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깨달음터 - 앱솔의 세계
 
 
 
 

최근 댓글 보기

 
최신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제주공
    2. 넘버원
    3. 뽈뽈
    4. 부다랑
    5. 유동민
    1. 우주
    2. 우주생명
    3. 능슝능슝
    4. 야마꼬양
    5. 세종북트리도서관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카페 통계

 
방문
20241120
0
20241121
0
20241122
2
20241123
0
20241124
0
가입
20241120
0
20241121
0
20241122
0
20241123
0
20241124
0
게시글
20241120
0
20241121
0
20241122
0
20241123
0
20241124
0
댓글
20241120
0
20241121
0
20241122
0
20241123
0
20241124
0
 
카페 게시글
고대사의 중국날조 스크랩 한반도 역사 미스테리
앱솔 추천 0 조회 200 13.10.30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세기 당시의 한반도 주변 지도.

[짙은 황색 부분은 고구려 영토, 고구려 윗부분 엷은 보라색 부분은 광활한 부여연방,
푸른부분은 백제본토와 고구려 영토였던 현재 중국 동부해안을 백제가 빼앗은 영토와 
백제연방(아래의 짙은 보라색 부분은 당시 왜국의 자치구),붉은부분은 신라영토와 일본열도
일부에 있던 신라령.연두색은 가야국]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에 걸쳐있던 거대한 제국이었다.

백제는 대륙과 지금의 일본을 포함해 동남아까지 식민지를 거느리던 해상제국이었으며
고구려는 동시베리아(동몽골 포함)에다가 상해까지 걸친 제국이었다.

발해는 당나라를 멸망시킬만한 최강국 상태에서 백두산의 대폭발(베수비우스 화산보다 10배 가까운 위력)로 인해 국력이 급속히 쇠퇴해버리는 바람에 거란에게 무주공산으로 진입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굳혀져 있는 상황이다.


백두산 주변과 개마고원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발해왕조(서기 698~926년)는,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송화강 이남 지역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확보하여 세운 국가였다. 이들은 고구려 문화를 물려 받고 당나라의 관제와 문화의 영향에 힘입어 '해동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쳤으나, 14대 229년만에 일시에 멸망했다.

서기 926년을 전후하여 천지 칼데라를 형성한 백운봉기 화산활동 절정기에 화산분출로 인한 고온의 화산회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의 발해
일대를 뒤덮고(베수비우스 화산분출로 고온의 화산회와 화쇄류가 폼베이시를 멸망시키듯), 화재 및 지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 및 재산상의 피해가 발해왕조 내부사정과 연계돼 멸망을 촉진한 것이다.





★ 아시아의 강자 "대고구려" 와 백제 그리고 발해..






주제는


“과연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는가 ?”  이다




(사학자 질문)

하북성까지 고구려 주강역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주장아닌지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답변)

기존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의 뇌리에 고정화 시켜놓은
왜곡된 역사인식 때문에 받아 들이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을 잘 들어주기 바랍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나 사실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기존의 역사인식을 비우고 다시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설명은 곤란하므로 몇가지만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러면 설명순서를
첫째 사서에 나오는 대표적 기록 소개와
둘째 유물에 나오는 기록 소개
셋째 천문학으로 연구한 자료소개

순서로 합니다



(1) 첫째 고구려가 하북성 유역을 점유했다는 사서의 기록 소개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 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자 이기록을 먼저 지도상에서 살펴볼까요




하북성을 통과하여 산서성 태원까지 고구려가 공격을 한 기록입니다
주의할 것은 고대북평은 지금의 부평으로 태행산맥 가까이 있었습니다
상곡은 지금의 탁록지방을 말합니다

이기록은

중국정사인 “후한서”에도 동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후한서”에는 북평을 “우북평”이라 기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청나라때 교간된 것만을 볼수 있는데
후대에 “우”자를 첨가 기록하여
고구려 강역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북평”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북평 - 태원으로 이어지는 군사진격로도 지도상에서 맞아 떨어지지요


(사학자 질문)

그런데 고구려가 강성시 잠시 갔다가 온 것은 아닐까요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답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다음에 설명하는 추가 내용들을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는 물론 말기의 전쟁지명들도 하북성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간과 해서는 안됩니다


어쨌던

위 기록을 일부OO들은 “오기”라던지
그당시 고구려 국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언급자체를 금기시 한다는 것을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전쟁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위기록은 고구려가 국력이 더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상식적으로 보아도
한반도나 만주에서 산서성 태원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바로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다고 본다면
태행산맥을 기점으로
한족과 고구려가 공방전을 벌이던 전투 접경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사학자 질문)

그다음에 예를 들것은 무엇인가요 ?



