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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세칭 동방교에서 발간하던 ‘주간 기독교’라는 다블로이드판 주간지, 내가 부산 주재기자로 일하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군 복무중일때는 창간 몇 주년인가가 되어서 기념사를 하나 써서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 몇자 적어 보내서 축하란에 실린 기억이 있다.
‘주간 기독교’의 사장은 권병찬으로 되어 있었는데 부산의 세칭 동방교 '당감동10교회'의 신도로 있다가 교주 노광공의 부름을 받아 어린 4남매를 아무 대책없이 사람좋은 젊은 처에게 맡겨놓고 처자식과 생이별 하다시피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서 신앙심이 투철해서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은어-隱語)하여 서울 대기처(천국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로 올라가 상도동 ‘큰집’이라고 불리던 대기처에서 교주 노광공과 같이 생활하면서 시키는대로 여러 가지 잔심부름을 하고 지내다가 2대 교주 노영구까지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세칭 동방교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실세였다.
지금의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의 아래쪽에는 기와를 덩그렇게 얹은 고가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동네가 있었다. 이곳에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가 한 곳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 상당히 규모가 큰 한옥이었는데 번듯한 사랑채의 한 칸에는 성전이라 이름하여 제단이 모셔져 있고 이곳에 거주하는 대기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 마당에서 언덕위를 쳐다보면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은 국무총리 공관이 바로 머리위로 보였다. 마당이 건물 입구의 도로보다 한층 정도 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출입은 대지의 왼편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가 세워진 솟을대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오른편으로 도로와 연접한 마당의 끝부분에 정자식으로 약간 튀어나오게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부속 건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이곳이 초기의 ‘청해’라는 월간 잡지와 주간지 다블로이드판 교계신문 ‘주간 기독교’가 출판 업무를 보던 장소이기도 하다. ‘청해’는 1대 교주 노광공의 ‘호’인데 이 이름을 따서 잡지를 발행하여 주로 군종교기관 중심으로 배포하던 월간잡지였다. 세칭 동방교의 신도들 중에서 몇명이 주로 이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곳 삼청동 대기처에서 잠시 기거한 적이 있는데 삼청동이라는 지명도 노광공의 선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선조중에 노광공의 아버지 삼형제 이름이 각각 ‘자청, 지청, 군청’이었다고 한다. 그들 삼형제가 이 동네에서 살았다고 해서 삼청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세칭 동방교에서는 선전되고 있었고 그때 나는 그것을 일말의 의심없이 굳게 믿고 있었다.
노광공 교주가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한 이듬해인 1968년 12월에 당시의 거금 1600만원(현재의 화폐가치로 수십억원에 해당)의 현금과 금괴 도난사건이 바로 상도동 ‘큰집’이라는 대기처에서 발생했다. 그돈은 세칭 동방교에서 당시 대구의 어느 건물을 매입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서 내일이면 잔금을 치루려고 전날 은행에서 현찰을 찾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돈이라고 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권병찬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틀을 뜯어내고 침입한 흔적과 발자국, 보관하고 있던 현금과 금괴의 도난사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던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구속되어 상당한 고초를 겪은 후 출소했고 당시의 도하 각 메스콤에는 자작극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거액의 현금인출을 눈치채고 은행에서부터 따라붙어 미리 소재를 파악해둔 도둑의 소행이거나 내부를 잘 아는 누군가와 모의해 외부침입에 의해 실제 일어난, 짐작은 가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도 알 수 없는 대담한 희대의 도난사건이었다.
