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베껴쓰기_254] 한국에서도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힘이 이동하고 있다 / 김인수 논설위원 / 매일경제 / 2015.09.25
지난 7월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이 쓴 칼럼을 읽었을 때, 나는 분노와 함께 수치심을 느꼈다. 그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몇 달 동안 뉴욕타임즈 기사를 포함한 많은 글들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스타트업 붐을 다루었다.(중략) 실리콘밸리의 벤처 캐피털들이 한국의 새로운 모바일과 인터넷 비즈니스를 정말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모두 재벌이라는 천장에 부딪히고 만다. 풍부한 자금과 깊은 정치적 유착을 가진 왕조와 같은 기업들이 잠재적인 시장 파괴자들을 쉽게 내쫓아버릴 수 있다. 시장의 판을 바꾸는 아이디어들은 한국경제를 지배하는 융통성 없고 하향식의 위험회피적인 기관들(대기업을 뜻함) 안에서 죽어버린다. (중략) 한국의 진짜 문제는 외국인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국민의 지능을 모욕하는 경제시스템이다."
그의 글은 한국의 경제시스템과 한국민의 지성을 모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틀렸어"라고 자신 있게 논박할 수 없었기에 나는 수치심을 느끼고 말았다. 페섹의 말 그대로 한국의 많은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대기업이라는 유리천장 앞에서 좌절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로서 그들의 부당한 '갑질'에 희생양이 된 경우도 많았다. 대기업 내부의 강고한 계층제와 상명하복의 문화 속에서 게임의 규칙을 바꿀 만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사라진 것도 엄연한 시실이다.
최근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포괄적 성장과 개발 보고서 2015' 역시 나를 부끄럽게 했다. 주요 30개국중 한국은 부패 순위에서 최하위인 5등급을 받았다. 보고서는 41쪽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패는 한국의 걱정거리 중 하나다. 다양한 영역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적 지대'를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 같은 경제적 지대는 제한된 숫자의 대규모 가족 경영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규제 시스템이 이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다." 이는 결국 대기업이 부당한 독과점적 이익을 얻고 있다는 지적과 다를 바 없다.한국에서는 창의적인 혁신 기업이 대기업이라는 유리천장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다는 페섹의 주장과도 일맥 상통한다.
만약 페섹이나 WEF의 지적이 100% 사실이라면, 한국경제에서 '풀뿌리 혁신의 힘'는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개인의 창의와 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스타트업이 성장하고 이들이 시장의 판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혁신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대기업의 정규직 직원이 돼 계층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게 최선의 커리어 전략이 될 것이다. 그 속에서 과연 파괴적 혁신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다행히 한국 사회도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힘의 이동이 감지되고 있다. IT 기술과 글로벌화, 구글플레이와 앱스토어가 만드는 통일적인 시장 플랫폼이 대기업이 만든 유리 천장을 뚫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그렇기에 가까운 미래 안에 페섹과 WEF에게 "당신들은 100% 틀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기업에서 인재들이 뛰쳐나와 스타트업을 속속 창업하고 있다는 것은 유리천장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다. 국내 대기업 중 연봉 1위와 2위를 다투는 삼성전자와 SK텔레콤에서도 직장인들이 뛰쳐나와 창업 대열에 합류한다. 지니웍스가 그런 경우다. SK텔레콤 출신 2명과 삼성전자 출신 4명과 총 6명이 뭉쳐 만든 회사다. 주차대행을 기본으로 대리운전, 세차, 정비 등 모든 카케어(Car Care)를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파킹 온'을 내놓았다. 주차대행 운전사와 고객이 최적의 장소와 타이밍에 만나 차를 주고 받을 수 있는 IT기술이 강점이다.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스마트폰 앱을 빠르게 업그레이드하고, 주차대행등 후선의 오퍼레이션을 빠르게 개선하는 '스피드' 역시 파킹 온의 강점이다.
그 어느 때보다 글로벌화가 손쉬워졌다는 것도 대기업의 유리천장이 붕괴되는 핵심 요인이다. 오늘날 IT 스타트업은 구글플레이와 앱스토어를 통해 전 세계 어느 시장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앱 시장은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똑 같은 규칙을 적용한다. 대기업이라고 독점적 이익을 추구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삼는다면 국내 시장에서 대기업이 유리천장을 아무리 두껍게 쌓고 있다고 해도 '넘사벽'은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벤티케익이 개발한 카메라 앱인 레트리카는 브라질 전체 스마트폰 사용자의 40%가 쓰고 있다. 레트리카의 구글 플레이 다운로드는 13.2%가 브라질에서 나왔다. 9.7%는 멕시코, 3.1%는 아르헨티나에서 다운로드됐다. 뽀로로 제작사인 아이코닉스가 만든 타요TV 앱은 전체 다운로드의 95%가 해외에서 나오고 있다. 터기가 1등이며 사우디 아라비아, 미국, 러시아, 이집트 한국 순서다.
페섹 역시 인정했듯이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외국 투자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호기다. 구글은 창업자를 돕기 위한 공간인 '구글캠퍼스'를 세계에서 세 번째로 지난 5월 서울에서 오픈했다. 한국의 창업자들이 혁신적인 앱을 만들어 구글플에이어 올릴 경우, 구글의 경쟁력 역시 강해진다는 믿음에서였다. 그만큼 구글이 한국의 창업자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다. 구글캠퍼스에는 세계적 명성의 투자 펀드인 '500스타트업도'도 입주해 있다. 이들이 쓰는 사무실 문에는 '500'이라는 큼지막한 숫자가 적혀 있다. 똑똑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IT기반의 스타트업을 창업해 국내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임정민 구글캠퍼스 서울 총괄 역시 "스타트업에 처음부터 '고 글로벌(Go Global)을 주문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구글캠퍼스에 봤던 젊은이들의 눈빛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도 '대기업의 유리천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젊은 엄마들도 아이를 안고 구글캠퍼스에 모여 창업에 관한 지식을 나눈다고 하지 않는가? 한국에서도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힘의 이동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