(답변)

고구려 유물로 본 고구려 강역입니다


(2)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앞의 설명이 사서의 예문이었다면
이것은 “실증주의 사학”이라 주장하는 OO가
제일 좋아하는 실증유물이지요

물론 이 유물도
하북성이, 아니 중국 동해안 전체가 모두 고구려 땅이라
증빙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볼까요


① (발견지역)


1976년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인데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분입니다

“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라는 것이 북경인근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지금 우리로 말하면 “경기도지사”정도로 비유하면 맞을까요 ?

하여간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이
중국 북경인근에서 통치를 하다가
고향인 평안도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덤발견위치)




1976년 발견되길 망정이지
일제시대때 발견되었으면 아마 어떻게 조작되었을지 모를일이지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OO는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추가로 소개하겠지만
북경유역에 땅을 파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전까지는
이 유물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유주위치)







(사학자 질문)

그런데 이무덤안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요 ?


(답변)

자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② 무덤안의 내용


우선 무덤안 전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기에 기가막힌 역사적 실증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무덤안 전경)




중앙에 있는분이 유주자사를 지낸 “진”으로
무덤의 주인공이고

▒ 유주자사 “진”



유주자사 “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때까지
고구려 4대왕을 모신 고구려의 신하였습니다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331년 ~ 408년 사이에는
중국동해안이 모조리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면 무슨 무리가 따를까요

기간중 일부를 점유하였던 하여간 중국의 동해안 옥토를
깡그리 지배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좌측에 서있는 분들이
유주자사 “진” 통제하에 있던 고구려 지방지도자인 13개 태수들입니다

▒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





(사학자 질문)

그렇다면 13명의 태수는 어디에 위치한 사람인가요 ?


(답변)


자 놀라지 말고 다음 설명을 잘 이해하길 바랍니다


③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온 태수라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13) “............(판독 불능)”


(사학자 질문)

도대체 13명의 태수가 있었던 지역은 어디라는 것이지요 ?


(답변)

자 중국 현재지도에 표시하기 전에
어떻게 증빙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까요 ?

이 지역은 중국지역이므로 당연히 중국고지도를 보고 찾아야
가장 근접한 위치가 되겠지요

자 송나라때 지도인 송본지리지장도 중 일부에서 한번 찾아 볼까요

물론 중국정사 지리지에 나오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전문적인 부분이라 일일이 언급하기가 어려우므로
나중에 라동현 선생님의 저서부분을 인용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치가 대동소이합니다

일단 중국 고지도에 나오는 부분만 살펴 볼까요
일단 고지도나 중국 군사지도에 나오는 부분을 개괄적으로 알아봅니다

아래지도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위 지명들을 현재 중국지도상에 나타내볼까요

하북성은 물론 산서성까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통치하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 아래지도를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언제 그랬다는 것인가 ?

유주자사 진이 태어난 331년과 408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로 그때 이지역를 고구려가 통치했었다는 실증유물입니다

왜 이것을 숨기고 교육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민족의 영광을 말하면 죽이려 달려드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

무역센타에서 고구려 유물전을 할때도 이 무덤 벽에 기록된
글자에 대한 소개는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도데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



(사학자 질문)

그렇다면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갔다는 말인가요 ?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는 어디인지요?


(답변)


지도에도 표시해 놓았듯이
사서에 나오는 9세기이전 요동, 요서의 기준지역은
틀림없이 태원 아래쪽 “요” 지금은 “좌권”으로 변경된 곳입니다





그런데
요동, 요서 태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요”를 기점으로 한 지역구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사서에 여러 가지 내용들이 산재해 있어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에 대한 부분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어쨌던 유주자사 진은 북경유역에 있으면서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신하로써
고구려땅 일부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은 331년 ~ 408년 고구려 신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비교를 하고 넘어가야될 대목이 있는데
바로 중국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 시절 7태수에 대한 부분입니다

백제 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은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에 오르신 분으로
산동성에 무덤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는 분입니다


고구려 유주자사 진이 사망하고 70년 뒤의 일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아주시겠습니까 ?




동성왕 시절 백제는 7지역의 태수를 두고 중국 동해안을 깡그리 지배를 하였습니다

그 7태수 지역이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북경 아래유역)
대방태수(북경 아래유역)
조선태수(북경지방)

등 입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이 겹칩니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을 백제가 강성해진 동성왕 시절
고구려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보아야 되는 것 아닌지요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지는 바로 우리민족의 주강역 이었다는 것을
유물과 정사의 기록이 중복적으로 증빙해 주고 있습니다

절대 허구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학자 질문)

놀라울 따름입니다 ?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이 유물에 대한 학계 등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


(답변)


아래 신문기사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
판단은 여러분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 읽어 보았지요

상기 기사는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입니다
이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것인데 국내반응이 참 재미있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일본과 국내의 반응이 극과극을 이루는데

