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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자료는 이사무의 Soft한 해군사 에서 퍼온자료임을 밝힙니다.
3. 전간기동안 워스파이트가 겪은 일들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은 도전자 독일해군을 꺾고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종전 당시 영국 해군은 나머지 세계 4대 해군국(미˙일˙프˙이) 보유한 군함의 총 수와 맞먹는 규모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4년 이상의 전쟁에서 대단한 숙련도를 갖추게 된 37,000명의 장교와 40만 명의 수병을 거느리고 있었죠. 하지만 이런 외양은 모두 허울일 뿐, 실상 영국의 상태는 파산 직전의 기업과 같았습니다. 영국은 전쟁에서 기진맥진해졌고 전후 경제부흥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산업 복구와 수출확대가 절실했으나, 그에 비해 전쟁에서 얻은 것은 보잘 것 없었던 것이죠.
따라서 정부는 지출예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방위비를 삭감하여 이에 대처하고자 했습니다. 1919년 8월에는 내각이 「10년 규정」(향후 10년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육군과 해군의 군비를 재조정하는 것을 골자로 함)을 제정하여 예산 삭감 작업에 착수했죠. 반면 잠재적인 경쟁자인 미국과 일본은 다니엘 플랜이니, 88함대니 해가면서 대대적인 건함계획을 세우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해군력에서 추월당할 것을 우려한 영국측은 주요 해군국에 군축을 제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수 개월간의 협상 끝에 1922년 8월 17일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정식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군축 후에도 나름대로 예산에 여유가 있던 미국이나 군축의 허점을 노리고 여전히 군비증강에 골몰했던 일본과는 달리 영국 해군은 군축조약이 진짜로 발목을 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약을 맺을 필요가 절실했던 만큼 그것이 발효되자 영국 정부는 군비축소의 당위성을 내세워 정식으로 해군예산의 삭감에 착수했던 것이죠.
때문에 영국 해군은 양이나 질 모두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구형함정에 대공포를 추가하거나 장갑을 개선하는 작업은 도무지 진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군 항공세력 면에서도 1918년엔 3,000대이던 것이 1920년대 초에는 겨우 100여 대 밖에 남지 않는 수준으로 떨어져버렸고, 그나마도 독립공군이 창설됨에 따라 공군에 소속 항공기들의 통제권을 빼앗기게 되었죠.(1937년에 공군과 싸워서 다시 뺏어옴)
재정적 제약은 함대의 전투준비태세 또한 제한시켰습니다. 대규모 함대 기동훈련 같은 해상 연습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 크게 축소되어 많은 전함들이 항구에 정박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으며, 주포나 부포의 탄약 구입비용이 축소되고 대공표적의 개발이 지연됨에 따라 사격훈련을 할 기회가 제한되는 실정이었던 것이죠. 한편 예산 삭감은 해군의 인력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9년 당시 38만명에 달하던 인원은 1930년대 초에는 89,000명까지 줄었으며, 1921~22년 사이에는 현역 대령의 ⅓을 포함한 장교 2,000명이 퇴역조치 되었던 것이죠.
이런 우울한 시기 동안 워스파이트는 군축조약의 구조조정 속에서도 살아남아 소규모 근대화 개장을 받기도 하고 지중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를 전전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리고 1930년 중반, 워스파이트는 다시금 대서양 함대로 전속되어 지중해에서 스코틀랜드의 로시스로 이동했습니다.
1) 「인버고든 항명 (Invergordon Mutiny)」 사건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영국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931년 9월, 당시 집권당이던 노동당의 맥도널드 정부는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 육˙해군을 포함한 모든 공공기관 근무인력을 위한 인건비와 실업수당을 10%씩 삭감하기로 결정했죠. 또한 이때 당시 1925년 이전부터 근무해오던 수병들은 그 이후의 입대자들과는 다른 기준액에 따라 봉급을 지급받고 있었는데, 정부는 이번 삭감안을 통해 차등화된 지급기준을 폐지하고 1925년 이전 입대자에게도 그 이후의 입대자와 똑같은 기준액을 적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인 봉급 삭감율은 25%에 달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수준이었던 대다수의 수병들에게는 안 그래도 힘겨운 생활이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도착 후 상륙하는 수병들]
1931년 9월 11일, 스코틀랜드 최북단의 인버고든 군항에 주둔하던 수병들은 신문과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정부의 인건비 삭감안에 대해 접했습니다. 당시 그들 대부분은 하층 노동계급 출신이었던데다 그해 초의 선거에서 노동당을 지지했었기에 이번 인건비 삭감안을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고 있었죠. 다음날인 9월 12일, 함대 기동훈련을 위해 대서양 함대의 순양전함 후드˙레펄즈, 전함 로드니, 워스파이트, 말라야, 발리언트, 중순양함 도제트셔, 노포크, 요크 등이 인버고든 항에 입항했습니다. 상륙한 수병들은 곧 기지에 주둔중이던 수병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봉급의 25% 삭감 소식” 은 운동장과 PX의 테이블 등지에서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병들의 동요는 매우 빠르게 시작되었습니다. 9월 13일 밤, 그날 함대 전체의 당직함이었던 워스파이트의 당직사관은 부두를 순찰하던 중 이미 규정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PX가 닫혀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죠. 그는 PX 안에서 수병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이번 삭감안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이 오고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관은 즉시 수병들에게 해산하여 각자의 배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지만 수병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각자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당직사관은 증원을 요청했고 워스파이트의 함장까지 포함된 추가병력이 달려오고 나서야 수병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배로 돌아갔죠.
