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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 원동파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김태중(金台重)1649년(인조 27)∼1711년(숙종 37) 안동(安東)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삼(天三),언겸(彥兼) 호는 적암(適庵)
증조부는 참의 운천(雲川) 용(涌). 조부는 시상(是相). 아버지는 기(炁)
1693년(숙종 19)에 이현일(李玄逸)의 천거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안동(安東)에 거처하였는데 문학과 명성이 영남일대에 떨쳤다.
갈암집
시(詩)
김언겸(金彦兼) 태중(台重) 이 부친 동지음(冬至吟)에 삼가 화운(和韻)하여 절구 두 수를 짓다.
깊은 땅 밑에서 이는 우레에 홀연 놀라노니 / 窮泉候至忽驚雷
한 기운이 순환하여 닫혔다가 다시 열리누나 / 一氣循環闔又開
양(陽)이 사라졌다가 다시 자라는 뜻을 아니 / 認取纔消旋息意
그대가 응당 천근을 밟고 왔으리라 이르노라 / 謂君應躡天根來
마음 아파라 구로는 옛날 뇌주로 좌천됐나니 / 傷心寇老昔遷雷
해 아래에 검은 구름 꽉 끼어 걷히지 않았지 / 日下玄雲鬱未開
어찌 그 당시 성스러운 임금이 없었으리오 / 豈是當年無聖主
단지 양구는 항상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 秪緣陽九有時來
[주1]깊은 …… 열리누나 : 동짓달은 《주역》으로는, 양효(陽爻)가 다 사라져 순음(純陰)의 상태인 곤괘(坤卦)에서 양효가 아래에 다시 하나 생긴 지뢰(地雷) 복괘(復卦)에 해당하는데, 이는 땅 아래에서 우레가 일어나는 형상으로 폐쇄되었던 기운이 열리어 만물의 활동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주2]천근(天根) : 별자리로, 《국어(國語)》〈주어 중(周語中)〉에 “천근이 드러나면 물이 마른다.” 하였으며, 소옹(邵雍)의 〈관물(觀物)〉 시에, “건이 손을 만날 때 월굴이 되고, 지가 뇌를 만난 곳에 천근이 드러난다.〔乾遇巽時爲月窟 地逢雷處見天根〕” 하였다.
[주3]구로(寇老)는 …… 않았지 : 구로는 송(宋)나라 때 명신(名臣) 구준(寇準)을 가리킨다. 구준이 간신의 모함을 입어 도주 사마(道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뇌주(雷州) 사호 참군(司戶參軍)으로 좌천된 일이 있다. 해는 당시의 천자(天子), 검은 구름은 간신들을 가리킨다.
[주4]양구(陽九) : 《주역》에서 양(陽)의 수(數)는 구(九)이고 음(陰)의 수는 육(六)이므로, 양구는 단지 양을 뜻한다. 양은 군자를 음은 소인을 뜻하는데, 여기서 양구란 군자가 득세(得勢)하는 태평한 시대를 뜻한다.
서(書)
김언겸(金彦兼) 태중(台重) 에게 답함 정사년(1677, 숙종3)
오랫동안 뵙지 못하여 그리운 마음만 간절하였고, 지나는 길이 어긋나 더욱 서글펐는데 보내신 편지를 받아 보니 저와 같은 마음이셨습니다. 화재(火災)를 당하고 추감(追勘)을 당하셨다니 너무나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현일은 덕택에 노부모를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하찮은 그대로입니다. 매번 저보다 훌륭한 분을 가까이하여 경발(警發)되고 유익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지만 동서로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평소의 뜻을 저버리게 되어 항상 두려워하고 있으니, 유속(流俗)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저를 아껴 주시는 좌우께서는 또 제가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하여 벗의 도로 대해 주지 않고 더러 너무 지나친 호칭을 쓰시니, 평소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깊습니다. 언제나 만나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는지요? 인편을 통해 답장을 쓰니,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答金彥兼 台重 ○丁巳
久違顏範。懷仰徒勤。歷路乖逢。尤深忡悵。奉告亦同此懷也。回祿之災。追勘之辱。豈勝驚歎。玄逸幸以餘庇奉老粗遣。惟是碌碌仍舊。每想親勝。已資警益之爲樂。而汩汩東西。違負夙心。恒懷懍惕。恐無以自拔於流俗。相愛如左右者。又以有一日之長。不以偲切之道見處。而或加太不著之稱。顧循平素。惟深慙懼。安得面罄以寫幽鬱。因便布謝。莫究所懷。
김언겸에게 답함 경오년(1690)
