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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9 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학 톡톡”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의 박종인 시집에 대한 대담
토론자 : - 손남훈 평론가, 정진경 시인 평론가, 박종인 시인
손남훈 :
1. 2010년 등단하신 후, 작년 말 첫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시인에게 첫 시집은 자식과 같다는 말도 있는데, 시집 발간에 대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종인 :
2. 네 시집 발간에 대한 소감이라면 [시인들이 시집출간을 시집보낸다고 하잖아요.] 정말 제게도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말」에서도 ‘딸아!’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마치 어머니가 딸에게 하듯이 그렇게 작성했습니다. 왜냐하면, 등단 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저게 있어서 시인 세계는 ‘별천지’, ‘유토피아’, ‘유형무형의 세계’ 등으로 생각했을 만큼 아주 멀리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시와 결혼(등단)하여 그 세계의 일원이 되었고 시를 잉태하고 키워서 시집(출간)까지 보냈으니 정말 ‘감개무량’ 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손남훈 :
2. 많은 시인들이 첫 번째 시집에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에 대한 시편들은 시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어떤 핵심과도 같은 것이어서, 아무래도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시인의 첫 시집에 나타나는 가족사를 드러낸 시편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박종인 선생님 시편에는 가족사에 대한 전면적인 시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어떤 의도가 있으셨던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박종인 :
2.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평면’ 시보다 ‘입체’ 시를 지향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입체’ 시는 사물을 빗 되어서 쓰게 되는데 사물이 가족사를 올바로 다 반영하는 것을 찾기가 힘들다고 해야 할까요. 저도 처음엔 ‘평면’ 시를 썼는데 제가 시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순간! “시가 내게로 왔다”라고 할 정도로 하루에 [초안을 잡는 것이] 열 편, 스무 편까지 적을 정도로 사물이 ‘시’로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시들도 옛날 것들이 더 ‘발상’이 좋다고 할 정도로 괜찮은 시편들이고요. 지금은 한편 마음먹고 쓰려고 해도 잘 안 되는데 말이죠. [물론 억지로 쓰면 쓰겠지만] 그래서 그때 초안 잡아 놓은 시들을 뽑아 퇴고해서 발표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무튼, 그 시점부터 ‘입체’ 시를 위주로 써왔는데 ‘가족사’와 연결될만한 것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꼭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롱리폼」이 가족사를 반영한 시라고 할 수 있는데 딸을 키우는 과정이 약간 들어가 있습니다. 그 외엔 사물을 빗 되어 쓰고자 해서 그런지 가족에 대한 ‘시’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평면’ 시에서는 자유자재로 자신을 다 드러내 놓는 것이 가능한데 사물을 빗 된 시는 ‘가족사’를 올바로 다 반영하기 힘든 점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실 ‘가족사’를 드러내 놓는 것은 잘못하면 넋두리가 되기도 쉽고 또 의도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다 드러내 놓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정신경 :
“형식만으로 예술은 가상의 성격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에 형식만 있게 되면 의미가 파괴되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박종인 시인의 시는 은유나 상징 화법으로 의미적 문맥이 비틀었는데도 의미가 통하고, 시간과 공간은 해체되어 초현실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 같은데도 현실에 닿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충족하기가 힘든데, 시인은 상황에 맞게 그것을 자유롭게 운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인의 입장으로 질문을 해야 하므로,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시인의 입장에서 흥미롭게 읽은 시를 중심으로 질문을 하겠습니다.
1. 「플라톤의 이상국가」
시인은 시의 제목을 아주 잘 짓는데, 이 시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는 손가락이 틈에 물리는 순간에 대처하는 몸의 현상학을 두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없는 공동체제의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산주의’라는 말은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몸의 현상학을 이상국가로 은유하는 발상이 흥미로웠고, 제목을 참 잘 지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 이 시를 지은 시인의 의도와 시인이 갈망하는 ‘이상국가란’ 어떤 것인가를 듣고 싶습니다.
