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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같이 넓고 깊은 불교세계(佛敎世界)
<< 차 례 >>
<강원도의 사찰들>
1. 강릉(江陵) 학산(鶴山)의 굴산사지(崛山寺址)
2. 춘천(春川) 청평사(淸平寺)와 당(唐)나라 공주의 전설(傳說)
3.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의 구룡사(龜龍寺)
4. 삼척(三陟) 두타산(頭陀山)의 삼화사(三和寺)
5. 양양(襄陽)의 고찰(古刹) 진전사(陳田寺)
6. 양양(襄陽)의 선림원지(禪林院址)
7. 설악산(雪岳山)의 백담사(百潭寺)와 봉정암(鳳頂庵)
8. 설악산(雪岳山)의 오세암(五歲庵)과 귀때기 청봉
9. 태백(太白) 고한읍(古汗邑)의 고찰(古刹) 정암사(淨巖寺)
10. 영월(寧越) 무릉도원면(武陵桃源面)의 법흥사(法興寺)
<강원도의 사찰들>
1. 강릉(江陵) 학산(鶴山)의 굴산사지(崛山寺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鶴山里)는 내가 자란 고향인데 신라시대의 고찰 굴산사 터(址)가 있다.
신라시대 범일국사(梵日國師)에 의하여 창건된 굴산사는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고, 굴산사의 경내에 있는 굴산사지부도(崛山寺址浮堵, 보물 제85호)와 사찰의 깃발을 올리는 정문이었던 굴산사지당간지주(崛山寺址幢竿支柱, 보물 제86호) 등은 구정면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범일국사의 탄생설화(誕生說話)를 간직하고 있는 학(鶴)바위, 석천(石泉) 등이 있고,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정의윤 고택(古宅)과 조철현 고택, 신라시대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어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농요(農謠) 학산오독떼기, 1000년 묵은 은행나무, 서지골 고택, 커피의 원조 (元祖) 테라로사, 거유(巨儒) 정주교(鄭冑敎)님 댁 이야기 등 내가 자란 고향이다 보니 들은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다.
굴산사지당간지주 / 굴산사지부도탑 / 학바위 / 석천(石泉)
신라의 고승 범일국사(梵日國師)는 이곳 학산에서 태어났는데 동네 처녀가 아침에 우물(石泉)에 물을 길러 갔는데 바가지로 물을 뜨니 마침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日)가 바가지에 떠(汎) 있었다.
처녀는 목이 말라 우선 그 바가지 물을 마셨더니 곧바로 태기(胎氣)가 있었고, 산달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남들에게 소문이 날까 두려워 뒷산 바위 밑에 가져다 버렸다.
처녀는 마음이 애틋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침 바위로 올라가 보았더니 학(鶴)이 날개를 벌려 아이를 감싸고 있고 산짐승들이 젖을 물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처녀가 아이를 안고 내려와서 키우니 바로 훗날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다. 학이 아이를 감싸고 있던 바위를 학(鶴)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아기의 이름을 범일(梵<汎>日-해가 떠 있다)이라 지었다고 한다. 범일(梵日)은 자라면서 모든 것이 비범(非凡)하여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로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훗날 신라의 최고 승려로 추앙받아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은 범일국사(梵日國師)인데 어릴 때는 범일(汎日), 일명 품일(品日)이라고도 불렀다.
범일국사는 고향인 이곳 학산에 와서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하는데 당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총본산이 바로 이곳 굴산사였다고 한다. 한창 번성할 시기의 굴산사는 얼마나 스님들이 많았던지 아침에 스님들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그 뿌~연 쌀뜨물이 남항진(南港津) 동해바다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실제로 지금도 굴산사지(崛山寺址)를 둘러보면 엄청나게 넓어서 부도탑 등 각종 유적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 굴산사의 규모를 증명해 주고 있다.
범일국사(梵日國師)는 대관령 국사성황(國師城隍)으로 서낭당(城隍堂)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대관령산신(大關嶺山神)으로 추앙받는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과 더불어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의 주신(主神)이다.
