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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화 체육복(교사 수필) 2. 바다에 오징어배 2/2 240201
“야간 자율학습이요? 그게 뭔데요?”
“밥 줘요?”
“에이 쌤 우리가 무슨 인문계도 아니고.”
“시끄러워 인마. 야자는 무슨 인문계 애들 전용이냐. 우리도 필요하면 하는 거지. 그리고 전원이 시작하는데 필기시험 합격한 사람들만 탈출이야. 실기는 다들 잘할 테니까 필기만 통과하면 자격증 딴 거나 다름없어. 대신 저녁은 쌤이 매일 컵라면 큰사발 하나씩 준다.”
중학교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학원엘 간다. 물론 공부를 위해서도 가지만 요즘은 거기가 친구를 사귀고 시간을 보내는 주요한 장소다. 맞벌이하는 부모가 많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 아이를 홀로 두기 힘든 가정이 많아지면서 낮에 학교가 담당하던 보육의 기능이 상당 부분 학원으로 이양되었다고 봐도 될 듯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시기에는, 방과 후에 아이들과 뭘 하려면 그놈의 학원 스케줄을 맞추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 반 아이들은 다행히도(?) 학원에 가는 게 의미가 없을뿐더러 그럴 만한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 덕분에 알바하는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했다. 내가 당시의 여친이자 현재의 아내를 만나러 가야 하는 금요일을 제외하고 4일 동안 여섯 시 반부터 여덟 시 반까지 두 시간을 하는데, 앞의 한 시간은 기출문제 1회 분량을 나와 함께 풀었다. 낮에 하는 국어 수업보다 준비 시간이 더 걸렸다. 전공 분야가 아니니 나에게도 공부가 필요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다른 회차의 기출문제를 풀게 하고 점수를 확인 한 뒤 집으로 보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좀 어색하긴 해도 그날의 기출문제를 골라 아이들 수만큼 출력하고 그날 먹을 컵라면을 미리 사다 놓고 어려운 단어들을 설명할 쉬운 예시와 대체어를 고민하는 일에는 금세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과 외로움이었다.
“공부하고 담쌓은 녀석들이 야자가 가당키나 해? 저러다 말겠지. 끝이 뻔히 보이는데.”
나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는 없었지만 둘러둘러 들려오는 말들에 가슴앓이한 적이 많았다. 어차피 차도 없고 만날 사람도 하나 없어서 관사에 혼자 있는 것보다야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저 인간 저거 초과근무 수당 받는 재미에 맛 들여서 괜한 일 벌이는 거 아냐?”
라는 말을 들은 날엔 가슴이 저릿한 것이, 일주일 내내 먹어도 물리지 않던 사리곰탕면을 앞에 두고서도 입맛이 돌지 않아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채 변기에 그냥 버리기도 했다. 청소 여사님 죄송해요. 내리는 물 타이밍에 맞춰 깨끗이 내려보냈어요.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못난이들을 남들이 하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교실에 붙잡아 앉혀놓았다는 자기만족이 가장 컸다.
왠지 멋진 교사 같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이야 어쨌든 복학생 몇을 제외한 아이들은 꽤 열심히 참여했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가는데 자기들은 남아서 무려 ‘공부’를 한다는 상대적 우월감, 그로 인해 입학했을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존감이 드러났다. 일단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는 네 시 반부터 야자를 시작하는 여섯 시 반까지 반 친구들과 매일 운동장에서 뛰고 구르는 것만 해도 큰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성장에 있어서 단체 스포츠든 개인 스포츠든 운동의 역할이야 말해 무엇하리. 내가 가르친 걸 다시 자기네들의 말로 바꿔서 서로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볼 땐 주제넘게도 ‘이런 게 가르치는 보람이구나!’ 싶은 것이었다. 덕분에 좀 덜 익은 컵라면을 먹어도 질리는 줄 몰랐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나자, 필기 합격자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교과 공부를 안 했을 뿐이지 일머리 있고 눈치 빠른 친구들이었다. 합격 확인을 한 날 종례를 마치면서
“야! 나는 이제 야자 안 한다! 너희들은 뺑이 쳐라~!”
하고 까불다가 허공을 가르는 나의 이단옆차기를 맞으면서도 스스로 뿌듯해하던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난 공부랑은 거리가 멀어. 난 안돼.”
그러한 마음이 누적되면서 그들은 글자와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이 학습된 무기력은 공부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차피 해도 안 될 테니 시도조차 하지 않아 삶이 갈수록 무료해진다. 그러나 뇌는 늘 자극을 원하니까 짧은 시간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음주, 흡연, 게임에 몰두하게 된다. 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한 불법 스포츠 도박도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문제들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에게는 일상 속에서 조그만 성공 경험을 반복해서 제공하고, 현상을 달리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절실하다.
그날 기출문제를 푼 점수가 엉망이라 풀 죽은 아이에겐
“야! 이 많은 문제를 니가 끝까지 읽고 다 풀었어? 이게 글자가 얼마나 많은데 영어도 많고. 넌 오늘치 밥값 다 했어!”
