대로 주체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국회를 보면 그 한심스러움에 혀를 찰 수 밖에 없다.
여당 측의 어떤 자는 부녀자를 강간하고서도 회유로 입을 틀어 막고 있고, 야당 측 어떤 자는 나 이만큼 먹었다며 검찰에 불려갈 때도 버젓이 낯 짝을 들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고 다닌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염치라는게 있을리 없다.
더 웃기는 것은 민주주의 대표적인 상징인 국회가 다수의 표로도 소수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한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선의로 만들었다고 이해를 해 준다 해도, 이를 철저히 악용하는 데는 전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민주주의의 기본 룰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훗날 역사에서 이 역시 너무 우습고, 한심한 자들로 득실거리며 임진 왜의 침략이나 조선 말기 한일 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당했던 그 옛날의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들로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역시 똑같이 그들 자신만 모를 뿐이다. //
우리 역사에 있었던 어떤 '그 날'에 대한 분노와 허망함에 눈물을 떨 꿀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은 최원정 아나운서 만이 아닐 것 같다.
//@ 8월11일 추가 내용
시간 없고 바쁜 사람들을 위해 위에서 언급한 ‘역사 저널 그 날’의 8월9일 편의 앞 부분을 이미지 컷으로 정리해 올려본다. 올릴 때 마음은 이를 일본어로도 번역하여 함께 올리려고 했지만, 뒤 부분에 나오는 우리 민족의 부끄럽고도 몸서리 쳐지는 치부 때문에 그냥 이미지와 몇 줄 글들만 올리기로 했다.
동학 농민 혁명의 발발
동학농민 혁명은 1894년에 발생했다. 광제창생, 부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로 일어난 농민 혁명 운동이다.
@필자 주: 참고로 동학은 최재우에 의해 창시된 사상으로 천주교인 서학과 운이나 도는 같고 이치만 다를 뿐이라고 보고, 둘 다 천도를 믿는 것은 같으나 그 설명이 다르다고 한 사상이다. 최제우는 1864년 처형당하지만 이미 상당한 지역으로 그 사상이 퍼져나간 뒤였다.
동학 농민 혁명의 발발 이유
그 유명한 고부 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 등장한다. 그의 행적은 혀를 찰 지경이다. 뭐 이딴 놈이 사람을 다스리는 자리에...
뭐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이름 붙여 세금으로 징수하며 수탈하고, 나중에는 지네 아부지 공덕 비 세우는데도 필요하다며 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렇게 그야말로 갑질 중의 상 갑질을 하여, 그 이름도 위대하게 탐관오리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역사 교과서에 이름을 올리셨다고(?) 한다. 나 참…
유독 호남 지역 쪽에서 수탈이 심했던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좋고 인심 좋은 호남 지역은 원래 천혜의 곡창지대인지라 탐관오리들에겐 꿈의 요직(?)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심지어 서울에서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을 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이 떠 돌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 농민 1차 봉기
탐관오리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 군의 동학도와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봉기하여 것 잡을 수 없게 되자 안학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여 자진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안핵사는 약속과 달리 동학과는 상관도 없는 전북, 충남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 죄로 처벌하는 등 주제 파악을 못한 짓을 벌여 이에 분개한 전봉준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총기와 농기구로 무장 다시 봉기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이나 기치들은 나라님이나 그 어떤 제상들의 사고보다 더 현명하고, 미래 지향적이다.
동학 농민 혁명은 기존의 민란들과는 달리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행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는 이미 민씨등의 외척 세력에 의해 거덜 나 있어, 나라라고 할 것도 없는 꼴인 상태...
농민들이 더 압도적인 상태가 되자 나라에서 파견된 안핵사는 그들의 건의를 수용함에 따라 봉기를 해체 했는데, 약속과 달리 오히려 농민들을 잡아 들여 처벌하는 등 주제 파악도 못한 황당한 짓을 벌인다.
이에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을 장령으로 삼은 농민군들이 백산에 모여 총궐기하여 전주성을 함락하는 한편,동학군은 황토현에서 방심한 관군을 공격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고, 급기야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된다.
당시 농민군들이 관군을 이길 수 있었던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동학 농민군인가?
저런 가르침들은 지금 펼쳐도 될 사상 아닌가? 당시에 어렸던 백범 김구 선생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동학 사상이 이렇게 연결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이 방송 보기 전에는...