인편을 통해 보내신 답장을 받고 맑고 화창한 날씨에 병세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감격스럽고 위안됨이 한량없습니다. 현일은 몇 달을 바삐 다니느라 안정되지 못하고 병으로 초췌함이 여전한데 속히 올라오라는 명이 또 내려왔으니 그 황공하고 궁색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올린 봉장(封章)에 대해 아직 비답을 받지 못했는데, 만약 부득이하다면 짐을 꾸려 길을 나서서 살아서 나갔다가 죽어서 돌아올 계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말이나 훌륭한 계책도 없이 한갓 바삐 왔다 갔다 한다는 기롱만 들을 것이니 매우 답답하고 한탄스럽습니다.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유 시독(柳侍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애통해하는 마음은 원근(遠近)이 같을 것입니다. 우리 영남에 인물이 적어, 뛰어나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현자(賢者)에게 바라는 바가 실로 범연하지가 않은데, 보내신 편지에 기가 꺾이고 자신을 경시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비록 겸손한 미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라고 한탄스럽게 합니다. 부디 조용히 조섭하시는 가운데 남들이 맛보지 못한 맛을 보시고 고인(古人)이 참으로 즐거워한 곳을 찾으시어 이 노쇠한 사람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를 천만 바라 마지않습니다. 현일처럼 매우 노쇠하고 병이 든 데다가 또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은 참으로 고인이 했던 출처(出處)의 의리를 바랄 수 없는데, 보내신 편지에서 하신 말씀에 깊이 경계하고 반성할 부분이 있으니 감히 공경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答金彥兼 庚午
便中辱復書。仍審淸和。愆度康復。感慰無量。玄逸數月棲遑。病悴如昨。而促召之旨又下。其爲惶窘。如何可言。前貢封章。尙未承批。若不獲已則將束裝就道。爲生行死歸之計。而不有忠言奇謀。徒取屑屑往來之譏。殊可悶歎。運氣不好。柳侍讀奄至不淑。云亡之慟。遠邇所同。吾南人物眇然。無卓然可恃處。所望於賢者。實非偶然。而承有摧沮卑薄之意。雖出謙光之美。極令人駭歎。幸於靜攝之中。味人所不味。尋求古人眞箇樂處。副此衰朽之望。千萬千萬。如玄逸衰病已甚。又作風埃顚倒之蹤。固無望於古人出處之義。而來喩之云。深有警省處。敢不敬奉以還。
김언겸에게 답함 신미년(1691, 숙종17)
그리워하던 중에 뜻밖에 정이 담긴 편지를 받고 봄날에 시봉하며 조섭하시는 기후가 편안하심을 알았으니 감격스럽고 위안됨이 한량없습니다. 현일은 전리(田里)에 물러나와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가 소장을 올린 일 때문에 크게 시휘(時諱)를 저촉하여 이미 승상(丞相)의 진노를 당하였고 또 성상의 엄한 비답(批答)을 받았으니 황공한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자신을 탄핵하는 소장을 올렸는데 과연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몰라 두려운 마음으로 명을 기다릴 뿐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간절히 염려해 주신 데 대해 매우 감사드립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날 소를 올려 진달한 6개 조(條)가 비록 채납(採納)되지는 않았지만 또한 이 때문에 죄를 얻지도 않았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정백자(程伯子)의 말에 이르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조정에 있을 때는 능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마침내 임금을 잊어버린다. 군신은 바로 부자간이니 의리를 끊을 수 없다. 크게 무도함을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스스로 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제가 이 말에 대해 일찍이 마음속에 감명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침 백성의 고통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목격하고는 저의 분수를 생각지 않고 망언을 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관작이 삭탈되고 변방에 귀양 가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만 이 일로 인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앞으로는 두문불출하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가려는 뜻을 두지 않을 것이니 현계(賢契)께서는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궁촌에 칩거하여 뵐 기약이 없어 인편을 통해 답장을 하자니 몹시 서글플 뿐입니다.
