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 왕규의 자는 숙개며 그 전 이름은 승로(承老)이니 시중 강렬공(侍中剛烈公) 왕충(王沖)의 아들이요 태조의 종제 녕해공 왕만세(寧海公王萬歲)의 7대 손이다. 나이 7세 때에 태자의 학우(學友)로 되었는데 그는 천성이 온화하고도 민첩하며 진중하였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국량이 커서 남에게 좀처럼 기쁨과 노염을 표시하지 않았다. 처음 군기 주부 동정(軍器主簿同正)으로 임명되었는데 문하성(門下省)에서 나이 어리다고 논박하였으나 의종이 말하기를 “그의 아버지가 건국에 보좌한 공이 있는데 어찌 상례에 구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벼슬이 여러 번 올라 병부 원외랑 전중 시어사(兵部員外郞殿中侍御史)로 되었으며 정중부의 난 때에는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때이었으므로 무사하였다. 명종 때에는 남경 유수(南京留守)로 재직하면서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사를 하였다. 왕규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이지무의 아들 이세연(世延)이 김보당(金甫當)의 매부로서 정중부의 난에 죽었으므로 이의방(李義方)이 왕규마저 살해하고자 하여 그의 처의 관계를 빙자하여 수색하였다. 그러나 왕규는 정중부의 집에 숨어서 무사했다. 그런데 그때에 정중부의 딸이 과부로 있었는데 왕규를 보고 마음이 끌려서 정을 통하게 되었으므로 왕규는 마침내 본처를 버리게 되었다. 이의방이 죽은 후 왕규는 복직되었으며 금나라로 사신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정주(靜州)의 중랑장 김순부(金純富)가 일찍이 낭장(郞將) 용순(用純)을 죽이려 하여 용순이 서울로 도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왕규가 귀국하는 도중에 정주에 도착하니 김순부 등이 왕규는 마침내 본처를 버리게 되었다. 이의방이 죽은 후 왕규는 복직되었으며 금나라로 사신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정주(靜州)의 중랑장 김순부(金純富)가 일찍이 낭장(郞將) 용순(用純)을 죽이려 하여 용순이 서울로 도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왕규가 귀국하는 도중에 정주에 도착하니 김순부 등이 왕규는 세도 재상의 사위이므로 그를 억류하여 두고 볼모(質)로 삼아서 용순을 죽일 것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순부가 왕규더러 말하기를 “당신은 양반 가문의 출신으로서 이제 본처를 버리고 세도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비루하게도 목숨이 살고 있으나 명망과 절조는 이미 추락되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사대부(士大夫)들과 함께 조정에 있겠느냐”라고 하니 왕규가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나 의주 분도(義州分道) 왕도(王度)가 주선하여 주어서 곤경을 벗어나 돌아왔다. 신종(神宗) 때에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고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 동 중서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로 되었다. 나이 64세 때에 변변치 않은 병에 걸렸는데 “?망렷?줄 알면 위태롭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퇴직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가정에 있으면서 출입도 하지 않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영(耆英)은 왕규로 으뜸을 삼는다고 칭찬하였다. 고종(高宗) 15년(1228년)에 죽으니 나이 87세였으며 왕이 3일간의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장경(莊敬)이란 시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