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끊임없이 워싱턴을 방문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두환 입장에서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 집요한 시도에도 카더 행정부와 접촉이 닪지 않자. 전두환은 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카터 행정부와의 접촉을 중단하는 대신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과 선을 대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11.4 대선에서 승리했고 전두환은 좋아라했고 신군부 인사들도 환호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눈물을 흘렸다. 제 2심에서도 사형선고가 내려지던 상황에서 '인권외교'를 가치로 내내건 카터가 재선된다면, 자신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을 지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든든한 후원을 얻은 전두환에게는 새로운 헌법에 의한 대통령 취임이 남아있었다. 미국에서 돌아 온 전두환은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 선거로 이뤄지는 대통령선거에 임하였다. 전두환은 90.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바빠진 건 KBS 였다. '제 12대 대통령 취임 경축쇼'를 전국 순회 공연으로 기획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톱 가수들이 전두환의 공연 참석시간에 맞춰 노래를 부르려고 순번 문제로 경쟁을 했다. 이미 한국은 전두환의 굳건한 통치체제하에 들어갔고, 광주학살은 먼 옛날의 이야기로 잊혀졌는지도 모른다.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정권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벤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81'이었다.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무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 붙인 것이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이 행사는 행사장인 여의도를 통행금지까지 해제시키면서 가장 거대한 놀자판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말 미국 대통령 카터와 갈등관계에 있던 박정희는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확실한 우위에 설 수 있는 발판으로 올림픽 유치를 계획했지만, 박정희의 사망 이후, 최규하 내각은 올림픽 유치를 단념한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생각은 달랐다. 전두환은 전임 대통령이 결정한 중대사를 해보지도 않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포기하느냐며 유치신청에 적극적이었다. 80년 11월 30일 전두환의 지시로 IOC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고 12월 2일 접수됐다. 하지만 경쟁국 일본의 방해와 불안한 국내정세로 올림픽 유치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모두가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것 처럼 보이는 순간 안기부장 유학성이 나섰따. 전두환과의 독대 이후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유학성은 사표까지 써 놓은 채 안기부 내에 테스크 포스(Task Force)팀을 구성해높고 올림픽 유치작전의 모든 계획을 입안하고 진행했다. 올림픽 유치단의 각종 로비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대량으로 항공권을 뿌리고 있다.' '밤이 되면 위원회 숙소로 초대하여 기생접대를 하고 있다.' 등의 소문이었다. 현지 언론은 아주 비정하고 혹독했다. IOC 관계자, 언론 할 것 없이 웃긴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81년 9월 30일 치뤄진 투표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52대 27로 서울이 나고야를 물리 친 것 이다. 로비와 여론공세 외에도 개발도상국들의 지지가 한 몫했다. 이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국에 호감을 가졌던 것 이다. 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킨 유치단을 환영하는 자리에선 자연스럽게 86 아시안 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아시안게임 유치에 대한 정식적인 논의가 청와대에서 시작되었고 이 해 11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AGF 총회에서 86 아시안 게임 유치에 성공했다. 86.88 이라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1945년 9월 7일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를 기해 전방 접굥지역과 후방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시민들은 자정 이후까지 거리를 뉘였고, 야간통행금지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드르이 특권이 사라졌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딱 두번 통행금지가 해제 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제야였다. 이 날만큼은 사람들이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었다. 이날만큼은 반드시 밤새껏 먹고 마시는 해방의 날이었다. 그러나 가정 주부들은 밤 문화를 반기지 않았다. 술로 인해 귀가가 늦는 남편들이 통금이 해제되면 아예 귀가조차 하지 않을까봐 속만 태워야 했다. 가정주부들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통금해제가 가져다 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 문화와 성적 욕망의 배설구들이었다. 또한, 전두환은 82년 3월 23일 프로야구를 출범했다.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서울 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첫 경기로 ㅊ첫 발을 뗀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관중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kbs 를 통해 특별 생방송 된 이산가족 찾습니다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 할 수 있었던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총 방송시간은 모두 453시간 45분이였으며, 방송기간 동안 방송 시청자 10만 952명 중 5만 3536명이 출연해서 1만 189명이 상봉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번에는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과 86 아시안 게임, 88올림픽 등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현대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나라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 알아가는 재미가 더 해지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역사가 아무리 슬프더라도 바꿀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