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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필그림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자
할렐루야, 오늘도 성 삼위하나님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고 귀한 은혜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같이 은혜 받읍시다. 라고 인사 나누도록 합시다.
오늘은 제가 어렸을 적에 들었던 욕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욕 중에 큰 욕은 너희 아버지 이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른다면서 뭔가를 해달라고 협박성 부탁을 하면 우리 아버지 이름 부르지 말라고 그러면서 그 친구가 부탁한 걸 들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나시는 분들 있어요? 하나 더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욕은 애비 없이 자란 쌍놈이란 말 들어봤어요? 들어봤구나.
지금 생각하면 이름 부른다는 것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 이름을 함부러 부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욕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것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침해당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욕을 먹는 것과 같이 생각이 되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오늘 이야기는 하나님 이름을 어떻게 하면 영광 돌리까? 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기독교회사 중에서 최고의 신앙인이랄 수 있는 사도 바울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자기처럼 살라고 한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는 오늘 읽은 말씀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말을 좀 더 확대시켜서 말하면,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또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하여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였던지 우리 장로교회를 일으켰다는 존 칼뱅 목사님은 인간의 본문이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얻어먹는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이 높아지고 빛날 수 있는 일만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목사님들이 재판정에 재판 받으러 들락거리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성도님들이 좋은 일, 선한 일 어려운 사람 돕는 일. 그런 일을 이름도 없이 하다가 그 일이 밝혀지면 그때 ‘야,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라’ 그러면서 하나님 이름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착한 일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되란 것이라고 마태복음 5장 16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민족은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에도 자기가 잘못하면 자기 아버지가 욕을 얻어 먹기에 아비 없이 자란 쌍놈 같단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 분의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땅에서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땅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를 낳아주신 육신의 아버지고 하늘에 아버지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욕을 돌리는 것이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 누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땅에서 일만 걱정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치 않고 그런 일을 계속하다간 용서의 기회마저도 놓쳐 버리면 그것은 큰일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는 가장 처참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들이 돌아갈 때 보면 지금까지는 계속 잘못했다가도 죽은 부모님 시신에게 만큼이라도 잘해 드리려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 것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부질없는 것인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부모가 살았을 때 잘하고 공경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나님아버지가 계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고 한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처럼 그런 사람들은 영혼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면 믿음의 눈.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그 하나님아버지께서 천지 만물을 그 뜻대로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똑 바르고 선한 행실을 다른 종교인들 앞과 불신자들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런 자들 앞에서 우리 언행과 행동거지를 올바르고 착하게 가짐으로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애비 없이 교육 없이 막 자란 아이처럼 지 맘대로 살면 ‘예수 믿는 것들이’ 란 욕을 얻어먹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이 우리 이웃들에게 옆 사람들에게서 뭐라고 평가받고 살고 있는 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평가를 받고들 계십니까? 저는 제가 자주 가는 인터넷 카페에 올려 진 글을 보며 그렇다. 저렇게 사는 것이 큰 교회 하는 것보다 낫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분에게도 소개합니다. 제가 펌 해온 카페입니다.
<열심히 하던 장애인시설의 자리를 본의 아니게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일을 저질러 논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남아 있는 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힘든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사 비용도 받지 못하고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폐가나 다름없는 농가주택을 월세로 얻어 작년 3월3일에 이사를 했습니다.
동네 가운데로 장애인시설이 이사 온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동네에는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80%, 절에 다니는 분들이 15%, 교회에 나가는 분들이 2%, 토속신앙을 믿는 분들이 3%입니다. 가뭄에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농부처럼,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죽기 살기로 어른들을 섬겼습니다.
요즘은 동네 어르신들이 오셔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죽을 때까지 우리랑 이 동네서 같이 삽시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제는 성당에 다니는 분들도 "우리 목사님~" 절에 다니는 분들도 "우리 목사님~"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우리 목사님~" 모두가 저를 표현할 때 "우리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눈물 나게 감사할 일입니다.
그저께 있었던 일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녀회장님이 "우리 목사님 계셔?"라며 현우에게 묻습니다.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목사님 반찬하게 한다며 바다에 가서 파래를 뜯어 온 것입니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밥상에 파래 김치가 올라왔습니다. 감사기도와 축복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하지만 큰 교회가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면요~ 저희와 함께 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출처] 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목장. 작성자 자오 나눔
교회의 진정한 힘은 크기에 달려 있지 않고 성도들의 변화된 삶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평가하는 것은 목사냐, 장로 권사란 직분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고 있느냐? 그것을 채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정말 믿어진다면 손해를 봐도 참을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것을 보고 손해보다도 훨씬 위로와 보상을 해 주실 것을 믿기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자존심이 심히 상하여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할 때도 있겠지만 주님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도 참으셨지 그러면서 상대방이 왜 저렇게 화를 낼까 하며 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며 참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사람이 그때 너그럽게 대해서 고마웠노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 너 요즘 많이 달라졌더구나. 고맙다. 신앙이 제대로 되어서’ 라고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알려 준 말씀 먹든지 마시던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란 말을 꼭 기억하며 사는 훈련이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뭐가 되어져야 한다고요?) 훈련.
