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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언어
----정구민의 [문어], [호랑이], [나비], [도기]의 시세계
반경환
언어는 모든 혁명의 씨앗이며, 이 세상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은 언어를 통해 연출된다. 세계가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는 자연 그대로의 존재이지만, 그러나 사유하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는 대상을 인식하고 대상을 사유하며, 이 사유의 힘으로 대상의 이름과 가치와 진리를 명명한다. 모든 혁명은 언어(사상)의 혁명이며, 언어 없이는 그 어떤 혁명도 일어날 수가 없다. 총과 칼을 만든 것도 언어이고, 우리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상호간에 피비린내 나는 이전투구를 벌이게 된 것도 언어의 명령 때문이다. 우주선과 비행기와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것도 언어이고, 컴퓨터와 인공지능(AI)과 스마트폰을 움직이는 것도 언어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 속에서 태어나 언어의 젖을 먹고 자라나며, 언어의 씨앗을 뿌리고 언어의 열매와 유산을 남겨 놓고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 언어는 인간 성장의 원동력이며, 언어의 힘이 없다면 그 어떠한 사상과 이론의 정립은 커녕,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도 창출해내지 못했다. 언어가 있고 이름이 있고, 언어가 있고 권력이 있으며, 언어가 있고 소유권이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리며, 언어를 통해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연출해내며, 그것이 공산주의이든지, 낭만주의이든지, 낙천주의이든지간에 모든 신세계를 창출내게 된다.
물갈피에 글을 쓰는 선비
먹고
먹히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홀소리와 닿소리
문어 발끝마다 흘러나오는 먹물냄새
행간에서 물비늘로 반짝인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글자들
누가 문어를 뼈 없는 동물이라 말했는가?
마르기도 전에 지워버리는 글이랑
한국에서 태어난 문어는
한글밖에 몰라
시를 번역하는 물고기를 만나지 못해
머리 가득 까만 먹물이 고인다
붓을 꺾어야 할까?
바다 환경 살리려 마지막 먹물까지 짜낸다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
흡반처럼 빼곡한 도서들
인류와 동행하는 문어文語
인류에 기록되어 문화유산으로 남을 문어의 생태시
---[문어] 전문
정구민 시인의 [문어]는 책갈피가 아닌 “물갈피에 글을 쓰는 선비”이며, “먹고/ 먹히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홀소리와 닿소리”의 힘으로 “바다 환경 살리려 마지막 먹물까지 짜낸다.” 동양에서는 문어文魚를 글을 아는 선비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선비란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앎을 육화시켜 나간 사람을 뜻한다. 문어의 발끝마다에는 먹물냄새가 배어 있고, 문어가 살아가는 바다에는 언제, 어느 때나 물비늘이 반짝인다. 문어는 홀소리와 닿소리, 또는 모음과 자음으로 언어의 먹물을 뿌리며, “바다 환경 살리려”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을 창출해낸다. 바다에는 “흡반처럼 빼곡한 도서들”이 있고, 또한, “인류와 동행하는 문어文語”들이 있다. 비록, [문어]는 정구민 시인처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밖에 몰라 그가 쓰는 시는 번역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언젠가, 어느 때는 하늘을 감동시키고 전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문어를 뼈 없는 동물이라 말했던가? 문어는 뼈 없는 대신 “물갈피에 글을 쓰는 선비”이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글자들”로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을 창출해낸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어의 바다는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이고, 문어의 다리는 펜이고, 문어의 피는 먹물이다. 문어의 머리는 사유의 총체이고, 문어의 흡반은 빼곡한 도서들이고, 문어의 심장은 “인류와 동행하는 문어文語”들이다.
정구민 시인은 온몸으로, 온몸으로 시를 쓰는 문어이며, 그는 끊임없는 사유와 자기 희생으로 이 세계와 만물의 터전을 되살려 놓는다. 이것이 정구민 시인의 힘이고, 그가 창출해낸 [문어]의 힘인 것이다.