答金彥兼 辛未
懷想之餘。忽奉情緘。就審春陰。侍奉調攝康勝。感慰無量。玄逸退處田里。粗保宿拙。而以上疏之故。大觸駭機。旣遭丞相之嗔。又承聖批之嚴。其爲惶霣。如何可言。方上自劾之章。未知處分果如何。竦息俟命而已。來喩之云。極荷相念之切。但念前日六條所陳。雖未蒙採納。亦未嘗以此獲罪。嘗聞程伯子之言曰。今之士大夫在朝不能言。退遂忘之。君臣父子也。義不可絶。若非大橫見加。豈可自絶也。區區竊嘗有感於心。適會目擊民隱一至於此。不量涯分。妄言誤事。雖削籍投荒。固所甘心。第恐因此遂致朝著之不靖也。自此當杜門念咎。無復有意當世。幸雅契勿過慮也。蟄伏窮村。未涯奉面。因便布謝。第劇忡悵
김언겸에게 답함 을해년(1695, 숙종21)
정중한 문안 편지를 멀리 황량한 이 북쪽에까지 보내 주시니 몸가짐을 바로하고 몇 번을 거듭 읽으며 며칠을 손에서 떼지 못하였습니다. 편지를 보내신 뒤에 해가 바뀌어 복제(服制)가 끝나 가니, 그리운 마음 더욱 간절하실 텐데 어떻게 억제하고 계십니까? 현일은 빈천(貧賤)의 절개를 고수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세상에 나갔다가 낭패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두가 천명 아님이 없으니 순순히 받아들여 편히 여길 뿐입니다. 제가 비록 보잘것없고 노둔하기는 하지만 또한 일찍이 군자의 유풍(遺風)을 들었으니, 환난을 당하고 곤궁에 처하더라도 지기(志氣)을 상실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학문에 정력(定力)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위태롭고 급박한 일을 당하여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 옛 현인의 풍도를 인용하여 권면하고 장려하여 제가 군자의 경지에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려고 하시니 현자께서 돈독히 아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겠습니까. 삼가 명심하여 잊지 않겠습니다. 대간(大諫) 어른께서도 유배를 면치 못하셨는데 그곳의 물정과 풍토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각각 땅 한쪽 끝에 떨어져 있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이곳은 지주(地主)가 꽤 후하게 대해 주고 풍속 또한 꺼려하는 기색이 없어 제법 지낼 만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 없으니, 현자께서는 거상(居喪)하시는 여가에 고인(古人)의 이른바 강습하고 체험하는 공부에 깊이 유의하시어 지난날 기약했던 뜻을 잊지 마시기를 천만 간곡히 바랍니다.
물으신 본생친(本生親)을 위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와 담제(禫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지아비가 처를 위해서와 자식이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에 모두 장기(杖期)를 하기 때문에 11개월, 13개월, 15개월에 연제, 상제, 담제를 하는 의절이 있는 것이니, 그 일을 중시해서입니다. 부장기(不杖期)의 경우는 이와 달라서 원래 낮추어 기년(期年)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니, 다시 이 뜻을 따라서 연제와 상제와 담제의 제도를 둘 수 없을 듯합니다.
答金彥兼 乙亥
鄭重哀問。遠及窮髮之北。三復莊誦。累日不去手。信後改歲。服制將訖。遠惟孝思加切。何以堪抑。玄逸不能固守貧賤之節。輕出世路。狼狽至此。莫非命也。只得順受而安之耳。雖罷駑。亦嘗側聞君子遺風矣。豈不知遇患難處窮厄。不至隕穫之爲可貴。但學無定力。猝當危迫之際。不能無撓念而懾志。茲承援据古誼。且勸且奬。欲其有以進乎君子之域。非賢者相愛之篤。何以至此。謹當書紳而服膺耳。大諫丈亦不免此行。未知彼中物情風土更如何。地角天涯。無緣得接音問。殊不堪鬱鬱耳。此間地主見待頗厚。土俗亦無相猜之跡。殊可賴也。相望落落。合席未易期。只願賢者讀禮之暇。深留意於古人所謂講習體驗之工。毋忘夙昔相期之意。千萬至望。詢及爲本生親行練祥禫之疑。蓋嘗聞之。夫爲妻。子爲父在母亡。皆杖期。故有十一月十三月十五月練祥禫之節。所以重其事也。若不杖期則異於是。自是降從期制。似不得更從此義而有練祥禫之制也。
김언겸에게 답함 병자년(1696, 숙종22)
