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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국립 오페라하우스(Wien National Opera House, Staatso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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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대로를 세우고 여러 채의 공공건물을 새로 짓는다는, 빈 시를 위한 거창한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중 웅장한 오페라 하우스가 필요했다.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은 1863년 시작되어 1869년에 끝났다. 이 극장은 빈의 중심 지역을 둥글게 둘러싸고 새로이 조성된 새로운 대로변에 지어졌다. 현재 이 건물은 링슈트라세에 위치하고 있는 많은 아름답고 정교한 건물 중 하나이다. 국립 오페라 극장의 원래 이름은 국립 황궁 극장이었다. 건축가는 에두아르트 판 데르 뉠과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르스부르크로, 1858년에 있었던 오페라 극장 설계 공모전에서 당선한 인물들이었다. 슬프게도 이 두 건축가는 1868년에 죽어 자신들의 계획이 열매를 맺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의 때 이른 죽음은 국립 오페라 극장의 신고전주의적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민들이 혹독한 비평을 가한 얼마 후의 일이었다.
▲▼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Wien National Opera House, Staatsoper)
▲ Opernbrunnen(오페른부룬넨)-오페라극장 우측분수(캐른트너슈트라쎄 쪽) 슈타츠오퍼 외부의 양 옆에 각각 분수가 있다. 하나는 캐른트너슈트라쎄 쪽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오페른가쎄 쪽에 있다. 캐른트너슈트라쎄 쪽의 분수가 있는 장소를 카라얀플라츠(Karajanplatz)라고 부른다. 거장 허버트 폰 카라얀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두개의 분수는 1865년 프란츠 요셉 1세 황제 시절에 궁정오페라극장으로서 현재의 슈타츠오퍼를 건축할 때에 함께 제작하였다. 슈타츠오퍼를 설계한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르즈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와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이 분수의 설계도 공동으로 맡아했다. 그런데 분수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과 중간에 있는 인물들은 각각 의미가 있다. 캐른트너슈트라쎄 쪽의 분수는 로렐라이(Loreley), 리베(Liebe: 사랑), 트라우어(Trauer: 비애), 라헤(Rache: 복수)를 의미한다고...로렐라이는 웬일인고...
▲ 오페른가쎄 쪽의 분수(좌측) 오페른가쎄 쪽의 분수는 톤쿤스트(Tonkust: 음악예술), 라이히트진(Leichtsinn: 경솔), 프로이데(Freude: 환희), 에른스트(Ernst: 진심)을 의인화 한것이다. 별것을 다 의인화했다.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보실 수 있습니다 ▲ 오페라 하우스 앞 도로 관광안내판 ▲▼ 케른트너 거리(Kärntner Strasse)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슈테판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빈의 중심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의 상품, 가치있는 골동품 또는 재미있는 기념품을 비롯하여 고품질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이 많고 보행자 전용거리인 그라벤Graben Strasse)과 콜마크르트(Kohlmarkt Strasse)로 이어진다.
▲▼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의 스와로브스키(Swarovski)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전 지역에서도 굉장한 인기인 ‘스와로브스키(Swarovski)’는 현지에서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고...진열된 상품 몇컷...
▲▼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
▲▼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의 하스하우스(Haas house) 케른트너 거리 끝에는 슈테판 광장이 있다. 슈테판 성당이 있어서 광장이름 역시 슈테판인 것 같았는데 그 장중한 고딕양식의 슈테판 성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스트모던한 건물이 슈테판 성당 맞은편에 있다.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의 1990년작 하스하우스(Haas house)가 그것. 그 당시에는 다이빙대를 머리에 얹은 건물이라며 엄청난 놀림과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광장과 잘 어우러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유리벽 면에 슈테판 대성당의 모습이 비춰지는 모습이 이채롭다. ▼ 케른트너 거리의 오른쪽으로 그라벤 거리(Graben Straße)가 있다. '그라벤 스트라쎄(Graben strasse)'거리 중앙에 서있는 기념탑은 1679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가 세운 '페스트기념탑(Pestsaule)'이다. 당시 유럽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여 빈에서만도 15만 명 정도가 희생되었는데, 마침내 페스트가 사라지자 이를 신에게 감사하며 이 탑을 세웠다. 좌대에는 천지창조, 노아의 홍수, 최후의 만찬 등을 묘사한 부조가 있고, 윗부분에는 삼위일체상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Pestsaeule) 그라벤의 역병탑(페스트조일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작품이다. 1679년 비엔나에 대역병이 돌자 역병을 피해 비엔나를 떠나던 레오폴드 1세 황제는 만일 역병이 곧 사라지면 감사의 탑을 세워 만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역병이 주춤해지자 비엔나시는 우선 목재로 탑을 만들고 상단에 성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황제의 뜻을 표현코자했다. 성삼위일체 조형물의 주변에는 아홉천사(아홉천사는 모든 품계의 천사를 의미함)들이 둘러싸고 있는 내용도 조각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역병이 물러난 1683년 레오폴드 황제는 거장 마티아스 라우흐밀러(Matthias Rauchmiller)에게 지시하여 정식으로 대리석 역병탑을 건조토록 했다. 그러나 라우흐밀러는 1686년 천사 몇 명만 조각해 놓은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기존의 설계에 대한 변경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69피트의 역병탑은 몇 명의 조각가들이 분담하여 건설토록 했다. 아랫단은 유명한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Johann Bernhardt Fischer von Erlach)가 맡게 되었다. 전체 건설 책임은 파울 슈트루델(Paul Strudel)이 맡았다. 슈트루델(Paul Strudel)은 극장 건축의 대가인 이탈리아 출신의 로도비코 부르나키티(Lodovico Burnacini)의 자문을 받아 전체 탑의 모습을 구름 피라밋 형상으로 하였다. 천사들이 구름 사이에서 성삼위일체를 찬양하는 아래에는 레오폴드 황제가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하는 모습도 있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는 1693년 봉헌되었다. 장장 10년이란 기간이 걸렸다. 그라벤의 역병탑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의 각지에도 역병탑이 같은 디자인으로 건축되었다. 왜 삼위일체인가? 가톨릭 교회는 역병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발생한다고 설교했다. 그리고 역병을 퇴치하려면 삼위일체에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삼위일체 탑이 세워진 것이다. 조일레라는 단어는 기둥, 탑이라는 뜻이다. 그라벤 거리는 정치권력의 중심인 호프 부르크 왕궁을 연결시켜주는 거리로 빈에서 처음으로 가스 가로등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에어스테 은행 앞 공중 화장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변기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라벤은 기능적으로 종교권력의 중심인 슈테판 대성당과 케른트너와 그라벤을 잇는 코르트로는 로마시대 참호(적의 공격을 대비하는 방어설비)로 사용되다가 참호를 메우고 도로를 만들면서 빈의 중심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Verdi 1813~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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