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동 이야기1)〔嘉山童〕
지평 현감 윤수익2)이 들려 준 말이다.
젊었을 때 그는 부친의 임지인 삼등현(三登縣)에 따라갔다가 가산동(嘉山童)을 보았다. 가산동은 그 고을 황학루(黃鶴樓) 앞에 살던 시골 사람의 아들이다. 그 어미가 자식을 두지 못해서 여러 차례 가산사(嘉山寺) 미륵불에게 기도했는데, 꿈에 미륵불이 그 집에 찾아와 “너는 이제 아이를 가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가산동의 아비가 멀리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왔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아 가산동이라 이름하였다. 열다섯에 장가들었는데 열여섯에 갑자기 키가 크고 엄청나게 살이 쪄서 그 모습이 영락없는 미륵불이었다. 소를 타고 강동현(江東縣) 처가에 가는 길에 소 세 마리의 등뼈가 모두 부러진 뒤로 다시는 외출하지 않았고, 고을 수령이 불러서 만나려고 했지만 그가 관청의 작은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부르지 않았다.
윤수익은 처음엔 그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해 찾아가 보았는데, 아랫사람이 놀라지나 마시라고 주의를 줬다. 그 집에 가 보니 벽을 터서 방을 만들었는데, 열고 들여다보고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한다. 어깨는 널찍하고 머리통은 작아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머리에 망건 다섯 개를 붙여 썼는데 세 개를 이어서 아래쪽을 만들고 둘을 이어서 위쪽을 만들었으니 그 크기를 알만 했고, 적삼과 바지는 입지 않고 단지 홑겹 베 한 폭으로 된 큰 치마를 목에 두르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은 팔뚝만 하고 팔뚝은 허벅지만 하고 허벅지는 허리만 하며 온몸은 누르스름하면서 하도 커서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루에 밥 세 동이와 국 세 동이를 먹었다. 잘하는 것은 지패(紙牌)와 장기인데 아무도 대적할 수가 없었다. 고을에 음탕한 기녀가 둘 있었는데 낮이고 밤이고 번갈아 안고 간통했다. 두 기녀는 안색이 누렇게 떠서는 종종 서로 질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였다. 가산동은 본디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집안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고 스물 남짓에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서장(西藏) 불교(티베트 라마교)에서 말하는 남의 몸을 빌려서 태어난다는 현상일까? 아, 괴이한 일이다.
[주1] 가산동 이야기 :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57 〈초사담헌4(草榭談獻四)〉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주2] 윤수익(尹守翼) : 윤면헌(尹勉憲, 1725~1767)의 아들이다. 1783년 6월 현릉 참봉으로 처음 임용되어, 이후 지평 현감, 순창 군수, 의성 현령, 안주 목사 등의 지방관을 주로 역임하였다.