대관령에서 국사성황과 산신을 단오장으로 모셔올 때 반드시 이곳 학산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굿당으로 위패(位牌)를 모시고와서 서낭제(城隍祭)를 지낸 후 단오장으로 모셔가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마을이름 학산(鶴山)이라는 명칭은 원래 굴산사에 유래하여 굴산(崛山)이라고 했었는데 여찬리와 학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장안재(長安峙), 노송 밭에는 학(鶴-왜가리)이 무리를 지어 깃들고 있어서 학산(鶴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개이름 장안재는 고려 말, 우왕(禑王)이 이성계로부터 쫓겨 귀양을 와서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곧 서울(長安)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굴산사의 많은 유적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굴산사지당간지주(崛山寺址幢竿支柱, 보물 제86호)인데 높이 5.4m로 우리나라 사찰들 당간지주 중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저 높은 지주에다 불화(佛畵)를 매달아 올리는 당간(幢竿)은 무엇으로 만들었으며 또 얼마나 컸을까?
우리 어머니는 굴산사 당간지주를 살개바우라고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살개’는 디딜방아의 발을 딛는 부분으로 두 가닥으로 벌어진 부분을 말하는데 당간지주가 돌기둥 두 개를 세워놓았으니 흡사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또, 어렸을 때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로 마고(麻姑)할멈이 치마폭에 살개바우(굴산사 당간지주) 두 개를 싸안고 황병산(黃柄山)을 넘어올 때 주루룩 미끄러져 내려오느라 산꼭대기에 다섯 개의 봉우리가 생긴 것이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ㅎ
2. 춘천(春川) 청평사(淸平寺)와 당(唐)나라 공주의 전설(傳說)
청평사(淸平寺) / 구송(九松)폭포 / 3층석탑(공주탑) / 공주못(公主像) / 공주굴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오봉산 기슭에 있는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에 영현선사(永玄禪師)가 백암 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한 절인데 1550년에는 승려 보우가 문수원을 개수 확장하여 절 이름을 청평사라 개칭했다. 그러나 6.25 때 화재로 일부 소실(燒失)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70년대에 전각(殿閣)들을 짓고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극락보전(極樂寶殿), 삼성각(三聖閣),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4호), 서향원(瑞香院), 청평루(淸平樓), 적멸보궁(寂滅寶宮), 해탈문(解脫門), 요사채(寮舍寨) 등이 있고, 주요문화재로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8호인 삼층석탑(공주탑)을 비롯하여 진락공 부도(眞樂公浮屠), 환적당 부도(幻寂堂浮屠) 등이 있다.
청평사는 춘천의 북쪽 소양호(昭陽湖) 건너편에 있어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역사가 오랜 청평사(淸平寺)도 물론 볼거리가 많지만 주변 산세가 너무나 수려(秀麗)하고 공주설화가 깃들어 있는 ‘공주탑(公主塔)’과 ‘공주 못(池)’ 등 사연이 깃든 볼거리들도 많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승용차(乘用車)를 가지고 가면 소양호 나루에 주차(駐車)하고 나룻배에 오르면 15분 정도 걸리는데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한다.
<공주탑(公主塔)의 전설>
중국 당(唐)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는 궁중에서 건물을 짓던 목수의 눈에 띄었는데 목수가 푼수도 모르고 공주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수군거리다가 당태종의 귀에 들어갔고 당태종은 즉각 목수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런데 목수의 혼이 상사뱀이 되어 공주에게 찰싹 들러붙어 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뵈지도 않고 공주 눈에만 보이는데 칭칭 감고 있으니 무거워서 몸을 추스릴 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하고 갖은 방법으로 떼어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때 마침 신라(新羅)에서 온 승려를 만나 물어보았더니 춘천의 청평사로 가서 치성을 드리라고 한다. 머나먼 길을 마다않고 조선땅 춘천의 청평사에 도착한 공주는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 절에 가서 밥을 얻어오겠다고 하지만 상사뱀은 꿈쩍도 않다가 절에서 뎅~~하고 종이 울리자 스르르 풀어준다. 공주가 회전문(回轉門-보물 164호)을 통해 절에 들어와 보니 스님들이 가사불사(袈裟佛事-法衣를 손질)를 하고 있어 공주는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한 후 끼어 앉아 바늘을 들고 몇 바늘 꿰매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사납게 빗줄기가 쏟아졌다.