반만년 나라를 지켜온 산신
백두대간 어슬렁거리며
발톱 내보였다
헛기침하다가
뻣뻣하게 수염 세우며
낮잠 자다가
나라 협박받으면
입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고
가난이 봄빛처럼 푸르르면
얼룩무늬 털을 뽑아
산빛 푸르게 물들이며
터줏대감으로 살았다
이제 땅에선 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늘로 이주하려니
봄에는 큰곰
여름에는 돌고래
가을에는 조랑말
겨울에는 토끼
계절마다 동물들이 집을 다 차지해
빈집이 없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는 눈빛
그냥 사라지기엔 억울하고
숲을 파랗게 키우려는
지구 전사 등에 태우고 으르렁으르렁 세계로 향해야지
생각을 탁본하는 밤
---[호랑이] 전문
오늘날은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종교와 신화를 대청소하고 상호간의 불신과 증오를 키우며 대 사기꾼들의 불량하고도 부정적인 신화들만을 양산해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땅을 사고 투기하는 법,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배신과 중상모략을 일삼는 법, 온갖 탐욕과 소비를 미덕으로 삼으며 반자연적인 자본주의를 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으로 찬양을 한다. 자연은 삶의 터전이 아닌 금은보화의 보물창고이며, 따라서 자연은 아무런 고민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파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온 동식물들이 다 소멸되거나 쫓겨나게 되었고, 백수의 왕인 호랑이마저도 멸종의 위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호랑이가 소멸하면 호랑이와 함께 살던 친근한 이야기와 그 성스러운 신화도 죽게 되고, 그 친근한 이야기와 성스러운 신화가 사라지면, 우리 인간들은 오직 미다스왕의 후예가 되어 황금 속에 파묻혀 죽게 될 것이다. 돈, 즉, 금은보화는 그 자체로 아무런 재화도 아니고 음식도 아니며, 우리 인간들이 언어로 부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쓸모도 없고 더군다나 식량도 아닌 금은보화, 이 금은보화를 위해 만물의 터전인 자연을 다 파괴하고, 모든 동식물들을 다 죽여버린 바보, 이처럼 바보스러운 악마가 그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호랑이는 고양잇과의 포유동물이며, 다 자란 어른의 크기는 220kg에서 300kg 이상까지 자라난다고 한다. 호랑이는 가장 아름답고 균형 잡힌 몸매와 함께,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기품을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백두산 호랑이, 호돌이, 비호, 범, 호순이 등의 이름 이외에도 산군山君, 산신령山神靈, 산중왕山中王으로도 불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동물 중의 동물, 백수와 왕이자 우리 한국인들의 수호신인 호랑이조차도 이제 멸종의 위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정구민 시인의 [호랑이]는 “반만년 나라를 지켜온 산신”이지만, 그러나 이 호랑이는 상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정구민 시인이 그의 상상력으로 탁본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백두대간 어슬렁거리며/ 발톱 내보였다/ 헛기침하다가/ 뻣뻣하게 수염 세우며/ 낮잠”을 자던 호랑이, “나라 협박 받으면/ 입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고/ 가난이 봄빛처럼 푸르르면/ 얼룩무늬 털을 뽑아/ 산빛 푸르게 물들이며/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호랑이, 그러나 이제 “이제 땅에선 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늘로 이주하려니/ 봄에는 큰곰/ 여름에는 돌고래/ 가을에는 조랑말/ 겨울에는 토끼/ 계절마다 동물들이 집을 다 차지해/ 빈집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언어의 위기이며, 언어의 위기는 생태환경의 위기이다. 생태환경의 위기는 지구촌의 위기이며, 지구촌의 위기는 더 이상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대한민국과 함께, 우리 한국인들의 가장 훌륭하고 늠름한 기상을 지켜주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던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한국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는 눈빛/ 그냥 사라지기엔 억울”하여 “숲을 파랗게 키우려는/ 지구 전사 등에 태우고 으르렁으르렁”거려 보겠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호랑이가 사라지면 호랑이가 뛰어놀던 숲과 들과 강도 사라지고, 호랑이와 함께 살던 큰곰과 돌고래와 조랑말과 토끼들도 하나, 둘,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호랑이, 호랑이, 정구민 시인의 [호랑이]가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의 탐욕과 마비된 의식을 물어뜯고, 이 시 속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삼천리 금수강산의 수호신으로서 살아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사방 벽면 안팎이 숲속이다
계절을 접었다 폈다
시집 숲속에 금빛나비 한 마리
의지도 다 못 태우고
시집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상상 나래로
쉬다 뛰다
걷다 뛰다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라고 보폭이 저항하는 소리
활활 봄을 피워
푸른 지조의 온기로 꽃을 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고요히 한숨을 펄럭이는 나비
---[나비] 전문
정구민 시인의 [나비]는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난 시이며, 그의 상상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비라고 할 수가 있다. 사방 벽면 안팎이 숲속이고, “시집 숲속에 금빛나비 한 마리”가 “계절을 접었다 폈다” 한다. “의지도 다 못 태우고/ 시집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상상 나래로/ 쉬다 뛰다/ 걷다 뛰다”한다.
하지만, 그러나 시집 속의 나비는 상상 속의 나비이고, 따라서 이 상상 속의 나비는 제아무리 “쉬다 뛰다/ 걷다 뛰다” 하여도 제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슬프고 무기력한 시간에, 시집 속의 나비는 “활활 봄을 피워/ 푸른 지조의 온기로 꽃을 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도로아미타불의 헛수고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집 속의 나비는 사방 벽면뿐인 언어의 숲속에 살고, 이 언어의 숲속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처럼 언어는 무소불위의 언어이며, 실제의 동식물과 사물과도 상관없이 하나의 상상, 또는 가상으로서의 가상, 즉 실제보다도 더 실제같은 가상(상상)의 세계를 창출해낸다.