이 소요는 즉각 함대 사령관인 윌프리드 톰킨슨 제독에게 보고되었으나 제독은 수병들의 불만 및 소요 주동자에 대해 조사하라고 지시하고 이 상황을 해군성에 보고한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9월 14일에 추가 함정이 군항에 도착하자 소요는 더욱 악화되어 순양함들과 순양전함 레펄즈를 제외한 모든 전함, 그중에서도 로드니, 후드, 발리언트, 넬슨에서는 수병들의 군기 이완이 두드러지게 관찰되었죠.
[(좌) 당시의 함대 사령관 톰킨슨 제독 / (우) 임무수행을 거부하고 갑판 위에 모여있는 수병들]
그리고 기동훈련 출항 당일인 9월 15일 아침, 위에 언급한 4척의 수병들은 지휘계통에 의해 내려온 공식적인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후드와 넬슨에서는 수병들이 출항을 거부하고 정박중 일과를 진행시키기 시작했으며, 발리언트와 로드니에서는 수병들이 함내 안전순찰과 소방대 운용, 수병 거주구 청소 등 필수적인 몇몇 임무를 제외한 모든 과업을 중단했죠. 그날 하루동안 수병들은 함수갑판에 모여 봉급 삭감안에 대해 성토하는 집회를 열었고 로드니에서는 심지어 갑판 위에 피아노까지 끌고 나와서 노래와 춤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장교들은 집회에 참석중인 수병들에 대해 당장 임무에 복귀할 것을 지시하고 위반시에 가해지는 처벌에 대해 엄포를 놓았으나 이들의 말은 무시되고 말았죠. 심지어 이런 명령 위반자들을 제지해야할 해병대원들-전통적으로 헌병의 역할을 수행해왔던-조차도 수병들의 파업에 가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어떤 전함에서는 아직 당직에 임하고 있는 인원들로 배를 움직여보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역부족이었으며, 순양전함 후드에서는 장교들이 배를 움직이려는 것을 수병들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저지하기도 했죠.
수병들의 항명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여 톰킨슨 제독은 일단 기동훈련 일정을 연기하고 이미 출항해있던 워스파이트와 말라야, 레펄즈를 복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해군성에 항명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죠.
① 항명의 주원인은 25%의 봉급 삭감에 있으나, 기준액의 변화 없이 단순히 10%를 삭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수병들도 납득하고 있음.
② 수병들은 장교의 명령은 거부하고 있으나 장교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이나 증오는 나타나지 않음.
③ 항명에 대해 강경한 수단을 사용할 경우 사태가 오히려 더 악화될 것으로 사료됨.
이에 대해 해군성은 “한번 정해진 방침은 절대 철회할 수 없다” 고 강경하게 나왔으나, 15일 오후가 되자 당초 사태에 가담하지 않았던 순양함의 수병들과 일부 하사관 계급에까지 항명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결국 수병들의 요구대로 기준액의 변화 없이 현재 봉급의 10%만을 삭감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병들 역시 즉각 임무에 복귀하여 9월 16일 밤에는 전 함대가 인버고든 항을 출항했죠.
“Mutiny"라는 단어와는 달리(폭동, 반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버고든 사건은 시종일관 평화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부 인원에 의해 함내 기계류에 대한 사보타지 시도나 무단이탈 등이 행해지긴 했지만 장교에 대한 폭행이나 폭력 사태, 약탈/방화 등은 행해지지 않았죠. 과격한 정치적 구호가 외쳐지지도 않았으며 수병들 또한 원칙적으로는 봉급 삭감에 대해 납득하고 있었고, 요구가 달성되자 즉각 본래의 임무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란이나 봉기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가까운 것이었죠.