잠시 있다 공주가 밥을 구해 공주굴로 돌아와 보니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둥둥 떠 있었다. 가련히 여긴 공주는 상사뱀을 고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평양공주는 구송폭포 위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삼층석탑(공주탑)을 세워 부처님의 공덕(功德)을 찬양하고 중국으로 귀국하였다는 설화(說話)이다.
인근의 폭포이름은 부근에 노송(老松) 아홉 그루가 있다하여 구송폭포(九松瀑布)라는 설과 폭포가 쏟아질 때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고 하여 구성폭포(九聲瀑布)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나는 30년 쯤 전, 40대 때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 써 보았다.
3.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의 구룡사(龜龍寺)
구룡사 대웅전 / 사천왕문 / 구룡소(九龍沼) / 치악산 정상(불탑)
치악산 구룡사 절터의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龍)과 한 스님(高僧)과의 겨루기 이야기....
스님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우려고 하자 연못 속에 살던 용 아홉 마리는 살 곳을 빼앗기게 되자 스님과 겨루기(내기)를 제안하는데 먼저 용들이 억수같은 비를 내리게 하여 스님을 익사시키려 했지만 스님은 끄떡도 않고 견뎌낸 후, 스님은 부적(符籍)을 써서 연못에 던져 넣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용들은 뛰쳐나와 동해(東海)로 달아나서 스님의 승리..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는 눈이 보이지 않아 가까스로 빠져나와 근처의 쬐끄만 연못으로 도망갔는데 그 곳이 지금 구룡사 옆에 있는 작은 연못 구룡소(九龍沼)라고 한다.
그래서 그 절 이름이 구룡사(九龍寺)였는데 세월이 지나며 점차 절이 몰락하기 시작하여 문을 닫을(閉寺)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고승(高僧)이 주지스님을 찾아와 절이 몰락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입구의 커다란 거북형상의 돌 때문이라고 하며 그 돌을 깨어버리라고 한다. 주지스님은 즉시 그 거북바위를 쪼개 버렸지만 신도(信徒) 수가 날로 줄어들고 더욱 몰락해갔다.
주지스님은 나중 거북바위를 쪼갠 것을 후회하며 거북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거북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구룡사(九龍寺) 대신 거북 구(龜)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한 후 번창(繁昌)했다고 한다.
정상을 오르는 등산로는 사다리 병창길, 계곡길이 있는데 제법 가파르고 정상에는 3개의 불탑이 있다.
4. 삼척(三陟) 두타산(頭陀山)의 삼화사(三和寺)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 / 두타사 적광전(寂光殿)/ 3층 석탑 / 철조 노사나불좌상(鐵造 盧舍那佛坐像)
무릉계곡 입구에 있는 유서 깊은 절 삼화사(三和寺)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건립하고 흑연대(黑連臺)라고 하였는데 그 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중창(重創)하여 삼공사(三公寺)라 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어 약사전(藥師殿)만 남았는데 현종(1660) 때 중건되었다고 한다.
삼화사는 순조 23년(1823)과 고종 43년(1906)에 두 차례 다시 소실(燒失)됐던 것을 재건축했다고 하며 현재 경내에는 3층 석탑(지정문화재 제713호)과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이 있다.