한 해가 넘게 소식을 듣지 못하여 그리움이 깊던 차에 아이가 와서 보내신 편지를 받고 심상(心喪)이 끝나자마자 또 동기(同氣)의 상을 당했음을 알았습니다. 슬프고 놀라워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의 몸인 저는 3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이미 70세가 되었으니, 병들고 노쇠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러나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은 모두 명(命)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감히 만나는 대로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찌할 수 없어 맘 편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휴형(休兄)의 묘도문자(墓道文字)는 이미 권 시랑(權侍郞)이 지었다고 하시니, 그분의 사적이 앞으로 길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어서 매우 다행입니다, 매우 다행입니다. 부탁하신 행장(行狀)은 분의(分誼)를 돌아볼 때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현재 죄인의 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현군자(大賢君子)들도 일찍이 백번 절을 하고 사양하였으니, 이에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합니다. 행여 성은을 입어 조금 죄가 가벼워져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곳에도 한두 학생이 와서 글자를 묻는데, 주건(朱楗)이라는 사람은 자질이 꽤나 순수하고 좋으며 또 능히 저의 뜻을 이해합니다. 만약 갈고 닦아 성취한다면 장래에 혹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북쪽 지방의 풍속이 무지하여 전혀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어떻게 그들이 습속에 물들어 변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신 편지에서 언급하셨기에 한번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答金彥兼 丙子
隔歲阻音。懷想方勤。兒至承書。知心制甫訖。又遭同氣之慼。悼歎驚怛。無以爲懷。纍人棘裏三載。已作七十歲人。疾病潦倒。日甚一日。然死生榮辱。莫不由命。豈敢云隨遇而安。秪得無可奈何而安之耳。承喩休兄墓道文字。已得權侍郞撰述。自此可爲不朽之資。甚幸甚幸。行狀之屬。顧念分誼。豈敢以不文辭。第惟賤跡方在罪籍中。此固大賢君子所嘗百拜而辭者。茲不敢承領。儻蒙天澤餘潤。稍輕罪戾。得返故土。則敢不唯命。此間亦有一二學者來問字。有朱楗者資質頗醇美。又能曉解人意。若得磨礱成就。將來或有可望。但北俗貿貿。絶無師友之助。其何能保其不爲習俗所移也。承喩之及。因謾布之耳。
김언겸에게 답함 경진년(1700)
방금 인편을 보내 문안해 주신 편지를 받고 몹시 더운 여름에 병세가 조금 나아지셨음을 알았으니 감격스럽고 위안이 됩니다. 현일은 궁촌에 칩거해 있으면서 낮에도 정신이 혼몽하여 하나의 주검처럼 지내니 가련하고 한탄스러움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매번 여차(廬次)에 한번 찾아가 차분히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지만 처음에는 조섭하시는 기후를 저촉할까 봐 두려웠고 지금은 또 더위가 무서워 움직이기 어려우니 그리운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편지에서 말씀해 주신 뜻에 대해서는 깊이 염려해 주신 데 대해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일찍이 어떤 사람의 물음에 답하기를, “만약 객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우두커니 전혀 수응(酬應)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죽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한결같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분수에 따라 응해야 할 것입니다.
答金彥兼 庚辰
卽奉伻書見存。就審酷暑。愆候稍間。感與慰幷。玄逸塊伏窮村。當晝昏昏。作一僵尸。憐歎奈何。每欲一造廬次。穩敍阻鬱。而初間恐觸攝中候度。今又畏熱難動。秪切瞻戀之懷耳。見喩之意。極荷相念之切。然朱子嘗答或人之問曰。若有厭客好靜之心。頑然不應。便是心死矣。人在世上。固不可一向如此。要當隨分應之爲可耳。
갈암집 부록 제5권
제문 [김태중(金台重)]
도가 천지간에 있어 / 道在天地
유행하면서 쉬지를 않으니 / 流行不息
재성하고 보상함은 / 財成輔相
군자의 책임입니다 / 君子之責
그러나 그 사이에는 / 然於其間
기수가 관여하니 / 參以氣數
기수가 변함에 따라 / 氣數之變
도에 성쇠가 있습니다 / 道有隆汚
옛날부터 지금까지 / 亘古迄今
누가 그 기미를 주장하였습니까 / 孰張厥機
아아 선생께서는 / 嗟惟先生
실로 하늘이 내셨으니 / 天實生之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추시어 / 才全德備
장차 크게 이룰 수 있었습니다 / 將大有爲
사해를 화로로 삼아 / 四海爲爐
장차 그것을 도야하고 / 我將陶之
한 사물이라도 안정되지 못하면 / 一物失所
장차 그것을 살찌우려 하였습니다 / 我將膏之
성스러운 임금을 만나 / 際遇昌辰
은총와 예우가 빈번하니 / 恩禮頻繁
내 몸에 친히 본 것은 / 於身親見
요순의 군민이었습니다 / 堯舜君民