그러나 이들 수병들이 민간인과 달리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해군성이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수병들은 함대의 등뼈와 같은 존재이며, 그들이 임무수행을 거부하면 전함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인원들을 다 잡아 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게다가 항명이 다른 지역에까지 확산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죠. 결국 해군본부는 수병들의 요구를 들어주되, 다시는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핵심 주동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적극 가담자 200여 명을 퇴역조치 했으며 그 외에 해군 전 함대 내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 200여 명을 타 부대로 강제 전출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건 이후 일부 강경파 제독들은 상명하복의 원칙을 무시한 자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잘못이었다고 강조하며, 과거 항명사건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주동자들을 즉각 체포하여 본보기로 사형에 처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군성이 그런 강경책으로 나왔다면 사태가 필요 이상으로 확산될 우려가 있었죠. 만약에 해군성이 수병들에게 발포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처럼 대규모 유혈사태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마 “조용한 태업”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것입니다.
(*주 : 실제로 인버고든 항명 사건 몇 주 후 스코틀랜드 일대에서는 10% 봉급 삭감에 항의하는 교사나 공공직 노동자들의 항의 시위가 잇달았고, 글래스고에서는 실업수당 삭감에 항의하여 「영국 실업자 협회」라는 단체가 30,0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집회를 열었다가 그대로 폭동으로 돌변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 사건과 이후의 사회적 소요는 영국에서의 금본위제 폐지에도 관여하는 등 인버고든 사건은 영국 사회에 많은 파장을 남겼습니다)
[이런 사태들이 재현됐다면...]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군기이완을 논하기 이전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가장 근본적 원인은 재정적 지원의 제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계급갈등도 없었고 사회적 요구나 메시지도 없었던 충성적인 집단이 하루아침에 손을 놓아버린 것은 오로지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으니 말이죠. 무리한 감원이나 긴축은 반드시 무리를 낳게 마련이며, 이 시기의 영국 해군은 무기와 장비뿐만이 아니라 인력 면에서도 예산의 제한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2) 제 2차 근대화 개장
1924년의 근대화 개장을 통해 다소간의 전력 상승을 얻어낼 수 있었던 워스파이트였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30년대 중반에 있어서는 다시금 전력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워스파이트는 1934년 3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약 5년 4개월동안 자매함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 2차 근대화 개장에 들어가게 되었죠.
[개장 전후의 기관 구조]
개장 내용은 비교적 철저한 것이어서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은 우선 장갑갑판 위에 있는 모든 구조물들을 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총 24개에 달하던 구형 보일러가 신형의 3드럼식 보일러 6개로 교체되었고 증기터빈과 추진축을 직접 연결하는 방식이었던 구형 터빈도 신형의 파슨스식 기어드 터빈으로 교체되었죠. 교체 전의 문제점이라면 증기 터빈은 분당 수천~수만 회전에서 가장 효율적인데 비해, 스크류는 분당 수백 회전만 넘어도 캐비테이션이 발생해 추진력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캐비테이션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터빈을 분당 수백 회전 정도로 운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경우 터빈의 효율은 상당히 떨어졌죠.
하지만 기어드 터빈이 장착되면 감속기어를 통해서 터빈의 고속회전이 스크류에 적합하게 줄어들으므로 기관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어드 터빈은 당시 신조함에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퀸˙엘리자베스 급이 건조될 당시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기술이었죠. 기관과 터빈 교체를 통해 출력은 75,000마력에서 80,000마력으로 상승했으나 항속거리는 오히려 3,600km 정도 늘어났으며 기관부의 중량도 1,480톤 가량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개장 전후의 장갑 구조]
그 다음으로 포스트-유틀란트 시대의 추세에 따라 갑판장갑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이전의 방식은 총합두께로는 4인치에 달하여 얼핏 보기에는 그럭저럭 양호한 수준처럼 보이기 쉬웠으나, 실상은 상갑판 1인치, 중갑판 1.5~2인치, 장갑갑판 1인치 식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대단히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제 2차 개장에서는 이것을 모두 들어내고 상갑판 1.7인치(45mm), 장갑갑판 2.5인치(63mm)로 조정했습니다. 총합두께는 이전과 비슷했지만 어중간하게 나뉘어있던 장갑을 2군데로 정리하여 효율을 높였고 탄약고 주변 등에서는 총합두께가 5.5인치까지 증가하게 되었죠. 단, 아무리 이런 개장을 거쳤다 하더라도 본격적인 포스트-유틀란트형 전함의 방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기본이 좋지 않으면 개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므로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 건조된 전함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숙명이었죠. (초기부터 집중방어를 도입했던 미국 표준전함들 정도가 예외일뿐)
무장 면에서는 우선 주포의 최대앙각이 20도였던 것을 30도까지 증가시켜 최대 사정거리가 29,000m에 달하게 됐습니다. 또한 항공기의 위협에 대비하여 비스마르크의 그것과도 유사한 형태인 반포탑식 4인치 2연장 대공포 4기를 추가로 탑재하였고, 그 외에도 8연장 2파운드 폼폼포라던가 12.7mm 기관총 등등을 다수 증설하기에 이르릅니다. 다만 현측 포곽에 있던 6인치 부포들은 몇 문 정도를 제거하는 것 외에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나중에 퀸˙엘리자베스와 발리언트에서 6인치 부포를 몽땅 제거하고 그 자리에 4인치 양용포탑을 올려놓았던 것에 비하면 워스파이트의 개장은 다소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죠.