삼척에는 그 밖의 사찰들로 감추사(甘湫寺), 지향사(池香寺), 보본사(報本寺) 등이 있고 유림서원(儒林書院)으로 용산서원과 문경사(文敬祠), 문간사(文簡祠) 등의 사당, 정자각인 북평해암정(北坪海巖亭:강원도유형문화재 제63호), 애연정(愛然亭), 옥석정(玉石亭), 만경대(萬景臺) 등이 있다.
5. 양양(襄陽)의 고찰(古刹) 진전사(陳田寺)
진전사 적광보전(寂光寶殿) / 삼층석탑 / 진전사지 부도탑(浮屠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降峴面) 둔전리(屯田里)에는 이곳저곳에 절의 흔적과 석탑 등이 흩어져 있는데 조사결과 통일신라 때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진전사(陳田寺)로 판명되었다.
대찰(大刹)이었던 진전사지(陳田寺址)는 일제강점기에 둔전리에 있다고 하여 둔전사터(屯田寺址)로 불렸고 벌판에 서있던 탑을 둔전동탑(屯田洞塔)이라고 불렀다. 도의국사(道義國師)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시창자(始創者)였던 스님이시다.
조계종 신흥사(新興寺)에서는 2005년부터 진전사 복원공사를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적광보전(寂光寶殿)과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寮舍)만 완공된 정도인데 진전사지 3층 석탑을 보물 122호로 지정되었고 부도(浮屠)도 보물 439호로 지정되었다. 3층 석탑에는 8부신장(八部神將)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형식이고, 부도(浮屠)는 진전사의 창시자 도의국사의 승탑(僧塔)으로 밝혀졌다.
8부신장은 ①제바(堤婆) ②용(龍) ③야차(夜叉) ④건달파(乾達婆) ⑤아수라(阿修羅) ⑥가루라(迦樓羅) ⑦긴나라(緊那羅) ⑧마후라가(摩睺羅迦)를 말하며 이외에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넣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이곳 진전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일연(一然)스님이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된 곳이라고 한다.
6. 양양(襄陽)의 선림원지(禪林院址)
선림원지 3층 석탑(石塔) / 석등(石燈) / 부도(浮屠) / 탑비(塔碑) / 동종(銅鐘)
양양군 서면 황이리(黃耳里)에 있는 선림원지(禪林院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신라 순응법사(順應法師)가 창건한 절이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은 없고 3층 석탑(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弘覺禪師) 탑비와 부도(浮屠:보물 제447호) 등이 남아 있다.
선림원지 3층 석탑은 높이 410㎝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오래전부터 도괴(倒壞)되어 있던 것을 법당이 있던 남쪽 원위치로 옮겨 복원하여 세웠는데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신장(八部神將)의 조각이 또렷하다. 또 선림원지 석등(禪林院址 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형식을 따르고 있는 석등이며 부도(浮屠)는 대석(臺石) 위에 구름을 차고 오르는 용이 연좌(蓮座)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탑비(塔碑)의 모양을 보면 받침이 거북형상인데 머리(龜頭)는 용(龍)의 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위에 얹혀있던 탑비는 근처에 파손되고 마모가 심한 것이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춘천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대석(臺石)의 앞에 있는 네모에 홍각선사비명(弘覺禪師碑銘)이라고 새겨져있다.
선림원(禪林院)을 크게 중창한 분은 중국 원나라 승려인 감산대사(憨山大師)로 본명은 감산덕청(憨山德淸)이고 신라 헌강왕(憲康王) 6년(880) 이곳에서 입적(入寂)하는데 시호(諡號)가 홍각선사(弘覺禪師)라고 한다.