연거푸 필기시험에 불합격한 아이에겐
“두 달 전을 생각해 봐. 두 달 전 오늘의 넌 PC방에서 게임 하고 있었을 거야. 지금은 어때.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있잖아. 그럼 두 달 후엔 어떨까?”
그렇게 유지해 나가던 우리 반에도 함께 몇 달쯤 공부하던 친구가 먼저 합격하고 나간 틈엔 잠시 숨죽이고 있던 무기력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갖은 핑계를 대고 야자에 빠지거나 자리에 있다가도 말없이 그림자처럼 스윽 사라지는 아이들, 앉아 있어도 창밖을 보며 멍때리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외부의 도움이 절실해지던 즈음,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지원을 시작했다. 야자에 참여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제공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학교 앞 백반집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밤바다에 홀로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처럼 달랑 교실 한 칸의 불로 어둠과 외로이 싸우던 중 등대가 켜진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배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타난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아이들도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합격자가 나오는 페이스도 아니었고 여섯 번, 일곱 번씩 시험을 봐도 결국 필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 우리 반에서 무언가 해 보자고 했을 때 못하겠다, 안 될 거다, 라는 말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본인이 각오를 가지고 무언가 해 보려고 하면 주변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것, 자신은 충분히 기대와 응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축제 때 합창 공연을 해 보자고 할 때도, 몇 년 후의 이야기지만 낯선 곳으로 취업을 앞두고 있을 때도
“야, 우리가 그때 담임 쌤한테 맨날 혼나가면서 야자도 했는데! 우리 학교에서!”
라는 말로 용기들을 냈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단순히 학교에 남아 공부했던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찾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때를 떠올리면, 나 역시도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할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시작된 야간 자율학습과 문제 풀이 수업이 지속된 지 일 년을 좀 넘겼을 때였다. 그날은, 서른을 맞는 내 생일이었다. 금요일이면 신나게 당시의 여자 친구이자 현재의 부인이 된 그분을 만나러 갔을 텐데 하루 차이로 목요일이었던지라 많이 갈등했다.
‘오늘만 야자를 쉬자고 할까? 음, 생일이니까 술이나 마시러 간다고 하면 좀 민망하고,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할까? 아니야, 그래봐야 교실은 2층이고 교무실은 1층인걸.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할까? 우리 집이 여기서 열두 시간쯤 가야 있지만……’
마음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던 천사와 악마의 싸움은 야자를 끝내고 학교 앞 호프집에서 홀로 생맥주나 한 잔 때리자는 신사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6시 25분, 아이들이 대충 식사를 마치고 수업 준비가 되었을 시간이라 그날 공부할 문제지들을 들고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거나, 좀 전까지 축구를 하고 들어와서 씻느라 왁자지껄해야 할 곳이 너무 조용했다. 화장실에도 교실에도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왔나 싶어질 정도였다. 교무실에서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평소와 달리 운동장 쪽에서 공을 차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 퍼뜩 생각났다.
그러나 이상하다는 생각도 잠시, 발끝으로부터 정수리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열두 명이 작당해서 다 같이 야자를 째? 겁도 없이?”
이놈의 학교는 왜 내 생일마다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건지, 처음 인사하러 왔던 날 무서운 여관에서 도망쳐 나와 하염없이 걷던 그 새벽이, 환영 회식에서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다가 이틀을 앓아누웠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결혼도 한 달 반이 채 남지 않아서 그러잖아도 스트레스받는 데 이놈들이 기름을 붓는구나. 내일 아침의 칼춤을 다짐하며 뒤돌아 내려가려는데 옆 교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깜깜한 교실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들리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사람 마음이란 게 묘하게 또 그런 소리가 들리면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공포영화에서 그러면 무조건 죽지만, 그게 전개를 위한 억지 설정이 아니라는 건 늦은 밤, 불 꺼진 학교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랫배가 싸르륵 아파 오는 긴장감을 누르고 옆 반 교실 문을 슬쩍 열었다.
“꾸웨에엑”
“너 땜에 들켰잖아 인마!”
“아니 옆에 이 새끼가 웃어서!”
“선생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긴 초 세 개가 꽂힌 노란 고구마 케이크 주위에 둘러서 있는 열두 명의 아이들, 현석이, 윤규, 윤철이, 승리, 희민이, 준형이, 규설이, 창환이, 도완이, 희원이, 진수, 민수. 생일 축하 노래를 들어본 지가 한 15년은 된 듯하다. 나와 띠동갑인 시커먼 남자 녀석들에게 듣고 있노라니 머쓱하기도 했지만, 콧날이 시큰해져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촛불을 불어 끄고선 쑥스러운 마음에 괜한 소릴 했다.
“야 인마 누가 이런 거 시켰어? 자 이제 공부하자. 불 켜!”