농민들과 관군의 신사 협정인 전주화약 체결
동학교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참여 하고 전주성까지 함락됨에 따라, 조정에서는 1894년 5월7일에 동학 농민 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어 집강소를 설치키로 한다. 즉 최초의 농민 자치기구인 것이다.
12개조의 폐정 개혁안
이때 동학군이 제시한 12개조 폐정 개혁안은 그 동안 농민들을 압박해온 폐습과 폐단을 제거하는 내용으로 그 이후 개혁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까지 청춘 과부조차도 개가가 허락되지 않은 사회였으나 동학에서 최초로 이를 개혁시킨 것이라 한다.
동학교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실제로 과부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시대를 앞 선 선각자들은 정말 남다른 듯하다. 동학 혁명의 실패후 피신했다가 1989년 원주에서 밀고로 체포되 사형을 당한다.
이러한 집강소가 전국 동시에 실시된 것이 아니라, 동학군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는 설치되고 양반의 힘이 큰 곳에서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상태라 한다.
이는 조선 근대사에서 눈 여겨 볼 대목이 아닐까 한다. 만약에 이러한 집강소가 더 크게 확장되었더라면 민주주의 근원이 자생적으로도 태동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필자 주:
결국 동학 농민군의 사상들이 갑오경장(1894년)과 을미개혁(1895년)을 하게끔 만들었고, 향후 신분질서를 타파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을미사변은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친러 성향을 보이게 되자, 급해진 일본 공사 미우라가 계략을꾸미고 그 일파들이 경복궁에 난입,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변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민심을 수습코자 4차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단행한 것이 을미 개혁으로 단발령등이 포함된 개혁을 시작했으나, 결국 아관파천(1896년)을 불러 개혁은 중단되고, 김홍집은 성난 백성에게 맞아 죽고 만다.
외세 잠입 (청나라 군과 일본 군)
봉기한지 석 달 만에 전주성을 함락당하자 당황한 고종과 민씨 세력들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청이 응하자 이번엔 일본이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한다.
이에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외세들이 철수토록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무정부 상태 같은 나라를 두고 청나라나 일본이 그냥 돌아 갈리가 없었다.
징비록에서 임진란 때 선조의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았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들도 하나같이 나라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당리당략을 우선하는 정쟁으로 날 세우는 꼴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라가 자력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 결국 어떤 꼴을 당하는지 너무나도 명확히 보았다.
그래서 이를 경계하기 위해 쓴 그날들의 역사 교훈을 철저하게 무시한 무지의 결과로, 환란을 자초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추한 능욕들을 당하는 꼴을 반복한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하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 시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자,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도리어 경복궁에 야음을 틈타 포를 쏘며 공격,고종과 왕비를 인질로 잡는다.
(@필자 주: 흥선대원군 내각을 실각시키고 친일 내각을 세운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은 일본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한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된다.)
동학 혁명군의 2차 봉기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여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한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급습하자, 삼남일대의 동학 농민군들이 이제는 척양, 척왜를 기치로 2차 봉기에 나서게 된다. 조정으로부터 가장 핍박 받던 자들이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고 있음은 참으로 아이로니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봉기한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민씨 세력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그러자, 일본 군들이 더욱 증강되고, 그들이 부산에 도착하여 경성으로 올라 오는 길이 임진 왜란 때 올라오던 길과 거의 같다. 이들은 이미 조선을 접수키로 하고 침략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다.
일본 군에 의해 무너진 동학혁명
조선 동학군과 일본 군들이 우금치에서 맞붙었으나 비교 자체가 안 되는 화력 열세로 무참히 도륙 당하고 만다. 조선 군이 재래식 화승총으로 1발 쏠 때 일본 군은 30~40발을 쏠 수 있는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 갔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일찌감치 동학군을 합병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큰 세력이라 여긴 일본 군은 동학 농민군들 전체를 아예 살육하라고 명령한 문서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미 근대식 전법을 구사하는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여, 완전히 살육을 벌이게 된다.
일본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 농민군들은 저 일본 군들에게 거의 도륙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진압 부대가 1년 후 결국 명성왕후를 욕보인 뒤 칼로 베고 불 태워 죽이는 천인 공로할 짓을 하는 부대가 된다.
정말 낯 부끄러운 우리 조상님들
더군다나 조선 관군까지 일본 군과 같이 토벌대로 나서고, 특히 돈을 버는 장사꾼들이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학 농민군들의 씨를 말리는 살육 전에 앞장 서고 있다.