한번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 조정에 서자 / 一起幡然
조야가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습니다 / 朝野拭目
경연(經筵)에서 가르침을 드리고 / 納誨經幄
전석에서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 秉匀銓席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 上格君心
아래로는 준수한 인재를 초빙하였습니다 / 傍招俊逸
그러나 날랜 발을 써 보기도 전에 / 大踢未施
화기(禍機)가 중도에 발하여 / 駭機中發
극변(極邊)의 유배지를 옮겨 가면서 / 流離荒裔
깊은 창 안에 갇혀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 折辱幽扃
험난한 길은 끝이 없었으나 / 險途難盡
도의 운치는 그럴수록 드러났으며 / 道韻愈彰
하늘의 은택을 입게 되어 / 逮蒙天澤
마침내 옛날의 은거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 迺反初服
공께서 세상을 잊으리라 여겼지만 / 謂公忘世
공의 뜻은 더욱 간절하였으니 / 公意彌切
시대를 근심하여 감개함이 / 憂時感慨
여러 번 언사와 용모에 드러났습니다 / 屢形言貌
머리는 비록 희어졌으나 / 素髮雖改
단심은 늙지 않았으니 / 丹心不老
거의 한번 오시어 / 庶幾一來
우리 방국을 살릴 듯하더니 / 活我邦國
아아 어찌 남겨 두지 않고 / 于何不憖
하늘은 이리 속히 데려가는 것입니까 / 天奪斯速
오호라 슬프도다 / 嗚呼痛哉
옛날 우리 선정께서 / 昔我先正
도산에서 학문을 창도하셨고 / 倡學陶山
공이 그 후에 나서 / 公生其後
끊어진 맥을 이으셨습니다 / 迓續絶絃
세덕을 살펴보면 / 攷論世德
분명하게 연원이 있었으니 / 的有淵源
경당의 외손이요 / 敬堂外孫
존재의 어진 아우였습니다 / 存齋賢季
덕과 가르침을 전습하여 / 傳德襲訓
그 맥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 丕振厥緖
사문을 흥기하여 / 興起斯文
실로 그 책임을 맡으셨습니다 / 實任其責
경전에 침잠하여 / 沈潛典墳
여러 설을 참조하였으며 / 參互諸說
참으로 알고 힘써 실천하여 / 眞知力踐
양쪽 모두 그 극단을 다하였습니다 / 兩臻其極
곡학하는 선비가 도를 말하고 / 曲士語道
거짓 경서가 진리를 어지럽히니 / 詭經亂眞
분분하게 어긋나 / 紛紜舛錯
그 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 其害滔天
공이 설을 내어 물리치면서 / 公辭而闢
밝게 은미한 뜻을 보이시고 / 昭示微旨
우리 어리석은 무리들을 인도하여 / 牖我群蒙
다른 길로 미혹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 不惑他岐
세상의 일 점차 어려워지니 / 世事漸難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탄식하면서 / 歸歟發歎
한 구역의 숲 골짜기에 / 一區林壑
용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 大開龍門
밝은 창 아래 책상에 / 明窓棐几
성대하게 봄기운이 생겨나니 / 藹然生春
멀리에서 찾아오는 / 有來自遠
젊은 학자들이 많고도 많았습니다 / 衿佩振振
하물며 우리 추로지향(鄒魯之鄕)은 / 矧我魯邦
가장 먼저 교화를 받은 곳이라 / 最先承敎
한번 그 풍속이 변하면 / 一變其俗
도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 可至於道
그런데 갑자기 역책을 하시어 / 曾簀遽易
선화(仙化)한 옷자락을 잡을 길 없으니 / 化裾莫追
소경이 어두운 길을 지팡이로 걷는 격이라 / 摘埴冥途
후학들은 어디에 귀의하리오 / 後學安歸
오호라 슬프도다 / 嗚呼痛哉
하늘이 우리 공을 내심이 / 天生我公
어찌 평범한 뜻이겠습니까 / 夫豈偶然
책임이 크고 무거우니 / 任大責重
사도와 사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斯道斯民
공효를 계산해 보면 / 計算功效
공의 뜻을 펴지는 못하였고 / 公志莫伸
도를 행하여 세상을 교화하는 일도 / 行道化今
두루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 未普厥施
삼재가 이미 확립되어 / 三才旣立
대운이 서로 밀어 대니 / 大運迭推
성하고 쇠함의 관건은 / 盛衰機緘
실로 하늘이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 天實主之
이미 그만한 덕을 내어 놓고 / 旣生其德
그 운명은 어찌 그리 인색한 것입니까 / 胡嗇厥命
정자(程子)는 부릉(涪陵)에서 곤궁을 당하셨고 / 程窘涪行
주자(朱子)는 위당의 액을 당하셨습니다 / 朱厄僞黨
고금이 한가지이니 / 古今一軌
누가 그 이유를 따질 수 있겠으며 / 孰詰其端
이제 다 끝났으니 / 已矣已矣
운명인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 奈何乎天
오호라 슬프도다 / 嗚呼痛哉
저처럼 불초한 몸이 / 顧余無狀
일찍부터 격려를 입었는데 / 早蒙奬飾
