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겨울호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이윤서 공광규 최서림 김선태 정영선 박정란 오주리 정구민 장진 성강숙
까마귀
이윤서
중앙선 너머 차도에
어둠 한 마리
어둠 두 마리
어둠 열 마리
어둠 스무 마리 내려앉았다
경적을 울려도
아스팔트에 눌러 붙은 검은 그림자들은
날아오를 줄 모른다
경고 따위, 이미 집어 삼킨 듯
리듬을 타듯 찍어 올리는
선홍빛 만찬
피묻은 고양이 꼬리털이
덮어쓴 새떼 사이로 삐져나왔다
집요하게 물어뜯는
까만 부리의 어둠이
내 입속으로 날아든다
숨이 막힐 듯
어젯밤 먹었던 육회가
명치끝에 걸린 듯
보이지 않는 내 꼬리에
붉은 전조등 불빛이 물들고 있다
--애지 가을호에서
까치와 나는 한 식구여서
ㅡ공광규
신도시 아파트 단지
서재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느티나무 숲
수평으로 뻗은 나뭇가지가 많아
까치 떼가 와서 살지
어느날부터였나 내가
늦은 밤 전등을 끄면 까악 까악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까악 까악
인사를 하지
까치는 내가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알아
언제부턴가 나는
까치 소리와 같이 잠들고
까치소리와 같이 일어나지
까치와 나는 한 식구여서
까치야 이제 불 끄고 자자 하면 까악 까악
까치야 나 일어났다 하면 까악 까악
대답하지
--애지 가을호에서
사랑꾼
최서림
코를 박고 죽고 싶을 만큼 큰
누드모델의 유방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찐빵만 해지다가 호두만큼 쪼그라든다.
계속 보고 있노라면 내 몸에서도 비린내가 난다.
속치마로 질끈 동여맨 조선 여자들의 앞가슴을
눈을 감고 그윽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유방이 막사발만 하다가 보름달만 해진다.
설백(雪白) 갑사너울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
그 속에 들어가 한 석 달 열흘 동안 자고 싶어진다.
세상 밖에서 세상 안에다
젖을 물려주고 있는 조선 여자들,
스스럼없이 풀어헤친 젖가슴이
이 세상보다 넓고 크다.
세상 밖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난다.
--애지 가을호에서
낚싯바늘
김선태
낚시를 하다 보면
물고기가 제 위장 깊숙이까지
낚싯바늘을 삼켜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땐 낚싯바늘을 빼지 말고 방생해야 한다
평생토록 낚싯바늘을 품고 살아야겠지만
어쩔 수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시라는 낚싯바늘에
제대로 걸린 적이 없다 한 번도
황홀하게 목숨 걸지 못했다 한 번도
나를 낚지 못했다 오늘도
허탕이다
--애지 가을호에서
선풍기
정영선
날개를 툭 건드리고 바람은 지나간다
바람의 주인은 나야
설득하고 싶은데 장난만 하는 바람
애착하던 이는 어디가고
낯선 곳에 있다
수거되기 전 둘러본다
꿈을 가동하던 때가 그리워
대형 에어컨의 입이 찬바람을 불어대면
거인 앞에서 왜소해져
자본 앞에서 초라해져
강자 앞에서 주눅 들어
그래도 가까이 몰아주던 작은 바람은 소중하지
낙오하는 바람은 없지
다수 아닌 개인으로 부는 바람이지
재개발 공고가 붙은 벽
일손을 놓고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다