당시 세칭 동방교에는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연단선님들과 전국 지교회에서의 지성(헌금)을 100달러짜리 외화로 바꾸어 탄창에 가득 넣어 교주만 아는 어떤 곳의 비밀장소에 땅을 파고 묻어놓기도 하였다. 땅을 파고 그런 탄창을 묻어놓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아모스 장로라는 분이었는데 카투사 운전병 출신으로 두뇌는 그리 명석하지 못했던지 실세 간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교주 노광공의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그의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신임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그런일을 시켰겠는가, 바로 이분이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샬롬 요엘’의 저자 문정열의 사수였는데 그도 세월이 흐른후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을 간파하고 그곳을 빠져나와 연단선님 출신 여신도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고 부산지방에서 택시 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껌팔이등 행상을 시켜 긁어모은 연단선님들의 지성(헌금)을 위시하여 곧 닥칠 말세의 공포심을 주입시켜 전국 지교회에서 매주일 알토란같이 거둬 들인 현금으로 장만했던 세칭 동방교의 부동산중 일부가 충성심 강했던 그의 명의로 된 것들이 꽤 있었는데 그가 동방교를 떠난 이후 세칭 동방교의 관계자가 수십번 찾아와 부동산의 명의를 돌려주면 어떻게 어떻게 해주고 사후에는 이래 할아버지(노광공 교주)의 옆에 안장해주겠다느니 하면서 온갖 감언으로 회유하더니 이전 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후 다시는 가물치 콧구멍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의 부인은 술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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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 前교주집서 1,600만원 도난신고
동아일보 1968.12.19 기사(뉴스)
한때 사교로 낙인찍혔던 세칭 동방교의 사실상 본부인 前교주 노광공씨의 집에서 노씨의 유산인 현금 1천6백만원과 5백돈중짜리 금괴가 감쪽같이 없어진 수수께끼같은 다액도난사건이 18일 신고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서울영등포구 상도1동 518에 있는 前교주 노씨집에 현재 거주하면서 사실상 동방교의 실력자인 권병찬씨(38.태평.조일운수 전무이사)의 도난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은 거액의 현금과 금괴를 보관하는 장소가 너무 허술했고 현금과 금괴가 보관되어 있는 사실을 안 사람이 이미 죽은 前교주 노씨와 권씨등 심복 네사람밖에 없었고 평소 외부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던 장막에 싸인 집의 깊숙한 안방 벽속에 든 돈과 금괴가 없어졌다는 점 등으로 보아 동방교의 상속권과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거나 측근자들의 소행이 아닌가 보고 수사에 나섰다.
현금과 금괴가 들어있던 곳은 前교주 노씨가 임종했던 방으로 동방교에서 성실(聖室)로 부르는 안방의 옆방으로 주인 권씨와 동방교 실력자이면서 이집에 거주하는 양학식씨(38.태평운수이사)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날아침 7시쯤 식모 이명숙양(23)이 청소하다가 방문이 열려있고 성실안의 벽장문이 열린것을 발견, 문간쪽 별채에서 자고있던 권씨에게 알렸다. 권씨는 벽장 오른쪽끝 벽장의 맨아래에 있는 자물쇠가 부서져 있었고 노교주의 침실로 보존되어 있는 이불등이 흩어진것을 발견, 벽장속을 보니 9개의 쇠통(기관총 탄약통)에 넣어둔 5백원권 1천6백만원과 5백돈쭝짜리 금괴 1개(시가5백1십만원)가 없어진것을 발견, 즉시 전화로 노량진 경찰서 수사과에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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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도난 허위로 판명
경향신문 1968.12.20 기사(뉴스)
동방교 권병찬씨(36)가 신고한 1천6백만원의 현금 도난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20일상오 권씨가 동방교 노교주 유산과 교인들이 낸 2천3백여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사업에 실패하자 교회로부터 불신을 모면키 위해 허위신고했다는 자백을 받고 권씨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구속했다. 주범 權이 경찰에 허위신고했었다고 자백한 뒤에도 죽은 노교주의 차남 노영구(28.서울상도1동518)는 ‘權이 자백한것은 경찰의 고문에 못이겨 허위로 한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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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목사등에도 영장
경향신문 1968.12.21 기사(뉴스)
서울 노량진서는 동방교 다액도난 허위신고 사건의 주범 권병찬씨(38.서울상도1동518)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구속한데 이어 20일 하오 동교목사 양학식씨(45.서울한강로4가40)와 동교전도사 김중식(28.서울상도1동518)도 같은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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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난 기사속에 나오는 식모 이명숙양(23, 명명-엘리야)이란 세칭 동방교의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사속의 양학식(베드로)과 권병찬(아마샤)의 나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실제 나이가 아니고 그의 나이는 한참 아래이다. 또한 그의 이름 권병찬도 사실은 본명이 아니다. 그는 한동안 아마샤전도사로 불리더니 노광공 교주가 세상을 하직한후 2대 교주 노영구 시절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아마샤 목사로 불리우고 있었다.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태문 삼손목사와는 나이로 서너 살 정도 아래이나 친구 비슷한 사이이며 같은 세칭 동방교의 부산 '당감동10교회' 출신이다.