먼저 일본의 반응은
-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이 북경까지 였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 한국 고구려사는 수정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 무덤 벽화 인물이 일본 것과 유사하여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며 충격적인 유물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다음으로 북한 역시

- 고구려의 북경유역 진출을 확인해주는 명문의 유물이다
라는 반응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남한만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서울대 고고학 김원룡이라는 교수 왈

- 일본, 북한의 주장은 비록 명문이 있어도 믿을 수 없다
- 북경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와야 믿을 수 있다
- 혹시 귀화한 중국인 무덤일 수도 있다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학자 질문)

학계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제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오며 머리가 아파옵니다

마지막으로 천문학적인 분석자료를 마져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답변)

그래요
진 무덤 안에는 14행 154자의 묵서명이 있는데 복잡하므로
오재성 선생님의 설명을 곁들여 별도로 설명하기로 하고
진 무덤은 여기까지 합니다



(해설) 고구려진묘비 덕흥리고분묵서명 : 14행 154자


아래 내용은 진 무덤 내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고구려 신하였던 "진"의 무덤 규모가 다른 왕릉보다 크다

그 왕릉들은 단한자의 글도 없다
무엇을 보고 왕의 무덤이라 하는가 ?

"진"유적 만이 고구려 무덤임을 증빙하고 있다
그기에 하북성 산서성이 고구려 땅이라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








▒ 한국고대사금석문 72-90쪽 서영대 해설을 참고한 것임


□□郡信都□都鄕中甘里(□□군신도□도향중감리)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주)
라동현 선생님에 의하면
“진”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었다면 국명을 기록하였을 것이라며
이 기록은 고구려 영토내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

(신도현)

평안북도 박천(영변)과 하북성 안평으로보는 두가지 설이 있음

釋加文佛弟子□氏鎭仕(석가문불제자□씨진사)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주) 국소대형 등은 고구려에만 있는 관직이름이다

龍(양)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진)
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였다.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년칠십칠훙언영락십팔년)        
太歲戊申十二月辛酉朔二十五日(태세무신십이월신유삭이십오일)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을유성천이옥구주공상지)

진은 77세로 죽어 영락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를 옮겼다.

(주) 고구려는 건원칭제하였음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영락”이었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공자택일무왕선시세사일)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시간을 선택하였다.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량장송지후부급칠세자손)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번창사환일천위지후왕)

날짜와 시간의 선택이 한결같이 좋았으므로 장례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는 후왕에 이르도록 하라

造장萬功日煞牛羊酒肉米粲(조장만공일살우양주육미찬)
不可盡掃旦食鹽시食一(종)記(부가진소단食鹽시식일(종)기)
之後世寓寄無疆(지후세우기무강)
무덤을 만드는데 만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창고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해설)


신도는 하북성 안평으로 보고 있다.
안평 근처에는 고구려 “동황성”이 있다.

동황성은 고구려사 343년 수도를 옮긴곳이다

이곳은
49년 고구려가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평정한 곳의 남쪽이며
고구리와 당이 대결했던 용도, 은산, 고대인성, 신성이 있는 곳 근처이다

무신년은 408년이다.
삼국사기에는 호태왕 17년이라고 하고 있으나 무신년은 408년이다

고분에 기록된 지명은 하북성 근처이다

연(燕), 어양(漁陽), 상곡(上谷), 광령(廣寧), 대군(代郡),
북평(北平), 창려(昌黎), 유주(幽州)가

북평과 태원사이
안평 즉 신도 근처에 있으니
그곳 사람이며

이곳은 고구리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리 강역이니
진은 고구리인이다

수도인 동황성 근처인이라고 하면
현재로 따지자면 수도가 있는 경기도 지사쯤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2월25일 사망하고 2월2일 묘실을 폐쇄하였다.
유일하게 축조 년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하북성 동황성이 있는 근처의 신도인이 덕흥리에 묻혔다면
현 평양은 고구리 별도 “한성”으로 보는 것에 타당성은 없을까

수도 동황성과 별도 한성을 왕래 할수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별도 한성은
32년 낙랑국을 합병하고
503년 신라가 독립하므로서 631년 만주 고구리장성과 대치하기 이전 유적인 것이다

진묘비의 큰 의미는
북평과 태원까지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려가 통치한 기록을 보충하여 주는 기록일 것이다  





< 고구려 평양 동황성(平壤 東黃城) >



(산동성지 중 안국시 부분입니다)






("동황성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상의 표시)



- 북경 아래 부분에 안국시가 위치해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 13년(343)


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은)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성은 지금 (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에 있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한글병기)

십삼년 춘이월
왕견기제 칭신입조어연
공진이이천수 연왕내환기부시
유류기모위질

추칠월 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
견사여진조공

동십일월 설오척





★ 단군조선 과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의 역사는 현재까지 남은 사료가 많지 않지만 남부지방부터 중국 베이징 그리고 만주 북부까지 비파형 청동검이 발견된 걸 보면 가장 영토가 넓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고조선 영토는 위 그림이지만 다양한 사료를 통해 고조선 전성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동예, 옥저, 부여, 마한, 진한, 변한 시대를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지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는 비록 삼국으로 영토가 나누어졌지만 고구려는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요동에서 만주 북까지 그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통일 신라시대 지금은 발해와 함께 남북조 시대로 바뀐걸로 알고 있다.
고구려의 후손을 주장하면서 대조영이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을 합쳐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한다.