1948년에 출토된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선림원지 동종(銅鐘)은 온전한 모습으로 오대산 월정사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6.25때 사찰의 화재로 녹아 찌그러진 비참한 모습이 되었다는데 가슴이 아프다. 이 동종(銅鐘)은 현재 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복원한 온전한 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밖에도 이곳에서는 은제불입상(銀製佛立像), 각종 기와(瓦)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7. 설악산(雪岳山)의 백담사(百潭寺)와 봉정암(鳳頂庵)
설악산 공룡능선 / 오세암 / 용대리 매바위 인공폭포 / 대승폭포(大勝瀑布)
강원도 인제군에 걸쳐있는 설악산의 관광명소(觀光名所)들을 살펴보면 우선 백담사(百潭寺)와 백담계곡, 봉정암(鳳頂庵)과 오층석가사리탑(五層釋迦舍利塔), 오세암(五歲庵) 등 수많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들이 있고 설악의 명승으로는 대청봉(大靑峰), 공룡능선(恐龍稜線), 마등령(馬等嶺), 귀때기청봉, 대승폭포(大勝瀑布), 십이선녀탕(十二仙女湯), 복숭아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각 명소들에 얽힌 여담들을 간략히 소개해 보면(대부분 이곳을 다녀갔고 들으셨을 테니...),
백담사(百潭寺)는 백담계곡 입구에 있는 절로 계곡에 수많은 못(潭-沼)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고, 절 앞의 냇가에는 수많은 돌탑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전두환 대통령이 실각 후 부인 이순자와 머물던 곳으로도 유명했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도 일제강점기 이곳에 기거하며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봉정암(鳳頂庵)은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여, 이곳 오층석탑에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사(祖師)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봉정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는 두 번 이곳을 방문하여 1박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머리 위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금방 떨어질듯 하여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 소청(小靑), 중청(中靑)을 지나 2시간쯤 오르면 최고봉 대청봉(1,708m)이다.
8. 설악산(雪岳山)의 오세암(五歲庵)과 귀때기 청봉
오세암(五歲庵)은 원래 이름이 관음암(觀音庵)이었는데 이곳에 기거하던 설정대사(雪淨大師)는 고아가 된 4세의 조카를 데리고 와서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되어 식량을 구하러 아랫마을로 가면서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벽에 걸려있는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며 밥을 다 먹고 저 어머니를 보고 관세음보살~ 하면 돌보아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폭설(暴雪)이 쏟아져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올 수가 없어 이듬해 3월이 되어 돌아오면서 틀림없이 조카가 죽었을 것으로 여기고 돌아와 보니 조카가 관세음보살 앞에 앉아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는 설화... 그래서 오세암(五歲庵)이다.
십이선녀탕으로 가는 산줄기에 우뚝 솟은 귀때기 청봉은 자기가 제일 높다고 우쭐거렸는데 이 말을 들은 대청(大靑), 중청(中靑), 소청(小靑) 삼형제 봉우리가 쫓아와 귀때기를 후려 갈겼다고 하여... ㅎㅎ
대승폭포(大勝瀑布)는 높이가 88m로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瀑布), 개성(開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꼽히는데 얽힌 전설도 많지만 생략... 쳐다보면 정말 아찔하다.
용대리에는 매바위 인공폭포도 볼만한데 높이가 82m나 되는 인공폭포(人工瀑布)이다. 겨울이면 물을 끌어올려 얼려서 빙벽등반의 훈련장으로 유명하고, 여름에는 암벽등반의 훈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자동차 경주장인 인제 스피디움, 원대리 자작나무숲, 방동약수, 인제 황태축제 등도 있고 백담사와 그 주변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 보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9. 태백(太白) 고한읍(古汗邑)의 고찰(古刹) 정암사(淨巖寺)
정암사 수마노탑 / 태백산정암사 / 정암사 적멸보궁 / 조양산 성불사
고한읍(古汗邑)에 있는 정암사(淨巖寺)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절로, 조계종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인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山西省) 운제사(雲際寺)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齒牙), 불가사(佛迦裟), 패엽경(貝葉經) 등을 받아 귀국하여 이곳 태백산에 금탑(金塔), 은탑(銀塔), 수마노탑(水瑪瑙塔)을 쌓고 그 중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유물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금탑(金塔), 은탑(銀塔)은 수마노탑 양쪽 산록에 세웠는데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탑이라고 한다.
