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한국 지하철 50년
1974년 광복절 '서울 1호선 개통'… 그날 육영수 여사 서거했죠
한국 지하철 50년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입력 2024.08.29. 00:29 조선일보
(왼쪽 위)1971년 4월 12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기공식에 참석한 육영수(맨 왼쪽) 여사, 박정희(가운데) 대통령, 양택식 서울시장. (왼쪽 아래) 1974년 8월 15일 서울시청사에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걸렸어요. (오른쪽 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을 기념해 발매된 승차권 앞면. (오른쪽 아래) 198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승강장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어요. /한울엠플러스·서울역사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서울교통공사가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 지하철’을 주제로 모바일 스탬프 투어를 실시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서울역사박물관에선 11월 3일까지 ‘서울의 지하철’ 특별전을 열고 있죠. 왜 이렇게들 지하철을 기념하고 있을까요? 바로 올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지하철이 개통된 지 50주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각하,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1955년 157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70년에는 552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크게 늘어났습니다(현재는 936만 명). 교통량 역시 폭증해 시급한 대책이 필요했죠. 지하철 건설 구상은 1964년에 나왔습니다. 이미 영국 런던에 1863년 세계 첫 지하철이 출현했고, 아시아에선 일본 도쿄(1927)와 오사카(1933) 등에 건설됐습니다. 대략 도시 인구 200만~300만 명 때였으니 서울도 지하철을 도입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노면 전차는 너무 느려 오히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68년 철거됐어요. 그 후 6년 동안 서울 서민의 대중교통은 사실상 버스뿐이었습니다. 1970년 4월 부임한 양택식(1924~2012) 서울시장은 지하철 건설을 결심하고 다음 달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땅을 파서 철도를 놓은 경험이 없었고 자금과 기술도 부족했던 한국 정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김학렬 경제부총리가 대통령에게 “각하,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진언할 정도였습니다. 정부의 실세였던 이후락 주일대사가 “서양 대도시치고 지하철 없는 곳이 없다”고 하자 대통령은 그제야 마음을 굳혔다고 합니다.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빌리고 기술을 도입해 1971년 4월 12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침울했던 지하철 1호선 개통식
첫 지하철인 1호선은 서울역과 청량리를 연결하는 노선이었습니다. 서울역과 인천·수원, 용산과 성북(현 광운대역)을 잇는 구간은 기존 철도를 전철화해 지하철과 직결되도록 했습니다. 3년 4개월의 공사 기간 큰 교통 혼잡이 일어났으나 서울 시민들은 미래를 위해 꾹 참았다고 합니다.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근처 노선에선 진동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수입 코르크로 방진벽을 설치하는 등 새로운 공법도 도입됐습니다. 대만과 인도, 하와이의 장관·시장이 견학을 올 만큼 해외에서도 관심을 기울였죠. “양 시장이 지하철에 미쳤다”는 소문이 났고, 대통령도 틈만 나면 공사장을 시찰했습니다.
제29회 광복절인 1974년 8월 15일, 마침내 9.5km 구간의 서울 지하철이 개통됐습니다. 기본 운임은 30원이었습니다(현재는 1400원). 이날 오전 11시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성대한 개통식이 이뤄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전 국립극장의 8·15 경축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을 맞아 그날 저녁 서거했습니다. 지하철 개통식은 대통령 없이 침울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습니다. 광복절 행사의 주관자였던 양택식 시장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며칠 뒤 사퇴했습니다.
부산·대구·인천으로 확장된 지하철
그런데 바로 이때 서울시장의 교체로 서울 지하철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양 시장의 후임인 구자춘(1932~1996) 시장은 서울이 4대문 안 기존 도심과 영등포, 강남의 3개 도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3핵 도시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 노선이 기존 도심으로 집중되는 전임 시장의 2~5호선 계획을 모두 엎어버렸고, 2호선은 종점 없이 을지로~영등포~강남을 빙글빙글 도는 순환선으로 설계했죠.
포병 장교 출신인 구 시장은 지도를 보고 지형을 파악하는 독도법(讀圖法)에 능했습니다. 시청 간부들 앞에서 서울시 지도를 놓고 연필을 든 그는 20분 만에 2호선 노선을 쓱쓱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구로공단 앞에는 가야 하겠지~” “서울대 앞도 지나야겠지”라고 말했답니다. 놀랍게도 2호선은 그 그림에서 큰 수정 없이 건설됐습니다.
전동차와 통신 장비의 본격 국산화가 추진된 2호선은 1984년 모든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도심을 X자로 교차하는 3호선(구파발~양재)과 4호선(상계~사당)은 1985년에 개통됐죠. 이로써 1기 지하철이 완공돼 서울 교통의 동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5~8호선의 2기 지하철은 2001년 지어졌죠. 다만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서울 3기 지하철 중 10~12호선이 무산된 것은 아쉽습니다. 한편 부산(1985), 대구(1997), 인천(1999), 광주(2004), 대전(2006) 등 다른 대도시에도 속속 지하철이 달리게 됐습니다.
지하철이 바꾼 도시 문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지하철’ 특별전에 따르면, 현재 서울교통공사 등이 운영하는 서울 지하철 11개 노선(운영 주체가 다른 공항철도·경의중앙선·수인분당선·신분당선 등 제외)을 달리는 전동차가 338개 역에 정차하며 총 노선 길이는 357.5km, 보유 차량은 3667량에 달합니다. 연간 탑승 인원은 26억 명으로 세계 4위이며, 접근성 면에선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지하철은 반세기 동안 사람들의 생활습관도 바꿨습니다. 정체가 없어 이동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지하철 덕에 엄밀한 시간 관념이 자리 잡아 ‘코리안 타임(한국인이 약속 시간에 늦는다고 비꼬는 것)’이란 말이 사라졌습니다. 줄서기·금연 캠페인과 ‘선(先)하차, 후(後)승차’ 같은 표어가 사회 전반의 공공질서 정착에 한몫을 했죠.
지하철로 인해 도시 곳곳의 개발이 촉진됐고, 흔들림이 적은 전동차 안에서 독서를 하는 문화가 생겨나 출판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땅 밑’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가 걷히면서 지하철 역은 약속 장소이자 휴게실, 문화 공간, 쇼핑센터로 새롭게 변모했습니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한국 지하철을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외국인들을 보며 새삼 뿌듯해집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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