[상부 구조물의 변화과정]
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포인트는 아마도 2차대전 시기 영국전함들의 특징이라 할 거대한 캐슬형 상부 구조물일 것입니다. 2번포탑 후방에 있던 사령탑은 상부구조물 꼭대기로 올라갔고 장갑은 복원성과 균형유지 문제 때문에 본래 11인치이던 것이 3인치까지 줄어버렸죠. (사령탑 무게는 400~600톤까지 나가기 때문에 그대로 위로 올려버리면 복원성에 악영향을 미치게 됨) 타국 전함들이 중장갑의 사령탑을 계속 유지한데 비해 유독 영국만은 2차대전 시기의 전함에 위와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것에는 사격 통제장치의 중량을 지지하는 것이나 공간 확보 등에서 장점이 많았으나, 방어력의 불충분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지 않았나 싶군요. 1차대전의 전훈을 통해 사령탑 장갑에 별 효용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교가 무참한 꼴을 당했던걸 생각하면 역시 이것은 실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외에 함 중앙부에 격납고와 캐터펄트가 마련되어 수상기 2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어뢰방어용 벌지가 추가되어 2차대전 시기의 전형적인 영국전함다운 외관이 완성되었습니다. 배수량은 만재시 33,000톤이던 것이 36,500톤까지 늘어났죠. 그리하여 워스파이트는 최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럭저럭 1선에서 활약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근대화 개장에서도 영국 해군이 시달리고 있던 재정적 제한은 어김없이 작용했죠. 워스파이트를 저렇게 개장하는데는 도합 250만 파운드가 들었는데, 이것은 그녀의 건조비용과 거의 같은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20년간의 물가상승이나 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만만찮은 액수이며, 덕분에 같은 자매함들이라 하더라도 개장 수준이 천차만별을 달리게 됐습니다. 개장수준을 따지면 워스파이트 다음으로 개장을 받은 퀸˙엘리자베스와 발리언트가 가장 최상의 성능을 보유하게 됐고 그 다음이 워스파이트이며, 5번함 말라야는 기관은 교체했으나 상부구조물은 개수되지 않았고 3번함 바함은 아예 2차 근대화 개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2차 근대화 개장 완료 후의 워스파이트]
영국 해군 전체를 따져 보면 QE급의 후속전함인 R급들은 5척 전부가 본격적인 근대화 개장을 받지 못하여 대전 기간 내내 “떠있는 관” 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찬밥 신세가 되었고, 순양전함 후드는 상부구조물과 사격통제장치 및 장갑구조 개선을 목표로 하는 개장이 계획되었으나 퀸˙엘리자베스 급과 레나운 등에 개장 순위가 밀려났다가 결국 개장을 받지 못한 상태로 전쟁에 돌입해야만 했죠.(그리고 비스마르크에게...ㅠ_ㅠ)
“부자집은 망해도 3년은 간다” 는 말이 있지만 이때의 영국, 그리고 영국해군이 딱 망해가는 부자집이었습니다. 1935년 이후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고 유럽의 정세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재무장이 진행되었지만, 영국의 재무장 속도는 타국의 그것보다 늦는 편이었죠. 전쟁이 터진 후 영국해군은 유럽에서 여전히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위세는 이제 옛날의 좋았던 시절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주변국 해군사 제 1권 : 일본, 영국』, 해군본부, 1997
-『HMS Warpite』, AJ Press Publishing, 연도 미상
-『Queen Elizabeth Class Battleship』, Morskaya Collekchiy, 연도 미상
- http://en.wikipedia.org/wiki/HMS_Warspite_(1913)
- http://www.answers.com/topic/invergordon-mutiny
- http://pubs.socialistreviewindex.org.uk/sr244/sherry.htm
- http://www.world-war.co.uk/index.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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