사찰 내에서는 강원도 지정문화재 자료 32호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을 비롯하여, 범종각(梵鐘閣), 육화정사(六和精舍), 요사채(寮舍), 삼성각(三聖閣), 자장각(慈藏閣) 등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 천연기념물 73호인 열목어(熱目魚) 서식지(棲息地) 등이 있다.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정암사의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적멸보궁(寂滅寶宮) 뒤쪽의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세웠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瑪瑙石)으로 쌓은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7층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탑을 쌓은 돌은 전체길이 30~40cm, 두께 5~7cm 크기의 회색 마노석으로 정교하게 쌓아져 언뜻 보면 벽돌(模塼)을 쌓아 올린 듯하다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주존불(主尊佛)은 모시지 않고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수마노탑을 지키는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 밖에도 정선읍에 있는 조양산록(朝陽山麓)의 성불사(成佛寺), 적조암(寂照庵), 수광암(水光庵) 등도 있다.
전해지는 설화(說話)에 의하면 자장율사께서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었는데 꿈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나타나서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고 하고는 사라졌다. 태백산으로 간 자장율사는 갈반지를 수소문하며 골짜기를 헤매다가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갈반지라 생각하고 석남원(石南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정암사(淨巖寺)라고 한다.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너덜너덜한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사가 못마땅하여 시자(侍者)가 나무라자 그냥 그렇게 전하라고 한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율사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자 거사는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수습하여 근처의 동굴(石穴)에 안치했다고 한다.
정암사가 있는 태백산은 단종이 서거한 후 경치가 좋은 영월 동강(東江) 어라연(魚羅淵)에 신선으로 살려고 했는데 동강의 물고기들이 비단결처럼 떼로 떠올라(魚羅) 단종께서는 태백산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단종은 백마를 타고 이곳 태백산으로 와서 산신령(山神靈)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10. 영월(寧越) 무릉도원면(武陵桃源面)의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寂滅寶宮) / 제2보궁 약사전(第二寶宮藥師殿) / 징효대사 석분(石墳)
영월 사자산(獅子山) 연화봉 아래 법흥계곡에 위치한 법흥사(法興寺)는 조계종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 흥녕선원(興寧禪院)의 본사 흥녕사(興寧寺)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산파의 개산조(開山祖)는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개창한 이는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라고 한다.
이 흥녕사(興寧寺)는 신라 말 진성여왕(眞聖女王) 때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다가 중건되지만 고려 때 다시 소실되는데 1901년에 중건하여 법흥사(法興寺)로 사찰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1930년에 다시 중건하고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찰이다.
이곳 대웅전(極樂殿)은 아미타전(阿彌陀殿),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는데 주존불(主存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양 협시보살(挾侍菩薩)은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다.
이 법흥사(法興寺)에는 신라 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와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고 그 뒤편에는 석분(石墳)이 있는데 고려전기의 형식인 돌로 쌓은 돌방무덤으로 자장율사가 기거하던 토굴이었다고 한다.
법흥사 일주문
법흥사 사찰로 들어가는 일주문(一柱門)이 독특하고 재미있는데 우선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 위엄이 있고 현판은 사자산법흥사(獅子山法興寺)라 되어있는데 뒤쪽의 현판은 전서(篆書)로 되어있어 읽기도 쉽지 않은데 사자산문 흥녕선원(獅子山門 興寧禪院)이라 되어있다.
또 양쪽 기둥은 엄청나게 굵은 배흘림기둥인데 오른쪽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의미하는 흰 코끼리가 받치고 있고 왼쪽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의미하는 사자(獅子)가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다 보면 극락전을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인 금강문(金剛門)이 있는데 2층의 정자각 (亭子閣)으로 현판(懸板)이 원음루(圓音樓)이고 아래 1층의 현판은 금강문(金剛門)이다.