반생을 일상적인 틀 속에서 / 半世科臼
엎어지며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 顚倒失脚
외람되이 은혜를 입어 벼슬에 추천되니 / 薦墨誤恩
부끄럽고도 고마웠는데 / 且愧且感
이제 만년에 이르러 / 今茲晩歲
자주 용모와 범절을 뵐 수 있었습니다 / 屢承容範
초평처럼 도를 들었으나 / 初平聞道
늙어서도 능한 바 없었는데 / 老矣無能
용렬하고 엉성한 구태로 / 慵疎故態
외람되이 후한 은혜 입었습니다 / 濫荷優容
젊은 시절 이맘때쯤 / 夙歲茲辰
잔치 자리에서 모셨을 때 / 叨奉燕席
술동이 앞에서 소매를 걷고 / 帣鞲樽前
남김없이 모두 마셔 버렸습니다 / 都盡餘瀝
취한 저는 미칠 듯이 / 我醉欲狂
호탕하게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는데 / 浩唱陶辭
공은 빙그레 웃으시며 / 公莞而笑
뒤이어 화답하셨습니다 / 而後和之
두 표의 충성스러운 말 / 兩表忠言
음절이 분명하였으니 / 落落音節
희미한 달빛은 처마로 떨어지고 / 微月墮簷
밝은 등불이 벽에 걸렸습니다 / 華燈在壁
인물을 논하면서 / 撫論人物
비분강개를 쉬지 않으셨으니 / 悲慨不歇
오늘 밤에 추억해 보니 / 追惟今夕
이미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 已成陳跡
그때의 그 즐거움 / 此時此樂
다시는 얻지 못하리니 / 不可再得
고산은 말없이 적막하고 / 高山漠漠
금수는 우는 듯 흐릅니다 / 錦水咽咽
유허의 새집은 / 遺墟新館
지는 해 속에 적막한데 / 寂歷斜陽
매번 슬픔이 일어날 때마다 / 每過興愴
남몰래 눈물이 눈에 가득합니다 / 暗涕盈眶
평생에 받은 은혜 / 平生恩遇
갚을 길이 없는데 / 報效無地
인간 세상을 생각하니 / 俛仰人世
저의 회포가 어찌 다하겠습니까 / 我懷曷已
다행히 어진 자제 있어서 / 幸有賢胤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리니 / 不墜家聲
부디 옛 우의 돈독히 하여 / 庶敦舊誼
끊임없이 나아가자고 권면하였습니다 / 勖以斯征
마음속에 새기고 / 銘以寸心
신명께 맹세하리니 / 質之神明
영령께서 어둡지 않으시거든 / 靈如不昧
저의 미충을 헤아려 주소서 / 鑑我微衷
만장 [김태중(金台重)]
대로께서 동해의 가에 거처하시니 / 大老居於東海濱
우리 영남의 중망이 진유에게 모였네 / 吾南重望屬儒眞
유풍은 멀리 장 부자에게 이어졌고 / 流風遠紹張夫子
가학은 정백순과 서로 탁마하였네 / 家學相磨程伯淳
몇 번이나 유경을 안고 옛날의 철인을 뵈었던고 / 幾抱遺經參往哲
다시 이 도를 가지고 백성들을 깨우쳤네 / 要將此道覺斯民
순 임금의 뜰에선 소를 듣고 봉황이 춤을 추었고 / 聞韶舜陛初儀鳳
주(周)나라 조정에선 세상을 놀라게 할 기린 얻은 것을 기뻐하였네 / 驚代姬朝喜得麟
경연에서 헌의하니 참된 시강관이었고 / 獻議經筵眞侍講
전석에서 인재를 뽑으니 원신이 되었네 / 持衡銓席作元臣
존주의 일념은 끝내 효과를 이루기 어려웠고 / 尊周一念終難效
세상을 도울 큰 계책은 아직 펴지도 못했네 / 補世弘規尙未伸
늘그막에 서하(西河)에 새집을 짓고 / 晩節西河新卜築
십 년의 파랑에서 즐겨 몸을 빼내었네 / 十年波浪好抽身
숲 속에 장실을 여니 봄기운이 자리에서 생겨나고 / 林開丈室春生座
땅이 용문에 접하니 덕이 이웃을 비추었네 / 地接龍門德照隣
학자들이 다투어 멀리서부터 보러 오니 / 學子爭看來自遠
고을의 풍속이 점차 다시 순수해졌네 / 鄕風漸覺復還醇
조용히 깨끗한 안석(案席)에서 크게 공부하였고 / 從容淨几工夫大
전대의 말들 상고하여 새로운 전주를 내었네 / 斟酌前言箋註新
구주의 뜻을 부연하여 홍범(洪範)을 넓혔고 / 義衍九疇推禹範
사단칠정에 공을 세워 문순공(文純公)을 도왔네 / 功存四七右文純
일찍이 게으른 단점 보충하지 못함이 한스러웠는데 / 自嗟懶慢曾相補
다행스럽게도 의용을 늦게나마 뵈었네 / 何幸儀容晩得親
글자를 묻는 일은 비록 가르침을 받지 못했지만 / 問字縱違承誨切
배종할 때는 오히려 자주 책상 앞에 앉았네 / 陪遊猶許拜床頻
인수를 오래도록 누리시기를 바랐더니 / 願言仁壽添遐算
누가 알았으랴 사나운 바람이 봄기운을 꺾을 줄을 / 誰料獰飆折大春
금수의 경치를 어찌 차마 지날까 / 錦水風煙那忍過
홍교의 소식을 다시 물을 길 없네 / 虹橋消息更無因
지금의 문헌을 누구에게 보태게 하랴 / 秪今文獻徵誰足
전술함은 응당 후인에게 달렸음을 알겠네 / 傳述應知在後人
적암 공이 갈암에게 보낸편지
적암선생문집(適庵先生文集)
上葛庵先生[戊寅]
自海上伏承辱復下書、備審伊時體候萬福、仰慰且感、信後、日子已多。伏惟海曲秋凉、道體益淸健。錦翁遺事、幸賴門下費意、撰出平生懿行、不至湮泯、感泣萬萬。第其中有一二宜復者、世鏞君想自有稟、目今不敢煩縷耳。此翁襟度英爽、壼觴談笑之間、氣像可觀。而至於義利截然處、處事律身至爲嚴密。狀中疏曠二字、恐不合此翁評品。其餘數處、雖非大段害事、亦望更加商量如何。夏間天京自門下來、細傳起居狀、仍說渠所呈如詩一絶、及先生和韻。諷誦再三、不勝贊歎之至。五年流竄之餘、體自康健、詞章讌笑之間、語無牢騷、未知平日充養之工如何而至此哉。此距謪館雖遠、匹驢單僮、想亦不多日可至。但老人氣力綿綴、殆無寧日、不敢曠日遠離。區區無以遂誠、瞻望雲天、只祝萬福而已。