교실 불을 켜려고 뒤로 돌아서다 마주한 교탁엔 흰 밥과 미역국, 부추무침, 계란부침이 담긴 반찬 접시. 아마도 의도대로 되지 않아 결국 파리바게뜨에서 케이크를 사게 만들었을 것만 같은 초코파이 무더기, 그리고 칠판에는 생신 빵 삼십 대만 맞자는 축하 메시지와 뜨거운 첫날밤을 보내라며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들이 뒤섞여 괴발개발 쓰여있었다.
“야. 이게 무슨, 야, 야……”
무방비 상태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녀석들은 손가락에 케이크 크림들을 듬뿍 찍어 내 얼굴에 처발랐다. 그렇게 얼굴에 고구마 무스와 생크림을 잔뜩 바른 채로, 종례를 마친 뒤에 버스를 타고 집에 가서 끓―였다고는 하지만 아마 누군가의 어머니가 90% 이상을 대신 해주셨을―여 온 미역국을, 엄마에게 물어물어 모양이나마 비슷하게 무쳐 온 부추무침을,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아버지 대신 동생과 함께 부쳐 먹던 실력을 발휘한 계란부침을 열두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맛있게도 먹었다. 음식을 차려두고 혹여나 미리 들통날까 봐 숨죽여 웃던 그 시간은 아이들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야자 시간 시작 전에 맞추려고 치킨집 사장님을 들들 볶아 닭을 네 마리 튀겨 온 녀석도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선생님들의 말씀에 따르면, 첫 학교, 첫 담임의 기억은 교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들 한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건 그렇게 강렬하게 마련이니 왜 그런지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따름이다. 오죽하면 한용운 선생님이 첫 키스를 ‘날카롭’다고 표현하셨을까. 처음이라는 것은 그 자극이 얼마나 크든 작든 간에 그다음 삶의 양식과 가치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한 번뿐인 경험이라서가 아니라, 무의식과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다음의 인생이 어디로 굴러갈지를 결정하고야 만다.
이광수의 <무정>이라는 소설이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주인공 형식이가 전 여친, 현 여친, 전 여친의 친구(모두 여성)와 각자의 사정으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만나 수해를 입고 괴로워하는 조선 민중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기존의 애정 갈등 관계를 넘어서 민족적 사명에 대해 각성한다는 줄거리다. 이 무슨 해괴한 설정인가 싶지만, 1917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설정이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여기저기서 외피를 달리해 되풀이되고 있으니 한 번쯤 읽어봐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 부분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어치 아니 되는 농사한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 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 짐이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그래서 (몸은 점점 더 약하여지고 머리는 점점 더) 미련하여진다. 저대로내어 버려두면 마침내 북해도의 ‘아이누’나 다름없는 종자가 되고 말 것 같다.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생활의 근거를 완전하게 주어야 하겠다.
“과학(科學)!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科學)을 주어야겠어요. 지식을 주어야겠어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거닌다.]
이걸 그때의 나에게 대입해서 바꿔 써보면 이쯤 될까.
[이 녀석들의 얼굴을 보니 지혜는커녕 지능도 높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그저 야동과 먹을 것, 담배만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배들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면서도 학교에서 하란 건 지독시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녀석들은 점점 더 나아지는 일 없이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건강도 나빠지고 결국 대충 그럭저럭 그날그날을 수습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저 아이들에게 힘을 주어야겠다. 지식을 주어야겠다. 그래서 제 밥벌이는 제 손으로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겠다.
“자격증! 자격증!”
하고, 나는 학교 안에 있는 관사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이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자격증(資格證)을 쥐어 주어야겠어요. 지식을 주어야겠어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거닌다.]
교사가 된 지 1~2년 차 때까지의 난 아마 형식이가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답도 안 보이는 이 녀석들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 밥벌이 정도는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제 손으로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어미 새가 그러는 것처럼 먹이를 꼭꼭 씹어 부드럽게 만든 다음 새끼들의 입 속에 넣어주듯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내가 해 본 사회생활이라고는 군대에서의 경험뿐인데도 마치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원로처럼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조직에 순응해야 한다’와 같은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그것은 나의 삶을 강요한 것일 뿐 아이들의 삶과 생각, 중요시하는 가치들을 모두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었다. 지식을 욱여넣는 것을 열정으로, 생활을 강제하는 것을 헌신으로 해석해 주면서 나라는 인간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교직 생활 12년 차를 맞았지만 지금도 나는 나와 만났거나 혹은 만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제자라는 말을 쉽사리 쓰지 못한다. ‘제자’라는 말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이다. 그럼 ‘스승’은 무엇인가.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되어 왔다면 아이들 역시 나의 스승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자 제자인 셈인데 나만 일방적으로 그들을 제자라고 부른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자라는 말 대신에 난 ‘○○년에 함께 공부했던 친구, ○○년에 내가 담임을 맡았던 친구’와 같은 말로 그들을 가리킨다. 그래, 친구.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있는 단어의 의미를 나 혼자 바꿀 수 없지만, 그들을 그와 같이 일컫는 일은 적어도 내게 가르침을 준 아이들에게 보내는 내 최소한의 감사와 예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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