권병찬 아마샤 목사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부산의 당감동에서 이발사를 했으며 외부에 내세울만한 학력은 없었지만 사람이 점잖은 기질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삼손목사와는 달리 인물도 신사풍이어서 세칭 동방교에서 외부 바람막이용으로 ‘주간 기독교’라는 교계 신문을 창간하면서 아마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듯 하다.
이분도 철모르던 젊은 한 시절 아무것도 모른채 사이비 이단사설에 현혹되어 노광공 교주를 하늘같이 모시고 믿었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알게되는 숨겨진 사실들과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 얽매여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세칭 동방교 내부의 실상들을 체험으로 느끼게 되니 세칭 동방교가 이단 사이비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세칭 동방교를 떠나려고 결심을 하게된 어느날 수중에 돈 한푼이 없던 그는 주간 기독교의 사장을 하면서 안면을 넓힌 세간의 친구에게 단돈 10만원을 빌려 기차표를 끊어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주간 기독교'의 사장은 부산의 초량12교회 출신 '니고데모 이일우'로 교체되었다.
대기처에서 숙식만 해결하는 동방교의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는 그가 누구라도 돈과는 인연이 멀었고 그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운수회사의 사장이네, 주간 기독교 신문사의 사장이네 하고 어깨를 우쭐거리고 다녀도 대기처안으로 돌아오면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잘못을 지적당하고 귀싸대기를 얻어터지는 동방교의 일개 대기자에 불과했고, 동방교는 또 그런 곳이었다.
그는 2대 교주 노영구의 시대 초기에 그곳을 떠나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와 지금은 천주교에 귀의한지 수 십 년, 부산의 어느 성당에서 돈독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희대의 도난사건이 발생했던 이듬해 세칭 동방교에는 또 다른 큰 사건 하나가 터졌다. 이른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가족 음독자살사건'이다.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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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敎아니다’ 입증하려 극약먹고 한가족 5명 함께죽어
경향신문 1969.10.09 기사(뉴스)
8일밤 10시쯤 서울 영등포구 양평1동 1가31 박창신씨(51)의 부인 김홍선씨(46)와 장녀 상희양(25.대졸) 2녀 상숙양(23.J여고졸) 3녀 상호양(20.K대가정대1년) 장남 상일군(17.용산고)등 5명이 화공약품을 마시고 모두 숨졌다. 이들은 아버지 박씨가 자기들이 믿는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前동방교)는 사교라고 믿지 못하게 꾸중하는데 반발, “우리가 믿는 교는 극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극약을 먹는다”는 글까지 써놓고 약을 마셨다가 이런 참변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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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도 세칭 동방교의 여러 간부들이 경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는데 10일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어 나와 도리어 자기들이 말세에 성경의 기록대로 큰 환난을 당하고 성경의 예언대로 10일만에 풀려났다고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 성경의 말씀이란 바로 요한계시록의 2장10절의 말씀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경찰의 수사절차상 10일간의 구속기간이 만료되면 검찰에 송치하거나 아니면 즉시 석방해야하는 규정에 따라 10일만에 석방된 듯한데 얼토당토않게 이 10일을 여기에 갖다붙여 자기들이 성경의 예언대로 10일동안 환난을 받고 이기고 나왔다고 으시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주간 기독교’에는 취재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김두배' 라는 인물이 있었다. 키는 보잘것없이 적은 편이지만 서울대학교 상대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의 형은 '김휘배' 라는 인물로 노광공 교주의 사망이후 2대 교주 노영구 시절에 두 형제가 세칭 동방교를 쥐락펴락하던 실세로 날리던 시절도 있었다.
'김두배'의 세칭 동방교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하박국'이었는데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는 박식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야기의 전개가 종횡무진이었다.