언어의 꽃은 시이고, 시의 꽃밭은 시집이다. 이 시집 속의 꽃밭에서 더없이 아름답고 우아하게 “계절을 접었다 폈다”하는 “금빛나비 한 마리”를 창출해낸 정구민 시인의 시적 재능은 언어의 충복에서 언어의 창조주로서 그 신분을 수직 상승시킨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나비를 찬양하고 숭배하기에 바쁘지만,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자기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는 정구민 시인의 장인정신은 “활활 봄을 피워” “푸른 지조의 온기로” 새로운 신세계를 연출해낸다. 비록, 잃어버린 시간과 한숨뿐인 상상 속의 세계에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금빛나비의 춤’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시는 마약이고 만병통치약이고, 이것이 내가 역설한 시의 네 가지 효과----진정제 효과, 강장제 효과, 흥분제 효과, 영생불사의 효과(반경환, {행복의 깊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도기에는
푸른나무 숨소리에는
새 날갯짓 풀벌레 울음
구름 발자국 안개 냄새
도를 닦고 있다
천도를 넘는 발버둥
간장종지 속에서도
단맛 짠맛 떫은맛
저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도를 닦고
소태처럼 쓴맛은 입맛만 다신다
질그릇에는
계절과 우주가
함께 숨 쉬고 있다
흙으로 빚은 그릇
밥 담으면 밥그릇
꿀 담으면 꿀병
도기에 정신을 담으면 장인정신
백자 청자엔 장인정신이 반짝인다.
---[도기] 전문
정구민 시인의 [나비]가 실제의 나비가 아닌 상상 속의 나비이듯이, 그의 [도기] 역시도 실제의 도기가 아닌 언어의 도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도기에는/푸른 나무 숨소리”와 “새 날갯짓과 풀벌레 울음” 소리도 살아 있고, “구름 발자국과 안개 냄새”마저도 “도를 닦고 있다.” 천지개벽을 하듯이 “천도를 넘는 발버둥”도 있고, 자그만 “간장종지 속에서도/ 단맛 짠맛 떫은맛” 등이 다 들어 있고, 모두들 다같이 “저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도를 닦”으며, “소태처럼 쓴맛은 입맛만을 다신다.” “질그릇에”도 “계절과 우주가/ 함께 숨 쉬고” 있고, “흙으로 빚은 그릇”은 “밥 담으면 밥그릇/ 꿀 담으면 꿀병/ 도기에 정신을 담으면 장인정신”이 담기고, 따라서 “백자 청자엔 장인정신이 반짝인다.”
정구민 시인의 [도기]는 소우주이며, 푸른나무와 새와 풀벌레와 구름과 안개들이 도를 닦으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의 삶을 ‘언어의 꽃’으로 활짝 꽃피워 낸다. 언어의 꽃을 피운 도기는 “천도를 넘는 발버둥”의 과정을 거쳐 왔으며, “간장종지 속에서도/ 단맛 짠맛 떫은맛” 등, 그 모든 맛들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모든 도기에는 “계절과 우주가/ 함께 숨쉬고” 있으며, 이처럼 정구민 시인의 [도기]는 언어의 꽃(시)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기보다도 더 아름답고 영원히 살아 숨쉬는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놀라운 것은 언어이고, 이 언어는 사진보다도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사실과 그 장인정신까지도 창출해낸다. 정구민 시인의 [나비]와 [도기]에서 살아 있는 것은 실제의 나비와 도기가 아니라 그가 창출해낸 나비와 도기이며, 이 나비와 도기는 그의 언어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정구민 시인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정구민 시인이 있는 것이다. 정구민 시인은 언어의 충복이 되기 위하여 수십 동안이나 면벽수도하듯이,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그토록 어렵고 힘든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거쳐왔던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가장 자유 자재롭게 창출해내는 창조주이지만, 다른 한편, 언어의 힘에 사로잡힌 충복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의 창조주이고, 시인은 언어의 충복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언어의 생명은 영원하다. 최초의 언어는 우리 인간들이 창출해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간들은 이 언어를 통하여 수많은 동식물과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
어느 인간, 어느 민족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인가, 아닌가는 그가 어떤 언어를 창출해 내고, 그 언어를 통하여 얼마나 새롭고 인적미답의 신세계를 창출해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창조주이지만, 언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언어 앞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충복에 지나지 않는다.
정구민 시인의 영광은 언어의 영광이고, 언어의 영광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