이 문을 지나면 곧바로 대웅전이 있는데 여기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부도탑과 적멸보궁까지 가려면 언덕 비탈길에 놓인 돌계단을 제법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이곳 흥녕선원 흥녕사가 있던 자리인 흥녕선원지(興寧禪院祉)는 강원도 기념물 제6호로, 석분(石墳) 바로 곁에 있는 징효대사부도탑(澄曉大師浮屠塔:貝葉經 포함)은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흥사 금강문(金剛門)과 원음루(圓音樓) / 징효대사 부도탑 / 징효대사 탑비 / 적멸보궁 내부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부도형식으로 세워진 3층의 징효대사부도탑은 징효대사의 사리(舍利)나 골분(骨粉)을 모신 부도이고 자장율사가 모셔온 진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는 자장율사가 모시고 있다가 사찰 뒤에 있는 사자산(獅子山) 어느 곳엔가 모셨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이 부도탑(浮屠塔)과 패엽경(貝葉經)을 묶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법흥사가 보관하고 있는 패엽경(貝葉經)은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인도에서 불경(佛經)을 영라수(靈羅樹)라는 나뭇잎에 범어(梵語)로 쓴 것이라고 하는데 패다라엽(貝多羅葉)이라고도 한다. 이 부도탑의 높이는 2.44m이다.
또,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징효대사탑비(塔碑)도 있는데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어있고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석비형식이라고 한다. 이 석비(石碑)의 형태를 보면 비석의 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거북의 모양이고 비석의 위를 덮고 있는 개석(蓋石)은 용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양으로 높이가 2.77m.
이 부도탑과 탑비 옆에 있는 자장율사가 기거하였던 석굴(石墳)은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어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건물로 알려진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불상은 모시지 않고 건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커다란 창이 뚫려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사자산 어디엔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오대산 중대사의 적멸보궁도 같은 모양으로 창밖으로 사리탑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5대(五大)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꼽아보면
①경남 양산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②강원 평창 오대산(五臺山) 중대사(中臺寺) ③강원 인제 설악산(雪嶽山) 봉정암(鳳頂庵) ④강원 영월 사자산(獅子山) 법흥사(法興寺) ⑤강원 정선 태백산(太白山) 정암사(淨巖寺)라고 한다.
사자산 법흥사에서 법흥계곡을 내려와 계곡물이 주천강과 만나는 강가에 정자각(亭子閣) 요선정(邀僊亭)과 커다란 바위에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새긴 요선암(邀僊岩) 석불(石佛)과 석탑(石塔)도 있다.
이곳 주천강가에는 통일신라 흥녕서원(興寧禪院)의 도윤국사(道允國師)와 징효대사(澄曉大師)가 포교(布敎)를 하던 곳으로 당시에는 이곳에 작은 암자(庵子)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요절한 선왕 단종(端宗)의 복위를 위하여 노력하였던 숙종(肅宗)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신 후 그 아픔을 어제시(御製詩)로 남겼는데 당시 이곳 주천현루(酒泉縣樓)인 청허루(晴虛樓)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청허루가 화재로 소실되자 영조(英祖)께서는 숙종의 어제시를 다시 몸소 쓰시고 또 자신의 어제시도 지어 영월로 내려 보내서 새로 건립한 청허루에 간직하게 하였다.
그 후 정조께서는 두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보관하도록 손수 장문의 서문(序文:敬吹酒泉縣樓所奉序)을 써서 내려 보내 청허루에 걸어놓게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사람들의 관심도 없어지고 청허루도 퇴락하여 무너지자 지방의 민가(民家)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1913년에야 요선정(邀僊亭)을 짓고 모시게 되었다.
요선정(邀僊亭,暮聖軒) / 요선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1,2,3
요선정(邀僊亭)에는 어제시(御製詩)와 서문(序文)이 걸려있고 모성헌(慕聖軒)이라는 현판도 걸려있다.
요선정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불상을 새겨놓은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상은 높이가 3.5m나 되는데 두상(頭像)은 양각(陽刻)으로, 몸통은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石塔)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암자(庵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요선(邀僊)이라는 말의 의미는 ‘신선(神仙)을 맞이하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