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 김종욱 교수
8. 불교 윤리에서 의무론과 목적론
이제 불교의 인과업보 사상에 담긴 의무론적 요소와 목적론적 요소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앞서 윤리학에서 목적론은 행위의 목적과 그것이 실현된 결과와
그런 결과의 행복을 얻는 데 유용한 효용성 등을 강조하는 이론이라고 했었다.
간단히 말해 목적론이란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추구하는 논리라고 하겠다.
그런데 불교의 업설에서는,
선한 행위는 즐거운 과보를 악한 행위는 괴로운 과보를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업과 보 사이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강조했었다.
따라서 목적론이든 업설이든,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목적론]과
즐거운 과보를 가져다 주는 것[업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행복한 결과란 고통의 부재나 욕구의 충족 또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쾌락 등을 의미하고,
즐거운 과보는 부귀영화나 무병장수 혹은 천계에 태어남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업설에서 진정으로 지향하는 것은 욕구의 충족을 통한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욕구의 소멸을 통한 행복의 추구라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는 미래의 과보를 약속함으로써 집착을 야기하는 상대적인 선에 머무르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 무루(無漏)의 마음으로 행하는 절대적인 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업설과 의무론의 관계를 살펴보자.
의무론이란 양심에 비추어 자명한 의무와 동기의 순수성 및 원칙의 고수 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의무론에서는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선의지]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불교의 업설에서는,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과 악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인 의지의 자유이지만,
전자는 즐거운 과보를 후자는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의무론이나 업설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의 내용은 양자가 상이하다.
의무론에서의 순수한 마음이란 신의 섭리나 율법 또는 양심에 따르는 것인 반면,
불교에서의 순수한 마음은 다르마에 따름으로써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그 내용이 상이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의무론에서처럼
규칙의 일방적인 강제나 율법적인 의무를 완고하게 고수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동기에서 여러 가지 방편(upa a)을 고려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순수한 마음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업설에서 의지(cetana, 思)를 중시하는 시각을 발견함으로써,
업설에 담긴 의무론적이고 동기론적인 요소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업은 심리적 작용처럼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과 신체적 활동처럼 몸으로 짓는 업(身業)과
언어적 표현처럼 입으로 짓는 업(口業)이라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구의(身口意) 3업은 언제나 의지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므로,
업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결과로서 나타난 행위의 선악 보다는,
그 행위를 낳게 한 동기나 의지라는 마음의 선악을 더 중시한다.
또한 신구의 3업에서 의업은 사업(思業)으로, 신업과 구업은 사이업(思已業)으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분류 방식 자체가 행위(業)의 비중을 의지(思)에 두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사업이란 행위를 하려는 의지적인 마음 작용을 뜻하고,
사이업이란 의지적인 사업(思業)이 그치고(已) 신체와 언어의 행위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데,
양자는 모두 의지를 중심에 놓는 분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지나 마음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중시하는 선악관은 마음을 본질로 하는 선악관을 낳는다.
즉 불교에서 불선(不善) 또는 악의 근본은 탐욕(貪)과 증오(瞋)와 미망(痴)이라는
세 가지 번뇌의 마음(三毒心)이며, 선의 근본은 이러한 세 가지 번뇌의 마음의 소멸인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삼독심에서 벗어나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自淨其意],
인과의 업보에 더 이상 빠지지 않기[不落因果]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의 동기와 바람직한 결과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업설의 진정한 의미는 순수한 마음을 무시한 채
즐거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만 밝은 것[목적론]도 아니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효과적인 여러 방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동기의 순수성이나 원칙의 고수만을 고집하는 것[의무론]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제대로 이해된 불교의 업설은 동기론과 결과론, 의무론과 목적론 사이의 중도인 것이다.
물론 이때의 동기란 삼독심에 빠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서,
자아의 집착에서 나온 이기심이 사라진 동기를 말하며,
결과란 여러 가지 방편들을 통해 최고선으로서의 열반을 성취하는 것
또는 그런 최고선을 실현하기에 알맞게 사회적 배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기에 앞서,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근원 상태를 먼저 보고,
여기에서부터 어떻게 선과 악으로 갈라져 나가는지를 관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도달된 근원 상태가 더욱 의미 있으려면,
세간의 선악 구분을 무가치한 것이라 하여 던져 버리지 않고,
세간이나 사회의 배경적 구조를 그런 근원 상태에 근접하게끔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불교의 윤리란 도덕과 도덕 이전의 조화이자,
개인적 완성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 윤리와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 윤리의 만남이라고 할 것이다 . <끝>
김 종 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철학사상 연구소 특별연구원.
서울대 강사.
논문으로 <하이데거에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하이데거와 근대성>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