비록 고구려 영토를 모두 복속하지는 못했지만 고구려 만주와 북부 지역을 아우르는 발해가 한반도의 통일 신라와 함께 그 다음영토를 차지했다.
그리고 후 삼국 시대가 열린후 태조 왕건이 통일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영토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고려의 영토는 조선시대 영토와 비슷한 걸로 알고 있으나 최근 들어 적어도 서압록까지 고려의 영토라는 주장이 있어 조선 시대보다 더욱 많은 영역을 우리 민족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시대가 열리고 500년간 나라를 존속시키고 지금의 남과 북이 갈린 시대로 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만년 역사를 영토의 변화로 짧게 본다면 5000년 역사가 진행돼 오는 동안 우리 민족의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은 남북조 시대로 말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발해를 별도로 배웠다.


만주를 호령했던 기마민족인 우리가 점차 정착생활에 익숙해지고 5000년이 지난 지금은 한반도 그리고 이마저도 반쪽으로 갈라져 있다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또 한가지 특이한 사항은 왕조가 바뀌면서 수명도 점차 짧아졌다.

2000년의 단군조선 시대가 끝나고 삼국시대도 1000년을 유지했고 고려시대는 700년 그리고 조선시대는 500년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몇백년을 갈까.
영토가 역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5000년의 세월동안 우리는 그만큼 나약해진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려 영토, 중-고교때 배운 고려영토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서토를 꿈꾸었던 연개소문에 대한 재해석도 최근의 일인 것만 보더도 정말 안타까울 뿐..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당시 연개소문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고구려를 망하게 한 원인이라고만 배웠다.
그리고 우리민족을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

하지만 이런 저런 책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농경민족이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여러 서적을 통해 기마민족이 내려와 나라를 세운것이라는 흔적을 여기 저기서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세월이 흐려며 우리의 기상은 점차 줄어들어갔고 지금은 더욱 초라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냥 한숨이 나온다.

어차피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서술된 것이니 우리가 정말 드 넓은 만주와 중국 중심 그리고 저 멀리 몽고까지 영역을 넓혔던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하겠는가...




★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만주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유럽 고(古)지도가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교수)은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집안, 간도지역이 조선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신동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서양 지도가 이처럼 대량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습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가 제작한‘A NEW MAP OF CHINA’.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1740년 예수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제작한‘La CHINE avec la KOREE et les Parties de la TARTARIE’ 지도.




1771년, ‘본 도법’으로 유명한 지리학자 본이 제작한‘CARTE DE LA TARTARIE CHINOISE’ 지도.




1778년 잔비어(Janvier, j. & Santini, F) 등이 제작한 ‘L、ASIE divisee en ses principaux Etats’아시아 지도.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을 녹색 테로 둘러 ‘COREE’라고 표기했으며 동해는 ‘MER DE COREE’로 표기했다.




1794년 윌킨슨(R. Wilkinson)이 제작한 ‘CHINA, Drawn from the Latest & Best AUTHORITIES’ 지도.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원본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한반도를 서울, 대구, 원산의 3개 교구로 나눴는데, 간도 지역이 ‘원산(Wonsan) 교구’에  포함돼 있어 간도와 한반도가  동일 생활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9년 일본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 답사도’.  백두산(검정색 원) 정계비는“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도는 토문강(土門江·갈색 원)과 두만강(豆滿江·청색 원)은 다른 강이며,  두만강 이북에 토문강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220년 전인 1785년 일본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林子平)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로 빨간선 안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다.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정병준 교수(40)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영국정부의 자료를 발굴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패전국일본이 1951년 9월 8일에 조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이자,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한 자료다.






★  우리나라 역사 미스테리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고려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의 병력은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30만명 안팎이었으나  
 고구려 전성기 병력은 50만이 넘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고.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적봉)가 발굴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의 무역 내역을 보면 일대가 보통2만으로 기록되어있고,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학계에서는 무시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사실로 밝혀졌다.

18. 이조개국시 전체 인구가 50여만으로써 고려인구의 3분에 1에 불과하였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장안(시안)과   일치한다.

20.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고구려의 요동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내륙 요동을 말한다.