박종인 :
1) 저는 ‘성경으로 길들어진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도 사실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 보면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들이 많다 다 눈이겠느냐? 다 머리이겠느냐? 그렇지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 같이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지체도 같이 기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손을 다쳐서 한 몸이라 몸 전체가 같이 아픔을 느꼈고 위의 ‘성서’ 말처럼 각기 각자의 위치에서 머리가 내리는 지시를 하나인 양 ‘동시 다발적’으로 일을 해낸다는 것을 피부로 감지할 수 있었죠. 그리고 앞으로 하느님이 임명한 예수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 몸의 현상 같이 지상천국을 실현하는 게 ‘하느님의 목적’인 동시에 제가 바라는 이상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직접 평면적으로 생각 그대로를 나열하면 시적인 맛이 떨어질 것 같아서 그냥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끌어온 것입니다. 거기다 저는 입체적인 시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는 차원에서 그냥 ‘이상 국가’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까지도 생각해 보도록 그런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고하는 틀에서의 실상은 성서의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다스릴 나라가 가장 이상 국가 아니겠습니까? 거창하게 사고하시는 분들은 심오한 대답을 기대했을 텐데 원래 진리는 항상 단순한 법 아닙니까? ㅎㅎㅎ
정진경 :
2) 이 시에서 말하는 공동체주의와 관련해서 시적 세계에 대한 부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말하는 공동체주의는 시인의 다른 시에서 나타나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의 시에서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생명이 아닌 시적 대상들을 의인화한다는( 「36+오늘」: 들판=연인, 「매혹적인 신데렐라」 소금=그녀, 「경계 없는 사랑」: 지하도=악어 등) 것입니다. 해설을 쓰신 평론가 김경복 선생님의 말대로 사물들에 “졍령들이 있다고 믿는 것”은 시인이 내면적 자아를 서술해나가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서 시인의 시는 사물과 소통을 하면서 교감을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자아의 변이마저 꾀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창조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시적 자아도 같이 변환되어 존재합니다. 이것은 존재성의 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물에 신이 들어 있다고 믿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보면서 시인은 어떤 종교관을 갖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종교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왜 시에서 이런 세계관이 많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박종인 :
2) 말씀드렸다 시피 저는 ‘성서로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신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사고’를 할 수가 없죠. 성서가 그런 사고를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다만 성서에는 비유가 참으로 많이 사용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했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성서는 일곱 가지 형태로 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유, 모형, 전형, 상응 등등 그래서 저는 자연스레 ‘상징’이나 ‘은유’에 길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시가 ‘이미지’ ‘심상’ 아닙니까? 구체성을 띠어 이미지를 그려 내려면 사물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고 저의 세계관이 성서로 길들어 있어서 자유롭게 ‘비유’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다 저의 종교에서는 ‘성서훈련학교’ 프로가 있는데 모두가 순번을 정해 5분 정도의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는 두 명이 ‘대화체’로 직접 연설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장면설정이 시하고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 연설 준비를 30년 이상 했습니다. 처음에 준비할 때는 좀 어려웠는데 지금은 손쉽게 잘합니다. 한때는 대타로도 많이 연단에 올라가고 다른 분들 것도 대신 연설준비도 해 주고 실현도 많이 하고 해서 거의 2주 간격으로 연설을 준비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시를 짓는 데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다른 ‘세계관’으로 상상하여 심오한 것을 기대하니 저로서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전 모든 ‘식물’이나 ‘동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단순히 동물은 동물이고 식물은 자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거창하거나 심오한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문학에서 쓰는 것처럼 ‘의인화’ 시켰을 뿐입니다. 저도 처음에 시를 쓸 땐 모든 초보자가 그렇듯이 그냥 ‘평면’적인 ‘시’를 썼습니다. 근데 앞서 간단히 얘기했지만 제가 시에 사물을 끌어와 의인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시를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에 시를 쓸 때는 시가 ‘이미지’ ‘심상’이다. 라고 해도 글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잘 와 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수님이 한 시인의 시를 아주 많이 칭찬하는 것을 보고 그의 시를 아주 세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그랬더니 그 시인의 ‘시’가 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 왔고 시라는 것이 상황을 ‘구체적 사물로 묘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시를 흉내 내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물을 대입해서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시가 내게로 왔는지 모든 사물이 시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이미지’ 추구에서 구체적 사물을 끌어다 의인화시키려고 비유를 사용하다 보니 심오한 생각을 많이 하는 거창한 세계관을 소유한 분들은 저의 시를 범신론적이니 자연과 소통하느니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대입해 의인화 시켰을 뿐인데 아주 심오하게 받아들여 주시는 분들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답니다.