예를 들어 세멘트라는 단어가 대화중에 나오게 되면 세멘트는 어디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어느 회사의 제품이 품질이 제일 좋고 매장량은 어느곳에 얼마나 되며 국내 소비량의 변동추이는 어떻고 수출전망은 어떻다는 등, 대화중에 어떤 단어가 튀어 나오더라도 상하좌우 종회무진 어원의 해설과 내력이며 그야말로 알고있는 지식의 실타래가 그칠줄 모르게 술술 풀려나오듯이 이야기가 터져 나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명문 서울상대 출신답게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고 그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하여 자기 아는것을 설파하면 내가 어찌 그 가부를 분별할 수 있었으랴 생각되기도 한다.
서울 종로 5가에 있었던 ‘주간 기독교’ 사무실을 들락거릴때 그때 서로 안면을 터고 인사를 나눈 후 의기투합하는 면이 있었던지 세칭 동방교 시절에 자주 연락도 하고 서로 연하장을 주고 받기도 하는 사이였다. 어느해 년초에는 연하장에 ‘至高 至純 宣愛’라는 글자를 붓글씨로 단정하게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세칭 동방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정말 대한민국의 엘리트 서울상대 출신이 맞는가 싶어 서울대학교 상대(商大) 인명록을 찾아서 그의 이름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그는 후에 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의 처가 된 유스도 김여사의 친구인, 세칭 동방교 신도였던 간호원과 결혼하여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2대 교주 노영구의 처와 자기의 처가 친구사이인 관계로 세칭 동방교의 교주 집안과 지금도 절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서울상대 출신으로 지금은 세칭 동방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이 이야기를 적어나가다 보니 그의 형 '김휘배' 라는 사람이 생각이 난다. '김두배'의 친형으로 동생은 상대, 형은 약대출신으로 그의 형제는 모두 서울대 출신 엘리트다. 수재그룹인 그들이 어떤 경로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들은바가 없으나 종교는 학식이나 지능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통일교도 초창기에 이화여대 교수들이 대거 들어와 붐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던가. 또 다른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도 현직 검사가 신도로 있어 수사에 애를 먹었다는등,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 약대출신 '김휘배'는 노영구가 2대 교주로 있던 어느 시절 김국장으로 불리면서 세칭 동방교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후 인삼과 관련한 논문제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세칭 동방교 분위기가 인삼을 연구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앉아있을 만큼 정상적이지 못한 시절이었는데 어찌 박사학위를 취득했는지는 아리송한 일이다. 박사학위 취득후로는 '김박사'로 불리웠는데 2대 교주 노영구가 산기도를 다녀오라고 종용했으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 말을 듣지않았다.
박사소리를 들어가면서 세칭 동방교의 자금을 쓰면서 목에 힘을 주고 다녔으니 교주로서는 경고를 줄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고 아마도 세칭 동방교의 행정업무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듯 한데 업무핑계로 지시를 이행하지 않고 불복하더니 결국 행정총괄업무를 모두 뺏기고 세칭 동방교에서 퇴출되고 말았는데 그는 퇴출되어 나가면서 한보따리를 챙겨서 나갔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어디서 약국을 차려 인생 본업에 충실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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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날카로운 바람님’의 글 ‘나의 청춘 동방교를 추억하며...4’ 에 올라와 있는 글중에 '김동일(김박사)' 라는 인물도 나타난다. 세칭 동방교라는 몹쓸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에 걸려 있는 자기 이름이 지인들에게 부끄러워 개명을 했나...
‘김동일’이란 무엇이 ‘동일’하다는 것이었을까, 그런 ‘김박사’도 쫓겨났으니...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세칭 동방교에 몸담고 있는 꼭두각시 추종자들이여, 사주(四柱)라고 불렀던 정재덕 요나단목사도, 양학식 베드로 목사도, 오인숙 헤레나장로도, 그 많던 중간 간부들도 모두 쫓겨나거나 이단사이비를 간파하고 떠나간 곳에 무슨 미련이 남아 머뭇거리는가... 세칭 동방교란 원래 그런 곳이었던가 하고 때늦은 후회로 가슴을 치려는가.
첫댓글
명절이나 추수감사절이 되면 각종 곡식들-쌀알 한 톨, 콩 한 톨까지- 일일이 좋은 것으로 골라서 제사를 지내고 그것들을 메고 기차역 수하물로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게 만들어서 잡념이 들 시간을 주지 않고, 책을 읽을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는 이단의 수법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