21.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고려땅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22.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3.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많은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4.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6.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7.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28.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29.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있다.

30, 가야김씨의 족보를 보면 가야는 반도가 아니라 중국에 있었다.

31.강씨족보에 의하면 기황후였던 강씨가 고려의 원군이 오지 않음을 원망하며 몽고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참형(육시:몸을 6등분하는 형벌)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은 본래 형제의 나라이므로 
     군대를 보내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추장이 금이라는 이름의 신라인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수십만의 기병이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9.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0.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1.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52.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 중국의 동북아 고대사 약탈 프로젝트 배경 분석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문제에 대하여

중국측의 공식 논문이 지난해 70여 편이나 발표된 상황에서
그들의 이론적 논리를 전부 검토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이론적 논리와 별도로 그 공작의 배경을 개략적이나마 유추 분석해 보았다.





(1) 중국동북지역 주도권 분쟁에 대비한 사전 포석


중, 장기적으로 볼 때 동북지역이 황하문명에 뒤지지 않는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고
경제, 정치적으로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지금은 비록 소유권이 중국에 있긴 하지만 언제 불거질지 모르는 영토와
역사적, 경제적 자원문제의 분쟁에 대비하여
이에 대한 영구 확보방안의 일환으로 미리 쐐기를 박아 놓자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광활한 중국 동북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러시아, 몽골, 그리고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지역 못지않게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지역의 복합적인 잠재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남북통일에 대비 사전 정지작업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 하나의 큰 힘으로 성장했을 때를 대비하여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할 수 있다.

남한은 가까운 중국의 광대한 시장을 염두에 둬야하고,
북한은 체제상 동지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 등 여러 면에서 현실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통일이 되었을 경우에는 동북아 역학구도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변화에 대비하여 미리 필요충분조건을 갖춰놓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동북지역 문화유적지 부각에 따른 사전 대비책


동북지역의 역사와 유물 및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중국이 이제 그 연고권을 한국에 빼앗길 수 없다는
패권의식에 기인한 과욕으로 볼 수 있다.

황하문명 중심론을 뒤흔들어 놓은
홍산문화, 산동성의 대문구, 용산문화 등
동부지역과 동북지역의 고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집착의 산물로
다양한 문명 발생론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현재의 강역에 고대사를 대응시키려는 무리수로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공유의식 없는 역사 제국주의의 독단이 아닐 수 없다.

당사국과의 토론이나 논의과정 한 번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몰상식한 행위이다.

아직 구체적인 이론적 내용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한 언급은 거론할 수 없지만
일단 그러한 프로젝트를 국가적 차원에서 구상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당사국인 우리에게는 충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4) 영토패권주의의 발로


중국 스스로 다양한 역사주체의 총체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흉노, 돌궐, 선비, 5호16국, 남북조, 몽고(원), 요(거 란), 청(금, 여진), 강남 등
주변의 다양한 역사들이 중국사 또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어진 상황에서

엄연히 독립된 실체이며 주인이 있는 고구려사를
현재의 영토안에 무리하게 대응시키려는 부당한 논리는
주변국과 공유할 수 없는 총성없는 무혈침략이 아닐 수 없으며
사학 영토패권주의의 다름 아니다.



(5) 지속적인 소수민족 동화책 사용


아직도 끝나지 않은 티베트 독립문제 등
중국 한족의 거대한 용광로에 용해되지 않고 민족의 독립성을 지켜 온 주변 민족들에 대해
존재는 인정하지만 독자성은 인정하지 않고
한족의 울타리 안에서 용해시키려는 작업이 국가정책으로
지금까지 그들의 계획된 의도였다.

중국내 소수민족의 독립을 분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내부인식 가운데 첫 번째 화두는 당연 ‘통합’ 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내, 외적인 요인으로 격렬한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 온 중국 역사의 특성상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내는 정치적 ‘대통합’은
그들의 복잡한 현실 여건상 최우선 과제 일 수 밖에 없다.

다민족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조화와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지 못하면
어떤 형태로든 역사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위적 통합책으로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이 ‘문화혁명’이다.

겉으로는 타파 미신, 봉건주의 등의 구호를 내 걸었지만
사실은 다민족, 다문화의 다양한 역사를 깨뜨리고
하나의 사회주의 체제안에 녹여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통치 전략과 전술이
의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수민족들에게 그들의 말과 문자는 사용하게 했지만
교육과정에서는 자신들의 역사는 교육하지 못하게 막고
중국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정책을 펴 온 것도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국가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조선족들도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황제헌원씨를 중심 시조로 기술한 이래 1980년대 초까지
중국에서는 자신들을 황제의 자손이라 정했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염제신농씨를 자신들의 선조 계보에 포함시켜 ‘염황자손炎黃子孫’으로 추가 변경시켰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탁록에서 황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룬 치우를 포함시켜
‘염황치자손炎黃蚩子孫’이라는 타이틀을 다시 내 걸고

이른 바 ‘삼조문화三祖文化’의 주인공인 이들이
다양한 중화문명을 일으킨 중화민족의 공동시조라 하여
이들 세 분을 통합의 상징으로 모시고 기리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만들어 역사적 근원으로부터의 통합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 조선(大朝鮮)의 대륙영토 100가지 증거 <21~42가지>

 

★ 현중국인들이 조선(大朝鮮)의 대륙영토사실을 증명함.