손남훈 :
3. 표제작인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여러 시편들에서 일상적인 사물·사태를 다른 맥락을 지닌 또 다른 상황이나 사물로 바꾸고, 그로부터 시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 전략을 시인께서는 구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구조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풍자의 목소리, 즉 에이런과 알라존의 두 목소리가 공존하면서, 힘세고 우둔한 알라존을 이기는 지혜로운 에이런을 부각하는 상황을 나타내기가 쉬운데요. 그런데 시인께서는 하나의 상황을 다른 상황과 겹쳐 바라보게 함으로써 풍자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다른 하나의 상황의 우위’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사물과 사태를 바라보는 ‘겹의 시선’이라고 저는 감히 명명해보았는데요, 이것은 곧 일상적인 상황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가정[(假定)가설]과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겹의 시선’은 서사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의 경우, 미술관을 드나들고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상적인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독특한 서사적 이해 방편으로 제공되는 수사관의 수사 · 용의자 검거 · 유죄판결의 과정들이 서로 호응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미술관에 미술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그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면회오는 저 끊임없는 발길들”이 되지요. 미술품 감상과 수사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지만, 이를 과감하게 동시적인 상황으로 배치함으로써 일상은 비일상이 되고 비일상이 일상의 내부로 불쑥 찾아옵니다. 시인께서는 일상 안에서 시적 의미를 배치할 때, 직관적인 상상력의 힘을 믿으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논리적이고 교묘한 배치를 통해 시세계를 통제하는 시적 자아의 가능성을 신뢰하시는 편입니까?
박종인 :
3. 네 위의 시는 다르지만 정진경선생님의 질문과 비슷한데요. 저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시를 ‘평면’보다는 ‘입체’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독자의 세계관에 따라 다 다르게 다가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 각도로 읽히도록 비유를 사용하여 ‘시’ 창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거리가 멀수록 독자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상관성이 없는 것을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런 생소한 것들이 신선하게 호응을 일으켜 긴장감도 생기고 말씀하신 우의가 있는 에이런과 알라딘의 풍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겹’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모든 사물이 시로 보일 때가 있었다고 한 것처럼 ‘발상’은 ‘직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시를 갓 알려고 할 때 시가 내게로 왔기 때문에 많은 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듬고 고치고 하는 퇴고 과정이 꼭 필요하였죠. 그러므로 ‘시적 논리’와 ‘통제’도 한몫을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직관’과 ‘통제’ 둘 다 저는 신뢰며 똑같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진경 :
2.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는 이 시집의 표제작으로, 예술가로서의 시인이 시를 써야하는 이유를 피력한 시라고 보아집니다.
시인의 약력을 소개한 데에 보면 “예술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있는 죄인이며, 이 천형의 삶을 통하여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게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에서 “미술관에 갇힌 화가들은 색채로 마술을 부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화가는 분명 마술의 대가, 치러야 할 형량이 늘어납니다.” 라는 구절이 저는 같은 의미로 읽혀집니다.
예술(시쓰는 행위)가가 왜 죄인이라고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술 작품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작품들을 왜 “애인”이라고 칭 했는지 궁금합니다. (부연 「Y세대의 웰빙」에서 립스틱을 애인으로 은유-시인에게 애인이라는 의미는 무엇인지-애인, 사랑에 대한 의미가 심오해 보입니다.)
박종인 :
2.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말씀하신 ‘약력’ 부분을 제가 쓴 것으로 오해를 많이 합니다. 프로필이 소개되어서 그런 모양인데 사실은 저는 약력을 드렸고 쓰기는 출판사 측인 반경환 주간이 쓴 것 같습니다. 제가 저에게 “의인화의 대가” “반어의 대가” “상징의 대가”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 이런 칭찬을 저 스스로 직접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대답하라고 한다면 보통 시인들이 시 쓰는 일을 ‘천형’이라고 표현하잖아요? 「나무시장」이라는 시에도 나타나 있듯이 “글 쓰는 수공이 얼마인데요.” “밤을 밝힌 흔적이다”. 이런 표현처럼 엄청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작품 하나를 탄생시킵니다. 글 짓는 것이 뼈를 깎는 엄청난 고뇌, 고통, 노력 끝에 탄생하는 작품이라는 뜻에서 ‘천형’ 즉 하늘이 준 ‘죄인’이라고 말들을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반경환 주간도 그런 차원에서 ‘예술가는 인류를 대속하는 죄인이다.’ 김경복 평론가가 말씀한 것처럼 ‘연금술사가 철이나 납을 정연하여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했듯이 그런 차원에서 살과 뼈를 깎는 고통으로 지은 글이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하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예술적 구원이다.’ 그런 의미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것이 전후 문맥을 고려해도 맞고요.