전라도 光陽으로 유배지를 옮긴 葛菴 李玄逸에게 보낸 편지로 1698년(숙종 24)에 썼다. 무리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金學培의 行狀을 작성해 보내준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면서 門下에서 문집을 간행할 의지를 갖는다면 평생토록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문집의 편집을 주도하고 있는 김학배의 아들 金世鏞과 함께 그에 관한 자료들을 검토하다 보니 그의 氣象이 談笑의 과정에서도 예리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義·利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절제된 처신으로 엄한 면모가 엿보이는 측면이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행장의 내용 가운데 ‘疎曠’이라 한 표현은 그의 면모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몇 가지 부분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再考하여 수정해 주는 것이 어떨 지를 물었다. 서울에서 선생의 起居에 관한 소식을 門下에 전한 내용 가운데 선생이 次韻한 詩를 보고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면서, 5년 유배생활에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여긴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비록 유배지가 멀다고는 하지만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부친의 氣力이 심상치 않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사정을 알리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上葛庵先生[丙子]
因海上便、時得遞來音問。竊伏聞講道之餘、體候萬福。精神髭髮、有倍平昔。此固神明所勞、自有扶護之力。亦豈非君子素養之功。隨遇而安、外患自不入也耶。慰喜區區、無任遠誠。但聞北關凶歉、與此中無異。在陳之歎、想所難免。伏未知主倅顧待如前、而近地守宰、亦或有同志相問者耶。且聞有一二士子往來問字云。伏想人情物態、與之相熟、而亦有顧藉之路耶。台重頑喘未絶、喪制己畢、加以老人筋力日漸衰敗。四月初、又遭同氣之慽。種種患故之中、精神已脫、虛殼僅存。雖欲自奮於文字之間、了無望矣。却恐從前縷縷勤敎、盡歸虛地而終不免爲得罪。門不之人、中夜以思、只自慨然而已就控先師錦翁、棄世已久。撰述無文、平生行蹟恐至泯泯無傳日者。權令公特念舊誼、許述碣文。今至就緖、庶有垂後之望。第念錦翁平生道義之交、無如先生知錦翁之深、而能道錦翁事者、亦無如先生。而先生之一言一字、足以取信於後。如得撰敍行狀一通、以詔來世、則其於表著幽潛、可謂備盡而無餘蘊矣。拙記遺事、疏略殊甚。仲胤兄繼有發揮文字、權懷德丈又有數段記來、語合是數者、通攷而裒輯焉。庶不至沒、實至於一時師友間嘉言懿行。鄙等未及知者、先生必自知而自述焉。未知如何。如何仰恃仁庇、僭率至此、俟罪萬萬。伏祝爲道自愛、以副區區慕望之忱。
함경도 鐘城에 유배되어 있는 葛菴 李玄逸에게 보낸 편지로 1696년(숙종 22)에 썼다. 유배지에서 講道의 바쁜 와중에도 한결 맑은 정신과 건강으로 지내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는 神明을 다해 스스로 扶護하려는 능력 때문으로 外患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君子의 素養의 덕분이라 반가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北關에 흉년이 들었다는데 근황에는 영향이 없는지, 守令도 이전처럼 뜻을 같이하며 자주 왕래하는지, 배우러 오는 士子들 역시 人情과 세상 物情을 서로 익혀 도움을 주고 있는지 등을 물었다. 자신은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는 데다 숙부의 喪을 마치자마자 부친의 筋力이 쇠약해지고 同氣까지 갑자기 잃는 변고를 당하고 보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종전의 편지에 누차 학문에 힘쓰라는 당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門下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다보니 한숨만 나올 뿐이라 자책했다. 錦翁 金學培(1628~1673)가 사망한지 오래되어 그의 문집을 편찬하려는데 그와 道義로서 교유하고 그의 학문에 대해 先生만큼 아는 사람도 없으니 行狀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자신은 遺事의 작성을 맡는 등 知友들이 서로 역할분담을 하여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은 알지만 선생의 글이 없으면 편찬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니 반드시 보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上葛庵先生[乙亥]