 

  21.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중국 전체가 당신들(조선(大朝鮮)인)의 역사무대(옛영토)인데 이런 역사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읍니까?  

   대륙(중원,동중국), 동북삼성,내몽골(만주국),한반도(조선(大朝鮮)총독부)는 일본이 분할지배,

  대륙남쪽은 서구열강(영국,프랑스,독일등)이 지배,

  대륙서쪽, 북쪽은 청이 각각 지배 

 

  22.  장개석 총통이  백범 김구선생에게 한 만찬회장에서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절강성)   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

 

 23.  주은래수상은 (중국)동북 지역의 역사가 조선(大朝鮮)인에게 귀속된다 

   (조선(大朝鮮)의 영토이자   그들의 역사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4.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1902-1999)박사가  중국의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림어당(1895-1976) 선생에게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 고 하자 림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東夷族 조상(고조선)  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25,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大朝鮮)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26.  1930년대 장려화와 그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편찬되면서  중국에서의 우리 조선(大朝鮮)의 영토와 역사가 완전히 중국인의 의해 조작되었다.

27. 정명가도(명으로 가려면 조선(大朝鮮)을 건너야 한다)


   황하이북(명)을 치기 위해서는 조선(=중국대륙)을 건너지 않고 갈수없는 구조.

   즉  명이 중국대륙이라면 바다를 통해서 직접 침략이 가능하기 때문.   중국대륙의 중부,동부, 남부인 조선과 몽골,하북성의 명,청으로 갈라진 형국을   말하는 것이다.


... 조선(大朝鮮)의 민요에 낙양성 십리하에라는 구절....  

28. (성주풀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저 건너 잔솔밭에           설설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임을 잃고 밤새도록        임을 찾아 헤매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한 송정 솔을베어             조그많게 배를지어
술렁술렁 배뛰워놓고        술이나 안주 가득싣고
강릉 경포대 달구경 가세   두리둥실 달구경 가세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판소리 심청가)"

"황천길이 멀다더니 방문 밖이 황천이라

 

(만가)" 

"고관대작 다 버리고 북망산을 찾아갈 제

 

낙양의 고려의 수도(고려도경:서긍)이라 나오고 그 곳 북망산에는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夫餘隆),

고구려 연개소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獻誠),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29.양사언의 태산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시대 조선
생몰년 1517-1584(중종12-선조17)
본관 청주(淸州)
응빙(應聘)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활동분야 문인, 서예가



놀라운 사실!

 조선(大朝鮮)의 중국영토인 강원도(산동성)에 바로 태산이 있다. 결코 중국(지나인)의 영역이 아니다. 조선(大朝鮮)시대에도 태산의 우리나라 고유의 산이다.  티끌모아 태산.....갈수록 태산이다.또는 걱정이 태산이다.  조선(大朝鮮)인들은 태산이 흔하고 누구나 잘알고, 흔하게 올랐던 산이다.


흔하게 사용하는 태산이 왜 중국대륙에 있는지 의심해본적은 없습니까?  해방이후 두고 온 대한민국의 산하입니다.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우리(大朝鮮)의 강토입니다.


 30  장안의 화제

 장안은  배달(아사달), 고조선(평양), 고구려(평양), 고려(서경),조선(大朝鮮)(한성), 대한제국(한성)  의 수도였던  우리나라 9000년의 도시입니다.바로 조선(大朝鮮)의 중국영토 섬서성 서안시입니다.   조선(大朝鮮)이 중국대륙이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낙양,태산, 장안을 흔하게 사용함.

 


31. 대동여지도 서문(김정호)

   우리나라(조선(大朝鮮))는 ... 길이가 두루 1만9백20리나 된다

    (조선이 만리지국으로 중국전체를 뜻하고 있다)

 

 蓋我東邦域 三面際海 一隅連陸 一萬九百二十里 凡三海沿一百二十八邑 總八千四十三里
[번역] 우리 동방 강역은 3면이 바다에 접하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으며, 강토는 10,920리이며, 세 바다 연안은 도합 128읍에 총 8,043리이다

 

 

 32. 신하멜표류기

    새롭게 고쳐쓴 신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주) 2003. 우석출판사  

     남한산성의  높이가 2메일(3218m)였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 남한산성은 400~500m의  산으로 맞지않음     중국의 한성(서안)의 남쪽산들은 모두높이가 2000~3000m 이고 서남쪽은     유명한 태백산(3767m,배달국의 시조산인), 남쪽엔 종남산(2604m, 목멱산,남산)      이 있다.