그리고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의 내용이 예술가가 죄인이라고 취급했다고 약력 부분의 평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실제로 마네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여자는 벌거벗고 있고 남자는 양복을 입고 있어서 왜 저런 그림일까? 라는 의문이 들어 유심히 보았고 의미가 궁금해서 나름대로 결론 내리기를 ‘여자는 느끼고 남자는 생각한다’는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참 그림이 색채를 조합하여 사람들을 잘도 현혹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림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게 되었죠. 그렇지만 ‘예술가가 인류를 대속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림은 원래 ‘평면’이지 않습니까? 근데 화가가 색으로 ‘명암’을 조절해서 사람들에게 ‘입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 ‘눈 속’임입니다. 그래서 시적 화자를 수사관으로 등장하게 해서 미술관을 찾아가는 것으로 설정, 화가를 죄인 취급을 했고 예술가들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좋은 역할을 하지만 미술관에 감상하러 오는 사람을 면회 오는 것으로 반대로 표현했죠. 그 반대로 표현한 것 때문에 출판사측에서 평을 “반어의 대가”라고 한 것 같고 그리고 그림을 의인화해서 “의인화의 대가”라고 한 것 같으며 제가 여러 각도로 이해하도록 입체적으로 시를 엮었기 때문에 “상징의 대가”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 같은 제 시집의 시편들을 모두가 다 적용하면 미래의 지상낙원이 아닐 수 없다고 반경환 주간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애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느냐고 의문을 가지셨는데, ‘애인’이란 의미가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도 작품에 대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저에 졸 시의 예술작품을 ‘의인화’시켰으니까 그런 비유로 ‘의인화’ 차원에서 ‘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범신론적 사고의 심오한 측면이 아니고 단순히 사물을 의인화시킨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작품이 애인입니다.
손남훈 :
4. 「성형시대」, 「장롱 리폼」, 「하나님의 습작기」, 「자연오리지널 시나리오」 등의 시편에서는 특정한 상황에 대한 시인의 논평과 해석을 포함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시 쓰기, 나아가 예술과 인간 사이의 고민을 담고 있는 메타적인 시편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습작기」에서 “그는 밑그림을 몇 번이나 그리고 지운다/ 어느 날 실전에 돌입./ 말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면서 ‘신(神)’의 창조행위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시인(詩人)’의 시작과정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인에게 시 쓰기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이 결국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의문 사이에 있는 것이라면 시인의 시 쓰기의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것이 시인에게 있어서 ‘詩’가 되는 것입니까?
박종인 :
4. 제가 시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가 좋아서입니다. 세상 상태를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사물이 말하고 있는 점을 찾아내는 것도 흥미롭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보는 세상의 시각을 나름대로 피력해서 ‘좋은 점’은 음미해 더 확대되도록 하고 ‘잘못 가고 있는 점’은 풍자로서 꼬집고 좀 더 나은 쪽으로 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는 시편들은 비판 아니면 야유 거의 풍자와 반어 의인화로 저의 생각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반면에 좋은 점은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나 「장롱리폼」처럼 사람들을 감화시켜 그렇게 행동하도록 촉구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좋은 쪽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시 쓰는 일이 즐겁고 시인으로서 자기 생각을 시라는 공식적 루트를 통해 발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특권처럼 생각됩니다.
정진경 :
3. 「36+오늘」-들길+도로, 여인+남자, 이혼+재혼
이 시는 자연을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파괴되는 환경 현실을 고발한 시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독특한데, 제 개인적으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제목 같은데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박종인 :
3. 네 ‘시’를 제가 의도한 측면에서 제대로 보신 것 같습니다. 그 시는 사실 ‘들길’이 ‘도로’로 변화하는 것에서 착안한 시입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로 부상하면서 많은 산과 들을 파괴했죠. 그래서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환경파괴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들길 하면 어쩐지 ‘여성’스럽고 도로 하면 ‘남성’스럽지 않습니까? 거기서 착안하여 들길이 인위적인 작업으로 도로로 변한 것처럼 성전환까지도 과감하게 하는 현실의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상태를 고발한다는 뜻의 제목이고 ‘36’은 일제 36년을 뜻하며 일제의 탄압에서 핍박받다가 나중에 ‘오늘’ 날처럼 변모했다는 차원의 제목입니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혼’을 당하고 다시 ‘재혼’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좋게 어떤 면에서는 나쁘게 그저 그렇게 변해 간다. 그런 것을 고발하는 동시에 제목으로 언급된 여러 가지 각도로 대입해도 ‘입체’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시를 엮었기 때문에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독자들도 제목을 대입해서 다 각도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취지에서 여러 개의 제목을 거론한 것입니다.
