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엽(嫩葉)/박경현
벚꽃잎 흩날리다
바닥에 누웠어도
가녀린 눈엽들은
새파란 숨 쉬거늘
으르렁
아퀴다툼에
어떤 싹이 틀런가
++++어떤 감상++++
박경현 시인의 시조 <눈엽(嫩葉)>은 낙화(落花)와 신생(新生)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거울삼아, 갈등과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 사회의 현실을 매섭게 질타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작은 거인 같은 지사적(志士的) 시조입니다.
단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격 평시조 틀 안에 이토록 팽팽한 긴장감과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응축해 낸 필력이 놀랍습니다.
☞[초장] 소멸과 하강의 이미지
'벚꽃잎 흩날리다
바닥에 누웠어도'
봄의 정점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벚꽃잎이 져서 바닥에 눕습니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소멸이자 하강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허무주의나 감상적 상실감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시선을 돌려 다음 단계의 생명을 포착합니다.
☞[중장] 신생과 생명력의 대비
'가녀린 눈엽들은
새파란 숨 쉬거늘'
화려한 꽃이 진 자리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연약한 ‘눈엽(어린 잎)’들이 돋아납니다. 비록 ‘가녀린’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내쉬는 숨은 ‘새파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초장의 소멸과 중장의 신생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지는 것이 있어야 새로 돋는 것이 있다”는 자연의 거룩한 순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연결어미 ‘~쉬거늘’은 자연의 이 순수한 생명력과 종장에서 다룰 인간 세상의 야만성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종장] 현실 비판과 비장한 탄식
'으르렁
아퀴다툼에
어떤 싹이 틀런가'
‘으르렁’이라는 강렬한 3음절의 도입은 이 시조의 백미입니다. 자연의 고요하고 푸른 호흡과 정반대되는, 마치 짐승들이 먹이를 두고 싸우는 듯한 인간 사회의 야만적인 소음입니다.
시인은 이 이권 투쟁과 갈등의 현장을 ‘아퀴다툼’이라는 밀도 높은 시어로 압축합니다. 꽃이 지면 푸른 잎이 돋는 자연과 달리, 매일같이 으르렁거리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인간 세상의 토양에서는 과연 미래를 향한 희망의 싹, 혹은 올바른 가치의 ‘어떤 싹이 틀런가’라며 깊은 한숨과 탄식을 내뱉습니다.
☞작품의 예술적 성취와 매력
① '청각과 시각'의 완벽한 전도(顚倒)와 대조
이 시조는 감각적 대조가 매우 뛰어납니다. 초·중장에서는 벚꽃잎과 새파란 눈엽이라는 '시각적 풍경'이 중심을 이룹니다. 자연은 소리 없이 묵묵하게 자기 순리를 다합니다.
반면, 종장에 이르러서는 ‘으르렁’이라는 강력한 '청각적 자극'이 시상을 지배합니다. 고요하게 생명을 키워내는 자연과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서로를 갉아먹는 인간 세상의 대비가 감각적으로 아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② 고도의 절제미를 갖춘 '정격시조'의 격조
평시조가 가진 형식적 규칙을 자로 잰 듯 완벽하게 지켰기에 시상의 울림이 더 묵직합니다. 종장 첫 구 으르렁(3음절)의 파격, 둘째 구 아퀴다툼에(5음절)의 무게감, 그리고 어떤 싹이(4음절) 틀런가(3음절)로 이어지는 하구의 매끄러운 가락은 정격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형식미를 보여줍니다. 특히 마지막의 ‘~틀런가’라는 독백 조의 어미는 독자에게도 '과연 우리는 어떤 싹을 틔우며 살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총평
박경현 시인의 <눈엽>은 겉으로는 봄날의 정취 속에서 건져 올린 자연시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대의 혼란과 인간의 영악한 이기주의를 꾸짖는 노시인의 매서운 시대정신과 서슬 퍼런 서정(抒情)이 숨어 있는 작품입니다.
자연은 쓰러짐(누웠어도)을 통해 새로운 미래(눈엽)를 준비하는데, 인간은 오히려 제 살을 깎아 먹는 싸움(아퀴다툼)으로 미래의 싹을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짧은 호흡 속에 거대한 성찰을 담아낸, 참으로 격조 높은 절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