조선 대륙영토의 섬서성의 태백산[위]     
종남산(남산,목멱산)굉장히 험준하고 높은산임.[아래]

                 

    (즉 병자호란때 청나라는 조선(大朝鮮)의 국경선인  황하  (압록강)을 건너 한성(서안)을 치고 여세를 몰아 한성 남쪽의  남한산성을 공격한것이다. 중국의 남한산성이다) 

 

33. 서거정(1420~1488)의 성삼문의 정원을 보고 지은 가산에서   

    정원을 보면서 (중국의 지명인) 형악,여산,태산,화산,동정호,팽려호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수려한 금수강산의 조선의 산야를 보고 비유한 것이다. 즉 대륙이 조선(大朝鮮)의  영토이었음에 가능 하다.

 

34. 김수온의 성현의 석가산에서

   숭산(중국 하남성 낙양시), 화산(섬서성)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선(大朝鮮)의 영토에    속하는 산들이다.

 

35. 예수회 선교사 알드신부(1735) 의 조선통사 4권중 조선편

   한성(漢城)은 조선(大朝鮮)의 수도로 북위 36도에 있으며~   즉 한반도가 아닌   중국영토의 섬서성에 있슴이 드러났다.   (지금도 섬서성과 산서성 인접지역에 한성(韓城)이라 표기되어 있다)

  

 36. 새롭게 고쳐쓴 신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주) 2003. 우석출판사 (20번~25번 참고)

     11월 하순에 한강에 얼음이 두껍게 언다고 함. 이 한강은 황하 중류를 뜻하며,    현중국에선  강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 얼음을 일부러 폭파를 하여 없앤다 한다.    한반도 한강은 11월에  거의 얼지 않는다.

 

37. 청나라는 산서성북쪽에 위치하였다.

 

 

 

38. 조선(大朝鮮)에는 야자나무와 파인애플이 즐비하였다.

    제주도는 1990년대부터 실내등지에서 특수재배로 파인애플을 키워왔으며,   산과 들에 원래  없었다. 조선(大朝鮮)의 중국남부영토을 뜻하며,    이곳은 야자나무등이 모두 자연산이다.

 

39. 조선(大朝鮮)의 인구는 1910년당시 4억2천1만명(420,010,000명)이었다.(http://cafe.daum.net/greatchosunsa/75XT/855)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에 이런 글이 나온다.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반도조선)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대륙조선(大朝鮮)))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만약에 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면   조선(大朝鮮)의 총인구는 중국대륙(지나)이  4억일만, 한반도(반도조선)가 2천만명 이것을 합하면  4억2천1만명이다.

 

40. 조선(大朝鮮)에는 악어가 많고 물소도 있었다.

    조선(大朝鮮)의 중국남부영토의 이야기다. 한반도는 절대 아니다.

 

41. 동국여지비고

    한성의 둘레는 18km,  한성 4대문밖에 창경궁성, 경희궁성이 있었다    현 서울에는 창경궁,경희궁이 모두 4대문 안에 있다.

     (조선(大朝鮮)의 중국영토 섬서성의 한성을 뜻한다)

 

42. 조선(大朝鮮)의 영토(1800년대) 지도 : 러시아제작.  제목="  조선의 엄청난 지도!"

   
조선(大朝鮮)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하여 한반도, 중국전체를 차지한 것을 알수있다.


1800년대에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조선지도'로서 우리가 알고있던 조선 영토에 의혹을 가져다 주는 지도 입니다.지도만 놓고 볼 때 굉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일본,만주,중국중동부,티벳,몽골,연해주를 비록한 시베리아를 지배한 동북아시아를 통일한 민족의 영광사를 만든 국가 였습니다..

고조선은 전성기에 거의 동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하다가

진나라에 망한것이 아니고 한나라에 왕검성을 함락당하면서 멸망한 것이다

중국은 지금 고구려역사나 고조선 역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일으킨 정권정도로 축소 시켜서 세계에 소개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드넓은 강역과 장구한 시간을 간직하면서도 사료의 부족과 의도적인 왜곡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학설들이 팽팽히 대립되고 있는 고조선의 역사.


1. “고조선이 없으면 우리 역사는 없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위태로운 고조선

일제 때 한국사는 식민사관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는 국사 교과서에 아직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 있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며 심각한 대처 능력 상실과 패배주의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또한  얼마전까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던 것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두 사관은 일란성 쌍둥이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첫째, 한국사를 멋대로 조작하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 중에서도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 둘째는 일본과 중국의 이 거대한 음모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음모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고조선이 고대의 역사가 아닌 오늘날 우리의 ‘현대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제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한국사는 식민지 상태로 출발한 것이 된다. 중국 동북공정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기자·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고조선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된다.