손남훈 :
5. 시인의 시편에는 독특하게도 ‘죽음’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산수유의 연애」와 같이, 온통 시인의 시편은 온통 “사방에, 봄을 상영 중”인 시편들이 많습니다. 사랑, 연애, 애인과 같은 단어도 봄의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생의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입니까, 아니면 그것보다 중요한 ‘생의 에너지’가 자본적 가치가 일상을 지배해버린 우리의 상황에 더 필요하다고 보는 데서 비롯한 시적 전략의 산물입니까?
박종인 :
5. 글쎄요. 저는 ‘시’를 쓸 때 꼭 이것이다. 하고 ‘전략’을 짜거나 ‘의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느 선생님이 세상의 잘못된 부분만을 꼬집는 것은 작가는 쏙 빠지는 것 같으니까 ‘밝은 이야기’를 더 중점적으로 쓰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으로 제가 시의 소재로 삼았던 노을이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보이고 성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하게 해서 「하늘길」이라고 제목을 붙인 적이 있는데 그런 제목을 붙이면 ‘시’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고 죽음이나 그 비슷한 것과 관련된 시는 피하는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다 제가 믿는 종교는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 부활이 없다는 가르침을 듣고 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죽음 이미지가 기피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진경 :
4. 「나무시장」 이라는 시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적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존재를 소유하려 할 때, 존재와 존재의 관계적 의미가 생기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서로가 서로에게 각인 되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공이라는 말, 나무에 마음 한줄 새기려고 밤을 밝힌 흔적이다. 잘 못 누른 키 하나에 몽땅 전지된 생각들, 흩어진 줄기를 그러모으려 몸부림치던 시간이다 그 말 속엔 떨리는 손이 있고, 분노의 손이 있고 수없이 나무를 살해한 전과가 있다 ...
나는 흔쾌히 그 대가를 지급한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시인이 상대를 성찰하고, 배려할 줄 아는 (그러니까: 임의로 삽입) 자아도취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적 세계관이 폭넓게 확장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존재와 존재와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종인 :
4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존재와 존재와의 관계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성서와 관련을 맺고 살아오다 보니 저의 생각이나 ‘세계관’이 ‘성서’와 비슷하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또 성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서는 모든 것이 다 ‘목적’이 있어서 존재하고 ‘사람은 땅을 위하여’ ‘땅을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는 다 ‘상호작용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로 성서 하면 사랑이고 ‘새 계명’ 중의 하나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 그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불안전한 인간들인지라 그것을 적용하며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지만 어느 정도 실수나 잘못은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포용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나를 희생하고 주려고 노력하면서 잘못된 점은 고치고 남을 배려하는 차원으로 사는 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라는 것을 성서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해를 끼치고 고쳐서 쓸 수 없을 만큼 손상됐을 때는 그 존재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성서 원칙이 적용된다고 그렇게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휠라이트의 말을 빌리면 ‘치환은 의미의 예술’ ‘병치는 존재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존재의 예술에 해당하는 ‘병치’는 ‘대등’의 관계입니다. ‘나란히’를 주장하죠. 그러므로 ‘존재와 존재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물론 직장 서열 그런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직’이지만 ‘존엄성’ 면에서 만큼은 존재의 예술과 같은 맥락의 대등한 ‘수평’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불평등은 있을 수 없고 누구나 대등한 관계다. 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남훈 :
6. 몇몇 시편들에서 시인께서는 현실의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시인에게 ‘현실’이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주어진 현재는 무엇이고 시인께서 지향하는 현실은 또 어떤 것입니까? 이를테면, 「뜨거운 게시판」에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들”이 주어진 현실이라면, 시인께서는 그것이 “의미 없는 소모전,/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치열한 전쟁터”라고 비판하고 계신데요, 정작 시인께서 보여주고 싶은 [(당위적)] 현실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박종인 :
6. 네 아주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 ‘시’는 현실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실제로 ‘게시판’의 실정과 치고받는 ‘정치판’을 염두에 두고 적은 ‘시’입니다. 예전에 TV를 통해 보여 주었던 ‘정치판’과 곳곳에서 빈번하던 ‘게시판’의 찢기고 찢는 다툼을 우리가 많이 접하지 않았습니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겪는 데 결과는 좋은 것으로 나타나질 않지 않습니까? 그것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당위적 현실’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라는 시에서 몸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서의 궁극적 목적인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아래서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국가체제가 제가 바라는 ‘당위적 현실’입니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인가요? 하지만 이 지상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이룩되려면 단일 정부 아래서 몸의 현상에서 머리만 지시를 내리듯이 다른 지체는 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문제가 생기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려하는 세상이 이룩될 것이라고 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