2. 두 번째 이야기는 32부터 나오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뭐라고요?)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되는 자가 되라. 우리 직접 한 번 읽어봅시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이 말은 안 믿는 사람에게 란 말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비방당하는 사람- 거치는 자들이 되지 말고 그런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 식구들에게 모든 사람이 기쁘게 여기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그러려고 하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전에 우리교회 출석하셨던 고영욱 장로님 이야깁니다. 그 고 장로님이 경찰관인데 그 동네에서 공부를 해서 글씨를 알고 청년 때부터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쳤답니다. 그리고 편지가 오면 대신 글을 써 답장도 해주고. 그러다가 6. 25를 만났다는 겁니다. 6.25가 터지니까 농민, 노동자 세상이 왔다 그러면서 그 면에서 글을 아는 사람 면사무소 사람들. 학교선생. 경찰 공무원 그리고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주들 다 잡아 죽였답니다. 그런데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고 장로님에게 어서 피하시오. 어서 숨으시오. 그러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앞에서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자가 되어야지 걸림돌이 걸리적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란 분이 우리 사람을 거미 형, 개미 형, 꿀벌 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해서 유명해졌지요. 거미처럼 남의 것들을 빼앗아 먹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인간. 단합도 잘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와 자기집단만 알고 개인주의 형 인간. 꿀벌 형 사람들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밀알 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밀알 아시죠?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한 알의 밀알을 통해 수많은 밀알을 탄생케 할 수 있으니 밀알의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밀알이 되어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밀알 정신- 많은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죽는다는 희생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본을 보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늘 나온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다 간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 성도들도 그런 희생정신을 가졌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숫자는 적었지만 애국자들이 독립투사들이 그렇게 많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을 깨우치고 심훈이가 지은 상록수를 보면 본명 최용신인 채영신은 기독교인으로 나중에 건국훈장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을 죽인 청년을 사형시키지 않고 자기에게 주면 양아들을 삼고 새 사람 되게 만들게 했다는 손양원목사님이 그럴 수 있었던 것도 기독교의 희생정신을 본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정신이 너무 많이 변질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 남에게 유익을 주려는 이타주의. 거기서 한 걸을 더 나가서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희생할 수 있다는 희생정신. 이 정신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기독교 정신 밀알 정신 희생정신을 되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를 포함한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이 극심한 이기주의,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손해 보고 참으면 순간적으로 그렇게 바보처럼 보이고 남들 밑에서 섬기면 그것도 바보처럼 보이고. 좀 희생하라면 내가 왜 희생하고 살아야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라고 생각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이미 세상이 주는 생각,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과 오십년 전만해도 우리민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님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들을 하셨습니다. 배우고 못 배우고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큰 형님 대학공부 시키기 위해서 밑에 동생들 학교 보내지 않았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 가서 먼지투성이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버스차장을 해서 자기 동생들 공부시켜라고 그렇게 혹독한 근로조건 속에서도 일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불과 오십년 전 일이었습니다.
경제가 발전되다보니 그 좋았던 희생정신, 이타정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금만능주의, 지독한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마음을 점령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독교인들이 더 할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너나 믿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주님을 늘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때 중동지역에 우리나라 건설회사에서 근로자를 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1년에서 몇 년간 일하러 갔지요. 그때 남편이 ‘여보, 나 없는 사이 아이들 잘 돌보고 살림 잘하고 있어’ 하고 가지 않겠느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아내들은 남편이 더운데 가서 고생하며 붙여준 돈을 아껴 쓰며 어찌 라도 해서 모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편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딴 생각, 딴 남자 생가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며 승천하셨습니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고 떠났지 않습니까? 다시 돌아와서 일한대로,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니 깨어 있어 기다리라고 하고 떠났지 않았습니까? 주님 다시 돌아오신다는 재림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살림 잘하란 말을 기억하며 살림 잘하는 아내처럼, 선하고 착한 신앙인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 유익을 끼치며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다시 돌아올 날 멀지 않았습니다. 주님 오실 때 성 춘양이처럼 변학도의 회유와 핍박 속에서 절개를 지켰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할 것이냐? 아니면 변질되느냐 차이에서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냐 바깥 어둠에 쫓겨날 것이냐가 결정 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챔피언이랄 수 있는 사도 바울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고 영광이 되는지를 생각하며 행동하라고 했고 두 번째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나만을 위한 행동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행동인지를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살면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는 것도 되고 전도도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여러분, 부디 기독교 밀알 신앙을 굳게 붙잡고 나가기 바랍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 한번 다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