이 쌍둥이 사관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의 영토를 빼앗는 데 있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의 영토를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의 한강 이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조선사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인 것이다.



2. 분노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지금은 우리의 진짜 역사를 알아야 할 때!

중국이 동북공정의 거대한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사실상 고조선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들이 왜 그토록이나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려 하는지, 그 영향력이 얼마만큼이나 위험한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국민적인 공감대와 공론의 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이는 국가적인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는 그들에 대해 개인으로 대응하는 데 대한 현실적인 한계와 함께 우리 국사 교육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등 많은 난제들이 겹쳐 있어 풀기 힘든 숙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장애물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내부에 잔재해 있는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거대한 역사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감정적으로만 대응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역사에 덧씌워진 식민사관과 중화주의 등의 잔재를 말끔히 털어내고 객관적인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먼저 나를 제대로 알아야 주변국들의 도전에 대응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3. “우리 고대사는 새로 쓰여져야 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잘못된 통설들

국사 교과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제 시대를 거치며 식민사관으로 조작된 내용들이 아직까지도 통설이라는 명목하에 그대로 실려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해방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아직까지도 이런 식민사학의 잔재가 남아 있는 국사 교과서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교육받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의 잔영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국사 교과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적 오류를 반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록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지난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당시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여 침묵했던 바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 저우언라이(주은래) :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주은래( 周恩來;저우언라이, 1898~1976 ) : 중국 혁명지도자·정치가.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은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이다. 이는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1963년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가 한 말이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지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좌: 마오쩌뚱 우:저우언라이



우:마오쩌둥(모택동)과 좌:저우언라이(주은래)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지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지니스트'에 불과하다.



 


 ★  저우언라이 발언록. 


저우 전 총리는 63년 6월 28일 중국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나 "중국 역사학자들이 대국주의와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등 중국 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비판했다. 이런 내용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당시 중국 정부의 발언록 문서에 들어 있다. 베이징(北京)대학에서 연수 중인 설훈 전 의원이 문서를 입수해 13일 공개했다. 다음은 저우 전 총리의 발언 요지.


◇ 중국 학자들은 부정확

▶중국과 조선의 민족 발전에 대해 과거 중국 역사학자들의 관점은 매우 부정확했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 대륙에 온 이후 줄곧 이곳에 오랜 기간 거주했다.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강 유역 모두에 조선 민족의 족적이 발견된다. 문물과 비석의 기록들이 오래전부터 조선민족이 이곳에서 거주해 왔음을 증명한다.

▶징포(鏡泊)호 부근에서 발해국의 고적이 나오고 수도를 세운 흔적도 발견된다. 이들 발해국은 현지에서 나온 출토품으로 조선민족의 한 갈래가 분명함이 입증된다. 발해는 조선반도뿐 아니라 랴오허와 쑹화강 유역에 오래 살았다.

▶민족 발전의 역사는 문물로 증명하는 게 가장 과학적이다. 서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당시 사람이 잘못된 관점으로 썼거나 어떤 경우에는 조작한다.

▶중국은 당신(북한 대표단)들보다 큰 나라며 문화발전도 조금 앞섰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늘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모욕했으며 침략도 진행했다는 점을 중국 학자들이 우선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조선민족이 '기자의 후예'라는 등의 왜곡을 해서는 안 된다.


◇ 역사의 진실, 환원해야

▶진대와 한대 이후 중원에서 랴오허 유역으로 정벌을 많이 진행했다. 사실상 침략이다. 그러나 상당부분 실패했다. 당 왕조도 패배했지만 역시 그들도 당신들을 모욕한 게 사실이다. 이 뒤에는 다시 거란족과 여진족이 흥기했다.

▶그 후 만주족이 흥기하면서 조선민족을 동쪽으로 내몰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동쪽으로 말이다. 조상이 만들어 낸 일이다. 현재의 판도(북한과 중국의 경계선)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조상을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과한다. 당신들을 동쪽의 좁은 반도로 몰아넣었고 우리는 큰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진실을 환원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왜곡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예물을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치부하고, 외교사절이 와서 만나주는 것을 '조견(朝見)'이라 하고, 전쟁 뒤 강화하는 것을 '신복(臣服)'이라고 하며, 스스로를 천조(天朝).상방(上邦)이라고 하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는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전통 연극 속의 당나라 사람인 설인귀(薛仁貴)는 동쪽으로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했다. 중국인들은 극 속의 그를 숭배까지 한다. 하지만 현재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리는 이를 공연금지시켰다. 비판해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