적을 도와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간 자들은 떵떵거리며 살게 되고, 나라를, 우리를, 농민을 생각한 이들은 저 일본 군들에게 무자비하게 살육이 된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기 그지 없다. 저기에 불을 붙여 불이 안으로 타게 하여 죽게 했단다. 우리 민족도 어떤 면에서는 꽤나 잔인한 부분들이 있었다.
MC 최원정이 고개를 떨 꾸는 회수가 늘어난다.
이 아래 부분부터가 이 블로그의 시작 부분이다.
이미지 화면으로 듬성듬성 건너 뛴 부분이 있으니 자세히 보기 싶으시다면 반드시 다시 보기를 해 보시기 바란다. [85회]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동학농민운동 부분을 보시면 된다.
http://www.kbs.co.kr/1tv/sisa/theday/index.html
※@필자 주라고 한 부분은 위키 백과 사전 설명 부분을 참고로 첨언한 내용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C%9A%B4%EB%8F%99
내가 정리한 년도 별 근대사 정리
예전에 배운 국사가 아리송하고, 특히 연대가 헷갈리기 십상이어서 동학 혁명 전후의 큰 역사적인 변혁을 참고로 한번 정리 해 보았다. (사실 학교 다닐 때 역사는 그냥 시험 때만 대비했지 역사로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제와 스스로 숙제하는 셈치고...^^**)
1863년 철종(25대) 사망, 고종(26대) 즉위
1866년 병인양요, 천주교도 탄압, 프랑스 군함 강화도 침공, 문화재 약탈
1871년 신미양요, 제너럴셔먼호 격침 빌미로 러시아 함대 공격, 물리침 대원군 척화비
1881년 최초 신식 군대인 별기군 설립
1882년 임오군란, 구식군대 반란, 민씨 일파의 청나라 군대 요청, 제물포 조약(조-일)
1884년 갑신정변, 김옥균 3일 천하,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 명분
1885년 텐진협정(청 리홍장-일 이토히로부미) 동시철병,파견시 통지, 청일전쟁 원인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같은 해 음력 1월,4월,9월 3차례 봉기로 나눈다.
1894년 갑오경장, 근대적 국가 개혁시도
1894년 김옥균 암살, 고종이 보낸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1894년 6월 청일 전쟁, 청과 일본의 한반도 주도권 전쟁, 2달만에 일본 우세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청(리홍장)-일(이토히로부미) 강화조약
1895년 을미사변, 명성왕후 시해
1896년 아관파천, 고종과 왕세자 러시아 공관 1년 생활
1897년 고종 환궁, 칭제건원, 광무 연호, 10월12일 황제 즉위, 대한제국 선포
1898년 대원군 사망
1904년 1차 한일 의정서
1904년 2월 러일 전쟁, 러시아-일본 한반도 주도권 05년 9월 강화
1905년 9월 포츠머(미 뉴햄프셔주 포츠머시) 강화조약, 러시아 한반도의 일본 우월권 인정
1905년 을사늑약, 일본 통감 정치 시작, 독도를 슬슬 자기네 땅으로 조작하기 시작...
1907년 고종 황제 일본 강압 강제 양위,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27대) 즉위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히로부미 제거
1910년 경술국치,황제의 직인도 없이 한일병합 조작, 황제를 왕으로 격하 이왕으로
1914년 9월 세계 1차 대전 발생,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간 전쟁
1918년 11월 독일항복
1920년 영친왕 일본 황실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
1939년8월 세계 2차 대전 발발, 독일 폴란드 침공, 영국,프랑스 대독 선전 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대한제국은 36년간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
친일 반민족 부역자들을 처벌 못함, 애국과 국가 정체성 혼란 초래.
처단되었어야 할 그들의 씨앗이 독버섯 처럼 자라 이젠 손댈 수도 없을...
http://www.hankookilbo.com/v/9e2e0002c7ed491e9ff0b5fc9f74ef85
2015년 8월 현재, 한국 박근혜, 일본 아베 - 식민지, 성노예 사과 할까말까 가지고 노는 중...
http://blog.naver.com/imgdot/220451324883
역사 저널 부분에서 너무 현대로 넘어와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조금 뭣해서 별도 페이지를 만들어 붙였다.
@2015-8-10 방문자
@2015-8-13 방문자
@2015-8-14 방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