높아갈 땅값의 꿈을 꾸는 사람과
땅이 꾸는 꿈은 멀어서
불안이 시멘트벽을 삭힌다
노을은 먼데 있고 어스름이
저녁을 밀고 간다
작은 바람은 작은 바램으로 도는 것이
꿈이다
외진 곳을 파고 든다
--애지 가을호에서
엄마 꽃
박정란
꽃처럼 곱던 시절
퇴근길 꽃집을 지날 때
아련히 풍겨오던 프리지아 향기
한 다발 사 들고 집에 들어서면
“꽃 대신 꽁치나 사오지”
혀를 차시던 내 엄마
작은 화단과 텃밭엔
장미를 심으려던 아버지와
고추,가지 한 포기라도 더 으려던 어머니
작은 다툼은 팽팽했다
훗날 주부가 된 나도
꽃을 사고 싶을땐 꽁치를 샀다
식탁 위 잘 구워진 꽁치를 보면
늘 엄마도 곁에 와 계시다
프리지아는 꽁치 꽃이다
--애지 가을호에서
걷는 부처
오주리
깨달음 얻기 위해 일곱 머리 가진 나가(Nāga) 앞에서 명상하는 싯다르타
고요 가로지르는 고뇌의 끝, 진흙이 연꽃 피워올리는 순간
진리의 수레바퀴 법륜(法輪)은 존재의 시작점으로 굴러가니
사라수(沙羅樹) 가지 아래서 날 낳으시고 이레만에 하늘 가신 어머니여, 내게 다시는 없는 사랑이여
눈물짓는 아들의 산화공덕으로 붉어진 노을 너머 도리천의 설법 마친 후
하늘에서 지상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단 내려오는 여래(如來)
지평선 끝까지 죽어가는 모든 이 위하여
눈 지그시 감은 채 하이얀 불꽃의 광배(光背)에 싸여
썩어가는 시체 덮어둔 천 걷어 제 몸에 두르니
분소의(糞掃衣) 투명한 날개처럼 하늘거리건만
왜 고통에서 태어나 고통에 죽어야 하는가
답 모르는 채 엎드려 우는 여인 위하여
가만히 서 미소 짓는 황금빛 불상
그의 이름,
‘걷는 부처’
--애지 가을호에서
파란자물쇠
정구민
산은 문을 잠그지 않는다
사계절 문 열어두고
푸른바람 새소리 산짐승 방목한다
날숨 가지에 햇빛
들숨 가지에 달빛 걸어두고
오른쪽으로 누웠다 왼쪽으로 일어나는
초목의 자음모음에
바람이 슬쩍 팔짱을 낀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두 개의 감정
눈동자에 주름 키우며 산을 지키고 있는 외발의 나무들
푸른피는 구름처럼 흐르다 한 채의 봄으로 태어난다
꽃진자리 길한 기운을 모아 동글동글 태어나는 둥근우주
산능선에 새울음이 걸려있다
새 울음에 산목련향이 난다
산그늘이 너무 뜨거울 때
파란자물쇠로 산문을 잠그면
없던 계절이 바글바글 태어난다
--애지 가을호에서
손
장진
손은 세번 째 입이다
입술이 말하고
눈빛이 말하고
그래도 다 못한 말 손이 한다
손은 입을 보고 경고한다
말을 지겹게 하지 말라고
손뼉 짝짝
두손 모으기
악수
경례
손은 천 개의 말을 단 한순간에 다한다
진심을 담아 하는 손동작들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손이 하는 말은
귀도 듣고
눈도 듣는다
입이 하는 말은 귀만 듣기에
반쪽 짜리 말이다
손으로 말하라
눈과 귀가 들은 말은
오랫동안 심장에 남는다
--애지 가을호에서
ㄱ과 ㅇ 사이
성강숙
나도 모르게 조금 깊이
꽃들이 만발한 꽃밭에 얼굴을 묻었다
윙윙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한두 걸음 뒤에서 감상하라는 듯
벌의 경고음
멈칫,
꽃으로부터 얼굴을 떼 내자
나와 꽃 사이에
몇 개의 싱그러운 바람이 지나갈 정도의 거리가 생겼다
사랑이라 이름 짓기 좋은 거리
너무 가까우면 눈멀고
너무 멀면 캄캄해지는
거리
ㄱ과 ㅇ쯤의 거리
그래야 그 너머까지 바라볼 수 있는
너와 나 사이도
딱 그만큼이면 좋을
--애지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