台重頑喘不絶、庵過祥期。餘殃未殄、又於四月初遭大諫叔父喪、痛哭痛哭夫復何喩。年前狼狽、蒼黃之變、兩家所同。而福城去家稍近、音問以時相接。年齡雖暮、精力尙完、屢承手簡、了無一毫牢騷之語。私心爲幸、或冀天道助順、好還有期、豈料殃禍之慘、遽至此耶。此由不肖輩罪大惡極、終不見佑於天、痛哭奈何。五月初返櫬、六月中改殮、今方營窆、未卜葬地。此中痛迫之情、尤復如何。春間伏承下札、兼叩賢胤、細審彼中土俗、淳古、主倅見待頗優、又有一二區弘輩、時從門下問字云。可想謫館不至、寥落稍慰。遠慕之懷、南鄕積雨之餘、物候早冷。秖今七八月之交、寒林病葉、凜若霜辰。遠惟北地高寒風土、不幷以南寒暑相交之間、將理得宜否耶。前書勉勵之意、敢不服膺。但喪敗餘生、精脫神澌、夙歲薪憂、猶復往復。文字工程、全然廢却。以玆昏耗日甚、愆尤日積大懼、終爲小人之歸、無以仰副長者期待之意。浩歎奈何、只願時運重亨、赤舃東歸異日者、收召驚魂、仰承淸範、陪遊於寂寞之濱。是區區之至望耳。
甲戌換局으로 함경도 鐘城에 유배되어 있는 葛菴 李玄逸에게 보낸 편지로 1695년(숙종 21)에 썼다. 천식이 멈추지 않아 고생하고 있는 데다 換局에서 竄逐된 후유증으로 사망한 叔父 芝村 金邦杰(1623~1695)의 喪을 당한 것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전하면서, 두 집안이 똑같이 禍를 입은 운명을 한탄함과 동시에 그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억울한 사정을 설명했다. 최근에 자신이 숙부를 만났을 때도 비록 年老하기는 해도 精力이 왕성했고 편지에도 힘이 넘쳤으며, 추호라도 私心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獄事에 관한 언급조차 없을 정도로 평생을 天道에 따라 순리대로 살아 왔는데 이러한 참변을 당하니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잘못으로만 여겨질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喪祭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葬地가 결정되지 않아 참담한 심정을 더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지난번 편지에서 유배지 사람들의 인심이 순박하고 후하며 守令도 자못 우대하고 있는 데다 門下에서 한두 명이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음을 전하면서, 지금 남쪽지방에는 더위와 추위가 교대로 찾아오는 날씨로 인해 나뭇잎이 병들고 있는 상황인데 이보다 더한 북쪽 유배지는 오히려 날씨 변덕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유의할 것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편지에 유념해 노력하기는 하지만 정신이 자꾸 흐트러지고 있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전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조용한 가운데에서 모시고 노닐 날을 고대하는 희망을 담았다
上葛庵先生[乙丑]
阻拜龍門、居然四三年。區區嚮往之忱、如水必東而汨汨。塵穴尋常、書尺亦且闕。然自知逋慢、獲罪於丈席者多矣。伏惟新元、靜中道體萬福。台重年來索居、孤陋日甚、而脚跟較舊歲漸退、懶習入新年尤加。前去四十、只是三歲。畢竟將爲無聞之人、而止自歎奈何。迷豚生長蓽門、素無知識。而今何幸、託迹於門下。愛其父施及其子、想不以昏庸絶之也。幸望特賜容庇、置之鑪韛中如何如何。春間準擬一涉仙源、得問花竹平安、而從前承誨之計、每每掣肘、亦安敢必邪。餘伏祝、爲道自愛。
1685년(숙종 11)에 썼다. 서로 자주 왕래하며 진솔함을 나누어야 마음의 티끌을 없애고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데도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타성에 젖어 게을러진 탓으로 여러 윗사람들에게 지은 죄가 적지 않다고 자책하면서, 龍門에서 인사를 드린 지 3, 4년이 지나도록 찾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우회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면서 집에서만 지내며 구차하게 살다보니 다리 근육이 퇴화한 데다 나태하기까지 하여 끝내 들은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탄식하고 있다면서, 門下에 들어가 배우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우매하고 용렬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다
上葛庵先生[庚辰]
伏聞台旆昨自宣城歸、道途勞役之餘、不審道體起居如何。就控此去、諸生輩俱以蒙學。竊仰先生德懿之盛、願得親依丈席之下。伏惟先生、於弊家先父兄事契深厚。不佞亦得因緣、出入門下有年。想必不以他家子弟視之、但念其稟質凡下、俗習已痼雖使親炙、模範恐無、以副先生樂育之意、是懼是懼。伏乞隨分施敎、卒有萬一之效、其爲感刻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